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구의 조카들.

by 권길주

그러나 자신과 엉가 엄마와 엉가를 반갑게 맞아 줄 줄 알았던 덕구의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 없이 슬픔이 가득 찬 것이 어찌 말로 할 수 없는 몰골이었다. 그리고 덕구는 어찌 된 일인지 방개와 엉가 엄마를 집안에

들일 생각은 아예 없다는 듯이 그들을 끌고 마을 초입에 벼를 산처럼 쌓아 놓은 면장댁 논에 그들을 데리고 갔다.


“어이 방개 내가 좀 힘든 일이 생겼어. 그래서 이제는 우리 집에서는 자네와 엉가 엄마를 하루도 재워 줄 수가 없는 형편이라네.”

“예, 무슨 일이 생겼슈, 그 사이”

“응, 그렇다네.”

“무슨 일이래요”

“응, 얼마 전 여름 홍수에 우리 형님하고 형수가 한꺼번에 홍수에 떠내려 갔다네.

“뭐라 고유, 어떻게 그렇게 엄청난 일이 일어났데요.”

“그러니까, 내가 지금 정신이 아예 나간 것 같이 힘드네 그려.”

“월마나 힘들겠슈, 한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이 그렇게 황망하게 떠나버리셨으니, 어떡하다 두 분이서 그렇게 갑자기 홍수에 떠내려 갔데요.”

“음, 홍수가 쏟아지는 날 형이 냇둑에 매어 놓은 소를 데리러 갔다가 소가 갑자기 비가 많이 오니까 급하게 뛰었나 봐. 그 통에 소를 잡고 있던 손에서 줄이 끌어지면서 형이 물이 엄청나게 불어난 냇가로 떨어진 것이지. 형이 소리소리를 지르면서 떠내려 가는 것을 먼 곳에서 형수가 보게 되었나 봐, 그래서 형수가 형을 건지겠다고 냇깔로 뛰어들었는데, 물이 워낙 불어놔 놔서 두 사람이 다 냇물에 떠밀려 동네 입구에 저수지까지 떠밀려 간 것을 동네 사람들이 겨우 몇 시간에 지나서 찾았는데, 어휴 그 미련한 사람들이 그렇게 황망하게 날 두고 갔어. 새끼들도 다섯이나 두고서 말이여. 내 조카 새끼들이 다섯이 다 한꺼번에 고아가 되어 부렸네, 방개. 흑흑흑.”


덕구는 방개를 붙잡고 검고 진한 눈물을 흘렸다. 그의 얼굴이 검어서 검은 눈물이라기보다는 이 깊은 어둠 속에서 동굴처럼 큰 어두움에 갇힌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으로 덕구는 자신의 삶 앞에 놓인 불행을 어떻게든 눈물이란 약한 무기로 잠시라도 위로를 받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방개는 덕구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 안으며 그의 등을 투덕투덕 두드려 주었다.


“덕구, 내가 뭘 도와줄 거는 없는가, 형네 아이들이 졸지에 고아가 돼 부렸으니, 내가 농사라도 뭐 좀 거들어 줄 거는 없는가.”

“응, 형이 지어먹던 남의 논이 몇 마지기 있는데 내가 지금도 면장에서 머슴을 살고 있으니 자네가 그 농사를 좀 도와주면 좋지만, 자네들이 있을 테가 있어야지, 형이 살던 집도 형이 남겨 논 빚이 있어서 팔고 아이들이 다 우리 집에 와 있으니 자네랑 엉가 엄마가 살 곳이 없잖아.”

“덕구, 내가 엉가 엄마를 잘 설득해서 겨울 동안 논에 있는 볏가리에서 잠을 자야 헌다고 말해 볼께유. 워떡해유 나나 엉가 엄마가 본시부터 방한 칸도 없는 팔자니 올 겨울도 그렇게 살아보고 내가 자네 형 논농사를 내년에 잘 지어볼게. 고아들이랑 살으려면 일꾼을 사서 농사 지어서는 수지타산도 안 맞을 테니 내가 도와줌세.”


덕구는 방개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했지만, 그래도 방개와 엉가 엄마와 엉가가 잠을 잘 곳은 마려해야 하는데, 형에 조카들이 다섯 명이나 올망졸망 한 방에서 모여 있고, 임신해서 배가 부른 덕구의 아내가 다섯 명의 아이들을 치다꺼리하는데 지쳐서 얼굴이 노래져 가는데 거기에 엉가엄마와 엉가를 얹어 주었다가는 아내는 아마 아기도 낳기 전에 쓰러질게 뻔했다.


“방개 나랑 오늘 저녁부터 며칠간 저기 앞산에서 골짜기에서 진흙 좀 퍼 나르세, 아무래도 자네 집을 지푸라기라도 진흙에 짓이겨서 발라서 우리 집 아래채에 방 한 칸을 마련해 보세.”

“우리가 잘 방 한 칸을 만들자 구유, 아휴, 그럴 거 없어요, 낮에는 일해야는데 언제 밤에 또 그렇게 힘든 일을 혀유, 그냥 저기 나무 간에서 잘게요.”


방개가 가리킨 곳은 부엌 옆에 허술하게 나무와 짚으로 이어 엮어서 만든 나무를 두는 나뭇간이였다. 밥을 할 때나 부엌에서 요리를 하려면 불을 때서 모든 음식을 만들어 먹던 시절이라서 시골집에서 나무를 따로 재워 두는 나무간이란 허름한 공간은 절대적이었다. 때로는 부엌에 나무 간을 따로 마련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부엌이 좁을 때는 담장 옆에 허술한 모양새를 갖추어서 그곳에 산에서 길러온 여러 종류의 나무를 쌓아 두었다가 그 나무로 밥과 요리를 하고 방을 따듯하게 데우기 위해서 군불을 때기도 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 나무 간은 방도 아니고 마루도 아니고 그렇다고 토방도 아니니 그저 흙바닥 위에 세워진 잔나무들의 놓인 땅바닥인데 거기에서 방개를 엉가 엄마와 엉가를 데리고 잠을 잔다는 것이었다.

덕구는 가슴이 미어지게 아팠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왜 이렇게 불공평할 수가 있단 말인가 싶어서였다. 이 동네에서도 몇몇이 부잣집들은 그래도 방이 한 집에 안채, 아래채, 사랑채 해서 방이 대여섯 개는 되었고, 대청마루도 어느 집은 뛰어다녀도 될 정도로 넓고 하다못해 안마당에 정원이나 뒤뜰의 정원에도 정자를 지어 놓고 온갖 나무와 꽃들을 키우기도 하고 개와 강아지들도 하다못해 그 너른 집에서 마음껏 뛰어놀고 사는데, 사람인 방개와 엉가엄마와 어린 엉가가 곧 추위가 닦칠 텐데 방 한 칸이 없다는 것이 가슴이 에렸다. 그러나 그 고통을 감내해 줄 사람은 지상에 아무도 없었다. 자기의 형과 형수가 한 날에 홍수에 떠내려 가자 자기 조카들 다섯도 정말 집도 절도 없는 고아들이 되어 버린 것처럼 사람이 사는 세상이 공평스럽지 못했다. 덕구는 면장네 집에 누렁이보다 못한 인간의 삶도 얼마나 이 땅에 많은가를 가끔씩 그 누렁이를 보면서 생각하던 터였다. 면장 집에는 대문 앞에 커다란 개집이 있었는데, 그 집에 털이 누렇게 반들거리는 누렁이는 언제나 먹을 것이 개밥 그릇에 그득했고 가끔씩은 고깃국도 밥에 말아져서 나오기도 하고 고기도 먹다 버린 것이 몇 점 밥알에 섞여 있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낮잠이나 늘어지게 자는 개팔자가 상팔자처럼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만, 덕구는 어린 나이부터 머슴살이로 친구들이 책보따리를 메고 학교를 가는 것을 볼 때마다 자신도 알지 못할 눈물이 가슴속에서 고여 올라왔지만, 앞으로 고아가 된 조카 다섯을 서른 살도 안된 나이에 짊어져야 할 인생의 무게는 잠을 자다가도 바위에 짓눌린 듯이 가슴이 답답하고 죽을 것 같았다. 그런 걸 생각하면 어쩌면 방개는 자기보다는 자유로운 사람일지도 몰랐다. 미친 여자 엉가 엄마가 방개의 아내도 아니요, 엉가가 자식은 아니니 끝까지 책임을 질 이유는 없고, 길에서 만나서 잠시 그들을 돕고는 살고 있지만, 또 언젠가는 길에서 헤어질지도 모르는 사이가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자신은 혈육으로 맺어진 조카 새끼들을 어찌 하나라도 버린단 말인가. 사람 사는 도리와 책임감이 덕구의 가슴팍을 쥐어짜듯이 아프게 했다.

그래서 방개네 보다는 어린 조카들이 자신의 눈앞에는 먼저였지만, 그래도 방개와 함께 형이 짓던 논 열 마지기는 더 지어야 어린 조카들 밥은 굶기지 않을 것 같았던 것이다. 그래서 덕구는 방개가 살 수 있도록 방 한 칸을 진흙으로 얼른 지어야 했다.

방개와 덕구는 밤에 주로 집을 지었다. 진흙 뻘이 있는 땅을 찾아서 황톳빛 진흙을 지푸라기와 잘 뭉쳐서 진흙으로 벽돌을 만들어서 덕구가 살고 있는 집에 붙여 방을 한 칸 들인 것이다. 보름 만에 방개와 엉가 엄마와 엉가가 등을 대고 잘 수 있는 방 한 칸이 마련이 된 것이다.

초가집 대부분이 스레트로 변모해 가는 농어촌의 분위기가 서서히 무르익어 갈 때였지만, 덕구네는 스레트로 지붕을 개량한다는 것은 꿈도 꾸어 볼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부잣집들은 높이 기와를 올려서 처마며 서까래가 아주 멋들어지게 구중궁궐 부럽지 않은 모양새를 한 집도 이 마을에도 몇 집이나 됐다. 덕구가 머슴을 살고 있는 면장집도 그렇고 권 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는 것은 마을이었기에 조상들이 양반가로 세도가 좀 있었던 집들은 큰 기와집들을 지니고 살고 있었다.

방개는 그렇게 다시 덕구와 함께 살게 되었다. 한 곳에서 오래 살지 못하는 방개의 떠도는 생활이 언제까지 일지 몰라도 덕구는 방개가 더 이상 떠돌지 않고 자기와 함께 이 마을에서 살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불쌍한 엉가와 엉가 엄마도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 돌봐주면 엉가 엄마의 미친 병도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덕구의 마음도 진실했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그리 냉정하고 모질게 불쌍한 사람들을 도리치고 살 수 있는 것인지 덕구는 가끔씩 동네에서 잘 사는 어느 한 부자에게서 환멸 같은 것이 느껴졌다. 여름이면 머리통만 한 수박을 리어카에 가득 싣고 가면서도 가난한 집에 그거 한 덩어리를 못 내려주고 가는 것이 부자들의 욕심이었기에 덕구는 땅문서를 한 뭉치 들고 사는 부자들이 더 지옥을 가지 않을까 생각을 하면서 살아오던 터였기에 바가지 한 개 들고 이 동네 저 동네를 동냥하러 다니던 방개가 어디서 자기보다 더 못한 형편인 미친 여자를 그것도 젖도 아직 안 뗀 아기를 업고 다니는 여자를 그 한 개 밖에 없는 바가지로 음식을 얻어다 먹이는가 싶어 방개가 한없이 고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부자 열보다 방개 한 사람이 더 낮지. 암 낮고 말고, 방개야 말로 사람구실 하면서 사는가.”


진흙으로 만든 방개의 방 한 칸 부엌 한 칸의 집도 정말 초가삼간이지만 덕구네와 담장을 붙여서 지어 놓으니 덕구의 집도 커 보이고 여러모로 집모양도 그럴싸하니 살만했다. 그러나 덕구가 데려온 조카들 다섯은 이제 고스란히 덕구의 큰 십자가처럼 무거운 형틀이 아닐 수 없었다.

덕구의 집에서 같이 살게 된 방개는 덕구의 무거운 십자가를 나눠라도 진 듯이 밤이고 낮이고 덕구네 형이 남겨둔 논 열 마지기에 발에 쥐가 나도록 모를 심었다. 그런데 방개는 몇 년 동안 잠잠했던 귀에 환청 같은 총소리가 다시 밤마다 그의 귀에서 들려왔다. 아무래도 너무 힘들게 낮에 일을 해서 그런가 하고 방개는 일을 조금 느슨하게도 해보았지만, 한국전쟁 당시 그가 소년병으로 나갔던 그 전쟁의 실전에 모습이 밤마다 꿈에 보이고 밤새도록 총소리가 그의 귓전을 떠나지 않던 그 환청이 다시 들려왔다. 그는 엄청나게 고함을 지르며 꿈에서 깨어나면 총소리에 놀라서 막 마당을 가로질러 들판으로 달려 나가야 했다. 꼭 총격전이 극심했던 전쟁의 공포에 놓인 듯이 그는 미친 듯이 총소리를 피해 달려 나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들판을 몇 시간이고 뛰어다니다 보면 어느 사이 총소리가 귀에서 떨어져 나간 듯이 사라지고 밤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무리를 지어 그의 마음을 달래주곤 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는 옆에서 자던 엉가 엄마가 기절을 할 듯이 놀라서 깨어나 어쩔 줄을 몰라하며 우는 것이 더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이 전쟁의 무섭고도 잔혹한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그의 삶에서 어느 날 복병처럼 나타나서 몇 달씩 괴롭히다가 잠시 가라앉고는 하는 육체와 정신의 병이 되어 버린 것을 어쩌겠는가 그는 이 땅에 있었던 한국전쟁의 상흔으로 많은 이들이 아파하고 핏줄이 갈라져 있지만 자신처럼 기억 속에 파묻힌 총소리가 삶을 이토록 힘들게 하는 것을 누구에게 보상받는단 말인가. 다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하루하루를 견뎌나갈 뿐이었다.

그는 총소리의 환청을 잠시나마 위로받기 위해 선장 장터를 나갔다. 중골에서 걸어서 십여 리가 되는 길이였는데, 선장 장은 온양장에 비해서는 작았지만, 그래도 옛 명성이 있는 장터라서 꽤나 사람들이 붐빌 때도 있었다. 그리고 그 장터에 가면 독립운동을 하던 김노인도 가끔씩은 만날 수도 있었다. 김노인은 선장 장터에서 아주 유명한 인사였다. 일제강점기 1919년 4월 4일 선장 장터에서 2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였다.

방개가 김노인으로 알고 있는 그의 본명은 김천봉이였고, 그는 선장의 오른편에 있는 인주면 도흥리 사람인데, 1919년 3. 1 운동이 발발하자 선장면 선창리의 정수길, 정규희, 둔포면 둔포리의 서몽조, 오상근, 선장면 군덕리의 임천근 등과 함께 독립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였고, 이들은 4월 4일 선장 장터에 모인 주민들에게 만세 시위에 가담하도록 연설하였고, 김천봉이 맨 앞에 나서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고 방개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내가 말여, 곤봉을 휘둘르며 군중 맨 앞에 서서 장터에 모인 사람들을 끌고 4월 4일 오후 3시경에 선장 저기 저 쪽에 있는 헌병주재소에 몰려가서 창문을 때려 부수고 온몸을 불태우듯이 격렬하게 시위를 하다가 일본 헌병 놈들한테 체포가 되었지. 그래서 내가 그 해 1919년 9월 4일에 고등법원에 상고를 했댔어. 뭐라고 했냐면.”

“나의 행위를 조선 민족으로서 정의와 인도에 기초한 의사활동으로 범죄가 아니다.”라고 주장했지. 그런데 말이야 그 일본 놈들이 날 가만히 두겠어. 결국엔 기각이 되어서 내가 옥고를 치렀지 뭐야. 스물 다섯 청춘에 나는 일본 놈들이 나를 감옥에 쳐 넣어서 옥고를 치르면서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겼다네. 청춘이 다 가는 것만 같고 나라는 캄캄했지. 그런데 해방되고 얼마나 됐다고 전쟁까지 터져서 이제는 이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져 이렇게 허리가 끊어져 있으니 나는 밤새도록 잠을 잘 수가 없다네."


방개는 김천봉 노인이 겪은 독립운동이야기에 자신이 겪은 한국전쟁이야기를 버무려서 비빔밥을 만들면 이 장터에 모여서 오늘도 한 날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어떤 삶의 낙이 될까 싶었다. 방개는 검정 고무신이 나달나달 닳은 나머지 밑창에 구멍이 나서 그것을 밤에 이리저리 명주실로 꿰매서 신었는데 그 꿰맨 자리에 실밥이 터지면서 발바닥에는 돌과 모래가 자꾸만 들어와 발바닥과 발가락을 찔러도 선장 장터 모퉁이를 돌고 돌면서 머리에 박힌 총알을 뽑아내듯이 밤새 들렸던 총소리를 지우고 싶었다.

그는 장터 한가운데 있는 서울옥이란 큰 술집에 간판을 올려다보며 중학교 때 배웠던 영어 단어들을 줄줄이 외우기 시작했다. 그에게서 영어 단어는 하나의 지난날의 기억 회로 장치 같았다. 무엇인가 보이다가 퍼뜩 생각이 나면 그 단어는 바로 영어로 이어지면서 입에서는 중학교 때 배운 영어들이 줄줄이 정확한 발음으로 새 나왔다. 그걸 들은 시골에 사람들은 대다수 방개가 영어 공부를 하다가 미친 거는 아니냐는 이상한 소리들도 했다.

이전 09화방개 사촌, 종택이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