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년 0월 0일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지만 해줄 수 없는 상황일 때, 그 이유가 경제적인 이유라면 얼마나 안타까울까? 물질이 전부는 아니지만 물질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 같다.
00년 0월 0일
출판사 물류창고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부장님은 연세가 일흔이다. 일을 안 하셔도 생활에 지장이 없는데 왜 저렇게 힘들게 책을 나르며 일을 하실까? 봄에 새싹이 돋아나는 것을 보면 그렇게 신기하고 즐겁다고 하신다. 잘 모르겠다.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는데 힘들게 일을 하는 이유도, 봄에 새싹이 돋아나는 것이 그렇게 신기한 일인지도.
00년 0월 0일
태어나서 처음 소개팅을 했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해야 하나? 알게 된 지 한 달, 두 번 만난 것이 전부인데 무척 보고 싶다. 나도 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보고 싶고, 듣고 싶다. 그 애의 얼굴을 목소리를.
00년 0월 0일
'나의 이기적인 행동이 싫습니다. 두렵습니다. 믿고 있었던 것에 실망했을 때 그 두려움이 너무 클 것 같습니다. 삶에 애착을 갖고 살게 될까 봐 두렵습니다. 만나지 않았으면 해요. 미안해요. 오빠'
00년 0월 0일
경천동지도 유만부동이지, 희야 희야 나의 희야,
금을 준 들 너를 사며 옥을 준들 너를 사랴.
날아 날아 가지마라. 날이 가면 달이 가고
달이 가면 너 잊노라.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나님께 비나이다.
우리 XX 어느 곳에서든 온전케 하옵소서.
지고지순 순수고결 우리 XX. 불철주야 주야장천,
검은 단발머리 빨간 입술, 슬픈 생각 하릴없네.
뿌리느니 눈물이요, 적시느니 한숨이라.
00년 0월 0일
그녀와 나는 만난 지 한 달 만에 이별을 했다. 나는 착각을 했던 것 같다. 그녀는 나를 처음 만난 날, 이미 헤어져야 할 날을 정해 놓은 것 같다. 그녀를 빨리 잊는 것이 나를 위해서 좋을 것 같다. 이성적이고 싶다.
00년 0월 0일
그녀는 내게 솔직하지 않았었던 것 같다. 오늘도 그녀를 잊기 위해 노력했다. 친구를 만나고 영화를 보고 술을 마셨다. 잊을 수 있지만 잊고 싶지 않다. 속초에 다녀왔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고 왔다. 그런데 마음은 너무 허전하다.
00년 0월 0일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눈물이 났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데 아버지는 인정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다. 마음이 안 좋다.
00년 0월 0일
요즘은 사소한 일에 분개한다. 공중전화에서 통화를 오래 하는 사람이 있으면 분개하고, 기다리던 버스가 오지 않으면 분개하고, 늘 먹었던 그 먹거리가 없어도 분개한다. 오늘은 면허 시험장에 3분이 늦어 시험을 보지 못했다. 2시간 넘게 걸려서 갔는데.
00년 0월 0일
특별히 하는 일도 없는데 코피는 왜 나는 건지, 몸무게는 왜 줄어드는 건지 모르겠다. 폭음했다.
00년 0월 0일
아무것도 하기 싫다. 책도 보기 싫다. 일체가 무의미하다. 착하면 바보가 되는 세상이다. 겸손하면 깔보고, 순수하면 바보인 줄 안다. 오늘 S자 후진 했다.
00년 0월 0일
울릉도에 다녀왔다. 특이했던 너와집과 생각보다 초라했던 성인봉의 정상, 여행은 참 소중한 것이다. 늘 마음을 새롭게 한다. 그리고 거기서 알게 된 한 여인이 있다.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하고 자수성가해서 큰 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남자에게 마음도 돈도 모조리 빼앗겨 삶을 비관해 자살하려고 울릉도에 왔다고 했다. 하얀 갈매기와 넘실대는 파도, 파란 하늘, 너무 아름다운 자연이다. 그래도 죽으면 안 되지 않는가?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이 있는데.
00년 0월 0일
두 번째 소개팅을 했다. 그녀 K는 무척 착하다. 그녀는 내게 자연스럽게 다가오며 마음을 열었다. 우리는 다정스럽게 걸었고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내 머릿속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K와 그만 만나기로 했다. 그녀를 잊기 위해 K를 만난다 는 것은 할 짓이 아니었다.
00년 0월 0일
XX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별 편지를 받은 후 3개월 6일 만이다. XX는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하얀 얼굴, 붉은 입술. XX는 날이 갈수록 예뻐졌다. 그러나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으나 공연한 집착이었던 것 같다. 집착은 사랑이 아니다. 그녀는 내가 만나자고 해서 만난 것일 뿐 나와 같은 감정은 아닌 것 같다.
00년 0월 0일
얼마 전 내가 모르고 있는 XX의 불행한 가족사를 알게 되었다. 동생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부모님의 이혼. 나는 상관없었지만 그녀는 그런 충격들로 많은 복잡한 생각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녀를 처음 만난 그날 이후, 매일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어떤 날은 10장도 넘게 썼다. 그녀가 불편할 것 같아서 전화도 자주 하지 않았다.
그녀와 연인이 되고 싶었지만 그 녀의 마음속에 내가 들어갈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너무 좋아하면 사랑이 아닌 것일까? 내가 더 많이 좋아했다고 창피한 건 아니겠지. 사랑에는 많은 이해와 노력도 필요하지만 타이밍도 중요한 것 같다.
00년 0월 0일
길 가다 몇 년 만에 교회 동생을 만났다. 여자는 대단한 기억력을 갖은 동물이다. 5년 전에 전화로 한 이야기를 감탄사, 조사하나 빼놓지 않고 다 기억한다. 여자에겐 말조심을 해야 한다.
순수한 사람일수록 깊은 사랑에 빠진다. 어쩌면 약간은 무모하고 맹목적 요소도 있어야 하지 않나 싶다. 무지한 사랑이 아닌, 순수한 사랑. 어떠한 것을 전제로 하지 않는 사랑, 어떠한 조건이 없는 사랑,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은 극소수인 것 같다.
사랑은 어떠한 형태로든 가능하지만 적당히 합리적 사랑을 하는 것도 필요하다. 사랑은 사랑이고 현실은 현실이니까. 이도령과 성춘향처럼,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사랑을 뜨겁게 하는 것까지는 좋다. 그것이 사랑에서 끝나면 사랑은 성공이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애를 낳고 살다 보면 또 다른 카테고리의 사랑법이 필요하다.
그래서 연애를 연애로 끝내는 사랑과 연애를 결혼까지 이어가는 사랑은 조금 구별하여 합리적이고 현명한 사랑을 해야 하지 않나 싶다. 고전들을 들춰 보면 "사랑가"나 그 밖에 사랑타령하는 노래들이 있는데 XX를 만 난 후 그런 노래들이 왜 나왔는지를 알 것 같았다. 군대를 제대하고 민간인으로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도 있는 것 같다.
사족
저 사람을 내가 어느 정도 좋아하는가를 쉽게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밥을 먹을 때 숟가락의 원형 모양에 그의 얼굴이 동그랗게 들어가 있으면 정말 좋아하는 것이다. 잠잘 때, 일할 때, 먹을 때 떠오르는 것은 가장 기초적 그리움이다. 심화 단계에 이르면 숟가락등 기타 동그란 원형에는 대부분 그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