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개 아저씨 2부.

22화. 상실의 내면

by 권길주




기환의 만든 영화 '방개 아저씨'는 크게 대박을 치지는 못했지만, 300만 명이 넘는 관객수로 그래도 흥행을 한 편이 되었다. 기환은 영화촬영이 끝나고부터는 아예 방개 아저씨가 사는 아산의 과수원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는 영화가 극장에서 막을 다 내린 뒤에는 과수원의 맨 끄트머리에 오두막을 하나 지었다. 그는 이제 서울에서의 모든 생활을 다 접고 방개 아저씨와 평생을 함께 살기로 한 것이었다. 오두막집에서 영화 작업도 틈틈이 하면서 그는 방개 아저씨의 과수원 일을 돕기로 했다. 농사를 지을 줄을 모르지만 방개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그는 과수원의 땅도 파고 과수원에서 해야 할 허드렛일을 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에게는 그것이 아내를 잃고 세상을 떠돌았던 십여 년 동안 가장 하고 싶은 일이기도 했었기에 그는 마음을 굳힌 것이었다.

방개는 자신의 곁에서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했던 오갈 데 없던 청년들이 다 결혼을 하고 직장을 잡아서 외지로 떠나고 엉가와 둘이서만 과수원을 일구어오던 중 기환이 내려온다는 말에 처음엔 그가 농사는 짓지 못해도 자신의 곁에서 함께 있어 준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했다. 이제는 방개도 일흔이 넘어서 노구였기에 농사도 힘에 부치고 삶도 지쳐있었기에 그는 자신의 곁에 누군가 머물러 주는 것만으로 마음이 놓였던 것이다. 그러나 기환이 방개 아저씨의 곁에 오게 한 결정적인 이끌림이 무엇이었는지 방개 아저씨는 그가 와서 오두막집을 다 지을 때 까지도 몰랐었다. 기환의 집은 오두막이긴 하지만 그가 영화감독으로 작업을 하기 위해 지은 집이라서 다른 집들과는 약간 다른 구조들이 있었다. 집은 극장처럼 영화를 볼 수 있는 지하에 영화실이 음향시스템을 잘 갖춘 것이 특색이었고, 위층은 온통 서재로 둘러싼 원룸 형태의 지하를 판 일층 구조의 오두막이었고, 겉은

작은 한옥식으로 지어져 있지만, 내부는 영화감독의 작업실 다뤘다. 그리고 집 뒤에는 대숲이 있어서 서재의 창문을 열면 대나무 숲에서 나는 소리가 참 싱그러웠다. 더구나 앞마당 전체가 방개 아저씨가 가꿔놓은 만여평의 과수원이다 보니 사계절이 다 그림처럼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오두막에 자신의 작업실을 다 완성한 기환은 친분이 있는 영화배우 몇 사람과 방개 아저씨, 엉가, 철희, 곽집사, 그리고 방개 아저씨와 이웃으로 아직도 살고 있는 덕구 아저씨네를 불렀다. 그러나 기환이 그날 어떤 미모가 뛰어난 영화배우들보다 눈여겨본 또 다른 아름다움에 매력을 가진 여자를 눈여겨보고 있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들 중에 아무도 없었다. 그 여자는 바로 엉가였다. 사십이 넘은 엉가는 얼굴도 이제는 촌에 사는 여자처럼 까무잡잡하게 타고 몸은 적당히 살이 찐 정도의 몸매였지만, 엉가의 표정에서 나오는 무언의 표정에서 그는 깊은 슬픔이 배어 나오는 한 여자의 상실한 자의 내면을 읽어 버린 것이었다. 젊은 날 사랑을 잃고 또 자식을 잃은 한 여자의 내면이 왜 이리도 그의 가슴에 파고드는지 그는 알 길이 없이 그 감정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그것은 십여 년의 방황의 세월을 보내고 기환이 오랜만에 방개 아저씨를 찾아 아산에 과수원을 처음 찾던 날부터 시작된 감정이었다. 어쩌면 박감독은 그 감정에 휩싸여 자신도 모르게 '방개 아저씨' 영화가 끝나자마자, 자신의 서울집을 정리하고 이곳으로 내려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엉가를 처음 본 것이 엉가 엄마가 서천 방개아저씨 집에서 죽었을 때였다. 그때 엉가는 아주 어린 소녀처럼 보였었다. 여학생이던 엉가, 그리고 그 후, 온양시내에 방개아저씨의 집에서 본 엉가는 여대생 엉가였다. 그리고 그는 엉가의 소식을 어쩌다 방개 아저씨에게 들으며 가슴에 안타까움만 있었는데, 엉가는 잘못된 사랑으로 미혼모가 되었었고, 그리고 그 아이는 심장병에 걸렸었고, 그리고 아이가 스무 살에 죽었다는 것은 기환이 외국에서 돌아와서야 알게 되었고, 그가 본 엉가는 이제 여대생이 아닌 마흔을 넘긴 중년의 여자였다.

하지만 엉가는 아직도 서른댓쯤 되어 보이는 처녀 같기도 하고 어느 때는 아이를 서너 명은 기른 억순이 같은 엄마로도 보였다. 한 아이를 저 세상에 보내기까지 그녀가 겪은 고통이 그의 가슴 저 밑바닥에 누가 건드리면 터질 듯 그녀의 슬픔은 몽오리 져있었다.

기환은 가슴은 그의 아내 차향숙이 떠나고 한 번도 두근거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는 촌부가 되어서 과수원에서 방개 아저씨나 돕는 엉가를 보면 두근거렸다. 그는 생각했다. 자신의 뒤늦게 사랑이란 감정이 생겨도 되는지.... 그러나 그는 그 감정에 솔직하게 반응하는 쪽으로 자신의 발걸음을 옮기기로 하고 방개 아저씨의 과수원에 자신의 작업실을 옮긴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그런 속내를 아는 사람은 그날의 집들이 손님 중에 아무도 아는 사람들이 없었다. 다만 그는 철희의 지고지순하고 오래된 사랑에 자신이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자신의 감정을 숨겨야만 했다. 그렇치만 엉가에게 자신의 사랑을 감춘다는 것은 바보짓이라고 생각을 했기에 그는 집들이가 끝나고 엉가에게 영화를 보러 시내에 나가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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