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나는 어쩔 수 없는 상황, 불가항력적인 상황들에는 미련을 두지 않는다. 소풍을 가려고 했는데 비가 온다고 우울해하지 않고, 키가 크고 싶은데 키가 크지 않는다고 좌절하지 않는다. 요즘 주위 사람들이 한 마디씩 한다.
“딸 나고 아들 나셨어요? 잘하셨네.”
주위의 과도한 관심에 어리둥절할 때가 있다. 정작 당사자는 아들인가 딸인가엔 큰 관심이 없다. 새로운 생명이니까 귀하고 감사한 것이다. 호사가들은 아들 낳고 딸 낳으면 100점, 딸 낳고 아들 낳으면 150점이라고 한다. 그러면 딸 낳고, 아들 쌍둥이 나면 200점인가? 딸 낳고 또 딸 낳으면? 아들 낳고 또 아들 낳으면?
흥미로운 채점이다. 무슨 논리로 채점이 된 건지는 모르겠나 잘했다고 하니 잘한 것인가 보다. 그런데 아들에겐 미안하다. 족보를 다 믿을 수는 없겠지만 조선시대 태어났으면 나름 편하게 살았을 텐데 작금(昨今)은 처우가 형편없다.
2015년 12월
아들은 거실을 왔다 갔다 하며 온방을 어지럽혀 놓으며 놀고 있다. 한 참을 놀더니 목이 말랐는지 냉장고에서 쥬즈를 하나 꺼내어 먹는다. 그리고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며 말을 한다.
"아빠 배사 줘"
내가 대답했다.
"배 거기 냉장고 맨 아래칸에 있잖아. 하나 꺼내봐. 아빠가 깎아줄게"
그러자 아들이 다시 대답했다.
"그 배 말고... 바다 위에 떠 다니는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