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뭔가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길 열망에서 비롯되곤 한다. 글을 잘 쓰고 싶다는 갈망은 라면 스프처럼 끓어올랐고, 많이 쓰면 잘 쓰게 된다는 흔한 조언을 나는 많이 먹으면 배부를 것이라는 단순한 진리와 다를 바 없다며 이를 굳게 믿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쓰레기 같은 헛소리가 되지 않기 위해 주어진 주제에 집중하며 매일 무작정 글을 써 내려갔고, 안전벨트 없는 아슬아슬한 글쓰기인지라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과 평가도 구했다. 그들은 앵무새 합창단처럼 입을 모아 말하곤 했다. 자전거를 넘어지면서 배우듯이 글쓰기 역시 경험으로부터 배운다는 의사의 진단 같은 그 말에 의지해, 글쓰기 여정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벽에 머리 박는 사람이나 멘땅에 헤딩하는 식의 그런 반복은 고장 난 녹음기처럼 아무런 변화가 없었으며 곧 고난으로 이어졌다. 10개, 20개 글을 쓰며 끝없이 펜을 들었음에도 글쓰기 실력은 도약하지 않았다.
요령도, 성취감도 없이 그저 고장 난 내비게이션에 의지해 쳇바퀴만 굴렀고, 잔인한 글쓰기 현실에 무참히 짓밟힌 채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절박한 질문과 함께 불안감이 나를 휘감았다.
많이 쓰면 된다는 내가 그토록 믿었던 글쓰기 교리가 과연 옳은 길인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로또를 매일 사면 언젠가는 당첨된다는 믿음을 굳게 믿었던 사람이 낭비일 뿐이라는 의심을 품기 시작한 것이라고나 할까.
라면은 그냥 물 붓고 스프 넣으면 되는 것이라고 믿었던 순진한 영혼을 간직해 오던 어느 날, 교과서에 실린 훌륭한 글들이 우연히 탄생한 것이 아니라, 분명한 이론적 기반에 의해 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노래에도 음정, 박자, 화성 등 음악 이론이 있듯이 모든 것들이 그냥 운빨이 아니라는 깨달음은 충격적이었다.
내가 마주한 글쓰기의 한계는 그렇게 단순히 많이 써보는 것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론의 부재로 좌절감은 점점 커져갔다. 헬스장에서 무거운 아령만 들면 근육이 생길 줄 알았던 순진한 청년처럼, 나는 많이 쓰면 글쓰기 실력이 늘겠지라고 믿었지만 현실은... 아령만 들다가 팔만 아픈 것처럼, 글만 쓰다가 머리만 아팠다. 이론이라는 헬스 코치가 없으니, 근육은커녕 지방만 늘어나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정체불명의 낙서에 가까울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던 나는 글쓰기 이론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주제 선정부터 논리 구성까지 신중하게 접근했으며, 마음대로 쓰면 소설 명작도 될 수 있다는 그런 단순한 감각에 의존했던 나 자신을 반성했다.
무조건 튼튼한 재료만 몽땅 쌓으면 믿었던 건축이 될 리 없는 것이며, 근육 또한 무조건 무거운 것만 들면 생기는 것이 아닌 것처럼 글 역시 단순히 반복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론적 밑바탕을 통해 완성된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첨단 장비처럼 견고한 이론이라는 밧줄을 잡은 후, 나는 마침내 온갖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혼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더 이상 줄에 매달려 빌딩 숲을 활강하거나 절벽에서 떨어질 걱정은 없을 것이다.
수학자가 수학 문제 풀이의 핵심은 정확한 공식과 논리적인 계산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나는 주제를 명확히 하고, 이를 짜임새 있게 뒷받침하는 구조를 세우는 것이 글쓰기의 핵심임을 깨달았다.
발로 쓴 글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써야 했던 이전 글과는 달리 더 이상 손발이 오그라는 드는 글이 아닐 정도로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문장이 되었고, 글쓰기가 어둠 속의 헤맴이나 절망이 아닌 희망을 느끼게 되었다.
글쓰기가 운칠기삼이란 것은 야매로 글쓰기 하던 옛말이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호랑이가 금연했다는 옛이야기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다. 무작정 글쓰기라는 낭떠러지에서 이론이라는 밧줄을 잡아야 하며, 교과서적 정석으로 갈아타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