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년 0월 0일
원주
지금 달리고 있는 기차의 속력은 얼마나 될까?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이 너무 예쁘다. 빨간지붕의 집들, 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동화책 속에서 읽었던 거리의 풍경들이다. 시원하게 뚫린 도로가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 어렸을 땐 어른이 되면 세상이 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다. 다른 세상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달라지는 것이다.
궁금한 것도 많고 생각할 것도 많다. 왜 사는 건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어른이 되어가는 내 모습을 볼 때 문득 서글퍼진다. 비 오는 날 비를 맞고 싶어도 맞을 수가 없다. 길거리에서 떡볶이를 먹는 것도 창피하다. 외출할 때는 머리가 항상 단정해야 한다. 어른이 되면서 얻는 자유도 있지만 잃는 자유는 더 많다. 낭만도 사라져 간다. 슬픈 노래를 들어도 별로 슬프지 않고, 감명 깊은 영화를 봐도 별로 느낌이 없다.
00년 0월 0일
단양
단양은 예쁘고 아기자기 한 도시다. 도시가 잘 정리되어 있고 깨끗하다. 작은 집들이 이쁘게 정렬해 있다. 한 참을 걷다가 지쳐 비포장 도로에 앉아 쉬었다. 옥수수밭에서 한가로이 밭을 매는 아주머니가 부럽다. 날씨도 너무 화창하 고 평온한 오후다.
해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맞이 하지만 언제나 자연은 우리에게 새로운 감동을 준다. 길 가다 사과나무를 발견해서 사과를 몇 개 따 먹었다. 마음은 평화롭지만 허전하다. 무엇이든 열중하고 싶은데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쓸쓸하고 서글프다. 음악을 들어도 술을 마셔도 사람을 만나도.
00년 0월 0일
대천
파도 소리에 잠이 깼다. 텐트문을 젖히고 앞을 보니 넓은 바다가 펼쳐 있다. 너무도 상쾌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눈앞에 바다가 있다는 건 정말로 새로운 기분이다. 손을 내 밀면 바닷물이 닿을 정도다. 바다가 안개에 묻혀 또렷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꿈속에서 본 천국 같은 모습이다.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며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 조개껍질을 줍고 있는 아이들, 공놀이를 하는 학생들........ 나도 1 미터가 넘는 모래성을 쌓았다. 그리고 노래도 불렀다. 잠시 행복했던 하루였다.
00년 0월 0일
부여, 낙화암에 앉아
앞으로 백마강이 흐르고 있고 강 위로 작은 배 한 척이 떠 있다. 강을 건너기 위한 배인 것 같다. 몸은 피곤한데 머리는 맑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행복하다. 이 평화와 자유가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면 좋겠다. 언제 보아도 아름답고, 평화로운 시골이다. 나의 존재감은 별로 없는 것 같다. 희미하다. 모두가 나 보다 훌륭한 사람들뿐이다. 그 사실이 슬프다. 세상은 똑똑한 사람만 원한다.
현실을 박차고 나갈 자신도 없다. 시행착오는 필연적인 것이라고 위로해 보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다. 가버린 것도 시간, 남아 있는 것도 시간인데 이 시간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기뻐하고 즐거워할 시간이 많이 남아 있을까? 세상에는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대단한 것도, 곳도, 사람도 없는 것 같다.
00년 0월 0일
공주, 갑사로 가는 길
간밤에 또 비가 내렸다. 텐트 안에 물이 들어와 옷이며 신발이며 책까지 모두 젖었다. 버너로 대충 말렸지만 몸은 여전히 눅눅하다. 눈이 피로하다. 어젯밤은 옆 텐트에 울산인과 묵호인을 알게 되어 모닥불을 피워 놓고 밤새도록 이야기를 했다. 좋은 사람들이다. 저마다 목표가 있고 사연이 있다.
나는 예외일 것이라는 생각은 버리자. 그것은 착각이다. 묵호인은 텐트 치는 것을 도와줬더니 라면과 커피, 그리고 국거리까지 주며 감사의 표시를 했다. 따뜻한 사람들이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의 개념도 모호하고 혼돈이 온다. 내가 어렸을 때 생각했던 사랑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사랑과 같을까? 너무 작위적이고 현실적인 사랑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신 (platonic) 하나만으로 사랑을 할 순 없겠지.
그러나 돈을 사랑 한 건지, 배경을 사랑한 건지, 사람을 사랑한 건지 정확하게 생각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 같다. 내가 분명해야 상대도 분명해진다. 안 봐도 될 것은 안 보고 싶고, 안 느껴도 될 것은 안 느끼며 살고 싶다. 비 개인 오후다. 비가 내린 후 내리쬐는 강렬한 햇빛이 무척 인상적이다. 아름답고 깨끗하다.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하고 맑다. 내 삶도 언제나 이렇게 비 개인 오후의 하늘처럼 밝았으면 좋겠다.
00년 0월 0일
여수
지난밤 식중독으로 무척 고생을 했다. 유난히 집이 그리운 날이다. 오늘 저녁도 라면으로 때웠다. 낮에 오동도에 들렸다가 잠자리를 찾아 급히 베이스캠프를 쳤다. 커가면서 오히려 약해지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작은 일에도 실망하고 괜한 일에 민감해진다.
사람들은 가려진 말 들, 어려운 말 들로만 이야기한다. 모든 것이 실망이다. 그냥 대충 살면 되는 걸까? 모든 것이 정지상태에 있는 느낌이다. 몸도 마음도 갑자기 멈춰 정지해 있는 느낌이다. 마음은 편하다. 무감해져서 편해지는 것일까? 무상무념의 날이 이어지고 있다.
00년 0월 0일
해운대
밤바람이 생각보다 시원하다. 신발을 벗어 손에 들고 해변을 걷는 연인들이 부럽다. 나도 연애를 하고 싶 다.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색소폰을 부는 사람도 있다. 밤을 지나 새벽으로 가는 길목임에도 불구하고 포장마차의 불 빛과 거리의 네온사인으로 거리는 대낮처럼 환하다.
무엇을 좋아했는지, 무엇을 하고 싶어 했는지, 내가 원했 던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무기력하고 나태하다. 오늘이 어제와 같고, 내일은 오늘과 같다. 일체가 무의미하다. 허무하고 무기력하다. 매일 괴테의 시나 샤르트르의 철학만 얘기할 수는 없 다. 좀 더 이성적이어야 한다.
진정한 여행이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데 있다.(마르셀 푸르스트)
여행은 무엇보다도 위대하고 엄격한 학문과도 같은 것이다.(카뮈)
여행을 하는 것이나 병에 걸리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반성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다케우치 히토시)
00년 0월 0일
안동
며칠 전 폭우와 강풍으로 야영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오늘 아침 반찬은 김, 멸치, 고추장이다. 오랜만에 푸짐한 반찬이다. 시내로 나가 여인숙에 짐을 풀었다. 바퀴벌레가 기어 다닌다. 아침에 유성룡 생가에 들렀고 조그만 탈 하나를 샀다. 몸도 마음도 피로하다. 이제 마냥 새롭고 신기하지 않다. 새로운 곳에 왔지만 새롭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00년 0월 0일
태백, 통일호 열차 안에서
잠에서 깨어 보니 기차가 산을 타고 올라가고 있다. 놀이 공원에서 놀이기구를 탔을 때 느꼈던 기분과 비슷하다. 아마 산속 깊이 들어온 것 같다. 지금 넘어가는 곳이 태백산맥인가 보다. 산을 넘고 마을이 나오고, 다시 산을 넘어도 또 산이다. 말 그대로 첩첩산중이다.
시골의 국민학교, 시골의 교회, 시골의 아이들. 모두가 소박하고 아름답다. 기차가 구름 속을 달린다. 손오공이 된 기분이다. 한 아주머니가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해 오는 모습이 창밖으로 보인다. 다시 비가 내린다. 넘어가던 구름이 태백산맥에 걸린 모양이다. 쓰러져 가는 듯한 집 한 채가 보인다. 책에서나 읽었던 두메산골이다. 저런 곳에 정말 사람이 살고 있을지 궁금하다.
산속으로 구불구불하게 난 도로가 정감이 넘친다. 노란 페인 트을 칠 했는데 도로가 비에 젖어 동화 속에 나오는 산 길처럼 이쁘다. 산속에 숨어있는 금색 불빛들이 무척 예쁘다. 산속에 드문드문 박혀 있는 초가집들이 한 폭의 그림 같다. 너무 아름답고 평화롭고 신기한 산골 마을의 풍경이다. 감동적이다. 다시 이곳에 와 볼 수 있을까?
00년 0월 0일
맹방
멀리 고깃배 두척이 보인다. 부서지는 파도 소리. 자욱 한 안개. 하얀 갈매기. 상쾌하다. 아담한 해수욕장이다. 파도가 이쁘게 친다. 어제는 세끼를 모두 단무지와 고추장으로 때웠다. 그래도 마음은 평온하다. 미분, 적분을 몰라도 세상은 잘 살 수 있는데..... 이제 소주병을 들고 있어도 어색한 기분은 없다.
잊기 위해서 술을 마시고, 한 편으론 기억되기 위해서 술을 마신다. 어떤 것에, 무엇에 의미를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 허무하고 고독하다. 인생은 연극과도 같다고 한다. 차이가 있다면 연극은 리허설이 있지만, 인생은 리허설이 없다는 것. 내 인생도 연극이라면 내가 주인공 일 텐데 주인공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때 여행의 기억이 너무 강렬했던 탓일까? 지금도 나에게 여행이란 자유다. 여행이 주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내게 여행은 맛집 투어가 아니고 자유다. 그래서 가족여행은 내가 원하는 여행의 본질과는 다르다.
함께하는 행복함과 즐거움이 있지만 혼자 있는 자유로움은 없다. 두 가지가 공존할 수는 없다. 하나는 버려야 한다. 그래서 생각해낸 꼼수는 가족 여행시 새벽에 일어나서 혼자 드라이브를 하는 것이다. 모두 잠든 새벽에.
효과 만점이다. 그 때 만큼은 완벽한 나의 시간이다.
모든 것에 때가 있듯이 여행도 그 때의 때가 있다. 20대의 여행이 있고, 30대의 여행이 있고, 40대의 여행이 있고 노년의 여행이 있다. 모두 소중한 의미가 있다. 지금도 여행을 하고 있지만 20대 때의 여행처럼 그런 맛이 나지 않는다.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더 좋은 숙소에 훨씬 더 비싼 음식을 먹고 심지어 내차도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