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5년전에 방송작가를 내려놓고 기독교 소설가로 등단한지 6년이 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첫 장편소설집을 내지 못하고 전전긍긍거리며 있다. 평범하지 않은 장르의 글을 소설로 쓴다는 것도 어려웠지만, 소설은 시와는 사뭇 다르게 점점 나이가 먹어가는 나에게 그리고 일정한 직업도 없이 글만 쓰기에는 경제적으로 체력적으로 점점 지쳐가는 나를 발견한다.
잃어버린 것과 다시 찾아야 할 것들 사이에서 좌충우돌하는 나의 모습. 그 모습은 도시생활에 길들여진 내가 소설을 쓰겠다고 전원주택을 얻어서 고향마루에 짐을 풀고 8개월 동안 장편소설을 겨우 30장 정도 쓴 결과물이 이 모든 것을 드러내는 것 같다.
물론 글에 집중하지 못하는 데는 늙고 병드신 부모님의 병시중이 한몫을 한다. 중풍으로 3년 전에 쓰러지신 엄마와 말기암이신 아버지 사이에서 내가 글만 편하게 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농사를 지으시던 아버지의 말기암 발견은 내게는 과도한 출혈을 한 환자가 기를 쓰고 생명을 붙잡아야 하는 것처럼 기진맥진하는 일이 허다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하루 세끼 환자의 식사뿐 아니라 가끔씩은 밭에서 깨도 털어야 하고 고추도 따아야 하는 일까지 추가할 때가 있으니 나는 시골에 들어와서 3개월이 지나면서 부터는 시골 생활 자체가 감옥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하다시피 하는 육체적인 노동의 피곤함도 힘이 들었지만, 나 혼자서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시간이 거의 없이 늘 가족들과 부딪치는 시간이 많은 것이 나를 무척이나 힘들게 했다.
그리고 갑자기 발견된 아버지지의 말기암은 온 가족이 망연자실한 상황이 되기도 했기에
나는 눈물을 보이지 않고 이 모든 현실에서 내가 할 일에 대해서 견딜 수밖에 없었지만,
견딜 수 없는 날들엔 택시를 잡어타고 무조건 인근의 카페로 노트북을 들고 달려나갔다.
그곳에서 혼자서 커피를 시켜놓고 노트북을 부팅시키면 무엇을 써야 한다기 보다는 그냥 멍때리기를 하면서 작가라는 폼을 잡는 아주 어색하고 이상한 시츄에이션 배우가 되어 있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가족들 앞에서 보이기 싫은 어떤 모습들이 타인들 속에 섞이어서 나를 나 혼자만 작가인양 착각으로 살아가는 어색한 시골뜨기 작가로 쓰다만 장편 소설을 끄적이고 올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내가 월세를 얻은 전원주택 단지 안에는 화가가 두 분이나 사신다는 것이다.
한분은 80세가 넘은 할머니 화가시고, 한분은 50대 초반의 의상디자이너며 여류화가시다.
우리는 가끔씩 얼굴이 마주치면 서로가 예술가라는 긍지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티를 조금은 낸다. 그렇지 않으면 그 달리 유명하지 않은 우리를 이 시골에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젊은 날에 방송작가였던, 시인이였던, 서울에서 유명한 의상디자이너였던, 또 서울에서 잘 살던 화가였던 이 심심산골에서는 아무도 그런걸 알아주지는 않는다.
시골에서는 텃밭에 상추 심고 가지심고 오이를 심어서 반찬을 해먹거나 느린 걸음으로 산책을 다녀도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 시골길을 혼자서 걷거나 아니면 늙은 남편의 손을 잡고 가는 할머니들 밖에는 없으니 누가 누구랑 경쟁을 할 일도 없고, 유명한 사람이 산다 한들 그달리 관심도 없는 것이 시골 생활이다.
글이 돈이 되어야만 했던 젊은 날의 방송작가 시절 나는 먹고 살겠다고 시를 외면했다.
그러나 그 먹고 살기가 나에게 남겨 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다 못해 지금까지 집한채도 없으니 말이다.
그런 큰 딸을 보고 30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나에게 아버지는 집을 지어주겠다고 공사를 시작하던 첫날에 덤프트럭을 타려고 논뚝에서 수로로 떨어져 대형사고까지 나고 말았으니 ..... 나는 지지리도 복이 없는 인간인가 하는 한탄으로 하룻밤을 꼬박 눈물로 밤을 새웠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아서 아버지는 전립선 말기암 판정을 받았고 뼈까지 암이 다 퍼져버린 상태가 된 것을 가족들은 알게 되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불행의 연속이 사람을 짖누르는 것이 무엇인가 싶을 정도로 힘겨운 봄과 여름이 갔다.
그러나 불행을 이기는 것은 사랑밖에 없으리라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매일 하루에 열가지 이상의 음식을 준비하고 부모님의 세끼 식사를 챙기고, 그리고 나는 무너지는 나를 다 잡기 위해 월세로 얻어 논 전원주택의 빈 방문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물론 아버지 집에서 지쳐서 겨우 낮잠을 한 숨 자거나 아니면 유튜브로 설교를 듣고는 기도도 못한채로 다시 저녁을 준비하러 아버지 집으로 가는 날들이 허다했다.
그렇게 봄도 가고 여름도 갔다.
그러다 오늘 나는 코스모스가 지천으로 피어있는 야산을 돌아서 내 정겨운 작업실이 있는 전원주택 뜰을 밟으며 어느 사이 가을이구나. 다시 글을 써야지.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작업실의 문을 열고 들어와 현관 앞에 놓인 책꽃이에서 너무 오래되서 낡아빠진
내 첫 시집을 아주 아주 오랜만에 꺼내들었다.
그리고 한 시간 가량 내 오래 묵은 첫 시집에 시를 한 편 씩 읽다가 시를 다시 써야 겠구나.... 하고 우선 내 시를 한 편 베끼기로 했다.
그리고 올 가을과 겨울에는 내가 사랑했던 시인들의 시집을 베껴 보기로 했다. 윤동주, 정지용, 박목월, 라이너 마리아 릴케, 백석, 김수영, 로버트 프로스트, 이상화, 등등 주옥 같은 시를 써온 시인들의 시집에서 내 무디어진 감성과 지성의 펜촉을 다시 갈아봐야겠다.
그러다 보면 갑작스레 찾아왔던 불행도 떠나고 시를 쓸 수 있는 인생의 새 지평도 열릴 것 같다.
너무 좋을 것도 너무 나쁠 것도 없는 것이 인생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인생은 시의 행간처럼 그렇게 짧지만 잠깐씩 쉬었다 갈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세상 어디에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비한 존재로 우리는 살아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루에 열가지 정도의 반찬을 해대던 여름도 가니 아버지의 말기암도 무척 많이 호전이 되어서 지난 주에는 병원에 가서 아주 반가운 소식을 듣고 왔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