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세, 화가 할머니가 내 앞집에 살아요.

내 작업실 이웃들

by 권길주

밤새도록 세찬 비가 내렸다.

올추석에 생전 처음으로 코로나에 걸린 후, 아직도 후유증인지 기침이 심해서

밤에 빗소리와 함께 잠을 잘 못잤다.

노트북은 윗집 작업실에 있고, 핸드폰으로 왓차에서 오래전 영화 '인어공주'를 보다가

간신히 잠이 들었다.

마음이 힘들때면 핸드폰으로라도 영화를 한 편씩 보려고 깔아 놨는데,

요즘은 거의 몇달 동안 보질 못했었다.

우체부와 섬소녀의 사랑이 그래도 풋풋한 영화 같아서 지루했지만 끝까지 다 보고 잤다.

얼마전에 쓰다만 시나리오는 죽기 전에 쓸 수 있을까 싶고, 기독교 문학지에 연재하던

'엔도슈사큐'의 '침묵' 뮤지컬도 마무리를 못해서 계속 연재를 미루고 있다.

내 글에 대한 진정성도 다 깨닫지 못하고 글에 대한 책임감도 없이

브런치 작가까지 됐나 싶다.


하나님께 푹 빠져버린 영화감독이 같이 하자고 콜링한 시나리오는 아버지의 말기암 발견으로

손한번 못데고 포기를 했는데,

그래도 양심상 문학지의 연재 작품으로 2년째 쓰고 있는 뮤지컬은 올해에는 끝을 내야 하는데

이번 겨울호에도 나는 작품 연재를 포기했다.

내년 봄호에는 마무리 해야 하는데 .... 아직도 작품의 해석이 너무 어려워서 내가 지금 무슨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기독교 문학지라서 독자가 얼마 않되니 작품 수준이 너무 낮아도 편집 위원들께서 봐주시는 건가

??

글이던 삶이던 ..... 어느 것 하나

나는 내가 집중하고 몰입하지 못하는 산만한 사람인걸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러니 되는 일도 없고, 안되는 일도 없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서 사는건가 싶기도 해서

밤새 영화 화면을 들여다 보면서도 집중을 잘 못했다.


그러나 나의 이런 산만한 삶의 태도나 진정성이 부족하고 인내가 부족한 내 성격에 비해서

내 주변의 어르신들은 너무나 감동적인 분들이 많다.


그분들의 십분의 일만 닮아도 내가 좀 더 어른처럼 살 수 있을텐데.

그리고 나도 남들처럼 책임감 있게 살 수 있을텐데.

난 인내가 너무 어렵고 , 꾸준함이 참 힘든 사람인거 같다.

아버지는 암말기임에도 가을 농사를 다 지었다.

서리태 콩도 털고, 노란 콩도 털고, 벼도 다 털었고,

벌써 가을 김장 준비를 하시느라 마늘도 엄청난 양을 다 까서

빻아서 냉장고에 재워 두셨다.

오늘은 김장에 써야 할 새우젓을 사러 온양의 재래시장을 혼자 나가셨다.


뼈에 까지 암이 전이 됐음에도 아직은 멀쩡하게 걸어다니시고

그 힘든 가을 농사를 다 끝내셨으니 기적이 따로 없고

아프시다고 안하시니 이 또한 기적이리라.


그런데 내 작업실 앞에 사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는 우리 부모님과는 전혀 다르게 사신다.

두분은 서울에서 사시다가 5년전에 우리 마을에 이사를 오셨다.

그리고 지금의 내 작업실 바로 앞에 전원주택 하나를 사셨는데,

이사를 와서 처음에는 무척이나 고생을 하셨다고 한다.


가로등하나 없는 야산에 집이라고는 화가 할머니 집 밖에는 없었으니

얼마나 무섭고 외로우셨을까....

더구나 이사와서 얼마 않되어 코로나까지 터져버렸으니

시골에서도 어르신들은 밖에도 잘 나가지도 않았고,

경로당도 문을 닫아 버리니

온 동네가 도회지나 마찬가지로 폐쇠된 시골 생활의 감옥이 되었으리라.


그래서 화가 할머니는 처음에는 우울증이 왔었다고 한다.

이웃들도 다 생소한데가 코로나가 겹치니 시골에 와서 낭만적으로 살아보려 했던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너무 외로우셨다고 한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천안까지 차를 몰로 직장을 나가시다 보니

하루 종일 야산의 전원주택에서 혼자 지내셔야만 했다고 한다.


그러나 할머니는 원래도 서울에서 그림을 그리시던 (당신의 말로는 아마추어라고 )라고 겸손해 하시지만,

그림에 대해 별다른 식견이 없는 내가 봐도 그 정도면 수준급이시다.


화가 할머니는 코로나와 전원생활의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코로나 기간 내내

그림에 더 열중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올 해부터는 천안의 직장을 정리하시고 부터는

이제는 내내 두분이 함께 계시는데,

할아버지는 취미로 하루 종일 텃밭을 가꾸시는 편이다.


그리고 우리 동네에서 제일 정원을 잘 가꾸시는 분이 할아버지다.

봄부터 사계절 내내 온 갖 꽃들이 만발하는 정원을 어찌나 잘 가꾸어 놓으셨는지

나는 내 작업실에서 앞집에 화가 할머니님 댁 정원을 바라만 보아도

하루 종일 꽃을 구경하면서 지낼 수가 있다.


중풍으로 주로 누워서만 생활하는 우리 엄마도 그림 그리는 것은 좋아하지만,

엄마의 그림은 초보들이 그리는 색칠하기 정도다

그래도 나는 엄마가 가끔씩은 색깔 칠하기를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 엄마도 그림을 일찍 부터 배웠으면 수준급은 되었겠구나 하고 아쉬워한다.


화가 할머님 댁에 오전에 떡을 가지고 갔더니 들어와서 차 한잔 하고 가라고 해서

잠깐 들어가 커피를 마시고 브런치에 할머니 그림 사진 올리고 싶다고 했더니

화가 할머니가 그림을 내주며 사진을 찍으라고 허락을 해주셨다.


내가 부모님의 병치레로 힘이 들어서 거의 시체처럼 작업실을 오르내리던

올 여름 , 나는 나의 삶이 지옥의 한철처럼 괴로웠다.

그때 마다 내가 화가 할머니의 정원을 지나갈 때면 할머니는 늘 나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다.


"하나님이 아무래도 부모님 돌보라고 세종에서 이 산속으로 땡겨오신거 같애.

큰 딸 없었으면 지금 아버지가 얼마나 힘드셨겠어."

그럼 나는 말했다.

"아휴 말도 마세요, 엄마 아프신지 4년이 됐는데,

세종에서 엄마 모시고 학원도 했는데, 엄마가 거기서 안사신다고 해서

주말이면 택시 타고 세종에서 아산까지 다녔는데... 학원도 코로나에 망하고

아버지가 말기암이라니

저는 어떻해요, 글은 또 언제 쓸지도 모르겠어요 ㅠㅠ

사는게 왜 이런건지 ...죽을 지경이예요. "


화가 할머님께 죄송하다고 말씀 드리고 싶다.

너무 투털대기만 하고 다녀서 죄송하다고.....

어르신도 여기서 얼마나 외롭고 힘든 외로움과 고통에 시간을 보내시면서

그림을 한 점 한 점 마무리 하셨을지..... 모르는데

이 외진 산속에서 그 진귀한 작품을 이루시느라 얼마나 고생하셨느냐고

위로 한번 해 드리지 못하고 모시고 나가서 차 한잔 대접도 못하고

오늘 나는 화가 할머님의 그림만 사진을 찍어 왔다.


화가 할머님의 그림을 보니 밤새 도록 추적거리고 내리던 내 마음의 비도 조금은

달래지고, 겨울이 오는 골목에서 그 나마 마음에 온기가 전해져 온다.


그리고 오늘도 비가 뿌리는 밤새 중풍을 가끔씩 혼자 말을 하시는 (의학용어 :선몽) 엄마와

갈비뼈에 파스를 붙이고 주무시는 아버지 곁에서 잠자리를 살피며

내일도 모레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떤 글을 써야 하는지도 모른채

브런치 작가로 오늘 밤도 이 글을 쓰는 것으로 나를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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