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좋은 날
오랜만에 K에게 전화가 왔다. 오랜만에 걸려온 친구의 전화는 반갑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조금 염려가 된다. 짧은 시간에 여러 가지 상상을 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나? 애들 돌 지난 지는 오래되었는데? 혹시 하는 일이 잘 안 돼서 급히 돈이라도 빌리려고 하나?’
K의 목소리를 들은 지도 2년은 족히 된 듯싶다.
“OO아? 퇴근했냐? 나야”
너무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어~~ OO이 아니냐? 네가 웬일이야? 전화를 다하고? 살다 보니 네가 전화하는 날이 다 있네?”
K는 나의 30년 지기 친구다. 코흘리개 어릴 때부터 함께한 친구다.
“얼굴 한번 봐야지? 우리 도대체 언제 본 거야?”
그날은 야근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업체에 샘플리스트를 작성해서 메일을 보내주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2년 만에 전화를 한 친구의 목소리에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래 한번 봐야지. 근데 갑자기 전화해서 보자면 어떻게? 다음에 날 잡아서 여유 있게 보면 안 될까?”
K의 맘을 떠 보려고 말을 돌렸다. 내심 다음에 봐도 괜찮다는 대답을 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K는
“다음에 보면 또 못 보잖아. 지금 보지 뭐. 너 회사가 충무로지? 내가 지금 그쪽으로 갈게”
그렇게 서둘러 통화를 끝낸 후 그가 오는 동안 미친 듯이 일을 했다. 잠시 후 K와 나는 종로의 어느 뒷골목 고깃집에서 2년 만에 회포를 풀었다.
K.
그를 열 살 때 처음 보았으니 벌써 30년이 넘었다. 그는 가정환경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부터 휴학을 해야 했다. 두 평이 안 되는 좁은 방에서 추위에 떨며 함께 공부했던 기억, 동생이 참 예뻤던 기억, 축구를 하다가 동네 형과 싸움이 붙었는데 친구가 함께 싸워주었던 기억 등 30년 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간 듯한 착각을 일으키며 우리는 신이 나게 이야기를 했다.
K는 다재다능했다. 중학교 때까지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었고, 탁구를 잘 쳐서 전국대회 나가서 우승을 했고, 태권도도 상당한 수준이었었다. 몇 시간을 쉬지 않고 주절주절 떠들어댔다.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친구가 주머니 속에서 빨간 봉투 하나를 꺼내어 내 앞에 내밀었다.
주위의 동료들의 경조사는 빠짐없이 챙기면서 30년이 넘은 친구의 아들, 딸은 언제 태어났는지 언제가 돌인지도 몰랐다며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이 봉투를 받을 자격이 있을까? 나 역시 먹고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친구에게 연락하지 못하고 살았다.
무엇이 그렇게 바빠서 친구 아들의 이름조차도 모르고 지냈는가? 내가 미안해서 못 받겠다고 몇 번이나 손을 밀어냈다. 그러나 한사코 봉투를 가방 속에 밀어 넣는 친구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찡해졌다. 친구란 무엇인가?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든든한 힘이 되어 주는 존재이다.
나무처럼 옆에서 나를 지켜보며 태양이 내리쬐면 그늘 아래서 쉬기도 하고, 비가 오면 비를 피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는 해마다 내 생일이 돌아오면 한 번도 머릿속에서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고 한다. 난 어떤가? 친구의 무심함 때문에 관계가 소원해졌다고 생각을 하며, 서운한 감정이 있었다. 나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서 친구에게만 서운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
“애들 옷이라도 하나 사 입혀라. 와이프 갖다 줘. 네가 챙기면 안 돼?”
중얼거리듯 말하며 그는 지하철 승강장으로 내려갔다. 멀어져 가는 친구의 모습을 한동안 서서 지켜보았다. 초등학교 때 학교 운동장에서 비를 흠뻑 맞으며 운동장을 뛰어 다렸던 친구의 모습이 오버랩되어 지나갔다. 참 오랜만에 기분 좋게 술을 마셨다.
직장 생활하면서 기분 좋게 술을 먹었던 기억이 몇 번이나 되던가? 박봉의 샐러리맨들은 좋은 일로 술을 마실 일이 별로 없다. 대부분 복잡하고 어려운 일들 때문에 술을 마신다. 회사에서의 업무스트레스, 가정에서 육아와 자녀교육 스트레스 등, 잔을 기울일 이유는 참 많기도 하다.
집으로 돌아와 곤히 자고 있는 아이들에게 술냄새를 풍기며 뽀뽀를 했다. 아내는 요즘 왜 술 먹는 횟수가 잦아지냐며 잔소리를 해댄다. 오늘은 잔소리하는 아내의 입에 뽀뽀를 했다. 아내에게도 미안하다. 빡빡하고 어려운 살림을 어떻게 해서든 꾸려 나가는 아내에게 항상 고맙다.
평소에는 꼼짝 못 하다가도 술이라도 한잔 하게 되면 큰소리치는 것이 남성들의 특징이다. 오늘처럼 술을 달콤한 마셔본 기억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친구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 고맙고, 미안하고, 행복했다. 빨리 씻고 자라며 투덜거리는 아내에게 갑자기 친구가 한 말이 떠올라 무게를 잡으며 말했다.
“당신 사랑이 뭔지 알아? 사랑은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니야. 기브, 그냥 기브(give)! 야 알았어? 이 사람아?”
아내는 듣는 것인지 마는 것인지 귀찮다는 듯이 등을 돌리고 누워 있다. 사랑이 뭔지 굳이 알려고 하지 말자. 마음이 따뜻해지고 가슴이 뜨거워지고,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 그런 게 모두 사랑이다.
10년이 훨씬 지난 일이라 감회가 새롭다. K는 지금 서울의 고등학교에서 교장선생님으로 재직 중이다. 학교 역사상 최연소 교장선생님이라고 한다. 지금도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그의 집 근처로 가서 갑자기 짧게 만나곤 한다.
가끔은 내 삶이 너무 팍팍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울적해질 때가 있다. 그래도 이런 기억이 있어서 감사하다. 남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겠지만 내게는 의미가 있다. 해외여행가서 비싼 숙소에서 잠을 자고, 비싼 음식을 먹었던 것 보다 백 배는 더 소중한 기억이고 감동스런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