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아지트

by JJ

가끔 집사람과 말다툼을 하거나 마음이 답답하거나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자주 가는 아지트가 있다. 집 근처 북한산 자락에 있는 곳이다. 둘레길 옆으로 샛길에 있는데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쉼터다. 초록 초록한 산과 파란 하늘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수선했던 머릿속도 정리되고 마음이 한 결 가벼워진다.


요즘은 내가 확실히 예민해져 있는 것 같다. 별일도 아닌데 주위사람들에게 짜증을 낸다. 답답한 마음에 친구를 만났지만 몇 시간 동안 그의 하소연만 들어주고 왔다. 걔는 나보다 더 심각한 것 같다. 나만의 아지트라도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아지트가 특별한 필요는 없다. 내가 좋아하는 공간이면 된다. 차 안에서 조용히 음악을 듣는 것도 좋고, 카페에 앉아서 차를 마시며 스마트폰 삼매경에 빠져도 좋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어도 좋고, 주말 농장에 가서 호미질을 해도 좋다. 공부하는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땀을 흘리며 공놀이를 해도 되고 게임에 몰입해도 괜찮은 것 같다.


요즘은 특히 자연에서 많은 위로를 받는다. 사람에게 상처를 받는 자 개나 고양이에게 치유를 받고, 개나 고양이에게 상처를 받은 자, 식물과 자연에서 치유를 받는 가 보다. 기대하는 것이 많은 생명체일수록 실망하는 것도 많고 상처가 많은 것 같다.


북한산 둘레길


언제부터인가 숲세권이라는 말이 유행하던데 어쩌다 보니 숲세권에서 살게 된 내게는 큰 행운이다. 숲세권도 프리미어와 스탠더드가 있는데 확실히 프리미어는 아닌 것 같다. 일생을 마이너로 살다 보니 마이너 한 숲도 충분히 좋다.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도 먹고 마시는 즐거움 보다 자연이 주는 감동과 치유 때문이다.


요즘은 퇴근 후에 새로운 일과가 생겼다. 늦은 밤 학원에서 끝나는 딸을 픽업하는 일이다. 기저귀만 떼면 소원이 없겠다며 아이들을 키웠는데 그게 아니었다. 기저귀를 떼는 것은 수학으로 치면 구구단 수준 밖에는 안 되는 것이었다. 삶이 TV예능 프로그램처럼 항상 즐겁기만 하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삶은 다큐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채플린 형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좀 더 정성껏 살아야겠다.


아내는 요즘 당근 마켓에 흠뻑 빠져있다. 하루 종일 울상을 하고 있길래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아들이 아껴 신으려고 보관해 두었던 신발을 당근 마켓에 팔아 버린 것이었다. 갱년기의 끝판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다가 나도 당근 마켓에 내놓은 것 아닌가 모르겠다.

"저희 남편 무료 나눔 합니다. 그냥 가져가세요. 오셔서 직접 가져가셔야 해요."



아무 때나 올라가서 누워 있을 수 있다면 거의 내 산(山)이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이 정도면 사유지로 사용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군만마, 부귀영화, 입신양명이 부럽지 않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