제49대 헌강대왕(憲康大王) 때는 성 안에 초가집은 하나도 없고, 집의 처마와 담이 이웃집과 서로 연해 있었다. 또 노랫소리와 피리 부는 소리가 길거리에 가득 차서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奇異) 처용랑(處容郞) 망해사조(望海寺條)
九月九日 王與左右登月上樓四望 京都民屋相屬 歌吹連聲 王顧謂侍中敏恭曰 孤聞今之民間 覆屋以瓦不以茅 炊飯以炭不以薪 有是耶 敏恭對曰 臣亦嘗聞之如此 因奏曰 上卽位以來 陰陽和 風雨順 歲有年 民足食 邊境謐靜 市井歡娛 此聖德之所致也 王欣然曰 此卿等輔佐之力也 朕何德焉. 9월 9일에 왕이 좌우의 신하들과 함께 월상루(月上樓)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서울 백성의 집들이 서로 이어져 있고 노래와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왕이 시중(侍中) 민공(敏恭)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지금 민간에서는 기와로 덮고 짚으로 잇지 않으며, 숯으로 밥을 짓고 나무를 쓰지 않는다고 하니 사실인가?”라고 물었다. 민공이 “신(臣)도 역시 일찍이 그와 같이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아뢰기를, “임금께서 즉위하신 이래 음양(陰陽)이 조화롭고 비와 바람이 순조로워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고 변경(邊境)은 평온하여 민간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덕(聖德)의 소치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경(卿)들이 도와준 결과이지 짐이 무슨 덕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1, 신라본기(新羅本紀) 11 헌강왕(憲康王) 6년 9월 9일 (국사편찬위원회 國史編纂委員會)
부왕(父王) 경문왕(景文王)이 뱀들과 함께여야만 잠을 잘 수 있고 귀는 당나귀 귀처럼 큰 변태(變態)가 되어 가면서까지 되살린 신라의 차(茶) 산업은 헌안왕(憲安王)이 모셔온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을 선례삼아 당나라에서 대거 귀국한 신라 승려(僧侶)들의 활약으로 헌강왕(憲康王)대에 이르러 확실한 성장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14년간의 재위(在位) 기간 동안 끊임없는 암살 위험속에서도 무쇠솥(鑊)을 이용한 전차(煎茶)제조법으로 확실하게 신라 차(茶)산업을 바꾸어 놓은 경문왕(景文王)은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일본 찻잎(茶葉)을 자신들이 통제하지 못하는 해상 무역으로 유통시키지 못하게 하기 위한 실크로드 상방(商幇)들의 악착같은 방해는 계속되었다. 866년 10월 이찬(伊湌) 윤흥(允興)이 실크로드 상방의 사주를 받아 남동생 숙흥(叔興), 계흥(季興)과 함께 반역을 꾀했고 868년 1월에는 이찬(伊湌) 김예(金鋭), 김현(金鉉)등이 역시 사주를 받고 반란을 일으켰다. 874년 5월에는 이찬(伊湌) 근종(近宗)이 이끄는 반란군이 급기야 궁궐(宮闕)까지 쳐들어 와 근위병(近衛兵)까지 파견해 진압해야 했던 경문왕(景文王)이었지만 회창폐불(會昌廢佛) 당시 실크로드 상방(商幇)에게 혹독하게 당한 칠산선문(七山禪門)의 사찰(寺刹)들이 그때마다 제각각 적절한 지원(支援)을 해 주어 고된 왕위(王位)를 지켜낼 수 있었다. 그랬던 그가 875년 7월 죽었을 때 신(神)의 선물처럼 당(唐)나라에서 황소(黃巢)의 난이 터졌다. 무려 20만명이 넘는 페르시아와 아랍 차상인(茶商人 Merchant)들이 가족들과 함께 황소(黃巢)가 이끄는 반란군(叛亂軍)들에 의해 도륙(屠戮)당한 이 사건으로 페르시아와 아랍의 차(茶)상인(Merchant)들이 차(茶) 구매(購買)를 위하여 모두 신라로 쏟아져 들어 온 것이었다.
황소(黃巢)가 장강을 도하해 아랍인과 페르시아인들을 학살(虐殺)하기 시작한 것이 헌강왕(憲康王)이 즉위한지 4년째 되던 878년 부터였으니 처용(處容)이 개운포(開雲浦)에 나타난 건 그 다음해였다. 오년(午年:879년) 삼월(三月) 왕이 동쪽의 주군(州郡)을 순행(巡行)하였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사람 넷이 왕의 수레 앞에 와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들의 모양이 무섭고 차림새가 괴이하여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산과 바다에 사는 정령(精靈)이라고 하였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사(紀事)는 황소군(黃巢軍)의 학살을 피해 신라로 도망 온 대식국(大食國:아랍인) 사람들을 처음 본 신라인들의 당혹감(當惑感)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가져온 경제적 번영 또한 분명히 기록하고 있었다. 신라인들은 그들을 산과 바다의 정령(精靈)이라고 여겨 자신들을 풍요하게 만들어 주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같은 해 6월에 일어난 일길찬(一吉飡) 신홍(信弘)의 반란은 그래서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실크로드 상방(商幇)이 마린로드 상방(商幇)의 편에 서서 이익을 취하고 있는 신라 왕실에 대해 좋지 않은 평가를 하고 있다는 분명한 경고(警告)였다. 일길찬(一吉飡:신라17관등중 7관등) 신홍(信弘)의 뒤에 실크로드 상방(商幫)이 개입해 있다는 건 그리 어려운 분석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신홍(信弘)을 참수(斬首)하고 일족을 멸살(滅殺)했다는 건 이후 헌강왕(憲康王)과 그 혈족(血族: 정강왕과 진성여왕)들이 실크로드 상방(商幫)의 칼날 위에 올라섰다는 걸 의미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헌강왕(憲康王)도 부왕(父王) 경문왕(景文王)이 했던 것처럼 근위대(近衛隊)를 확충하고 활발해진 해상무역(海上貿易)을 실크로드 상방의 청부(請負)를 받은 해적(海賊)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수군(水軍)을 육성했다. 후일 후백제를 세운 문경(聞慶) 출신 견훤(甄萱)이 헌강왕에 의해 근위대 하급병사로 선발(選拔)된 것은 이즈음이었다.
부왕(父王) 경문왕(景文王)이 암살의 위협속에서도 보호한 칠산선문(七山禪門)이 황소의 반란으로 인한 정세 변화에서 큰 역할을 해 주었다. 그러나 칠산선문(七山禪門)의 사찰(寺刹)들은 공식적으로 신라 왕실과 중앙 정부의 지원으로 육성(育成)되어진 것이 아니었기에 모든 수익(收益)을 왕실(王室)과 조정(朝庭)이 독식(獨食)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자은종단으로 이름을 바꾼 법상종단의 살인 승려들에게 숱한 탄압(彈壓)으로 모든 걸 뺏긴 경험이 있었던 사람들이어서 칠산선문(七山禪門)에 속해 있는 각 사찰(寺刹)들의 자체 무력(武力)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지방 호족(豪族)이 칠산선문(七山禪門)의 사찰(寺刹)들을 장악(掌握)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칠산선문(七山禪門)의 사찰(寺刹)들이 신기술(煎茶法)과 신재료(무쇠솥)를 가지고 와 그 지역 사람들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 이런 지역 사람들의 존경과 절대적인 지지(支持)를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사찰들을 중심으로 그 지방세력(地方勢力)들이 조직화(組織化)된 것이 호족세력(豪族勢力)이라고까지 불리게 된 것이었다. 호족(豪族)들로 대표되는 지역사람들이 당연히 자신들의 경제적 토대가 되는 차(茶) 가공공장인 사찰(寺刹)들을 호위(護衛)하는 세력으로 스스로 나선 것이었다. 따라서 아랍과 페르시아에서 차상인(茶商人 Merchant)들이 쏟아져 들어와 앞다투어 칠산선문(七山禪門)의 사찰들에서 만들어진 차(茶)를 구입해 가는 상황에서는 신라 왕실과 조정이 크게 생색낼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칠산선문(七山禪門)의 각 사찰들은 본산별(本山別)로 대사원(大寺院)을 중심으로 팔관회(八關會)를 개최해 세계 각지의 차상인(茶商人)들을 불러들여 자신들이 만든 차(茶)를 홍보(弘報)했다. 지금의 차(茶) 박람회(博覽會) 역할을 한 것이 당시의 팔관회(八關會)였다. 신라 전역에 서역과 일본에서 들어온 돈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841년 장보고가 암살되는 걸 보고 왕으로 있는 내내 가위에 눌려 실크로드 상방(商幇)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 신라를 굶주림의 나락(奈落)으로 빠트린 문성왕(文聖王), 그런 조카의 뒤를 이은 짧은 왕위였지만 나라를 위한 용기를 갖고 있는 원수(怨讎)의 손자(孫子) 김응렴(金膺廉)을 사위로 삼아 그에게 왕위(王位)를 물려주기 위해 자기 아들 궁예를 죽이기까지 한 헌안왕(憲安王), 평생을 실크로드 상방(商幇)의 암살 위협 속에서도 당나귀 귀처럼 긴 귀를 가지고 뱀과 함께여야만 잠이 온다는 변태(變態)로 기록되는 걸 두려워 않고 일본 찻잎(茶葉)을 수입(輸入)해 회창폐불(會昌廢佛)로 당(唐)나라에서 쫓겨 들어온 천태종단(天台宗團)의 승려(僧侶)들이 구산선문(九山禪門)을 세워 그 찻잎(茶葉)들을 가공해 수출(輸出)하도록 방조(傍助)해 신라인들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한 경문왕(景文王), 회창폐불로 거지가 되어 돌아와 신라에 무쇠솥과 숯을 이용한 전차법(煎茶法)과 탄배법(炭焙法)을 도입(導入), 정착(定着)시켜 숯으로 밥을 짓게 한 칠산선문(七山禪門), 그리고 실크로드 상방(商幇)의 청부(請負)를 받아 머천트(Merchant 茶상인)와 그 가족들을 학살해 그들을 신라로 피난(避難)가게 한 황소반란군(黃巢叛亂軍). 이들이 수수께끼 같은 기와로만 이어진 집들로 채워진 경주의 굴뚝 연기 없는 저녁을 만든 주역들이었다. 외조부와 아버지의 대(代)를 이은 목숨 건 헌신과 희생으로 이룩한 꿈같은 신라의 번영(繁榮)은 광주(廣州)에 머무르던 황소반란군(黃巢叛亂軍)이 자신들을 배신(背信)한 실크로드 상방(商幇)을 응징(膺懲)하기 위해 장안(長安)으로 북상(北上)하면서 끝이 났다.
북상한 황소반란군이 장안에서 패배한 883년 여름 이후 신라에 피난(避難)왔던 그 모든 사람들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882년 4월 일본 왕이 황금 300량과 명주(明珠) 10개를 진상하는 사자(使者)를 파견(派遣)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거래 청산을 위해 지급된 사례금의 규모를 알게 해준다. 884년 9월(음력) 신라의 배 45척이 대마도를 습격했지만, 일본은 다자이후에서 격전을 벌여 신라군을 요격하고 위기를 벗어났고 전쟁 후 포로가 된 신라인 현춘(賢春)을 심문 하니 전년(前年)부터 계속된 흉작(凶作)으로 백성들이 굶는 사태가 계속되어 신라에서는 왕성(王城)도 불안한 상태라는 대답이 있었다는 부상약기(扶桑略記)의 기록은 아랍과 페르시아 머천트들이 떠나고 난 뒤 어려워진 신라의 경제상황을 보여주는 기록이었다. 수출길이 막혀 쩔쩔매던 일본이, 황금과 명주를 갖다 바치며 고마워하던 일본이 황소반란군이 장안에서 패퇴한 883년부터 더 이상 찻잎(茶葉)들을 신라로 가져오지 않았다. 그렇게 셀 수도 없이 지어 놓은 숯 공장과 벽돌 공장, 제철소와 차(茶)가공공장들이 일시에 일거리가 없어져 버린 거였다. 884년의 대공황(大恐慌)이었다. 9세기에 있었다는 수수께끼 같은 신라 해적(海賊)이 창궐(猖獗)한 이유였다. 신라인들은 자신들이 일했던 탄공장(炭工場)과 제철소, 광산과 전공장(甎工場), 그리고 사찰에서 계속 일하게 해 줄 일본 찻잎(茶葉)들이 절실했던 것이었다. 그들이 대마도로 갈 수 밖에 없던 이유는 은(銀)이나 진주(珍珠), 견면(絹綿) 따위를 노략질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일본인들이 뇌물(賂物)까지 바쳐가며 팔아 달라던 찻잎을 계속 팔아 줄테니 찻잎을 제공(提供)하라는 것이었다. 결국 그들은 거두절미(去頭截尾)되어 신라 해적(海賊)으로 기록되었다. 금과 은, 진주 따위나 노린...
재위 12년이 되던 886년 7월 5일에 헌강왕은 사망했고 왕위는 동생인 정강왕(定康王)이 이었다. 헌강왕이 죽고 50년 후 신라는 망했다. 망한 신라가 우리에게 묻고 있는 오늘이다. 너희들은 어쩔거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