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가와 신라구의 진실 2
842년 회창폐불(會昌廢佛)이 일어나기 전부터 일반화되기 시작한 무쇠솥(銑鐵鑊)을 이용한 일명 덖기라는 볶기식 전차(煎茶) 제조법은 시루를 이용해 찌는 증차(蒸茶) 제조법보다 훨씬 높은 생산성을 가져다주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가공된 찻잎의 보존력(保存力)이었다. 무쇠솥을 뜨겁게 달군 후 달궈진 솥 안에서 뜨거운 열기로 찻잎을 볶는, 덖기 방법으로 차(茶)를 만들면 가공한 후 바로 먹을 때에는 그리 좋던 약효와 향(香)이었건만 일정 기간 이상 보관했다 먹으면 그 향과 약효가 나오지 않는 문제가 발생했는데 운반 거리가 먼 아랍에서는 더욱 심각한 문제였다. 이때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도입(導入)되었는데 그것은 시루(斯盧)를 쓰면서부터 사용하지 않았던 고인돌 시절에 쓰던 고래(古來)의 낙법(烙法)을 변형한 탄배법(炭焙法)이었다. 낙(烙)을 하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낙양(烙陽)이 세월이 흘러 낙양(洛陽)으로 바뀐 것에서 보듯 완전히 잊혀졌던, 찻잎에 불을 쪼이는 고래의 낙법(烙法)을 숯을 사용해 쪼이는 배화법(焙化法)으로 변형 발전시킨 것이었다. 수(隋) 양제(煬帝)가 천태대사(天台大師)에게 극도의 존경을 표하게 한 이 탄배법(炭焙法)은 대운하가 건설되던 시점부터 천태종단의 지도적(指導的) 사찰(寺刹)에 먼저 보급되기 시작한 신공법(新工法)이었다. 신라에 이런 배화법(焙火法)이 도입(導入), 정착된 건 당연히 칠산선문(七山禪門)을 일으키고 발전시킨, 당나라에서 신라로 귀국한 선사(禪師)들 때문이었다.
대나무나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배롱(焙籠)에 찻잎들을 담아 숯(木炭)으로 쪼이면서 찻잎의 수분(水分)을 제거하고 원하는 향을 입히는 탄배법(炭焙法)이 전파되었다. 수 양제 시절 건설된 대운하 주변에 그토록 많은 버드나무가 심어진 연유였다. 사치와 향락의 극을 달리는 것으로만 매도된 대운하 주변의 40여개 행궁은 이러한 탄배(홍배)를 시행하기 위해 설치된 시설이었다.
신라엔 숯을 구워내는 전문 가마(木炭窯)가 칠산선문(七山禪門)의 사찰(寺刹)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졌고 비용절감(費用節減)을 위해 흙만으로 가마(窯)를 만들 수 있는 망댕이 가마가 개발되었다. 망댕이 가마로 문경(聞慶)이 유명한 것은 칠산선문(七山禪門)의 사찰들이 분포되어 있는 지역들의 한가운데가 문경이었기 때문이었고 또한 산들로 둘러싸인 지역의 특성으로 강한 화력을 내는 숯을 구워내기 좋은 재질의 참나무와 박달나무, 느릅나무 같은 나무들이 많이 자라고 있어서였다. 게다가 덖음을 하기 위해 필요한 무쇠솥을 만들어 내려면 수많은 용광로(鎔鑛爐)가 새로 지어져야 했는데 거기에 내화벽(耐火壁)으로 사용해야 할 벽돌(甎)도 모자라는 사정이었기에 숯가마는 흙으로만 짓는 망댕이법이 개발된 것이었다. 무쇠(銑鐵)를 철광석에서 뽑아내기 위해서는 1200도 이상의 열을 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숯도 흑탄(黑炭)이 아닌 백탄(白炭)이 필요했다. 그런 백탄도 엄청나게 필요했기에 숯 만드는 일은 신라인들의 일상이 되어 버렸다. 흑탄 만드는 일은 일도 아닌 일이 되었다. 신라에 숯이 넘쳐나게 된 이유였다. 무쇠솥을 만드는 원료인 선철(銑鐵)을 뽑아내는 용광로(鎔鑛爐)에 사용할 내화벽돌(耐火甎)을 구워내는 일이 일상화(日常化)되다 보니 지붕에 사용하는 기와(瓦)를 구워내는 건 기술도 되지 못했다. 신라에 기와(瓦)가 넘쳐나게 된 이유였다. “지금 민간에서는 기와로 덮고 짚으로 잇지 않으며, 숯으로 밥을 짓고 나무를 쓰지 않는다”는 삼국사기의 기사(紀事)는 단지 경제적으로 진골들만 부유해진 상황을, 풍년이 계속되어 편안해진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영어로 숯을 charcoal이라 쓰는 건 변화를 뜻하는 중세 영어 charren과 coal이 합쳐져서가 아니라 cha(茶)를 만드는 coal(炭)이기 때문이다. 중국어로 선(禪)은 젠(zen)이 아니라 찬(chan)으로 발음되는 이유와 같다.
전 세계로 수출되는 차(茶)들이었기에 특히나 바다를 통해 운반(運搬)되는 차(茶)들이었기에 오랫동안 보관하지 않을 수 없는 차(茶)들이었다. 시루(斯盧)와 절구(臼)를 이용한 청태전(靑苔田)과 청전차(靑磚車) 같은 증차법(蒸茶法)으로 만든 고형차(固形茶)는 이런 문제들이 발생하지 않았는데 회창폐불로 생산기반인 사찰(寺刹)들을 모두 뺏기고 쫓겨난 상황에서 증차(蒸茶) 보다 더 값싼 차(茶)를 빨리 만들어 빼앗긴 고객들을 되찾아 와야 했기에 생긴 부작용이었다. 구증구포법(九蒸九曝法)에서 알 수 있듯 증차(蒸茶)는 만드는데 많은 시설과 장기간이 요구되는 까다로운 제품이었다. 일본에서 채엽되어 바다를 건너오면서 이미 고온(高溫)과 습기(濕氣)에 변질되기 시작한 찻잎들을 변변한 건물 하나 없는 사찰(寺刹)에서 전 세계 차상인(茶商人 Merchant)들에게 내놓을 수 있는 경쟁력 있는 차(茶)로 만드는 유일한 길은 전차(煎茶) 제조법과 탄배법(炭焙法)이었다. 대량으로 들어오는 일본차(茶)를 가공해 아바스 왕조가 다스리는 일명 사라센 제국에 수출해 회창폐불 이후 괴멸상태에 빠진 천태종단의 명맥을 부활시킨 칠산선문(七山禪門)의 본산(本山) 사찰들이 모두 일본차(茶)가 뱃길로 들어오는 지역에 자리 잡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황해도 해주(海州)의 광조사(廣照寺)를 본산(本山)으로 하는 수미산파(須彌山派)는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 때 성립한 산문(山門)이었고 문경(聞慶) 봉암사(鳳巖寺)를 본산(本山)으로 하는 희양산파(曦陽山派)는 지증국사(智證國師) 도헌(道憲)이 신라 헌강왕(憲康王)에게 사액(賜額) 받아 879년에 창건(創建)했으나 가까이에 위치한 보은(報恩) 법주사(法住寺)의 핍박(逼迫)으로 터만 남았다가 고려 초기 진정국사(眞靜國師) 긍양(兢讓)이 그 터에 다시 개창(開創)한 산문(山門)이었다.
강원의 강릉, 양양, 평창, 영월, 원주, 전남의 장흥, 순천, 광양, 남원, 곡성, 화순, 경남의 창원, 함양, 충남의 보령, 충북의 충주, 제천, 경기의 여주, 양평 등이 칠산선문(七山禪門)의 본산(本山)과 운반(運搬)을 담당(擔當)한 중요한 말사(末寺)들이 있던 곳인데 일본차(茶)들이 수입되는 곳과 가공되어 서역으로 수출되는 수출항 그리고 수출항까지 생산된 차(茶)를 운반(運搬)하는 주요 수송처(輸送處)가 있는 곳이었다. 영산강과 금강, 한강으로 연결되는 차(茶) 수송로(輸送路)에서 평창, 영월, 원주, 남원, 곡성, 화순, 함양, 충주, 제천, 여주, 양평 같은 지역에서 역참(驛站)과 같은 역할을 했던 사찰(寺刹)에서는 숯(木炭)과 배롱(焙籠)을 사용해 탄배(炭焙)를 하기 위해 항상 숯과 대나무 또는 버드나무 가지를 대량으로 소비하고 있었다. 문경(聞慶) 희양산(曦陽山)에 있는 봉암사(鳳巖寺)를 본산으로 하는 희양산파(曦陽山派)는 그런 중요한 숯을 공급해 주는 원천(원천)이었기에 보은(報恩)과 상주(尙州)에 있는 법상종단(法相宗團) 소속 사찰들에 의해 파괴(破壞)되었었다. 희양산파의 파괴를 직접 목도(目睹)한 다른 선문(禪門)들이 그들의 무자비한 폭력을 막아내기 위해 목탁(木鐸)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법구(法具)들이 모두 박달나무로 만들어지는 계기(契機)가 되었다. 목탁(木鐸)이 대승불교(大乘佛敎)만이 사용하는 법구(法具)이며 당 태종(太宗)의 전폭적 지원을 받은 현장(玄奘)이 규기(窺基)에게 법상종(法相宗)의 홀(笏)을 들게 한 후 중국 선종(禪宗)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도량석(道場釋) 목탁(木鐸)의 크기 출처:강형원기자가 기록하는 찬란한 우리 문화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