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사랑이라는 기억의 필름을 풀었다.
엉가는 딸 조앤이 죽은 후, 한 번도 극장엘 간 적이 없었다.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간 적도 없고 친구를 만난 적도 없이 혼자서 방개 아저씨 뒤만 따라다니며 '에덴 농장'안에서 그녀는 사계절을 보냈었다. 스무 살짜리 딸이 죽었다는 것이 그것도 자신이 오 년 동안은 방개 아저씨 집에 고아처럼 버리고 떠났던 딸이 죽었다는 것은 언제나 그 아이 대신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을 숨죽인 채 살아야 하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살아 있지만, 어쩌면 죽은 자처럼 그렇게 살았는지도 몰랐다.
아침마다 조앤의 무덤가에 홀로 가노라면 엉가는 아침해가 떠오르는 것에 감사하면서도 그날 하루를 또 조앤의 심장과 같은 과수원의 흙을 만지지 않으면 가슴 한쪽이 휑하니 아파왔다. 과수원에서 풀을 뽑다가 또는 조앤과 살던 정원에서 조앤과 함께 심었던 노란 수선화나 연못가의 보랏빛 벚꽃이나 담장가에 커다란 해바라기아래에 흙을 돋아 주는 일은 그녀가 살아가는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였었다. 정원의 꽃밭에 있는 흙은 더더욱 조앤의 심장처럼 느껴져서 그녀는 해가 지는 저녁이면 밤이 어둑해질 때까지 집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꽃들이 내쉬는 숨소리와 흙냄새를 맡으며 거기에 그렇게 오랫동안 앉아서 풀을 맸었다.
그런 엉가에게 기환은 온양 시내에 가서 영화를 보자고 했던 것인데, 그날 처음으로 엉가는 외출이란 것을 한 것이었다. 엉가는 기환에게 어떤 큰 감정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내려오고 나서 방개 아저씨와 자신만 살고 있던 '에덴 농장'에 이상한 활력소가 생긴 것은 사실이었다. 가끔씩 서울에서 유명한 영화배우나 스태프들도 기환을 찾아오기도 하고 그러한 소문들은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굉장한 뉴스거리나 호기심거리가 돼서 어쩌다 근처의 여학교에 예쁜 여고생들이 찾아오기도 하고 인근의 유명인사들도 일부러 박감독을 찾아왔노라며 과수원 입구에 있는 엉가의 집 초인종을 누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엉가에게는 싫다거나 거부감을 주기보다는 세상 사람들과 다시 섞여서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음의 문이 열린 것이었다.
엉가는 조앤을 낳은 후, 그 사랑이 처참히 무너져가던 미국에서부터 마음 한쪽은 늘 상처와 두려움으로 닫혀가고 있는 자신을 알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 문이 서서히 기환이란 한 사람의 존재가 '에덴 농장'에 작업실을 지으면서 열리고 있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엉가의 마음도 어느덧 기환에게 자연스럽게 열려있었던 것이었다.
박감독은 영화를 보면서도 호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뭔가를 메모를 했다. 감독이라서 그런가 보다 하고 엉가는 박감독의 옆모습을 슬쩍하고 한두 번 훔쳐봤다. 의외로 그는 어둠 속에서도 예리한 눈빛을 하고 몰입이 강한 표정을 짓고 영화를 보고 있었는데, 그런 박감독은 본래 가지고 있는 균형 잡힌 잘생긴 얼굴이라기보다는 예술적인 기질이 강해 보이는 오뚝한 코가 날카로워 보일 지경이었다. 엉가는 박감독의 새로운 모습에 자신이 이전에 뉴욕에서 의상디자이너로 출세와 성공에 목말라했던 유학생시절의 꿈이 되살아 나는 것만 같았다. 어떤 일이든 탑을 일군 사람들의 진취적이고 강한 의지가 뜻밖에 박감독의 예리한 눈빛과 오뚝한 코에 살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은 영화를 보고 박감독이 모는 차를 타고 대천바다를 향했다. 엉가는 박감독이 모는 차 안을 눈부시게 비추는 오월의 햇살에 눈물이 쏟아졌다. 엉가는 분명히 생각했다. 지금 눈물이 흐르는 것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 눈물을 박감독에게 들켰을 때 그녀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운전석에 있는 그의 가슴에 쏟아버리고 말았다. 조앤이 아프면서부터 단 한 번도 누구에게도 그녀는 자신의 눈물을 비치고 싶지 않았었다. 자신의 죄가 낳은 비극을 누구에게도 털어놓고 싶지 않았던 것인데, 엉가는 조앤을 가슴에 품고 산 이십 년과 그리고 그 딸과의 영원한 결별을 하고 몇 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그녀는 박감독이란 한 남자의 품에서 숨겨진 자신의 절절한 눈물을 쏟아 내고야 만 것이었다.
대천바다의 저녁 노을이 바다를 향하여 서서히 잠겨 들때까지 박감독과 엉가는 어깨를 기대고 홍조를 띤 먼 바다의 슬프지만 아름다운 볼을 서로의 상처처럼 어루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