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케냐로 간 여자

ㅡ 중편소설

by 권길주

소설가 권 길 주

1. 아프리카의 태양

은희가 본 아프리카의 태양빛은 그동안 서울에서 보았던 태양빛과는 사뭇 달랐다. 그 태양 아래에서는 눈부신 것들이 다 사라질 만큼 뜨거운 빛의 세례라고나 할까.

태양의 강렬한 느낌이 너무 커서 그런지 한 낮에는 그 태양보다 눈부신 것은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사람의 욕망이나 커다란 꿈조차도 그 태양 아래에 서면 초라하게 시들어 버릴 것 같은 무더위였다. 또 다른 한 쪽으로는 죽음처럼 어두웠던 자신의 마음 한편을 향해 몇 천 볼트의 강력한 전압을 가지고 하늘에서 자신을 향해 전등불빛이 쏟아져 내리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그 태양빛 아래를 걸어 다닐 때면 몇 천 볼트의 전압에 의해 밝혀진 전등불빛 속에서 서른일 곱 해 동안 숨겨 놓았던 자신의 비밀한 이야기들이 하나하나 문을 열면서 황량한 아프리카의 사막을 향해 낙타처럼 서서히 걸어 나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한편으로는 빛과 어둠이 공존해 있던 마음의 끝자락 에서 모락모락 봄날의 아지랑이 같은 것이 피어올라서 정신이 혼미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몇 달 동안 그녀는 한 낮에 태양빛을 바라보는 일이 힘들게만 느껴졌었다. 너무 강렬한 태양 때문에 은희는 아프리카를 여행하다 말고 다시 유럽으로 넘어가 그 곳에서 쉬다가 다시 아프리카로 들어오기도 했다. 거의 일 년 가까이 여행을 하고 있는 상태였지만, 목적이 없는 여행 이였기에 시간은 늘 어디서나 충분했다.

자신 안에 있는 어떤 묶임들이 태양빛 아래서 뜨겁게 달궈진 모래알처럼 모든 것이 흩어지고 부서지고 하였다. 그랬다. 사막에 모래처럼

은희는 그냥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부터 여행을 시작하면서 킬리만자로를 등정했고, 나미브 사막을 지나 토착 원주민들이 사는 마을을 지났고, 탄자니아의 옛 수도였던 잔지바르 섬을 돌아 나왔다. 탄자니아를 구석구석 다니다 보니 어느 사이 한 달여 시간이 지났다.

은희는 탄자니아에서의 마지막 여행을 빅토리아 폭포로 잡았다. 폭포는 정말 하늘의 문을 열고 있는 거대한 수문과 같았다.

하늘의 거대한 천정위에 감추어 둔 하늘의 높은 수문이 한꺼번에 수 천 개가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는 듯했다. 또 그 하늘 문이 열리고 닫혀 질 때마다 우레와 천둥이 치는 소리가 폭포를 둘러싼 천지를 진동시키며 끝없이 울려 퍼졌다.


하늘의 나팔소리처럼 무겁고 웅장한 그 소리는 하늘과 땅의 사이에 인간이 표현 할 수 없는 자연의 신비한 소리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사람은 할 수 없는 한계의 소리가 그 폭포 위에서 분초도 쉬지 않고 떨어져 내리며 광활한 대자연의 곡조에 힘을 실어 주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빅토리아 폭포 앞에서는 지치고 무거웠던 발걸음도 어느 사이 사슴이 높은 곳을 오르듯이 폭포 주변을 가볍게 거닐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폭포에서 흘러내리는 끝없는 물의 세례는 그동안 아프리카 여행에서 그토록 눈이 부셨던 태양빛의 빛의 세례와 또 다른 감격으로 다가 왔다.

빅토리아 폭포는 ‘모시 오아 투니아’ 라는 원주민의 말로는 ‘천둥치는 연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스코틀랜드의 탐험가 ‘리빙스턴’이 발견했다는 폭포였다.

은희는 그 빅토리아 폭포 앞에서 자신의 씻겨 지지 않은 얼굴을 본 듯이 오롯이 자신만의 모습을 발견하고 서 있었다. 하늘에서 천둥을 치는 듯한 강력한 물소리가 빅토리아 폭포의 계곡에 떨어지는 것을 들으며 은희는 자신이 아직도 듣지 못한 내면의 강력한 소리를 자신에게 듣고 싶었다.

그것은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처럼 자신에게 무엇인가가 확실하게 들려오길 바랐던

지난날의 가슴 답답했던 모든 것이 한꺼번에 그 폭포 소리와 함께 자신의 마음속에 울려오길 바랐다. 그래서 은희는 빅토리아 폭포 근처에 수일을 머물며 눈을 뜨면 폭포 앞으로 가고 또 가 보았다.

‘ 넌 내게 지금 무슨 소리를 들려주고 싶은 거니 제발 말을 해다오’

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수일을 그 폭포가 쏟아져 내려오는 협곡을 바라보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어떤 강력한 내면의 소리도 그녀는 그곳에서도 들을 수가 없었다. 다만 은희가 빅토리아 폭포 앞에서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우레와 같은 물소리뿐이었다.

은희는 빅토리아 폭포 앞에서 자신에게 들려오는 어떤 소리도 듣지 못하고 그저 우레와 같은 물소리에 가슴을 쓸어내리다 아프리카 케냐로 발길을 돌렸다. 유럽으로 가려던 발길을 돌린 곳은 이상하게 아프리카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였다.

그녀는 그곳에서 자신의 또 다른 삶의 짧지 않은 여정이 준비되어 있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빅토리아 폭포를 떠나 나이로 비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그것은 아프리카를 여행한지 거의 1년이 다가올 즈음 이였다.

은희는 작열하는 정오의 태양빛 아래서 서서히 잠을 깼다. 그녀는 찬물을 한 잔 마시고 눈을 부비며 일어나서 호텔 욕실의 샤워기 앞에 가 섰다. 은희는 얇은 원피스를 벗으며 또 생각을 했다.

아프리카 ! 왜 내가 아프리카에 왔지........그것도 케냐에 ...

그건 은희가 처음 예상 했던 여행과는 전혀 다른 행로가 된 셈 이였다. 어딘가를 가기로 정하면 그 정한 곳 외에는 잘 다니지 못하던 그녀는 유럽 여행을 계획했던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아프리카로 방향 전환을 하는 데는 아주 단순한 생각이 있었던 것 뿐 이다. 그 단순한 생각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뜨거운 태양빛을 경험하고 싶다는 생각이 어느 날 세계 여행 지도를 펼쳐 놓고 여행을 짜는 은희의 머리위로 스쳐 지났을 뿐이다.

소용돌이치는 듯한 태양 빛이 분명 아프리카 어딘가에는 있을 것만 같았다. 그 빛의 소용돌이를 만나면 분명 자신을 묶었던 어떤 어둠들이 송두리째 타버릴 것만 같았고, 그 어둠의 끈이 풀어져 나가면서 강력한 힘을 가졌던 자신안의 어둠의 강한 어떤 끈들이 맥없이 풀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또 그 강한 태양 아래 서면 7년 이란 시간동안 너무나 비어버린 자아의 상실 안으로 한 줄기 뜨거운 물줄기가 살아서 돌아 올 것만 같은 생각들도 아프리카 여행의 길을 잡게 해 주는 동기가 되어주었다.

한국에 들어 온지 지난 7년 이란 시간 동안 은희는 자기가 좋아하거나, 하고 싶은 일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지냈다. 수녀처럼 어쩌면 면벽하는 수도승처럼 그냥 벽만 바라보고 살아온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 이유는 중풍으로 쓰러진 새 엄마의 병치레를 위해 그 긴 시간을 침대에서 한 쪽 벽을 향해 누워 있는 새 엄마의 무거운 등 뒤만 쳐다보고 지냈기 때문 이였다.

병든 새 엄마도, 자신도 ...... 그들은 서로의 벽을 향해서 한 사람은 죽음을 기다리고, 한 사람은 또 다른 인생을 기다리며 차가운 벽돌처럼 각자 자기의 벽을 향해서 7년이란 세월을 보냈다.

새 엄마는 7년 이란 시간을 병들어 누워 있다가 작년 가을에 떠나셨고, 은희는 새 엄마의 장례를 마치고, 인생의 새로운 길을 떠나기 위한 여행 가방을 챙겼다. 그 길의 끝에는 자신이 가야할 화가로써의 길이 분명히 있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고, 그림 속에 자신을 집어넣기 위해서는 자기 스스로 어떤 곳인가에서 새로운 정박을 해야 함을 그녀는 스스로 깨닫고 있었다. 십년이나 떠나 있었던 집과 나라를 벗어나 새로운 집과 타국이란 먼 곳을 향해서 그녀는 자신이 가야 하는 곳이 있음을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은희는 여행의 처음 시작에는 자신이 처음 입학했던 프랑스 파리의 미술 대학 근처에 초라한 아파트를 하나 얻어서 그림을 그릴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7년씩이나 붓을 놓았었으니.......... 스무 살에 파리로 유학을 떠나서 그때 입학했던 미대 근처에 가서 살면서 잃어버린 감성을 다시 찾고 싶기도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은희는 갑자기 아프리카의 그 강렬한 태양 아래를 걷고 싶었다. 여행을 시작한 이후, 어느 덧 일 년 이란 시간이 흘렀고, 그녀는 강렬한 태양 볕을 쪼이면서 아프리카의 구석구석을 무수히 걸어 다녔다. 아무런 목적지도 없이 , 때로는 아무도 모른 곳을 찾아서 아프리카 땅을 밟고 다녔다. 너무 덥고, 너무나 지치는 걸음 이였지만,

그 긴 걸음걸음의 여정 속에서 은희는 태양이 주는 밝은 빛을 좋아하게 되었고, 배고프고 가난한 이들의 슬프고 지친 얼굴과 눈빛을 수도 없이 보았다.

그 초라하고 가녀린 모습 속에는 인간이라고 하기 에는 너무나 가혹한 삶의 풍경들이 무수히 펼쳐져 있어서..... 은희는 그런 모습들이 보기 힘들어서 일부러 그런 곳을 피해 다니기도 했다. 자신의 삶속에서는 단 한 번도 보기 힘들었던, 비참한 모습들에 알 수 없는 분노와 격한 마음이 일 때가 있어서 그걸 다스리기도 무척 지치는 일이였다.

그래서 그녀는 오직 내가 이 아프리카 여행을 하는 것은 저들의 가난하고 비참한 사회상을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 내 안에 어두운 빛을 이토록 뜨거운 태양 아래서 자신을 한 번쯤 잘 조명하면서 들여다보는 것으로 만족하자..........하며 오히려 그 속에 들어가서 더 잘 먹고, 때로는 풍족한 지갑을 열고 그 나라에서 최고급 호텔에서 잠을 자면서 자신을 위로하고 스스로를 위안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은희는 7년 동안 잊어버렸던 그림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 프랑스로 날아간 적도 있었다. 은희가 아프리카 여행 중에 잠시 갔다 온 곳은 프랑스 지방도시중 ‘아를’ 이란 곳이 있었다. 은희는 그곳에서 옛 추억에 사로잡혀 일주일을 머물렀다. ‘아를’은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그 지방에 쏟아지는 밝은 태양빛을 사랑해서 그곳에서 그림을 그렸던 장소였다. ‘아를’은 그래서 반 고흐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면 대다수가 아는 프랑스의 지방도시지만 은희에게는 자신 좋아한 화가에 대한 동경이 담겨 있는 여행지였다. 은희는 스무 살에 프랑스 파리에 있는 미술대학에 유학을 갔었다. 그때 그녀가 가장 좋아한 화가가 빈센트 반 고흐였다.

은희는 프랑스에 있을 때 반 고흐가 마지막 생애를 마치기까지 가장 많은 그림을 그리고 살았던 프랑스의 아를에 자주 가 보았었다. 어두웠던 반 고흐의 마음과 마지막 생애를 비춰주던 그 밝은 태양빛을 보러 가기 위해서였다. 네덜란드의 브라반트 북쪽의 작은 마을에서 목사의 아들로 출생 하여 성직자의 길을 열망 했던 반 고흐. 그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최하층의 생활을 직접 체험하기

위하여 오두막집에서 지낸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왜 서른일곱에 밝은 태양이 가득한 그 아름다운 프랑스 아를에서 권총 자살을 했을까? 그것도 밝은 태양에 감격해서 미친 듯이 2년여 동안 2000 여점의 그림을 그리던 열광적인 상태에서 그렸다는데..... 은희는 반 고흐의 그림을 볼 때마다 그가 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 신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많이 사랑하는 것이다”

인간이 신의 영역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런데 반 고흐는 어떤 계시로 신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 신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많이 사랑하는 것” 이란 진실을 깨닫게 되었을까? 그리고도 그는 왜 성직자의 길을 갈망하다 말고 화가로 변모해서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모든 것을 두고 자살을 했을까? 자살을 한 고흐의 사랑은 신과는 또 어떤 관계였으며, 그 신과 어떤 사랑을 나눴던 사람 이였을까? 은희는 그의 그림을 볼 때 마다 이런 저런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던 시기가 바로 대학 시절 이였다. 반 고흐는 지금은 오히려 ‘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한 화가’라는 평을 받기도 한다고 하는데...... 성직자가 되려고 몸부림을 치던 고흐는 누구를 무엇을 사랑하면서 살다가 간 사람일까?

그리고 그의 마지막 선택은 왜 또 신이 또 가장 싫어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죽음을 선택 했을까? 그리고 그가 사랑한 그림엔 그의 어떤 사랑의 절정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지금까지 그걸 밝혀낸 사람은 과연 있을까?

한 사람의 위대한 화가가 사랑했던 모든 것이 들어 있는 저 많은 그림 속에서 사람들은 그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알아냈다고 할 수 있을까? 은희는 늘 화가들의 그림을 볼 때마다 가졌던 생각들을 고흐의 작품을 보면서도 많이 하곤 했다. 이십대 후반이 돼서 은희는 그림을 그리며 혼자서 고흐라는 화가, 그의 그림, 그리고 그의 생애를 조금은 객관적으로 들여 다 보는 눈이 조금은 생겼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 중 ‘수프 배급소’(1883년 작) 같은 초기 판화작품에서 그는 가난한 이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행위 자체에도 엄숙한 종교적 신성함을 드러냈다고 하는데.........

과연 가난한 이들의 식사조차도 엄숙하게 종교적 신성함을 나타낸 그가 왜 자신의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회의는 그렇게 허무하게 끝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은희는 그가 그린 ‘수프 배급소’가 그래서 또 더 감동적으로 다가 오기도 했다.

사랑의 행위로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반 고흐는 자신이 사랑했던 매춘부 여자에게

귀를 잘라주고 스스로 정신 병원에 입원했다고 하는데, 그가 정신병원에서 그린 그림 ‘별이 빛나는 밤’은 은희의 책상 앞에 늘 걸려 있었다.

이십대의 은희는 가끔씩 반 고흐에 ‘별이 빛나는 밤’에를 보면서 이런 생각도 했었다. 신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럼 내가 아닌 타인을 많이......사랑하는 것이란 것을 고흐는 어떻게 알았을까? 그래서 창녀라고 할지라도 .... 고흐에게는 타인을 죽도록 사랑하는 남다른 열정이 있었던 것일까? 그 열정을 남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다 해도... 고흐는 정말 아무도 진실로 사랑해주지 않는 대상을 사랑함으로 그의 삶과 내면은 얼마나 고독해졌을까?

그러면서 고흐는 신과의 절대적 사랑에 너무 몰두했던 나머지 오히려 광신자라는 비판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는 성직자가 되지 못한 채 끝나버린 성직자의 길을 놓고 스스로 굉장한 죄책감에 빠졌다고도 한다. 그런 고흐의 내면은 얼마나 힘이 들고, 그 영혼의 고통은 또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은희는 그림을 그리다 말고 가끔 그렇게 고흐의 인생과 그림들을 혼자서 깊이 생각해 보았다.

은희는 이십대 후반 네덜란드에서 그림을 그리는 내내 고흐에 대한 여러 가지 인물 조사와 그림에 대한 연구를 하며 지냈었다. 그러다가 생각한 것은 어쩌면 인간은 신에 대한 사랑이든.......인간에 대한 사랑이든........ 혼심의 힘을 기울여 마음과 정신과 영혼을 불태우며 일을 해내도 .....결국은 다 쓸쓸한 인간 존재의 밑바닥에 있는 깊은 영혼의 문제만은 쉽게 풀어 나갈 수가 없구나 하는........막연한 생각을 했다.

은희는 고흐를 생각할 때마다 자신의 화첩 한 구석에 그에 관한 단상을 써서 메모지를 붙여 놨었다. 그건 은희가 특별히 좋아하는 화가가 생각 날 때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자기의 그림 옆에 늘 붙여 놓고 그 메모지를 읽고 또 읽고 하는 습관 때문이기도 했다. 아주 짧은 단상들이였지만, 주로 이런 글 들이였다.

“ 고흐, 그가 사랑한 것은 신이였을까? 세상이었을까?”

“ 고흐, 그가 사랑한 아를에 밝은 태양이여, 오늘도 나를 감격시켜다오”

“ 고흐, 당신은 격정적인 영혼이었기에 매춘부를 진실로 사랑했을 것이요?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리 할 수 없을 지라도 ....”

“ 내가 그리는 그림은 과연 정신과 영혼의 문제를 괴로워했던 고흐의

그림에 비해 과연 정신과 영혼이 살아 있는 그림이 단 한 점이라도

있는가?”

은희는 주로 그런 짧은 단상들을 자신의 그림 옆에 붙여 놓고 자신의 그림에 대해서 생각하곤 했다. 그러다 은희는 렘브란트의 그림 중에 예수님과 성경에 나온 인물들을 그린 성화들을 보면서 서서히 자신의 그림도 신에 대한 경외감으로 바뀌어 가고 있을 때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은희에게 렘브란트는 어쩌면 반 고흐보다 더 영향을 준 작가였다. 그는 정말 빛의 화가라는 말이 옳았다. 빛과 그림자를 정확하게 드러냈고, 밝음과 어둠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그의 그림들을 볼 때면 은희는 그 빛과 어둠의 세계에 자신도 모르게 몰입해 들어가기도 했다. 사람의 감정과 영혼을 그리는 화가라는 말도 무색하지 않은 것이 렘브란트의 그림에서는 나타났다.

그중에서 은희가 가장 좋아한 렘브란트의 그림은 ‘돌아온 탕자’였다. 집으로 돌아온 탕자 아들을 기뻐서 두 팔로 끌어안고 있는 아버지의 이마가 해같이 빛나는 그 모습에서 렘브란트는 ‘빛의 화가’란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돌아온 아들을 껴안고 있는 아버지는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웠을까.....

그런데 그 기쁘고 환한 마음을 렘브란트의 아버지의 이마에 그려 놓았던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돌아온 탕자의 어두운 이미지가 그림을 어둡게 칠해 놓았다면 아버지의 환한 얼굴 중에서 가장 위에 있는 이마를 황금빛처럼 눈이 부시도록 환하게 그리면서 그림은 정말 돌아온 탕자 아들과 그 아들을 다시 맞이해 주는 아버지의 너그럽고 자애로운 마음을 너무나 잘 대비시켜서 그려낸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이 돌아온 탕자는 그래서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어쩌면 너무나 절묘하게 묘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고 은희는 그림을 공부하며 깨달았다.

세상을 방탕하게 살던 아들은 어쩌면 지옥을 갔을 수도 있었지만, 아버지의 저 넓은 가슴으로 끝까지 그 아들을 포기하지 않고 기다려준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바로 그런 분일지도 모른다고 은희는 생각했었다.

앞집 화가 할머니 작품


렘브란트는 ‘빛’을 그리기 위해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촛불을 화실 안에 환하게 켜 놓고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어둠이 짙을수록 빛이 더욱 환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의 그림에서 ‘돌아온 탕자’는 그런 작업환경에서 인간의 내면을 좀 더 세밀하게 그려낸 렘브란트의 작가적 치밀함이 드러난 것 같다는 생각도 은희는 했었다.

성경에 나온 인물 벨사살 왕을 그린 렘브란트 다니엘의 예언대로 죽게 된 벨사살 왕의 죽기 직전의 살아 움직이는 듯한 동작의 섬세한 필치, 돌에 맞아 죽는 스테반 집사의 거룩한 순교 현장, 은희는 렘브란트의 성화를 보면서 고흐와 달리 렘브란트는 더 구체적이고 더 다양한 사랑을 한 사람일거라는 생각을 했다.


은희가 아는 렘브란트는 누구보다 인간적인 삶을 살았던 화가 같았다 . 전염병으로 자녀들이 죽고, 두 번 결혼해서 두 번 다 아내를 잃고, 마지막 생애는 빚에 쪼들려 비참한 생활을 했다고 하는데, 그런데 그가 남긴 기독교적 그림에는 왜 이상하리 만큼 어떤 종교적 엄숙함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은희는 그것이 자신의 개인적 느낌일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가끔씩 그의 화집을 펼칠 때 마다 미묘한 감동이 밀려왔었다.

은희는 서른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비행장에서 한국행 비행기 트랙에 자신의 몸을 실을 때까지도 그 두 화가의 화풍과 생애를 잊을 수가 없었다. 은희는 그림에 대한 생각, 화가들에 대한 생각, 그 모든 것이 다 지워져 버린 듯 기억의 필름이 정지된 상태로 1년여 가까이 아프리카 여행을 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아프리카 케냐의 나이로비에 한 호텔에서 샤워를 하는 시간을 갖고 있는 것이다.

시원한 물줄기가 쏟아지는 샤워기 앞에서 은희는 하얀 나체를 드러내고 몸을 씻어내는 이 정오의 시간에 호텔 밖은 또 얼마나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 있을까를 생각했다.

은희는 자신의 손등과 발등이 처음 여행을 떠날 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몇 달 사이 새까매진 것처럼 한편으로는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 믿기질 않았다.

네덜란드에서 돌아와서 뜻밖에 새 엄마를 병간호 하면서 지냈던 7년이란 시간이 그 순간, 시원한 물줄기 사이로 흘러내려가 호텔의 어두운 하수구 통로를 지나 아프리카의 끝없는 사막 어딘가로 흘러갔다.

7년 이란 세월을 억누르고만 있었던 그 무엇이 갑자기 용광로처럼 들끓으며 자신의 내부 밖으로 흘러 넘쳐서 그걸 주체 할 수 가 없었다. 아무런 욕심도 욕망도 꿈조차도 없었던 그 7년이 앞으로 남은 인생은 그렇게 살지 말라고 하면서 일으키는 반란 이였는지......

일 년이란 시간동안 그녀는 이 여행이 즐겁고 때론 행복하기도 했다.

혼자서 아프리카 땅을 밟고 돌아다니며 낮선 호텔에서 잠을 자고 눈을 뜨고 할 때마다 마음과 영혼의 그 어떤 반응들이 때때로 가볍고 상쾌할 때가 많았다.

그건 자기라는 저울에 자신의 무게를 달아 봤을 때 37년 동안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자유가 그 저울의 무게를 자꾸만 가볍게 줄여주는 기분 이였다.

하얀 비누 거품이 목덜미를 벗어나 희고 긴 다리를 흘러내려 호텔 욕실의 하수구로 쏟아져 내려간다. 은희는 마지막으로 흰 목덜미에 샤워기를 대고 한 오 분쯤 그렇게 씻다가 샤워기를 잠갔다. 육체의 껍질을 다 벗겨낸 기분이 들 지경으로 상쾌한 느낌이 온 몸을 감싼다. 은희는 목욕할 때마다 하는 버릇이 맨 마지막에 목을 유난히 오래 닦는 습관이 있었다. 그건 어릴 때 친엄마가 늘 목을 오래 오래 닦아주면서 했던 말이

“ 은희야 여자는 목이 예뻐야 돼,

여잔 목이 깨끗해야 다 깨끗해 보이는 법이야.”


유난히 가늘고 긴 자기에 목을 비누 거품을 내서 살살 밀어 주던 엄마가 세수와 목욕을 시킬 때마다 했던 말이 늘 그녀를 습관처럼 따라 다녔기 때문이었다.

은희는 여행 가방에서 흰 색 긴 롱 원피스를 입고 그 위에 하늘 색 남방을 살짝 걸치고 남방의 앞자락을 가볍게 묶었다.

그리고 긴 머리도 작은 손수건으로 가볍게 묶어 버렸다.

‘ 정오의 태양 빛을 더 이상을 받으면 안 되겠어.

손등과 발등이 너무 새까매서 나도 내 손 과 발이 이상하게 느껴지네.’

은희는 혼자 자기의 손등과 발등을 쳐다보다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 인간이 어디에 사느냐가 이렇게 중요한가?

내가 아프리카에 와 있다 보니 내가 아프리카인이 되어 가는 것은 확실하니 말야’

은희는 호텔에서 주문 배달 해온 얼음이 든 아이스커피와 초콜릿과 생크림이 듬뿍 든 아이스크림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자신도 그 테이블의 의자 위에 오도카니 올라가 앉았다.

은희는 의자 위에 한 쪽 무릎을 올려놓고 그 무릎 위에 한 쪽 손을 올려놓고 그 손가락 끝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녀가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쓸 때, 아니면 이것저것 생각을 많이 할 때 취하는 포즈다. 한참을 그런 자세로 앉아서 탁자 위에 놓인 아이스커피를 마셨다. 마지막으로 남은 아이스커피를 한 모금 다 마시고 나서 오늘 오후 2시에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한 손님과의 약속을 생각하고 있었다.

두시에 호텔 로비 커피숍으로 오라고 했으니까 잘 찾아오겠지.......

그 때까지는 아직 삼십분이 더 남았어.......

힘이 좀 센 여자애가 와야 하는데..... 내가 혼자서 살려면 아무래도 일을 잘해주는 여자가 필요한데........

은희는 현지인 가사 도우미를 구해달라는 부탁을 호텔 지배인에게 해 놓고 그 상대를 오후에 면접을 보기로 약속 해 놨었다.

ㅇ 앞으로 삼십분에 안 남았는데, 내가 먼저 커피숍으로 내려갈까?

아니야.......여기서 좀 혼자 있다가 가자....

은희는 혼자서 삼십분을 무엇을 하며 그 손님을 기다릴까......하다가 어느 덧 의자에 앉아서 꾸벅 꾸벅 다시 졸고 있었다.

실컷 잤는데......잠이 이상하게 왜 또 오지.......

은희는 잠깐 사이 수면제를 먹은 듯이 잠이 다시 드는 자신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미끄러지듯이 침대로 가서 쓰러졌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며칠 전에 가 보았던 케냐의 나이로비 수도를 벗어난 황량하고 긴 모래사막에서 본 밤하늘이 꿈속에서 보였다.

케냐는 적도에 가까운 나라다.

그래서 일까, 지구의 허리쯤에 걸친 듯한 달은 어찌나 크던지

눈앞에 보이는 또 다른 우주와도 같았다.

하늘을 반쯤 가린 듯한 달이 얼마나 크던지.......그 달을 처음에 볼 때는

아름답다기보다는 늘 멀리서만 보이던 달이 아주 가까이 보이는 것 같고,

너무도 큰 달의 위력 앞에 두렵기 조차 했다.

저 큰 달에 밀려서 내일은 해가 떠오르지 않는 건 아닌지.......

아니면 별이란 별은 다 숨어서 빛을 발하지 못하는 건 아닌지......

은희는 하늘을 두리번두리번 대며 그 달빛에 감춰진 것들을 찾아내려 애를

써 보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랄 일을 그 큰 달의 위력 때문에 그 달빛에 드러난 그 사막의 풍경은 그야 말로 원시 시대의 풍경 같았다.

그리고 자신은 그 원시시대의 첫 사람처럼 왠지 온 마음과 정신이 자신의 본래 모습은 이런 모습일거 같아 하면서 달을 처음 본, 태고 적 사람들처럼 그 달빛 아래에 옷을 다 벗어 제치고 마구 춤이라고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거대한 태양이나 달을 처음 본 인간의 마음을 어땠을까? 하는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 달빛 아래서는 자신이 원시인 같았고 또 원시인처럼 살고 싶어졌다. 옷을 다 벗고, 밤에 소나기라도 오면 그 물줄기를 마셔대며 낄낄대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 박수를 쳐대고........그렇게 자신이 하는 짓에 대해서 타인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벌거숭이 원시인처럼, 그렇게 거추장스러운 가식 , 체면이나 위선 따윈 없는 듯이 마음을 다 벌거벗은 체 껍질을 벗고 그 달빛 아래서는 한 순간 만큼은 원시인이 되고 싶어졌다.

은희는 그 달빛 아래서 어쩌면 이 지구의 어느 한 편에서는 문명의 손때가 전혀 묻지 않은 아프리카 오지나 무인도 같은 섬에서는 그렇게 살고 있는 자연인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해 보았다.


모래가 바스락 바스락대고 밟히는 이 사막의 끝에서 저 달은 어디를 비추는 걸까?

저렇게 큰 몸체로 지구를 반쯤은 가릴 듯이 커다란 형체를 하고서 아! 저 파란 동맥처럼 푸른 빛........... 저 빛으로 도대체 이 막막한 사막의 어느 곳을 비추려고 떠 오른 것 일까?

모래와 뜨거운 열기로 죽을 것 같은 이 사막을 단 한 번에 식혀 보려고 저렇게 큰 몸집으로 떠오른 것은 아닐까,

은희는 그냥 그 큰 달 앞에서 작은 어린 아이처럼 그런 저런 상상만을 하며 몇 날 몇 밤을 보내야 했다.

황량한 모래 벌에 엎드린 나란 존재는 비울 것도 없이 자신의 내면은 끝없는 바벨탑처럼 무너지고 또 무너져갔다.

내 안에 내가 언제 이렇게 높고 허망한 바벨탑을 쌓아 올린 거지......

은희는 자기도 모르는 어떤 욕망이나 욕심들이 자신의 속에서 있었고, 그 높은 바벨탑은 이 모래사막에서 저 크고 높은 달 앞에서 그 달빛에 비추이면서 산산이 부서져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아주 오래된 어느 소설가의 소설 제목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처럼 내 속에도 그 난쟁이가 날마다 작은 공을 끝없이 쏘아 올리고 있었어....

그 공에는 인간인 내가 가진 욕망이 끝도 없이 자라나고 있었겠지.....

집채만 하게 보이는 사막의 달은 어느 사이 가벼워진 자신을 사막의 바람 끝으로 몰아 세워 버릴 듯 했다.

가끔씩 회오리바람처럼 부는 그 사막의 모래 바람 속으로 자신이 가진 재물이나 보화들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이 다 사라져 버려 ‘나’라는 사람은 아예 지구상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만 같은 기분도 들었다.

적도의 끝에 있는 이런 모래벌판, 모래사막에서는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구나,

부자든 가난하든........이런 곳에서는 인간의 생존이란 참으로 보잘 것 없이 초라한 목숨 한 줄기 뿐이구나.

벼랑 끝에 서서 봄이면 피어나던 제비 꽃 한 송이처럼 내 인생이 이렇게 작고 초라하구나.

그러나 그렇게 작고 여린 풀꽃과 같은 자신의 인생에서도 가끔씩 떠오르던 말이 그 사막에서 다시 떠올랐다.

당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세상과 나누라.

언제나 부족해 보일지라도

< 그래도 > 최고의 것을

세상에 주라.


언젠가 읽었던 마더 테레사 수녀의 글 중에서 < 그래도 > 라는 글 중에

몇 줄의 글귀 이였다. 은희는 마더 테레사 수녀의 글을 참 좋아 했었다. 수녀님이 쓴 시도 좋았고, 여러 사람에게 격언처럼 들려주는 기도문 같은 글도 은희는 너무나 좋아해서 그 수녀님의 글을 줄줄 외우며 다닌 적도 있었다.

내가 가진 최고의 것.........그게 뭘까,

그리고 그걸 어떻게 세상에 나눠 줘야 하는 거지...

내가 가진 가장 초라한 것,

그 초라한 것이 너무 부족해 보일 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최고의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겠지........

내가 주는 < 가장 작은 것 > 그러나 < 내 전부가 되는 것>

그것을 나눠 줄 < 누군가>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가?

은희는 가끔씩 이런 질문을 주위 사람들에게 하면서 살았다.

서른 일 곱 해 동안 자신은 이란 사람은 그냥 물처럼 흐르다가 고이면 그런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고, 물이 고여서 썩으면 그 물을 퍼낼 생각도 못하고 그 자신을 썩은 물에 발목까지 적신 채 우두커니 서 있는 그런 바보 같은 인생 이였다.

꿈이 없다는 것, 그리고 그리움이 없다는 것이 은희를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꿈과 잃어버린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어디 가서 찾는단 말인가? 열네 살 이후 , 잃어버린 꿈들.........그리고 그리운 엄마.......

그걸 대신 해줄 이 세상의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열네 살 봄에 은희는 태백산 줄기를 뻗어 내려와 높고 낮은 산들이 첩첩히 쌓여 있는 고향을 떠나 강남의 최고급 주택지로 자신의 몸은 전혀 다른 환경에 하루아침에 옮겨졌다.

그 열네 살, 봄 이후. 은희는 단 한 번도 인생의 꿈을 그려 보지도 않았고, 또 누군가를 단 한 번도 그리워해본 적이 없었다. 학교를 갔다 와서 이층 구석에 있는 자신의 방에 한 번 문을 닫고 들어가면 그 방은 깊고 어두운 동굴이 되어서 은희를 한 없이 깊이 침잠케 했다.


가족이 다 모여서 저녁 식사를 할 때만 빼고는 은희는 저녁밥도 잘 먹질 않고 공부를 했었다. 그 이유는 그녀가 새로 만난 가족이란 이름이 너무 불편하고 때로는 자신에게는 너무나 불안한 존재들이였기 때문 이였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과 새로운 가족이 되어 산다는 것........

그건 이제 막 사춘기가 시작된 은희로써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였고, 아버지를 제외한 그 집의 가족과 친척은 사실 자기라는 존재에 대해서 인격의 포장지를 뒤집어 쓴 가면을 가지고 대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그러는 것은 ......그 모든 것은 ........당연한 ........ 결과였다.

친엄마와 아버지의 관계를 알고 난 뒤에 은희는 그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며.....그 가족들과도 마음에 부담을 느끼면 그 날카로운 칼에 베이지 않으려고 스스로 마음을 곤두세우지 않고, 시골 마당에 잘 익은 호박 덩어리처럼 상처의 시간들을 태엽에 감듯이 둥글둥글 보내려 일부러 애를 썼다.

그래도 은희는 아팠다. 자꾸만 가슴 어딘가가 한없이 아팠다.

그래서 은희는 중 3때부터 자신의 골방에 들어 앉아 그림을 그렸다.

어느 날은 너무 외로워서 죽을 듯이 가슴이 아려와 물 한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스무 시간을 넘도록 화첩에 고개를 수그리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날에는 오히려 그림을 전혀 그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마음이 봄날에 햇살이 풀어지듯이 슬프고 외로운 마음이

따사로이 풀어지면 오히려 그림이 잘 그려졌다.

열네 살 봄에 떠나오던 집에 빈 마당에 핀 화단을 그렸고,

강줄기를 따라 흘러가는 꽃잎 들을 투명한 수채화로도 그려보고,

그리고 친 엄마와 둘이서 걸었던 눈 쌓인 태백산을 그렸다.

눈송이가 멀리 하늘가에 닿을 듯이 날아가다가 또 한 무더기 솜사탕이

구름 아래로 한꺼번에 쏟아져 내려오는 듯이 환희롭던 그 태백산의

눈송이들과 눈 더미는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어느 겨울엔 가엔 너무 눈이 많이 와서 사람이라곤 몇날 며칠을 구경할 수

조차 없이 눈이 많이 와서 어린 은희는 눈이 무섭기도 했다.

그래서 그 해에는 유난히 엄마의 가슴에 얼굴을 꼭 묻고 잠을 청하곤 했다.

그럴 때 마다 엄마의 젖가슴은 밖에 하얗게 쌓여 있는 눈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향기롭기가 그지없는 향긋한 냄새가 났었다.

시골에서 살던 추억과 친 엄마를 생각하던 밤이면 중학생 은희는 꿈에서

혼자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눈 내린 깊은 산중에 갇힌 아이가 되어

혼자서 자신의 그림 속에 파묻혀 발을 뻗고 울고 있곤 했다.

아무도 들리지 않을 울음을 은희는 그림 속에 파묻혀서 그려내며 노랗고 파란

물감이 뭉개진 파렛트 사이에 한 방울 한 방울 자신의 눈물을

유화 물감을 개는 기름처럼 뜨겁게 떨어뜨렸다.


그녀는 자신의 내부에서 타는 촛불이 무엇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도 모른 채

하루에도 수 십장의 그림만 스케치를 해댔다.

그리고 가끔씩 그 진한 물감들 사이로 떨어지는 눈물의 의미를 다는

알 수 없이 중학교와 여고를 다녔다.

그런데 이 망망한 사막 한 가운데, 밤의 깊은 한 가운데서,

그것도 지구의 허리쯤에 걸친 듯한 저 큰 달의 위력 앞에서

자신은 스스럼없이 자신의 내부에 깊이 숨겨진 어떤 비밀한 말들이 새어

나올 것이 같이 입술이 옴짝달싹 거렸다.

그리고 그 입술은 드디어 자유로이 입을 열고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을 하기

시작했다.

- 그리운 엄마에게 -

엄마!

이젠 엄마가 너무 보고 싶은 걸 어떻게 해야 해요.

당신은 살아는 계신 건가요?

내가 죽기 전에 ..........또 살아 계시다면 당신이 돌아가시기 전에

우린 꼭 한번은 만나야 하지 않나요?

집 앞에 그 많던 복숭아나무는 다 어떻게 되었나요.

그 아름답던 연분홍빛 꽃잎들은 다 어디로 흩어져서 지금도 복숭아는

그렇게 맛있는 복숭아는 아직도 먹을 수 있는 건가요?

나는 아직도 왜 엄마가 살던 그 집을 찾아 갈 생각을 못하고 있는 걸까요...

그건 당신의 부재를 확인하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겠죠.

‘ 네 엄마는 영원히 떠났다’는 아버지의 한 마디 때문 이였겠죠.

그 영원히 라는 말이 죽음은 아닐 거라는 생각........그 생각을 늘 했어요.

‘그리운 엄마에게’라는 이 짧지도 길지도 않은 편지는

그날 사막의 벌판에서 집채만큼 큰 달을 보고 돌아와서 호텔 테이블에서

처음으로 엄마에게 쓴 편지였다.

오후 두시에 호텔 커피숍에서 현지 도우미를 면접하기로 한

약속시간을 놓치고 잠깐 잔 낮잠에서 은희는 꿈을 꾸고 또 꾸었다.

기억의 한 장면들이 스쳐가듯이......꿈은 이어졌다.


꿈속에서 은희는 열네 살까지 살았던 복숭아 밭 앞의

옛 집에서 엄마의 얼굴을 아주 오랜만에 보았다.

앞뜰에 피어난 복숭아꽃과 작은 봄꽃을 만지는 엄마의 손이 어느 사이 검으스레

구릿빛으로 변해 있는 것과 엄마의 얼굴이 오십 후반쯤으로 보이는 중년의

나이든 엄마로 변했다는 것이 꿈에서도 놀랄 일이였다.

은희가 엄마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고 온 날 만해도 엄마는 아직 서른 살도 채 안돼 보이는 앳된 처녀 같은 얼굴이었는데......

꿈속에서 본 엄마는 아주 많이 늙었고, 손은 일을 많이 한 고생을 한 손으로 변해

있어서 꿈에서도 은희는 그 엄마의 손이 너무 가슴이 아파서 그 손을 한번 자기

가슴속에 품어 드리고 싶었다.

그런데 그 안타까운 손은 여기 저기 피어 있는 꽃가지와 풀들 사이를 왔다 갔다

분주히 오가더니.... 어느 사이 엄마의 모습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은희는 엄마가 복숭아밭을 걸어 들어 간 것은 아닐까 하여 연하디 연한 복숭아 꽃가지를 마구 헤치며 과수원 한 가운데를 들어 가 보았다.

그런데도 그 과수원의 어느 곳에도 엄마는 보일 질 않고,

바람 끝으로 처연하게

아름다운 연분홍빛 꽃잎들만 흩어져 날아갈 뿐 이였다.

은희는 여기 저기 허공을 가르며 흩어지는 그 꽃잎들을 잡으려고 손을 휘졌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너무 오랜만에 본 엄마의 얼굴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늙고 온갖 세파가 지난 간 듯 깊은 상흔들이 얼굴에 보이고

일을 너무 많이 해서 구릿빛으로 변한 손까지......

은희는 잠에서 깨어났지만, 가슴에 통증이 오듯이 아팠다.

칠년 동안 하루도 그 사람 곁을 떠난 적이 없었던 나,

평생을 귀부인으로 살았던 그 여자,

내게는 새 엄마였고 명훈이 오빠의 친엄마인 그 여자의 하얗고 보드라운

손에 비하면 엄마의 손은 아주 고된 노동의 세월이 준 거친 손이였다.

사진에서나 본 거칠고 고된 손이였다.

은희는 잠을 깨고 나서도 멍하니 그 손을 그려 봤다.

그러다가 은희는 호텔 프런트에서 온 전화 한 통을 받고 깜짝 놀랐다.

호텔 지배인의 말에 의하면 오후 두시에 약속했던 손님이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자기를 찾아 왔으니 방에 계시면 만날 건지 약속 여부를 가르쳐 달라는

정중한 부탁이었다.

시계를 보니 오후 네 시가 넘었다.

두 시간을 넘도록 꼬박 낮잠이 들었다가 깬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손님은 약속을 어긴 자기를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단 말인가?

은희는 서둘러서 호텔방에서 나오느라 샌들을 거꾸로 신을 뻔 했다.

이 낮선 땅에서 그것도 자기가 도우미가 필요해서 호텔 지배인에게 부탁을 해서

현지 도우미를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주선 해 달라고 해 놓고

약속 시간 삼십 분 전에 샤워까지 하고 옷도 다 갈아입은 후

아이스커피와 아이스크림을 주문해서 먹고도 다시 낮잠을 자다니.......

생전에 없던 일이 아닌가?

기후 탓 인가, 아프리카 여행을 하면서 그녀는 거의 자 본적이 없는 낮잠을

자주 낮잠을 자는 자신을 발견 했는데, 오늘은 정말 너무 했구나 싶다.

‘ 날씨 탓이라고........내가 아직도 이 더운 날씨에 적응을 못해서 그렇다고

해야 하나........날 기다린 손님에게 정말 뭐라고 해야 두 시간을 기다린

그 손님의 마음이 풀릴까 ’

은희는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혼자 이말 저말 궁리를 해 봤지만, 이 낮선 이국땅에서 처음 보는 도우미에게 두 시간이나 기다리게 해 놓고 자신은 에어컨이 켜져 있는 시원한 방에서 아이스크림 먹고 깜박 졸려서 낮잠을 자게 됐다고..........솔직하게 모든 정황을 털어 놓을 자신도 그렇다고 딱히 거짓말을 할 거리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 호텔의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호텔 지배인이 총알 같이 은희 앞으로 달려 왔다.

“ 저쪽 커피숍에서 타샤 라고 하는 소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손님이 부탁하신 이곳 현지 ‘음사이디지’ 입니다.”

“ 아, 네..... 죄송합니다......어쩌죠. 내가 너무 늦어서...”

“ 괜찮습니다. 일단 만나게 되었으니 .....제가 잘 말 해줬으니까

기다린 시간에 대해서는 불평을 하진 않을 겁니다.

저 소녀에겐 오늘 일자리가 해결 되는 것이 중요하지 기다린 시간은

그렇게 중요하진 않습니다.”

검은 빛의 얼굴이지만 아주 핸섬한 호텔 지배인은 자기에게 부탁한 이 일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 손님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자세가 그쪽에서 은희를 기다린 타샤라는 소녀에게 미치는 시간상 손해는 별로 중요하질 않다며 호텔 커피숍으로 그녀를 안내 해 줬다.

호텔의 한쪽 구석에서 아주 작은 말라깽이 소녀가 은희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녀는 은희를 보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소녀는 일 미터 오십 정도 되는 아주 작고 마른 전형적인 흑인 소녀였다.

“ 타샤, 인사해요. 여긴 한국에서 오신 사장님입니다.”

“ 타샤.........미안해요, 내가 깜빡 졸다가 잠이 들어서 그만....”

은희는 호텔에 자기를 소개 할 때 그림 장사를 하는 사장라고 했다. 자기를 화가라고 소개 하거나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갤러리를 운영하는 재벌 집 딸 중에 하나라고는 전혀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 이번 여행만큼은 그림을 사고팔러 떠난 여행은 아니지만, 화가라는 말은 어디에서도 하기가 싫었다.

그런데 아프리카를 몇 달 동안 여행 하면서 그림을 다시 그리고 싶었다. 화가로 본래의 자리에 돌아가고 싶다는 것, 그것은 두려웠지만,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은희는 어제 사막에서 돌아오자마자, 나이로비에 있는 아파트를 하나 얻은 것이다. 우선 살 집을 마련하고 거기서 그림을 시작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새 엄마를 7년 동안 병수발 한 대가로 재벌인 아버지는 은희에게 꽤 많은 돈과 백화점 갤러리 운영권을 선물로 줬었다. 그 아버지가 준 돈이 넉넉하게 있어서 은희는 아파트도 나이로비 시내에서 제법 큰 걸 얻었는데, 그 집에 가구를 채워 넣고 그림 그릴 도구들을 준비해야 했고, 자기에게 시장도 봐다 주고 가끔씩 아파트 청소도 같이 해줄 도우미가 필요했다.

두 시간 동안 일자리 때문에 자기를 기다렸다는 타샤라는 처음 본 소녀는 우선 너무 작고 깡말라서 자기가 원하는 힘든 가사 노동을 하기엔 꿈조차 꿀 수 없을 것 같았다.

“ 저렇게 작고 마른 소녀를 내가 그 큰 아파트를 청소도 시키고, 빨래나 음식 차리는 일, 시장 보는 일, 또 내가 해야 할 이런 저런 심부름을 시킨다면 그건 죄가 되겠군. 너무 작고 어린걸........

아직은 엄마의 돌봄을 받아야 할 나인데 왜 여길 온 거지.

호텔 지배인 아저씨가 내 말을 잘못 알아들었군.

나는 힘센 처녀를 원했는데..........어떡하지 ”

은희는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아서 계속 그 생각만 했다. 타샤와 은희 사이에서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은희가 먼저 웃으며 침묵을 깼다.

“ 타샤, 내가 늦어서 너무 미안해요.

약속시간을 기다리다가 깜빡 잠이 들어서 그만........

깨워 줄 사람도 없고 하니 너무 오래 잤나 봐요,

내가 미안해서 그러니 우리 같이 식사해도 될까요?

난 아직 점심을 안 먹었는데, 혹시 점심 식사 안했죠.

우리 같이 저기 레스토랑에 가서 뭐 좀 먹을까요?”

은희는 서투른 영어를 하면서 타샤의 얼굴을 처음으로 자세히 살펴봤다. 소녀의 눈은 겁에 잔뜩 질려 있었다. 처음 와 보는 호텔의 분위기가 자신의 삶과는 너무나 무관해서 그런지 위압감에 공포의 눈빛도 약간은 있었다.

그러나 타샤는 세 시간이나 기다리는 동안 이 일자리가 안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감으로 너무 마음을 졸이고 있어서 애가 다 탔었다.

그러나 낮선 동양 여자를 보자마자 왠지 맥이 한꺼번에 풀려버렸다.

“그런데 사장님이 너무 예뻐요, 나이도 젊고, 저 희고 긴 목과 갸름한 얼굴,

그리고 긴 속눈썹이 너무 아름다워서 난 첫눈에 반했어요.”

타샤는 은희에게 얼른 짧은 쪽지 편지를 마음속으로 날려 보냈다.

타샤는 그 긴장된 시간 속에서 상상한 사장님이란 존재는

뚱뚱하고 위엄에 가득 찬 나이 든 동양 여자의 모습이었고,

똥배가 툭 튀어나온 뒤뚱거리는 오리 같은 궁둥이였는데,

자기 앞에 서 있는 여자 사장은 사장님이 아니라 학교 선생님 같기도 하고

하얀 수녀복을 입은 천사같이 아름다운 동양의 아름다운 처녀였기 때문에

긴장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풀려 버렸다.

일자리를 놓고 마음을 졸일 그 이상이 것이 타샤의 눈엔 없어 보였다.

은희가 입은 긴 롱 원피스의 흰색 옷자락이 호텔 바닥까지

은희의 발끝을 덮고 있어서 타샤는 은희가 걸어 들어 올 때부터

무슨 신기루를 보듯이 황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만 봤다.

더구나 키가 일 미터 육십팔이나 되는 큰 키에 마른 체형의 은희를 보니 타샤는

더 기가 질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 타샤는 그녀의 선하게 생긴 아름다움이 얼굴 전체에서 무슨

빛처럼 새어 나오는 것을 본 것이다.

악의가 전혀 없는 선한 얼굴빛........ 맑은 피부 위에 사뿐히 내려앉은 검고

긴 속눈썹과 검은 빛이 도는 갈색 눈동자......... 그리고 길고 하얀 목이 그녀를

천사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은희는 타샤의 생각과는 정 반대로 이 깡마른 소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우선 호텔의 레스토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나이로비에서는 최고급에 속하는 호텔이라서 레스토랑의 분위기도 국제적인 감각을 맞춰서 아름답고 격조 있게 꾸며져 있었다.

타샤는 그런 호텔 레스토랑에서 자기가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사실 이였는지..... 아님 그 분위기에 압도를 당했는지

입구에서 들어오지도 못하고 식사하는 외국인을 쳐다보기만 하고 얼어붙은 듯이

서 있기만 했다.


그런 타샤를 은희는 몇 걸음 앞서 가다 말고 뒤돌아 와서 손을 잡아 줬다.

소녀의 손이 꿈에 본 친 엄마의 손보다 더 새까맣다.

그리고 그 촉감은 그리 보드랍지를 않고 뻣뻣하다.

그러나 은희는 그 손을 꼭 잡아 줬다.

떨...지 ...마...라...고

여기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

그리고 여기도 사람들이 밥을 먹는 식당이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아프리카 여행을 하면서 그녀는 많은 생각을 했었다.

한 지구 아래서 어떻게 이렇게 비참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단 말인가?

먹지를 못해서 빼빼 마르다 못해 얼굴 마다 버짐에 누런 고름이 여기 저기

달려 있는 피부병을 앓거나 에이즈를 앓는 어린 소년 소녀들

그리고 그 옆에서 꺼먼 젖을 물리고 있는 엄마들...

그리고 그 엄마의 젖이 나오지 않아서 우는 것도 지친 간난 아기들.

은희는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도 하고 그런 모습을 TV에서 남의 나라 일로만

보던 화면상의 거리에서가 아닌 실제 자기 앞에 펼쳐진 실존 인물들을 본다는 것이

너무 힘들기만 했었다.

그러나 그녀 자신은 그런 속에서 자아를 발견해 나가는 걸음을 시작했을

뿐 아직 아무것도 자신이 왜 그런 사람들 틈에서 그림을 그리고 뭔가를

시작해야 한다는 그런 절박함이 다시 솟구쳐 올라와 자신의 생애 안에서

새로운 그림을 그려야 할 것 같은 욕구가 생겨버렸는지 아직은 그 모든 출발점이

다 정리가 되질 않은 생태였다.

“ 타샤 넌 뭐가 먹고 싶니? 여긴 호텔이니까 맛있는 요리가 많거든”

은희는 타샤가 불편하지 않도록 될 수 있으면 소녀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말을 했다.

“ 네, 주인님 제가 주인님 하고 같이 식사를 해도 되는 건가요?”

“ 그럼 얼마든지......... ”

“ 저 그럼 여기 식당에도 고기를 파나요? 전 고기가 먹고 싶어요.”

“ 그럼 소고기를 먹을까? 아님 닭고기를 먹을까?”

“ 네 전 소고기 요리를 먹어본 기억이 별로 없어요, 그거 먹어 보고 싶어요.”

은희는 소고기로 된 요리 중에 제일 비싼 걸 골라서 시켰다.

“ 난 한국에서 온 부자야, 오늘 여기서 최고급으로 나온 소고기 요리를 시켰으니

더 먹고 싶은 거 있음 이 요리 다 먹고 또 말해........ ”

은희는 호텔 레스토랑에서 제일 비싼 소고기 전체 요리를 시켰다.

얼마 후 요리가 나왔을 때 그 맛있어 보이는 색깔과 고기에서 나는 그 향기에 마치 타샤는 마취제를 살짝 마신 아이처럼 눈에 동공이 한 없이 커지는 것을

은희는 보았다.

그건 너무나 오랫동안 굶어본 아이들이 갖는 본능적인 먹는 것에 대한 두려움

같기도 했다.

‘저걸 어떻게 먹지, 저렇게 훌륭하게 차려진 음식을 손으로 어떻게 먹어야 하나?’

하는 두려움 같은 것이 타샤의 겁먹은 눈동자에서 느껴졌다.

은희는 재빨리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서 오른쪽 왼쪽에 쥐면서 요리를 먹는

법부터 천천히 가르쳐 줬다.

“ 자, 이렇게 포크는 왼손, 이 나이프는 오른 손, 이건 고기를 먹을 때 쓰는 거고

먼저 스프를 스푼으로 이렇게 들고 한 숟가락씩 떠먹어 보렴.”

은희는 타샤가 소고기 안심 요리를 잘 먹을 수 있도록 접시에 작고 예쁘게

하나하나 썰어서 올려 놔 줬다.

그리고 과일과 야채도 천천히 먹을 수 있도록 가르쳐 줬다.

소녀는 무슨 먹는 대회에 나온 것처럼 나중에는 먹는 것에만 속도를 냈다.

은희의 접시에 있었던 소고기 안심 요리까지 거의 다 비울 정도로 소녀는 정신없이

먹어 댔다.

은희는 호텔 지배인에게 자기가 그림 장사라고 소개한 것이 웃기기도 하고

또 타샤에게는 자기가 부자라고 자랑하듯이 말한 것이 우습기도 해서

포크에 빨간색 브로콜리 볶음을 찍다 말고 웃음을 터트렸다.

“ 타샤.....난 사실 그림 장사라기보다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란다.”

“ 네.........그림 그리는 화가요...... 우와 멋있다.”

타샤는 화가란 말에 호기심어린 두 눈이 동그래지며 동공이 다시 커다래진다.

그녀의 그림을 본 유럽 화단의 평론가들은 그녀가 동양적인 색감과 선을 분명히

살려내는 아주 특별한 재주를 서양화에서 잘 보여 준다고까지 호평을 했었다.

그래서 그녀의 그림은 서양을 보는 것 같지만 한 폭의 동양화를 서양화 속에

옮겨 놓은 듯 하다면서 한국인의 옛집 마당에 있던 깊은 우물을 서양의 넓은

정원에 옮겨 놓은 듯이 뭔가 독특한 느낌이 강하다고까지 표현하는 미술평론가도 있었다.

비안리 작가 작품 ㅡ


은희는 한 번도 자신을 화가라고 자부해보거나 그림으로 무엇인가 되어 보려는

생각조차 안했지만, 몇 번의 전시회와 수상 경력을 통해서 해외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은 덕분에 나이 서른에 자연스럽게 국내 대학에 전임강사 자리를 얻어서 귀국하게 되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은희가 첫 학기 전임 강사로 대학에 강의를 나갔을 때

새 엄마가 중풍으로 쓰러졌다.

그 날도 봄 이였고, 은희는 강의실에서 나와 그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나의 이 짧은 강단 생활은 불과 한 달로 끝나겠구나.........하는

예감을 했다.

그리고 은희는 새엄마의 병원 입원과 함께 전임강사 자리를 내놓고

새 엄마의 병수발을 들기 시작했었다.

왜였을까?

내가 왜 그 일을 했을까?

은희는 지난 몇 달 동안 아프리카 여행에서 돌아가신 새 엄마 병수발을 하던

7년이란 긴 세월을 더듬어 보기도 했지만,

딱히 그 길고 힘들고 지루하기까지 했던 그 시간들에 이름을 붙일 수는 없었다.

유럽에서의 미술공부 십년이 국내에 있는 대학에 전임강사 자리로 돌아왔다면,

이번에 새 엄마의 병수발을 들었던 7년 이란 시간은 또 이상하리만큼 전혀

엉뚱한 일로 나타났다.

재벌이신 아버지로부터 강남에 최고 유명한 백화점에 갤러리 운영권을

선물 받게 된 것이다.

“ 그림 장사도 장사고 사업이다. 네가 소질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까지 백화점하고 같이 운영하던 건데, 이 갤러리만 떼서 널 줄 테니

네가 해외 화단에서도 촉망받은 젊은 작가니까 너도 그림 다시 그리면서

화랑에다가 좋은 그림 잘 걸어두면, 한국 부자들 다 집에 그림 걸어 두고

감상하는 거 좋아하니까 네 능력을 잘 발휘해 봐라. 사업도 인내다.

네가 새 엄마 중풍을 7년이나 병수발 했는데, 어떤 까다로운 화가든 손님이든

그거 못해내겠니.... 넌 잘 할 수 있을 거다. 최고의 손님은 최고로 까다로운 손님이란 사실만 알면 무슨 사업이든 성공할 거다.”

은희가 가진 재주나 소질과는 전혀 다른 사업을 내 맡기는 아버지의 속내를

은희는 다 알 수는 없었지만, 은희는 그것이 아버지의 애정이길 바랬다.

새엄마를 7년 동안 병수발 하는 은희를 아버지도 오랫동안 속 깊이 바라보며

그녀의 인내심을 파악할 만큼 파악했고, 또 대가를 지불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죄의 굴레를 벗길 수 있는 어떤 끈은 아닐지라도

세상에 필요한 돈이라도 이 가여운 자식에게 주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이 지은 죄의 사슬이 자식에게 묶여서 끝없이 그 자식의 앞날을 묶고만

있다면 아무리 무정한 아버지라 해도 그 끈을 풀어주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은희는 생각했다.

어쩌면 아버지는 자신 보다 더 뜨거운 속죄함의 불구덩이에서 괴로워하며 살고

계신지도 모른다고......

한 여자와의 짧은 만남이 이렇게 긴 세월.....자신을 묶어버리고......

은희를 묶어버리고........자기 가족들까지 묶어 버릴 줄이야.....

그 사랑하는 그 때는 어찌 알았으랴.......

사랑이 없는 결혼 속에서 몸부림치듯 빠져 나오고 싶었던 아버지의 반란이

결국 또 다른 사랑의 불구자들을 만들어 냈을 뿐이다.

은희..........라는 ........자식의 불구자.

그리고 친 엄마.....라는 ........한 여자 불구자.

사랑하지만 끝까지 가족으로 살 수는 없기에 장애가 되는 가족.

그래서 한 집에 그런 장애자가 있을 때 겪는 고통을 온 가족이 겪어야 하는 아픔과

고통이 결국 그 자신의 삶속에서 영원히 남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은희는 어찌 보면 재벌 집에 숨겨진 막내딸이 새 엄마 병수발 든 효도의 보상으로

얻은 것 같은 그 유명한 갤러리가 돈의 액수로는 자신은 아직도 얼마인지도

모르고 , 거기서 얼마의 수입이 매달 나오는지도 그녀는 별로 관심이 없다.

다만, 국내의 유명한 화가들이 그 백화점 갤러리에 그림을 걸고 싶어 한다는

사실 외에는 그녀가 아는 것이라고는 경영에 관해서나 그림을 사고파는 일에서는

일 년이 넘은 지금도 그녀는 문외한 같다.

나 같이 보잘 것 없는 인간이...........무얼 했다고,

국내외의 유명한 화가들 그림을 사고판단 말인가?

어찌 보면 그 일은 은희에겐 그림을 기만하고 자기를 내동댕이치는 장사치에

불과한 것 같아서 얼른 그걸 누구에게 던져 버리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은 갤러리를 잘 운영할 수 있는 전문가에게 그 사업을 통째로

맡겨 버린 것이다.

사업이기에 그건 마땅했다.

나이 서른일곱까지 껌 한통도 팔아 본적이 없는 자기로써는 너무나 당연하고

올바른 선택이라고 믿었다.

아버지 역시, 그녀의 선택에 대해서는 왈가불가 하지 않는 걸 봐서는

예상한 일이라서 굳지 그녀의 선택사항에 찬물까지 끼얹을 마음은 없으신 듯

조요히 관망을 하고 계신 것 같았다.

그러나 거기엔 아버지의 애정..........그 말 못할 애정이 그 아버지의 내심

저 깊은 곳 기저에 숨어 있었기에 그 갤러리에 대한 애정과 거기서 나오는

수익금에 대해서만큼은 고귀하게 쓰기로 작심을 한데가 있어서

은희는 모든 경영권에 대해서도 사장의 자리와 자신의 이익금에 대해서만큼은

갤러리 전문가로 뽑은 관장에게도 분명히 해두었다.

“ 내가 번 돈이 아니라고 해도 돈은 가치 있는 곳에 쓰여야 하니까...”

은희는 갤러리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자신이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일을

자신의 인생행로와 상관없이 그 누군가를 위해 준비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 부분만큼은 명확한 처리를 미술관을 맡긴 관장에게 설명을 해주고

여행을 떠나왔다.

“ 관장님 여기서 생긴 수익금에서 제 몫은 분명 잘 통장에 넣으셔야 해요.

그 돈은 날 위해서 쓸 돈이 아니니까...... 관장님도 수고를 좀 해주시면

감사하겠어요. 출처는 나중에 제가 다 밝히죠.”

은희는 미술관을 맡은 관장에게 수익금에 대한 처리를 잘 부탁하며

그림을 잘 그리는 관장이 아니라, 그림 장사를 잘 하는 탁월한 장사꾼인

관장을 그래서도 일부러 채용한 자신의 속내를 확실하게 말해줬다.

은희는 열네 살에 아버지가 살고 있는 고래 등 만한 무섭도록 큰 집에 들어와서

살면서 가끔씩은 집이 너무 넓고 커서 밤이면 집에 들어가기가 무서웠다.

그 집에 사는 사람은 새 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명훈 오빠, 그리고 피아노를 매일

치는 언니 윤서가 있었다.

집에서 일하는 아줌마와 아버지의 운전기사가 대문 옆 아래채에 집에서 살았어도

집은 사람 수에 비해서 너무 컸다.

아버지는 일요일이면 명훈 오빠와 함께 진초록 잔디 위에서 골프채를 들고

골프 연습을 했다.

두 부자는 누가 봐도 똑 같이 닮았고, 재벌 그룹을 일궈갈 만큼 탁월한 능력이

있는 남자들다웠다.

반듯한 이마에서 풍기는 자신에게 엄격한 자세와 돈과 세상을 흔들 줄 하는 재벌

다운 셈법은 반듯한 이마 아래서 눈썹이 한 뻔 올라 갈 때 마다

사람을 자기 수하에서 꼼짝 못하게 하는 강한 기운을 드러냈다.

그들이 부자가 이룬 그 재벌그룹은 하루아침에 얻어진 돈 방석이 아니라

대대로 가문을 일으킨 조상들로부터 치열한 사업가의 수완을 발휘하면서 일궈낸

땀과 수고의 대가였다.

돈과 땅과 학문이 뒷받침된 명문가의 단단한 혈통이 만들어낸 복합체였다.

서울에 있는 명문 사립대학과 호텔과 제주도의 농장 그리고 강원도에 있는

대규모 목장까지 소유한 그룹의 총수가 바로 은희의 아버지였고,

또 그룹에 총수 아들로 하버드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명훈 오빠가 재벌 후계자로

탄탄대로의 자리를 꽉 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집안에서 은희는 늘 외톨이처럼 이방인처럼 굴었다.

한 번도 집안의 행사나 잔치의 자리에 그녀는 끼지를 않았다.

사돈의 팔촌까지 다 잘사는 그 어마 어마한 집안에서 그녀는 자신을 드러내길

가장 싫어했고, 늘 집안의 행사 때 마다 그녀는 집안을 벗어나 도망치듯

밖으로 배회하며 다녔다.

명문가의 재벌 총수인 유명한 아버지에게 영원히 비밀에 붙혀진 딸.

슬퍼도 그것이 자신에겐 더 어울리는 이름 이였을 거라고 어린 은희는 그때부터

생각을 했었다.

나를 낳아준 엄마.

그 엄마와 매일 한 지붕 밑에서 숨소리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그 엄마 품속에서 엄마 젖을 만지며 눈을 뜨고,

또 눈을 감고 잤던 십 사년이 있는데,

저 고래 등 같이 큰 집은 대체 나에게 어떤 집이란 말인가.

사람의 숨소리는커녕 정다운 목소리 한 번 듣기 어려운 이 딱딱하고 무거운 집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차라리 고래 등짝을 버리고 바닷가 모래벌판에 편히 누워서 자고만 싶은 .......

망막한 밤의 느낌들이 은희는 때론 두려움으로 다가 오기도 했다.

세상의 모든 비밀은 결국은 드러나기 위해 잠시 숨겨진 것 뿐 이라서

자신의 존재도 십 사년 이상을 더 버티지 못하고 어느 날 갑자기 영원히 자기

앞에서 종적을 감추고 사라진 엄마 때문에 드러나게 된 걸까?

엄마가 하루아침에 종적을 감추고 그 시골집을 떠난 이유나 깊은 속내를

어린 내가 다 어찌 알 수 있으랴....... 싶어도 그렇게 사라진 엄마에 대한 소식을

전혀 알 수 없는 은희로는 어린 나이부터 밤이면 밤마다 잠을 깊게 잘 수 없는

사춘기를 보내게 했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깊은 절망으로 온 밤을 하얗게 지새 울 때마다

은희는 가슴에서 어떤 풀지 못한 실 꾸러미가 자신의 가슴속에서 한 올 한 올

풀려서 세상을 자유롭게 날아가는 것 만 같았다.

“ 나를 옭아매고, 엄마를 옭아맸던 이 실 꾸러미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 실 꾸러미엔 과연 엄마와 아버지의 말 못할 깊은 사랑의 비밀이 들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 세상의 어떤 비밀들이 숨어 있는 것일까?”

은희는 그렇게 밤새도록 색색의 실 꾸러미를 풀어내면서 밤을 꼬박

새우기도 했다.

노래를 잘 부르던 엄마가 글을 잘 쓰던 엄마가 음식을 아주 잘 만들던 엄마가

그녀 앞에서 하루아침에 사라 졌는데........

엄마는 시를 지어서 혼자 노랫말로 바꿔서 그걸 노래로 잘 부르곤 했다.

은희는 그 엄마의 감성이 늘 놀라워서 엄마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엄마 나도 그 노래 가르쳐줘 .......” 하고 졸라댔었다.

엄마는 슬플 때나 기쁠 때면 혼자 노래를 지어서 불렀다.

엄마는 글도 참 감동적으로 잘 쓸 줄 아는 탁월한 문학적 재질이 있었는데,

엄마가 가진 재주의 모든 것은 결국 엄마가 혼자 부르는 그 노래 속에

녹아들어 있었다.

엄마는 그 마을에서 제일 높은 산봉우리 보다 더 높은 목소리를 가졌다고

은희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엄마가 부르는 소프라노 목소리는 언제나 자기 집 앞에 높은

봉우리를 넘어서 하늘에 닿을 듯이 소리가 빼어나게 높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엄마는 팝송이나 서양 가곡을 주로 불렀는데, 엄마가 부르던 노래 중에

‘황금빛 수선화 일곱 송이’를 은희는 가장 듣기 좋아했다.

눈부신 아침햇살에 산과 들 눈뜰 때

그 맑은 시냇물 따라 내 마음도 흐르네

가난한 이 마음을 당신께 드리리

황금빛 수선화 일곱 송이도

긴 하루 어느 듯 가고 황혼이 물들면

집 찾아 돌아가는 작은 새들 보며

조용한 이 노래를 당신께 드리리

황금빛 수선화 일곱 송이도

엄마는 그 마을에 아줌마들이 산에서나 들에서 부르던 정선 아라리 같은

노래와는 전혀 다른 가사와 곡을 불렀는데,

은희는 사실 어느 걸 들어도 노래는 다 좋았다.

대청마루에 누워 있는데, 마을 어딘가에서 아녀자들 몇이 부르는

정선 아라리 가사를 듣고 있으면 그건 그렇게 재미있고 신이 날 수가

없었다.

우선은 엄마가 부르는 ‘황금빛 수선화 일곱 송이’ 와는

너무 다른 가사 때문에 재미가 있었고,

그런 노래들은 소리를 높이 부르지 않아도 되는

힘들지 않은 노래들이라서 어느 사이엔가는 어린 자기 입에서도 그 노래

가사들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은희는 엄마가 정선 아라리는 우리나라 여자들이 자주 부르던 노래라서 가사가 이런 거고 엄마가 부르는 노래는 서양 여자들이 많이 부르던 노래라서 가사가 이렇게 틀리다며 노래 가사에 대해 이런 저런 설명도 곧잘 해주셨다.

엄마는 늘 자기가 언젠가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게 될 거라며 자신을 위로하듯이 말했는데,

그 꿈은 시들은 풍선처럼 바람이 빠져나간 비참한 모습으로

엄마의 가슴 한편에 남아서 엄마를 힘들게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린 은희는 그런 엄마가 꼭 꿈과 이상을 다 펼치지 못한 천재처럼 일찍

죽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했다.

은희는 친구들이 천재는 일찍 죽는다는 말을 학교에서 듣고 다녔기 때문에

분명히 이 시골 마을에서 서울에 있는 일류대학에 성악과를 나온 우리 엄마는

천재 일거라고 믿었던 것인데, 그 천재성이 무엇보다 노래 잘하는 것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어린 은희는 생각했었던 것이다.

“ 너네 엄마는 천재는 아니지만 수재는 되겠다.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너희 엄마가 우리 학교 출신중에는 서울에 있는 제일 좋은 여대를

나왔다고 하니까.

그런데 수재면 뭐하노, 널 아부지도 없이 태어나게 했는데....”

어느 날 엄마의 초등학교 친구 딸 경하가 그런 말을 했을 때

은희는 역시 우리 엄마는 천재와 닮은 수재구나.......하며 친구의 말에

화가 난 게 아니라 자기 엄마가 수재라는 걸 확인시켜준 친구가 고마웠었다.

엄마의 그런 문학적인 감수성과 여러 방면의 예술성은 어린 은희에게도

탁월하다 못해 일찍이 드러나서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넌 엄마랑 정말 똑 같구나, 어쩜 노래 잘하는 것 까지 아주 닮아도 너무 닮았네.

그런데 넌 너네 엄마보다 더 뛰어난 게 그림까지 잘 그리니........널 어디다

갖다 놔야 할지 ........선생님도 고민된다 얘 “

하면서 선생님은 엄마와 자기를 맘껏 칭찬해 준 적이 있었다.

육학년 담임 선생님은 엄마와 한 마을에 살던 어릴 적 단짝 친구 이었다고 했다.

둘은 같이 읍내 고등학교까지 다녔고,

엄마는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녔고, 선생님은 춘천에서 교대를 나왔다고 했다.

엄마의 탁월함은 서울에서 명문 여대에서 성악을 전공하면서 더 뛰어 났다고

하는데, 엄마가 자기를 덜렁 임신해서 배가 시골의 앞산만큼 불러서

혼자 그 시골 마을에 나타나자,

시골에선 서울에서 무슨 큰 괴물이 내려 온 듯이 다들 놀라서 입을 열지를 못했다고 했다.

마을에서 제일 잘나가던 계집아이 하나가 무슨 몹쓸 전염병에라도 걸려 온 듯이

마을은 소리 없이 술렁대고, 사람들은 엄마가 살던 친정집에 넓은 마당을

지나가기를 꺼려했었다고 한다.

농사처가 워낙 많은 땅 부자 외할아버지는 인근에 소문난 부자였지만,

딸의 그 모습에 충격을 받고 쓰러진 후,

3년을 못 견디고 돌아가시고, 외할머니도 그 후 얼마 안되어 세상을 떠나자

엄마는 그 많은 농사를 어린 은희를 데리고 다니며 지었던 것이다.

은희는 가끔씩 놀랬던 것이 그렇게 가늘어 보이는 엄마의 몸에서 어떻게 장사들이나 지고 다닐 만큼 무거운 곡식과 복숭아를 척척 따서 이고 들고 다니는지

은희는 그런 엄마가 밤에 자기 몰래 산삼을 먹을지도 모른다고 혼자서 우스운

생각도 해 봤다.

“ 처녀가 힘이 장사야, 저 힘이 어디서 나올까?”

“ 아휴, 말도 마요, 인생에 오기가 붙으면 황소도 때려잡을 수 있다잖아요.”

“저 집 처녀가 지금 남자한테 자식 까지 낳고 버림 받았다는데,

무슨 오기는 없겠수, 불쌍도 하지......쯧쯧 저 좋은 팔자가 어쩌자고 저렇게

부모 눈에 못을 박고 , 저리 기막힌 팔자가 됐는지........

어떤 놈인가 벼락을 맞을겨 ”

“ 저리 곱상한 여자를 버렸으니..........지도 아깝기만 하것죠,

벼락은 무슨 벼락이레요,

여자 버리고, 자식 버리고도 다들 팔자 피고 잘 만 살드만요 뭐.”

동네 아줌마들의 숙덕거리는 소리가 담장을 지나가도 엄마는 한 번도 그런 말에

대꾸를 하거나 그런 동네 사람들을 뭐라고 한 적이 없이 그 하얀 손이 구릿빛이

되도록 농사만 지을 뿐 이였다.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농사는 복숭아밭에서 복숭아꽃을 속아 내는 봄철에

커다란 복숭아밭을 가꾸는 일이였다.

한 번도 농사를 지어 본적이 없는 엄마는 땅을 놀리기만 하다가 어느 날 부터인가

그 넓고 넓은 복숭아밭에 들어가면 해가 져서야 나왔다.

“ 복숭아꽃이 너무 잘 피었어야, 올해도 우리 은희 복숭아 실컷 먹겠다.”

엄마가 지은 복숭아 농사는 그러나 늘 실패였고,

열매는 어쩌다가 하나씩만 매달려서 복숭아나무 가지가 썰렁 할 때가

더 많았지만, 그래도 은희는 그 복숭아밭에서 엄마를 보는 게 행복했다.

그건 엄마가 그 복숭아밭에서 가장 행복해 했기 때문 이였고,

복숭아꽃을 속아 낼 때 부르는 엄마의 노래가 가장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은희는 지금도 눈을 감으면 연분홍 복숭아 꽃잎 사이로 날아가는

엄마의 노래 가사들이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구름 같았다.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는 구름처럼 엄마의 노래는 한을 다 풀지 못하고

이 봉우리 저 봉우리를 떠돌아다니는 하얀 눈꽃송이 같은 조각구름처럼

아직도 고향의 산봉우리들을 넘나들면서 아름다이 메아리를 치고 있을 것만

같았다.

은희는 디저트로 나온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앞에 앉아 있는 타샤의 얼굴에서는 배가 불러서 행복한 아이의 표정이 나타났다.

실컷 젖을 먹고 너무나 행복해서 한 숨 잘 것 같은 그 행복한 표정이

은희로써는 오랜 만에 보는 인간의 먹는 즐거움이 갖다 주는 기분 좋은

만족감으로 다가 왔다.

소녀는 평상시에 음식을 배불리 먹어 보지 못해서 양은 그다지 크지 않지만

허기진 배를 채우고 나니 .......졸음과 피곤이 동시에 오는지 자꾸만 눈을

끔벅거리며 은희를 쳐다봤다.

은희는 그런 타샤를 보면서 그 소녀의 허기지고 지친 삶이 보이는 것 같아서

마음에 괴로움이 순식간에 덮쳤다.

“분명, 돈이 너무 필요해서 ‘음사이디지’를 이 어린 소녀가 하겠다고

온 걸 텐데.........집은 여기서 얼마나 멀까?

분명 나이로비 근처에 못사는 빈민가에서 왔을 텐데....

직장을 얻어 보겠다고 온 이 어린 소녀를 내가 일도 시켜보지 않고

여기서 거절을 한다는 건.........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지....”

“너네 엄마는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는 여자야”

화가 나면 한 번씩 자기 귀에다 대고 소곤거리듯 전했던 새 엄마.

그 새엄마 말대로라면 나는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는 여자의 딸이고,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어버린 내 친 엄마는 지금도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는 체.......

난 지금 아프리카 케냐라는 적도의 끝에 와 있는데,

지금 나는 저 어린 소녀에게 도대체 ‘인간에 대한 예의’를 어디서 얼마큼

어떻게 지켜줘야 하는 거지....

은희는 고개를 숙이고 커피 잔을 만지작거렸다.

“여기까지 온 차비와 나를 두 시간이나 기다린 보상비를 두둑하게 주고

넌 아무래도 힘을 모자랄 것 같으니 집에 갈래”

하고 말을 해야 하나?

아니면, 며칠이라도 일을 시켜보고 결정을 해야 하나......

은희는 배가 불러서 금방 동그래진 타샤의 볼록한 배를 쳐다보며 이런 저런

갈등을 했다.

그 사이 타샤는 배가 불렀지만, 은희의 표정 속에서 심각함을 느끼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 치마의 옷자락을 움켜쥔 손에서 긴장으로 땀에

흐르는 걸 느끼며 옷자락에 손을 갖다 대고 문질러 댔다.

땀을 씻기 위해서 라기 보다는 불안해서였다.

고개를 깊이 숙이고 커피 잔을 만지작거리며 커피를 한 모금씩 마시던

은희가 갑자기 얼굴 표정이 환하게 바뀌며 타샤 앞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타샤라고 했지, 타샤야 우리 이제부터 같이 살아 볼래.”

타샤가 숙였던 고개를 그때서야 얼른 들었다.

타샤는 갑자기 자기가 이 궁전 같이 큰 호텔에 온 것도 기적 같지만,

나이로비의 큰 아파트에서 사는 돈이 많은 한국인 사장, 아니

화가랑 같이 한 집에서 살게 된다는 게 믿을 수가 없었다.

“와! 역시, 하나님은 나에게 오늘 아침에 주신 응답을 이루시는 구나.

분명히 하나님은 나에게 말씀하셨어.

당신은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려 오셨다고.......

이런 일자리를 주신 것이야 말로 .........나처럼 가난한 자에게

가장 아름다운 소식이지 뭐겠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 순간 , 타샤는 속으로 하나님께 기쁨에 차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은희도 그 순간, 놀랍도록 변하는 타샤의 검은 눈동자를 보게 되었다.

타샤의 눈은 조금 전까지도 슬픈 낙타처럼 풀이 죽어 있었는데,

갑자기 유목민들이 목초지에 풀어 논 윤기 나는 한 마리 양처럼 금방

눈가에서 물기가 반짝이며 생명력으로 넘치듯이 새까만 눈동자는

기쁨과 환희에 차서 커다랗고 아름답게 변해갔다.


은희는 그런 타샤가 갑자기 너무 예쁘기도 하고 신기한 생명체를 앞에

놓고 있는 듯이 무엇엔가 홀린 듯이 그 크고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다

기억의 한 장이 또 스쳐갔다.

그날은 유난히 눈이 많이 와서 그런지 서울 시내에 택시들이 잘 다니지를

않았는데, 은희는 그날도 다른 날처럼 빵을 한 꾸러미 가슴에 안고

좁고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갔다.

두 사람이 함께 나란히 걷기에는 불편하고 좁은 가파른 골목의 끝 언덕에

자리한 고아원을 가기 위해서였다.

아이들이 있는 방과 식당에서는 춥고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감돌았고,

고아원의 여기저기는 추위로 인한 고장 난 수도와 막힌 하수도 등이

골칫거리로 수녀님들의 손과 발을 꽁꽁 얼어붙게 했다.

수녀님들은 이런 날씨에 빵을 사온 사람은 분명 천사가 보내준 양식을

받아 가지고 온 사람일거라며 농담을 하며 활짝 웃어줬는데,

그때 본 수녀님들의 눈과 아이들의 눈이 지금 타샤처럼 저렇게 아름다웠었다.

생각지도 못한 기쁜 일이 있을 때 기쁨과 가슴속에 작은 열정이 불타오르며

내는 저 눈빛,

은희는 너무 오랜만에 본 사람의 가장 순수한 눈빛 중 하나를 그 때

보고 또 오늘 본 것 같다.

추운 바람과 빵 한 보따리를 안고 고아원의 춥고 싸늘한 식탁에 앉았을 때

수녀님이 그런 자기를 꼭 끌어 안아주시면 그 수녀님의 넓은 품에서

새어 나오던 풀빵 같은 낯익은 냄새가 새삼 그리워졌다.

“얘들아 다 모여서 오늘도 천사가 배달해온 양식을 먹자,

제일 먼저 이 천사의 양식을 배달케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 기도부터

하고 먹어야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 좁고 가파른 언덕길을 이 예쁜 자매가 천사의 양식을 가지고

올라왔습니다. 이 맛있는 양식을 저희에게 먹게 해주신 하느님 참으로

이 감사를 무어라 말씀 드릴까요. 저희는 이 양식을 먹고 오늘도 하느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드리며

기도 올립니다.”

수녀님의 기도가 끝나자마자 아이들은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바쁘게들

고사리 같은 작은 손들을 놀려댔다.

추워서 목욕을 자주 못한 아이들의 손이 여기 저기 때가 낀 듯 더러웠지만,

은희는 그런 아이들의 손을 잡고 그날도 해가 질 때 까지 놀아 줬다.


새 엄마 말대로 라면 나 같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는 엄마 밑에서

자란 사람도 천사의 양식을 배달 할 수 있는 심부름꾼으로 하늘에서 계신

신이 써준 것이라면 난 얼마나 행복한 지상의 사람일까.

은희는 그날 참 기분이 좋았다.

자기를 ‘천사의 양식을 배달해 온 심부름꾼’으로 불러준 수녀님의 그 좋은

말을 들어서라기보다 이 세상 어딘가 에서는 자신도 남에게 뭔가를 해줄 수 있는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는 게 기뻤다.

좁고 가파른 골목 끝에서만 찾을 수 있는 그 고아원은 그래서 은희에게는

은신처요,

삶의 가장 큰 보금자리로 한 때를 자리 잡았었다.

고아원은 자신처럼 세상과는 동 떨어진 곳에 외롭게 있었다.

거대한 도시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고아원은 외딴집 같았고, 고아원의 마당은

자기가 두고 온 강원도의 깊은 산골짜기 마을에 앞마당 같았다.

복숭아나무만 없었지..........은희에게는 그 고아원의 마당이 고향집 앞마당처럼

느껴졌고, 수녀복을 입은 수녀님들은 왠지 모르게 자신의 삶의 비밀을 감추고

어디론가 사라진 친 엄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왜, 내가 중학교에 입할 때 엄마는 사라진 것일까?

내가 중학생이 되었으니........ 다 컸다고 생각하고 간 걸까?

누구에게.......어디로........엄마는 간 걸까?”

은희는 고아원 마당에서 빛나는 차가운 겨울 하늘에 별을 보면서

그 엄마가 간 하늘 저편 어딘가에 있는 별들을 찾아 봤다.

동서남북........어디인지........분간을 할 수 없는 ........어떤

공간에서 엄마도 살아 계시겠지.......

돌아가신 것은 아닐 거야.

나하고 헤어지기 며칠 전까지도 엄마는 큰 병을 앓거나 하진 않았으니까....

은희는 엄마의 노래가 다시 듣고 싶어졌지만, 서울에 있는 아버지의 집에

온 이후로 엄마의 목소리와 노래를 잊어버리려고 그 어느 누구의 노래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 가수가 나와서 노래를 불러도 그녀는 듣지를

않으려 했고, 오로지 듣는 음악이 있다면 그건 클래식 음악들 위주였다.

은희는 그 고아원을 찾아낸 이후,

여고 시절 내내 그 고아원을 은신처로 삼아 일요일이면 그곳으로 피난을

나왔다.

은희는 그 고래 등 같은 큰 집에서 일요일 마다 나올 때면 거대한 동굴 속에서

일주일을 박쥐처럼 살다가 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너 일요일 마다 어디 가니?”

명훈 오빠는 일요일이면 빵 보따리 , 초콜릿 보따리, 예쁜 인형들이 가득 담긴

쇼핑백을 들고 버스를 타는 은희를 발견하고는 밤에 몰래 자기 방에 찾아와서

물었다.

‘ 응 오빠는 몰라도 돼요, 전 제가 가고 싶은 곳이 있어서 가는 거고,

전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좋아요.’

은희는 짧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명훈이는 대학생이었고, 복학을 한 후라서 어른스러운 데도 있었다.

명문가의 자제답게 예의가 발랐고, 한 번씩은 은희에 대해서 깊은 생각과 사념에

사로잡혀 있는 듯 ........그녀를 보면 이마를 한 번씩 찌푸리며 괴로워했다.

“너 때문에 우리 집이 .......우리 부모가 ......명문가에서 밀려 난 것도

있지만, 그러나 나는 이 명문가의 빛나는 가문에 모든 걸 지켜낼 거야”


하는 의지도 그 표정에는 있어서 .........은희는 그런 명훈 오빠가 무섭게도

느껴졌다.

가문과 자기를 위해서라면 나중에 자기를 어디 먼 곳으로 보낼 지도 모르는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스치기도 했던 것이다.

“허술한데 다니면서 질이 안 좋은 사람들을 만나거나 너무 가난해서

매일 아버지한테 손을 벌리려고 쫓아다니는 그런 사람들 종류를

네가 벌써 만난다면 넌 아버지를 배신하는 거야.

너를 버리지 않고 잘 키워 보겠다고 아버지도

엄청난 모험을 하고 너를 집안에 불러 들였으니까.....

너 때문에 아버지가 힘들어 하는 것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해.

물론 우리 엄마는 더 힘들겠지만, 난 그런 우리 부모님을 네가 이해하고 네가

이 집에 들어 왔으면 수준 높은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

명훈 오빠는 딱 한번 자기 방에 들어와서 자기가 가는 곳이 고아원이라는 걸

안다는 듯이 말하면서 그런 고아들이나 만나는 일은 제벌인 아버지를 언제 힘들게 할지 모르는 일이 된다면서 일침을 가했었다.

그러나 은희는 그런 명훈 오빠 말을 무시했다.

왜냐하면 은희는 고아원에서 자기가 누구네 집에 딸인지에 대해서 말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신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 번도 누군가에 말을 거역하면서까지 타인들을 만나거나 사랑을 해 본 적은

없지만, 고아원에 일요일 마다 가는 걸 명훈 오빠의 말에 의해 빼앗긴다면 그건

자기 자신의 죽음을 눈앞에 둔 것처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기 힘들 것

같았다.

“이 넓고 큰 집에서 너무 부유해서 ........더 이상 갖고 싶은 것도 없는

이 집에서.........난 빠져 나가고 싶은데........... 지금은 거기 밖에 없는데...”

은희는 이 세상에서 그 고아원의 아이들만큼 그 당시 자기에게 동질감을

주는 사람들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옹기종기 고아원 마루에 앉아서 놀던 아이들의 얼굴에서 외로움이 배어 나오고

어디선가 먼 그리움이 아이들의 숨소리에 배어나올 때쯤이면 어느덧

고아원의 뜨락에 봄이 찾아 왔다.

기지개를 켜는 아이 같은 나뭇가지 사이로 노란 개나리꽃들이 만발을 했고,

하얀 목련이 사춘기 소녀의 젖가슴마냥 수줍게 감출 듯이 보일 듯이 나뭇가지 마다 흰 봉오리를 맺어 놓았다.

자기를 낳아준 엄마의 얼굴이나 젖 냄새를 잊은 아이들이

어느덧, 자라서 대 여섯 살이 되면 그들은 그들끼리 노는 법을 배우는데,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은 여름의 작열하는 태양이 찾아오면 옷을 훌렁 훌렁

벗어 던지고 드넓은 고아원의 마당으로 뛰어나와서 물장구를 쳐댔다,

은희는 그런 날이면 마당에 긴 호수를 수도꼭지에 묶어서 하늘로

물줄기가 치솟게 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물놀이를 해줬다.

부모가 없는 슬픔 따윈 잊으라고.........은희는 하늘에다 대고 소리를

치듯이 물줄기를 높이 하늘에다 대고 쏘아줬다가, 또 아이들의 발 아래로

쏟아부어대면 아이들은 그 물줄기를 쫒아서 여기 저기 마당 가운데를

뛰어 다녔다.

그럴 때 마다 은희의 마음속에 있는 어떤 분출 할 수 없던 슬픔도

시원하게 폭포수처럼 햇살 사이로 쏟아져 내려오면서

눈이 부실 정도로 물살은 순식간에 물방울로 변하며 하얗게 뿌려졌다.

어느 날은 그 물줄기가 분출할 수 없는 아이들의 원망과 슬픔이 한꺼번에

고아원 마당에 시원하게 솟구치듯 쏟아져 내리는 것 같기도 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은빛 물세례.

거기엔 그들을 이 땅에 지어내신 신의 눈물도 함께 쏟아져 내리는 것인지도

몰랐다.

은희는 특별히 그 고아원의 가을날을 좋아했었다.

나무들이 일 년 내내 입었던 자기 옷을 벗어야 하는 그 서글픈 시간이

바로 가을 이였다.

고아원 마당에도 금빛 융단처럼 샛노랬던 은행잎이 누렇게 변해가고

뜨거운 사랑을 가을 내내 혼자서만 해온 단풍잎의 그 빨간 정열도

어느 사이 시들어서 선홍빛의 붉은 피 같은 단풍잎들이 마당을 덮을 때면

늙은 원장 수녀님은 나뭇잎을 가슴으로 쓸어내 듯이 빗질을 하셨다.

젊은 날을 고아들과 다 보낸 늙은 원장 수녀님은 거북이 등 같은 손으로

낙엽들을 한군데에 모아서 태우시곤 했는데,

나뭇잎을 태우는 늙은 수녀님의 등 뒤에서 어느 날은 먼 나라 이국의 시인이

써내려간 시가 한 편 읽혀지기도 했다.

이 세상을 얼마나 능가하는 마력이기에

오늘 이 몸을 주님 곁으로 끌어올리느뇨?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기대어

찾는 자는 불행하려나!

불멸의 지혜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져 우리를 가르치기를,

‘사람의 아들아, 그대들 마음이 맺는

열매가 그 무엇이뇨?

허망한 마음을 가진 이들아, 잘못되어

그 맥박 치는 맑은 핏줄기도 헛되이

언제나 오직 그 손에 엊는 것은

배불리는 빵이 아니고

더욱더 굶주림을 갖게 하는

그림자뿐임을 아느뇨? 모르느뇨?

이제 내가 그대에게 권하노니,

이 빵은 천사의 양식이로다.

주님께서 밀 이삭으로 손수 만드신

향기 높은 이 빵이야말로

그대가 아는 세상 사람들의

식탁엔 결코 오르지 못하는 것이로다.

내게로 오는 자에게 주리로다.

오라, 살려거든

잡으라, 먹으라, 그리하여 살지어다,

.......

얽매인 이들도 다행이

너희의 굴레 밑에서 평화를 찾으리라.

결코 마를 리 없는 그 신선한 샘물에

몸을 기울여 목을 축이라.

이 물은 모든 사람을 부르건만,

우리는 어리석음 때문에

진흙 구덩이의 더러운 샘을 찾고

거짓이 고인 물을 찾아 뛰어다니누나.

그리하여 생명의 물은 달아나고

손에 남는 일도 없어라.

중학교 3학년 때 읽은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에서 알리사가 제롬에게

보낸 프랑스 시인 ‘라신’의 시였다.

은희는 타샤와 지금 먼 이국 땅 ,

아프리카 케냐의 한 호텔에서 타샤라는 처음 보는 배고프고 헐벗은 한 흑인

소녀와 한 끼 식사를 나누고 있다.

아 ! 얼마나 먼 시간을 돌고 돌아서 찾아온 시간들인가?

이렇게 가난한 아이와 함께 한 끼 식사를 한 것이..........

그 고아원을 떠나고 나서 처음 있는 일이다.

은희는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는 없는 엄마의 생존 여부도.....

서울의 그 큰 고래 등 같은 아버지 집도....

그리고 병석에서 눈만 끔뻑거리며 가쁜 호흡을 하다가 아무 말도 못한 채

7년 만에 돌아가신 새 엄마도.......

그리고 명문가를 지키겠다고 반듯한 이마에 선이 분명한 굵은 눈썹을 한번씩

찌푸리며 모으는 명훈 오빠도.

결혼해서 인간의 행복이란 행복은 다 만끽하며 사는 윤서 언니도 그리고 백화점의 갤러리도.......

이제는 자기와는 너무나 상관이 없는 먼 거리에 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들과는 너무나 닮지 않은 타샤와 이제부터 한 끼 빵을 먹게 될 것이고,

대학 강의실에서 그림을 전공하는 미대생들에게 렘브란트나 르노와르, 고흐를

말하지 않고, 이곳에 있는 흑인 아이들에게 ....

그리고 타샤에게 그들의 그림을 가르치게 될 것이라는 예감을 했다.

그건 예감이라기보다 내일이면 눈앞에 나타날 현실 일 것만 같다.

은희는 커피 잔에 커피가 식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잔을 내려놓지 못하고

다시 한 번 라신의 그 시들을 마음속으로 조용히 읽어 내려갔다.

언젠가 지금 식탁에 마주 앉아 있는 타샤에게 들려주기 위해서.........

2부. 식탁에 앉아서


은희는 타샤와 함께 시장을 봤다.

작열하는 태양이 내리쬐는 시간을 피해서 나이로비에서 제일 큰 슈퍼나

한국인 마트를 찾아 다녔고, 거리에 있는 노점상에도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매일 아파트 냉장고에 먹을거를 날랐고,

둘이서 식탁에 마주 앉아서 빵을 먹고 고기를 구은 것을 먹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그러다 둘이서 제일 좋아하게 된 것은 얼음과 우유가 가득 든 비엔나 아이스커피를

만들어 먹는 일이였다.

두 사람은 어느 사이 사랑이 시작됐고,

사랑하면 생기는 반응들이 서로에게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건 매일 보지 않으면 안 되는 반응들이고, 함께 있으면 행복해지는 반응들이였다.

타샤는 보기 보다는 일을 너무 깔끔하게 잘하는 손재주가 탁월한 소녀였다.

집안 청소나 빨래 같은 걸 곧잘 했는데,

심부름을 시키면 어찌나 똘똘하게 일을 하는지

은희는 은행 심부름까지 시켜도 아무런 손색없이 일을 처리해 오는

타샤의 그 조숙하고 현명함에 깜짝 깜짝 놀랐다.

그러나 타샤가 잘 못하는 것은 음식이었다.

은희는 타샤가 만든 음식은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음식을 별로 만들어 본 적이 없는지........ 타샤가 해 줄 수 있는 음식이라고는

커피를 타주는 일과 빵이나 고기를 데우는 정도였다.

시험으로 김치만 넣은 김치볶음밥을 시범을 보여주고 그대로 해보라고 해도

타샤는 김치는 까맣게 태우고, 밥은 질척질척 거리게 볶아서 김칫국에 말은

김치볶음밥을 해 놓았다.

“ 타샤, 할 수 없다, 배고픈 사람이 샘물을 판다고 했으니..... 내가 요리는

할 테니....... 설거지는 네가 깨끗하게 하도록 ...”

정말 타샤가 닦아 논 접시에서는 유리알이 굴러갈 정도였다.

“ 이 소녀가 요리 빼고는 완벽하군 .....호호 ”

은희는 참 우습기도 하고 음식을 하는데 걸리는 시간들 때문에 그림에 몰두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게 느껴지긴 했지만,

“7년 동안 못 그린 그림을 한꺼번에 다 그릴 수 없듯이........

타샤도 내가 먹고 싶은 요리를 한꺼번에 다 익힐 순 없겠지.......

천천히 가르쳐 주면 나중엔 할 수 있겠지.”

하며 스스로를 위안하며 오히려 타샤에게 요리를 해주는 게 행복했다.

자신이야 말로 재벌 아버지 만나서 요리를 해 먹어 본 기억은 별로 없지만,

요리 책을 펴 놓고 가끔씩 해 보는 이런 저런 요리들이 재미가 붙기도 했다.

더구나 혼자서 먹기 위한 요리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 먹기 위한 요리를 하는

기분은 서른일곱 살까지 느껴보지 못한 묘한 설렘도 있었다.

그래서 은희는 통장에 많은 돈이 있었지만, 호텔이나 식당에 가서 음식을

사먹는 일에 횟수를 차츰 차츰 줄여가기 시작했다.

은희는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하면서 맨 처음 모델로 그린 사람이

타샤였다.

빨래를 소파에 앉아서 개고 있는 타샤의 모습을 그렸고,

또, 과일 바구니를 들고 있는 타샤의 웃는 얼굴을 그렸고,

빵을 입 안 가득 물고 있는 배부른 타샤의 얼굴과 볼록 나온 배를 그렸다.

타샤는 가사 일보다는 모델로 서는 일에 더 즐거움이 있는 듯 했는데,

그건 은희가 자기를 보고 그리는 그 모습에서 어떤 인간의 따사로운

애정이 자꾸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날도 은희는 타샤가 해바라기 꽃을 한 바구니 들고 있고 있는 모습을 모델로

넓은 거실 한 쪽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석양이 지기 전에 시간이라서 그런지 옐로우 빛의 채광이 거실 가득 쏟아져

들어 왔고, 타샤의 까만 얼굴과 노란 해바라기가 잘 어우러져 보고만

있어도 행복한 그림이 나올 것 같았다.

은희가 막 노랑 유화 물감을 뭉개서 해바라기 꽃을 그리려고 하는 데 전화가 한통

걸려 왔다.

“ 헬로우....”

“ 네, 저 혹시 거기가 하은희 화가님 집인가요”

“ 네, 제가 하은희인데요.........”

상대방은 자기 또래의 젊은 남자였다.

그러나 목소리로는 누군지 전혀 짐작이 안가는 목소리였지만,

서울에 갤러리에 관련된 화가나 손님인가?

은희는 대수롭지 않게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저쪽에서의 반응은 뜻밖에 너무 기뻐하는 목소리가 담겨왔다.

“ 하은희.......네가 하은희 맞어, 강원도 태백산 밑에 달월 초등학교 출신 하은희.

잡지에서 널 봤어. 난 네가 그 하은희 인지 금방 알아버렸는데....

난 민기야. 서 민기. 육학년 때 너 부반장 할 때 내가 반장한 거 알지”

“ 서 민 기 ”

은희에겐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이름이었다.

나에게 강원도 정선에 달월초등학교라는 학교에 대한 기억이 하나라도 있는 건가?

난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는데........

그러나 분명 은희는 친엄마랑 함께 살던 복숭아밭에 그 집과 태백산 밑에 작은

마을과 그리고 달월초등학교라는 지명들이 순간,

자기의 기억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이 낮선 아프리카 케냐 땅에서 내가 어떻게 삼십년 가까이를 잊고

지냈던 그 어릴 적의 지명과 초등학교 이름과 그리고 서민기라는 남자애가

떠오를 수 있을까? 싶은데..........다른 것은 다 기억이 났지만,

서민기라는 이름만은 금방 기억에서 돌아오질 않았다.

다만, 그 순간 은희는 숨이 탁 막히면서 친 엄마 이름이 떠오를 뿐이었다.

“ 내 엄마 이름은 오은지였는데.......”

내 이름도 엄마 이름에서 가운데 은자를 따서 은희로 엄마가 지어 준건데,

그런데 이 남자 서민기라는 이 남자는 내가 부반장 할 때 자기는 반장을 했다고

이런 우스운 스토리를 갖고 자길 기억해 달라고 하니..........

이 남자를 난 통 기억할 수 가 없는데...

“ 내 이름이 잘 기억이 안 나나보네.

하긴 네가 중학교 입학하기 바로 전에 이사를 했으니까,

벌써 헤어진 지 33년쯤 지난 것 같다. 나도 지금 케냐에 와 있거든.

너 어디에서 그림 그리니...........”

세상에 무슨 남자가 33년만이라면서 어제 본 것 같이 말을 하는 건지

은희는 도무지가 이 서민기라는 남자가 종을 잡을 수가 없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다혈질에 급한 남자 성격 같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다짜고짜 반말부터 하는 이 남자는 너무나 예의가 없는 스타일에 남자다.

은희는 속으로 기분이 은근히 나빠지려고 하는 걸 느끼면서 .......

다시 기억을 더듬었다.

서민기.........내가 육학년 때 부반장을 할 때 자기는 반장이었다고.....

“ 아! 그 서민기 ”

은희는 갑자기 어떤 추억이 하나 떠오르면서 하마터면 전화기를 놓칠 뻔했다.

“ 뱀을 잡아서 막대기 꼭대기에 걸쳐가지고 나타나서 나를

기절시켰던 그 서민기 반장 너 ”

은희는 자기도 모르게 그 말을 수화기 저편에 던져버렸다.

“ 응 , 너 그 사건 아직도 기억하니 ...........”

“ 야, 서민기 나 그 때 이후로 네가 무서워서 싫어진 거 알어 ”(물음표? 느낌표?)

둘은 전화 수화기 너머로 갑자기 무조건 반말이 통했다.

그건 뱀 사건 때문이었다.

은희는 정말 그날 이후로 반장 이였지만 서민기를 싫어했다.

공부 잘하고 선생님 말 잘 듣던 똑똑한 반장이 아니라

세상에서 제일 질이 나쁜 집에 망나니처럼 보였고,

뱀이나 들고 다니는 원시인들처럼 머리도 아주 나빠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서민기가 아프리카 케냐에서 자기를 찾다니........

어쩌나, 다시 모른 척 할까? 내가 미쳤지......왜 갑자기 반말을 하고 그랬지.

은희는 일이 분 사이에 벌어진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할지

잠시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러나 이미 말문을 튼 상태였고, 초등학교 친구들은 오십에 만나도 역시

초등학교 시절에 모습 그대로 서로 대하듯이 .......

왜 서른일곱이나 된 내가 .......... 저쪽에서 초등학교 친구 대하듯이 대한다고

무슨 망발을 한 것인가? 그러나 이미 사태는 수습이 곤란하다.

은희는 진땀을 빼듯이 수화기를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옮겨본다.

“ 하은희, 우리 지금 만나자, 여기 호텔 커피숍에서 저녁 7시쯤에

만날까?”

그는 일방적이었다. 그런데 은희는 자신도 모르게 그 일방적 약속에

시간을 정해주고 전화를 끊었다.


“ 내가 왜 그를 여기 아프리카에서 만나야 하지..........그것도 친엄마에

관한 기억을 다 가지고 있는 그 고향 친구를........”

서민기라는 그 똑똑한 남자애가 가지고 있었던 모습 중에서 제일 싫어하는

추억이 떠올라서 기절할 뻔 했는데,

그런 남자애를 이곳 아프리카에서 만나기로 하다니....

은희는 전화를 끊고 나서 난감함에 가슴이 답답할 지경이었다.

33년 동안 한 번도 보지 않고 살았던 고향이란 이름에 친구를

아프리카 케냐라고 해서 덥석 만난다는 것은 도무지 은희 자신의 성격으로는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이였다.

대인관계에 대한 공포심까지 있는 은희로써는 이런 식으로 약속을 잡거나

누구를 만난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사실이었다.

사람을 만나는 일에서만큼은 늘 조심하고 두려워했던 자신의 성격이

어느 사이 변했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이 돌발적이 상황이

머리와 가슴에서 정리가 되질 않아서 가슴이 두근거리며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은희는 그건 어쩌면 엄마의 소식을 듣고 싶어서 자기도 모르게 자석처럼

일방적인 전화 한 통화에 그에게 끌려 나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때 반장을 하던 서민기는 무슨 직업을 갖고 있길래.........여기에 와 있는 거지.

내가 다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을 알린 잡지는 국내의 유명한 그림 전문 잡지 인데,

그런 수준의 잡지를 보는 걸 보면 ....... 그림에 관심이 있는 일을 하는 것 같은데.

호텔 커피숍에는 푸른 셔츠 남방에 수동식 독일제 카메라를 든 남자가 서민기였는데, 예전의 모습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선이 굵은 호남형의 얼굴로 삼십대 후반에 남자보다는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느낌을 풍겼다.

“ 어! 하은희......나 서민기야 ”

그러나 서민기는 처음 보는 은희를 보고 너무 놀란 표정을 지었다.

“ 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 너 초등학교 때 키 작았잖아. 맨 앞줄에

앉아서 부반장 했는데.........언제 이렇게 키가 컸니?”

“ 응, 고등학교 때 갑자기 십오 센티쯤 커서 이리 된 것 같아”

둘은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그냥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가서

자연스레 계속 서로 반말을 하게 됐다.

서민기는 자기는 지금 한국의 방송국에서 보도국 피디 일을 한다고 자신을 소개

했다.

“ 네가 방송국 피디........가 됐어. 그것도 뉴스를 하는 보도국에서 일한다고

너무 잘 어울린다. 공부 잘하는 네가 뱀을 잡아가지고 와서 우리 여학생들 앞에서

들고 서 있어서 난 공부 잘하고 반장인 네가 그런 원시적인 일을 해서 내가

그것 때문에 더 놀랬는데, 너는 역시 뭔가를 잡아내고 추리하는 그런 일이

잘 맞나보구나.”

“ 하하하.... 그때는 정말 어린 시절이었고, 우리 산골에 남자애들은 산에서 토끼잡고 참새나 꿩을 잡아서 구워 먹는 일이 최고로 재미있는 일이였지.

그런데 사실 나도 뱀은 너무 무서워했는데, 그날은 나도 사탄에 뒤집어 쓰인

날 이였던 것 같아. 왠지 아니 나도 여학생들 앞에서 호기부리고

나서 그날 밤엔 집에서 이불에 오줌을 싸고 잤어야....

그래서 우리 엄마한테 쫓겨 날 뻔 했잖니 하하하....”

“ 뭐 ! 그런 황당한 뒷담이 있을 줄이야....너도 간이 작긴 작구나..... 난 나만 기절한 줄 알았더니........너도 남자였지만 어리긴 어렸구나.... 오줌까지 싸다니 호호”

“ 그래 우리는 그때 다 어렸지.........나이도.....마음도...... 키도 작은 ....”

“ 시시한 뱀 얘긴 그럼 그만 하고 넌 왜 어쩌다가 방송국 보도국에 피디가 됐니?

그 얘기 좀 해봐”

“ 글쎄, 나도 어쩌다 보니 사법고시를 해서 판검사가 돼서 시골에 계신

아버지 어깨 좀 한번 으쓱하게 해드릴까 했는데,

공부를 파고들어서 하는 게 자신이 없기도 하고 난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 내내

언론에 관심이 자꾸만 가더라구......그래서 방송국 피디 시험 본거지 뭐

어떻게 보면 산골짜기에서 세상 구경 못했던 한이 있어서 인가 싶기도 하고...

허허허 ”

“ 그래 방송국 일은 재미있어?”

“ 세상에 있는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

안 좋은 일이 제일 먼저 들려오는 곳이 보도국이거든.

전쟁이든 사고든.......... 우 끔찍하지 뭐.

그 중에서 어떤 뉴스를 헤드라인에 넣느냐...... 어떤 뉴스를 빼느냐,

이런 걸 순식간에 판단해서 결정하고 전 국민이 그걸 보게 한다는 건

정말 때로는 고통스럽고 힘들어 ”

“ 너도 힘들겠다. 직업 스트레스 땜에 ”

은희는 어느 사이 서민기가 육학년 때 반장이 돼서 부반장인 자기에게

얘들 자습 시키는 게 힘들다고 하소연 하는 것처럼 들렸다.

둘이는 가끔씩 선생님 심부름으로 늦게까지 학급에 남아서 환경정리나

선생님이 시키는 일들을 하다가 같이 하교를 한 적이 있었다.

파랭이 꽃이 나부끼는 산길을 돌아서 둘이서 걸어 올 때면 반장인 민기는

은희에게 얘들이 자습시간에 너무 떠들어서 자기가 반장 노릇을 하는 게

힘들다고 어리광처럼 투덜대기도 했다.

“ 은희야 나 배고파, 우리 우선 저기 레스토랑으로 자리 옮겨서

저녁 먹으면서 얘기 하자 ”

둘은 저녁을 먹으면서도 어쩐지 다 큰 어른들이 좀 덜 자란 어린애들

티를 내듯이 서로 머쓱해 했다가, 다시 친해졌다가를 반복하면서

밥을 먹었다.

서민기는 아주 똑똑한 모습을 보일 때 마다 손을 번쩍 들면서 선생님께

다른 아이들이 하지 못하던 질문을 해대던 시골아이의

그 어딘지 모르는 촌스러운 똑똑함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서민기의 촌스러운 똑똑함이 오늘의 모습을 만들어 낸

것 같았다.

촌스럽지만 정직한 저 모습.

어딘지 그에게는 아주 걸맞은 모습이었다.

“ 은희야.......

난 사실 네가 재벌 집 딸이라서 만나기 싫었거든.

네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다 알고 있었어.

네가 네덜란드에서 대학 전임강사로 초빙돼서 국내에 들어올 때부터

난 네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사실 네 거동을 대충 다 알고 있었어.

직업상 얻는 정보도 있었지만, 난 너를 대학 때 부터 찾았었거든.

너를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면 만날 수 있다는 희망만으로 공부한 적도

있었는데........

그렇지만, 네가 들어가 있는 그 부잣집에는 연락할 수가 없어서

한번쯤은 꼭 너를 만나보고 싶어도 참았는데, 네가 그 재벌 집을 나와서 아프리카

케냐에서 그림을 그릴 줄을 정말 꿈에도 생각을 못했어.

어제 그 잡지를 보기 전에는 ”

은희는 왜 서민기가 자기를 만나고 싶어 했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그의 눈빛에는 어떤 그리움이 들어 있었다.

오래된......듯한.

은희도 초등학교 친구라고는 서민기가 다였다.

그가 뱀을 들고 나타나 장난을 치기 전에는 .

그러나 은희는 그 날 이후, 다시는 서민기와는 말도 잘 안하려 했었다.

서운한건 서민기였지만, 그 때 이미 사춘기의 감정들이 오고 갈 나이라서

서민기는 자신의 속내를 들킬까봐 오히려 두려워했는데,

은희가 자기를 피해서 다니자, 오히려 자기감정을 들킬 일이 없어서

어린 마음에도 더 편했다.

그건 똑똑하고 다부진 서민기로서는 은희처럼 동네에서 모든 사람의 관심인

은희의 엄마와 은희의 존재가 자기라는 사람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갖는다면 그건 더 큰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어리지만 잘 알고 있었다.

“ 결혼은 했어?”

결혼에 관해 먼저 물은 건 은희였다.

왜냐하면 자신은 이미 잡지에 실린 대로 미혼인 걸 그도 알 테니 ...

“ 응, 난 결혼 했어. 한 오년 정도 된 거 같아 ”

“ 그럼 아이들도 있겠네. ”

“ 아이는 없어.... 아내가 아이를 못 낳아서 ..... ”

“ 왜? 무슨 이유가 있어? ”

“ 응 ...... 아내가 암 투병 중이야.... 벌써 3년째야 ”

조금은 흥분 됐던 자리에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한 차가운 공기가 감돌았다.

은희 역시 아프고 힘든 기억의 자리인 고향에서의 어린 시절 친구를 만났는데,

자신의 과거가 아픈 만큼 지금의 자리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서

입맛도 안돌았지만, 고향 친구에게 예의라도 지켜야지 하고 억지로 스프를

떠 먹고 있었는데, 서민기 아내가 암으로 아이도 못 낳는다고 하는 소리를 듣자,

갑가기 과거 자신의 아픔 보다 지금 현재 이 남자의 아픔은 더 비극적으로 들렸다.

“ .......암?? 어쩌다가 그렇게 됐어? 무슨 암인데?”

“ 난소암이야....... 자궁도 다 드러내고 난소도 다 잘라 내고 그랬어.

너무 늦게 발견돼서 ........병원에서는 희망이 없다고는 했어.

그래도 수술하고 항암하고 방사선까지 했는데,

항암이 끝나고 지금은 시골에 내려가서 간병인하고 둘이서 지내고 있어”

“ 간병인하고 둘이서....”

“ 응 , 그 사람은 살려고 하는 의지보다는 죽음을 준비하려고 해.

아내는 참 현명한 여자거든. 어차피 죽음의 선고를 받은 몸인데,

너무 살려고만 하다보면 언제 죽음이 찾아 왔을 때....

그때는 자기가 아무런 준비를 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야.

인간은 태어났으면 그 다음엔 살게 되어 있는 거고,

그리고 그 다음에 순서는 죽으러 가야 하는데.......왜 사람들은

그 죽음을 피하려고만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거야.

자기 자신은 남들보다 어쩌면 조금 일찍 죽음이 찾아 왔을지라도

그 죽음을 담대하게 받아들이고 싶다는 거야.

암이 일찍 발견되어 삶에 대한 희망들이 많이 남아 있는 시간들이

충분했다면 그런 생각을 안했을 수 도 있어.

그런데 아내가 암이 발견되고 나서 병원에서도 사실 너무 늦었다고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말을 먼저 했거든.

그래도 수술을 받고 항암까지 하고 그걸 이긴 건 기적 중에 기적이었어.

그래서 병이 발견된 이후에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걸 항상 감사해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고 할까?

하루 한 시간이 너무 소중하고 너무 감사 하다는 거야.

작년부터 아내는 신이 있다면 정말 믿어 보고 싶다고 아내는 말했어.

그리고 그 신이 자기에게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다면 그 일에 목숨을

걸고 그 일을 다 해놓고 하늘나라에 가고 싶다고 했어.

그런데 자신은 지금 신이 자신에게 이 땅에서 준 자기에게 하라고 지시한 그 일은

무엇인지 도무지 찾을 길이 없다는 거야.

남편인 나를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지극히 당연하지만, 사랑하는 남자에게 지금은

밥 한 그릇도 자기 힘으로는 해줄 수 없다는 게 참 슬프다는 거야.

내 아내는 하루에 한 시간 이상은 아직도 활동을 잘 못하거든.

이젠 몸이 너무 쇠약해져서 일상생활이 불편하게 된지는 오래 됐어.

난 아내가 요양원에서 의사랑 간호사들에 손에서 있길 원했는데......

아내는 병원 분위기가 나는 요양원이 싫다고 해서 강이 보이는 곳에 별장을 얻어서

간병인과 함께 보낸 거야.

지금 내 아낸 그 곳이 너무 좋다고 매일 편지가 와.

그런데도 난 아내를 그렇게 보낼 순 없다는 강박관념이 날 사로잡고 있는 것 같아.

어떻게 보면 난 아내의 죽음을 전혀 받아들이질 못하는 거지.

정확하게 말하면 아내가 죽어가는 시간을 난 지금 전혀 준비할 수가 없어서

세상과 아내에게서 도피중인 거나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여기까지 왔겠지. 지난주에 회사에 휴직계를 냈거든.

몇 달 쉬면서 그 사람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아님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살릴 방법은 없는지 .........너무 고민이 되거든.

내가 해줄 수 있는 차원의 일은 다 끝났거든. 지난 3년 동안.

최고의 병원에서 수술을 두 번씩이나 했고,

항암에 방사선 .......의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고,

그런데 자꾸만 다른 장기로 전이가 되고 있어서 이젠 뭔가를 준비할 때가 되긴

된 것 같아.

나도 그녀를 위해서라면 안 해 본 것이 없을 정도로 최선을 다 했어.

내가 사랑한 여자였으니까.....

난 지금도 아내를 사랑해....그런데 정작 아내의 죽음 앞에서 나는 대신

아내 대신 죽어 줄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더라구.

하다못해 내 몸의 일부분의 장기라도 떼어서 주고 싶어도 그것도 전혀 아닌

상태니 말이야.

그래서 인간적인 내 방법은 다 내려놓고 여기에 있는 제일 친한 친구를

찾아 온 거지.

그 녀석이라면 신이 가진 답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

난 인간이고 인간이 인간을 어떻게 죽음 앞 에서 살리겠니?

하지만 그 녀석이 믿고 있는 신은 무슨 답이 있으시겠지 싶어서 그 친구가

믿는 신에게 해답을 찾아보려고 여기까지 왔어.

아니, 어쩌면 난 도망자인지도 몰라....... 아내의 죽음이 이젠 두렵다 못해서

도망치고 싶은 도망자일지도 .....모르겠어 ”

“ 민기야......많이 힘들었겠구나.

그런 상황 속에 네 인생의 답을 알 것 같은 그 친구를 만나러 이 먼 곳까지 왔는데,

난 어쩌다가 네 인생에서 여행자중 한 사람으로 함께 만나게 된 건지

참 고맙기도 하고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뭔가 있었음 좋겠다.”

“ 은희야, 난 널 언젠가는 만나게 되리라 생각은 했었어.

이런 곳에서 이럴 때 만날 수 있다는 건 ......상상조차도 안했지만,

아무튼 내 인생의 한 페이지에서 넌 분명 살아 있는 사람이었고,

언젠가는 가장 좋은 추억의 한 페이지를 너 때문에 만들게 될 거라고

믿고 살아 왔었어.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나도 꿈도 못 꿨었지.”

“ 민기야 네 친구는 어떤 신을 믿는데, 그 사람은 어떤 일을 하는데

어떻게 넌 친구에게 죽음에 문제에 답을 얻으려고 하는 거야.

그 친구가 뭐하는 사람인지 정말 궁금해지네?”

“ 응 선교사야........ 허 선교사라고....... 나이로비에서 두세 시간 거리에 가면

할렘가 같은 빈민촌이 있다는데 거기서 목회를 하고 있거든 ”

은희는 습관처럼 숙였던 고개를 가만히 들고 서민기의 날카롭지만 예리하고

차분한 눈빛을 잠깐 들여다봤다.

그리고는 은희는 갑자기 서민기의 손이라도 잡고 나도 너에게

네가 이렇게 힘들 때 아프리카 케냐까지 찾아올 수 있는 그런 친구로 지금까지

지냈다면 얼마나 좋았겠니 .......라며 그를 깊이 위로 하고 싶었다.

난 누군가에게 왜 그렇게 절박하고 절실한 친구가 한 번도 되어 주지

못했을까?

은희는 새삼 자기 주변의 친구들을 떠올려봤다.

서른일곱 해 동안 한 번도 자기를 그런 절박함 속에서 찾아온 사람은

단 한 친구도 없었다.

아니, 자신 스스로가 삶에 지쳐 있을 때 친구를 찾아 가 본적은 단 한번도

없었고, 그런 친구를 만들지도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그 순간 떠올랐다.

사람을 보면 벽을 쌓고 방패로 막아서 다 물리치듯이 하고 스스로의 감옥 안에

갇혀 살던 청춘이 아니었던가...

“ 서민기. 난 역시 인생에 실패한 사람이구나. 너를 보니까.”

“ 그게 무슨 소리야 ”

“ 응 , 난 한 번도 너처럼 그렇게 힘들 때 나를 찾아와준 친구나 가까운 사람이

없었거든 .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나쁜 인간이면 나보고 자길 도와달라고

찾아오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제대로 없었을까........”

“ 응.......그건 나도 그래. 나도 지금은 너무 힘드니까....... 답이 없으니까?

한국에서 케냐까지 선교사 하는 친구를 찾아온 허술한 인간이야.

그런데 내 친구 허 선교사는 정말 달라.......... 이 세상의 어떤 사람하고도....”

“ 선교사님의 어떤 점이 그런데.......”

“ 그 친구는 성자야........ 성 프란체스코 신부님처럼 사는 친구지”

“ 성 프란체스코 신부님처럼 살아?

어떻게 살 길래.....”

“ 하은희......너한테도 소개 시켜줄려고 생각하고 왔어. 내일 시간되면

나랑 같이 내 친구가 있는 케냐의 빈민굴이라는 그 할렘가에 들어갔다

며칠 같이 갔다 올수 있겠어?

원래 케냐에 올 때는 너를 만나려니 꿈도 꾼 적도 없었고, 내가 이곳에 온 줄은

아무도 몰라, 방송국에서도 집안에서도 친구들도 아무도 모르게 왔어.

아내의 죽음의 문제가 3년씩이나 나를 짓누르니까 나도 이젠 너무 지쳐서

나도 모르게 어디론가 훌쩍 한번쯤은 떠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어.

회사에다는 아내 병간호 한다고 휴직해놓고........ 정작 난 친구를 찾아서

이 먼 곳에 와 있으니 말이야.

그런데 어제 한국 식당에 들렸다가 그 식당에서 네가 실린 미술 전문 잡지를

우연히 보게 됐어.

그 식당 주인이 너를 잘 안다고 하더구나.

네가 그 식당에 자주 들린다고.....네 그림에 펜이라고 하면서 네가 나온 잡지를

식당에 놓고 보셨는데, 내가 우연히 또 보게 된 거지.

그래서 널 보자마자 너하고 같이 그 친구를 찾아 가고 싶은 생각이

불같이 일어나는 거야. 그건 왜 그런지 이유를 나도 알 수 없었어.

몇 십 년 만에 잡지에 화가로 나와 있는 네 그림과 프로필 사진을 본 것뿐인데,

난 네가 나와 동일한 시간에 한국도 아닌 아프리카에 그것도 한 지역에서 있다는 게

기적처럼 느껴졌고, 네 그림을 보니까 난 네가 내가 6학년 때 나는 반장을 했고

너는 부반장을 했던 그 하은희라는 생각이 분명하게 들어 왔어.

그래서 오늘 날이 밝자 마자 전화 할까 하다가 열 세 시간을 비행기를 타서 그런지

어제도 호텔 방에서 몸을 일으킬 수가 없어서 하루 종일 밥도 안 먹고 잠만

잤거든. 그래서 오늘은 몸을 좀 회복하려고 호텔에서 밥도 먹고 목욕도 하고 그러고 있다가 너한테 오후에 전화를 한 거지. 그리고 저녁을 먹자고 곧바로 약속을 해서 서둘러 너를 만난 것도 나의 이런 급한 일정도 있지만, 너하고 같이 허 선교사 있는 데를 가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 강하게 왔거든.

내 감정에 소용돌이치는 것에 네가 당황해 하는 걸 알면서도......내가 참 황당한

놈이지........은희야. ”

“ 아니야, 난 네 얘길 듣고 보니 네가 나한테 전화를 해준 게 너무 고맙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여기서 자리 잡은 지 이제 겨우 석 달째야..

생각조차도 못한 아프리카 케냐의 화실이 생긴 셈이지.

우리 아버지의 뜻대로라면 난 새엄마를 병간호 한 대가로 받게 된 백화점에

유명한 갤러리나 잘 운영해야 하는 그림 장사가 되어야 하는 건데,

나도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아버지의 뜻에 맞게 그림 장사를 잘 할 자신도 없었고

그렇다고 내 팽개치고 말 수도 없는 사업처가 생겨서 고민을 하다가

그 갤러리는 전문가에게 맡기고 난 유럽 여행을 떠났던 건데......

사실 유럽으로 여행을 하려고 한건 내가 유학했던 프랑스 파리에 있는

미술대학 근처에서 다시 새로운 그림을 시작하고 싶어서였거든.

그곳에서 작은 아파트 하나 얻어서 혼자서 그림을 그리다보면 스무 살에 그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열정만 가지고 그림을 그리던,

그 시절의 열정이 어쩐지 되살아 날 것 같아서.......난 거길 가고 싶었어.

난 사실 우리 새 엄마 병간호 하면서 내 삶의 의미를 전혀 알지 못했거든.

그림을 그리던 이십대는 그림으로 뭔가가 되어 보고 싶었어.

그래서 이룬 것이 화가란 타이들이였고, 미대 전임강사라는 직업 이였겠지.

그런데 그게 그렇게 가치 있는 건 아니란 걸.......난 새엄마의 병치레를 통해서

알게 됐어.

우리 새엄마는 정말 대한민국이 알아주는 명문가의 딸 이였고,

최고의 명문 여대에 유학파에 뭐 하나 모자란 게 없는 여자였어.

그런데도 7년 이란 긴 시간을 중풍으로 누워서 자기 손으로는 물 한모금도

못 마시고 정말 뼈하고 가죽만 남은 채 돌아가셨거든.”

ㅡ 김재현 작가


네가 새 엄마 병간호를 7년씩이나 했다고.......너 참 대단한 인간이구나.

역시 난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어....후후 ”

서민기의 얼굴에 갑자기 어두운 방에 전기불이 들어온 듯이

환한 빛이 들어왔다.

소풍을 나온 어린 초등학생이 오래된 늙은 소나무 아래에 선생님이 감춰둔

‘보물찾기 쪽지’를 찾은 것처럼 감격에 찬 얼굴 같기도 했다.

초등학교 시절에 소풍을 가면 으레 선생님들은 점심시간 이후에 보물찾기를

할건데 수풀이나 나무 주변을 찾아보라고 하면서 ‘보물찾기 쪽지’를

그런 은밀한 곳에 숨겨 두셨다.

점심을 먹고 난 아이들은 삼사오오 짝을 지어 ‘보물찾기 쪽지’를 찾아서

나무 밑이나 수풀을 뒤졌는데,

그 때 그 쪽지를 발견한 아이들은 소리를 치며 선생님께 달려갔고,

선생님은 준비해온 공책이나 연필, 지우개를 선물로 하나씩 주셨다.

선물이 대단한 것도 아니었지만, ‘보물찾기 쪽지’를 발견한 아이들은 좋아서

펄쩍펄쩍 뛰면서 선물을 받아왔고, 그 쪽지를 발견하지 못한 아이들은

집에 올 때 까지 풀이 죽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서민기의 표정엔 그 보물찾기 쪽지를 발견한 아이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억지로 애써서 참으려고 하는 얼굴이다.

그건 옆에 있는 친구가 그 쪽지를 찾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걸 보았기 때문에

조금은 그 감정을 숨기려는 그런 순수한 계산이 포함된 얼굴이다.

서민기는 방송국에서 매일 하는 생방송 뉴스의 보도국 피디로 일하는 것과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시간을 보내는 아내 사이에서

어느 것 하나만을 선택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3년이나 보았다.

그런데 이 여자는 도대체 자길 낳아준 엄마도 아닌 새 엄마란 존재에게

왜 그런 희생과 수고를 했단 말인가?

서민기의 눈에서 신기한 물체를 보는 듯이 다시 한 번 은희를 향해서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 강렬하게 쏟아져 나왔다.

“ 내가 내 친구 허 선교사를 만나러 온 게 신의 뜻이 아니라

너를 만나서 무슨 답을 듣게 되는 건 아닌가 싶다. 은희야”

“ .......그게 무슨 이상한 소리지?

난 우리 새엄마 사랑해서 병간호 한 게 아니야.

너하고는 완전히 달라.

넌 너의 아내를 사랑하잖아.

그러니까 더 괴로울 수 있어.

난 너처럼 그렇게 괴롭지는 않았어.

어쩌면 자동화된 기계처럼 그냥 그 일을 했는지도 몰라.......

메마른 감정으로......음..........더는 말을 못하겠구.......그나저나

그 선교사님이 계시다는 할렘가에 내일 갈 거지.

난 아직 케냐에서 그런 곳을 가보지는 못했는데.....

그런 성자가 사는 곳이라면 나도 관심은 가지만, 며칠씩 있기는

자신이 없는데.........”

“ 그래......넌 무리겠다. 나야 시골에서 뱀도 잡고 꿩도 잡고, 토끼도 잡아서

먹어본 놈이니까...... 좀 험악한 곳에서도 석 달 열흘 정도야 버티는 재간이

있지만, 넌 여자인데다.......워낙 공주로만 살았으니....

네가 여기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만도 기적이긴 하지........”

“ 그래 맞어, 내가 케냐에서 그림을 그리고 사는 건 분명 기적이긴 해.

그런데 난 어디서든 현실에 맞게 살려고 하는 현대판 무수리야.

지금도 난 여기가 그래서 나하고 또 잘 맞는 거 같아.

파리에 있을 땐 거기가 좋았고,

네덜란드에 있을 땐 또 거기가 좋았고, 서울만 빼고 난 다 좋아”

“ 그럼 넌 국제파구나......국제적 감각이 네 체질인가본데....”

둘은 갑자기 허망한 말들을 주워 모으며 비실비실 웃어댔다.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서민기 라는 초등학교 남자친구가 한쪽으로는 상당히

부담스러웠기에 어떻게 하면 빨리 식사대접을 하고 헤어질까를 궁리했던

은희는 그의 모든 상황이 당황스럽고 내일의 약속도 부담은 된다.

그런데 이미 은희 자신은 서민기가 몰고 가는 차에 급하게 동승을 한 기분이

들었고 이 차는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힘든 코너로만 몰고 가는 것 같아서

언제 급브레이크를 걸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게 됐다.

그러나 상황은 이미 함께 동승한 이상 쉽게 이 남자의 차안에서 내릴 수 가

없는 뜻밖의 돌발 상황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렇다고 내가 너를 언제 봤냐는 듯이 나쁜 아이처럼 난 너하고 안 놀 거야

하고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가기에도 이미 모든 것은 상황종료와 같은 느낌이 든다.

갑자기 한 사람의 인생을 다 알게 됐고, 거기에다 그는 아내가 죽음을 준비하는

중이라서 그걸 해결하려고 이 아프리카 케냐까지 선교사인 친구를 찾아왔다고 하는데, 그 선교사님은 과연 이 남자의 문제를 해결할 키를 가지고는 있는 건지...

아무 답도 없는 황당한 사건에 은희는 순식간에 휘말려 버린 것이다.

또 거기다가 내일 그 선교사님이 계신 케냐의 할렘가를 함께 가자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 선교사님이 성자처럼 사는 분이라서 나에게 소개를 해주려 했다고

하니.........은희는 갑자기 하루아침에 삼십년 전 초등학교 친구가 자기 인생에

유성이 지나가듯이 하늘에서 순식간에 이쪽 하늘에서 저쪽 하늘로 떨어지는

느낌이다.

그것도 육학년 때 이 남자는 반장을 했고, 난 부반장을 했다는 그 짧은

기억 속에서 자신의 인생의 필름은 그 시절의 모든 것이 이미 옛날에 끊겨버린 녹슨 테이프가 되어 버렸는데, 이 남자는 왜 오늘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서......

그 끊어져 버린 과거의 녹슨 테이프를 감는 게 아니라......

여기서 새로 만드는 영화를 같이 찍자고 덤비는 불법 영화 제작자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데 느닷없이 나타난 이 불법 영화 제작자가 제안하는 영화 촬영

장소가 가기 싫은 게 아니라......... 이상하게도 마음속에서 설레기 까지

하니.......은희는 자신도 어처구니가 없는 기분이다.

“ 내일 아침 9시까지 내가 네가 묵고 있는 이 호텔로 올께. 민기야.

그 대신 오늘은 나도 집에 가서 그림도 마무리 하고

내일 가서 며칠 있다 오려면 우리 집에 오는 도우미 아가씨한테도

연락을 해서 내가 없는 동안 할 일을 전해줘야 하거든.

그러니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할까?

나머지는 내일 더 얘기 하자. ”

은희는 마음이 힘들어져서 더는 그 자리에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자꾸만 서민기에게 자신의 마음이 쓰이는 건 아닌지........싶고,

지나치게 마음을 쓰다보면 자기도 모를 감정이 생길까봐 빨리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다.

‘이 남자를 위로해주거나 도와준다고 어설프게 하다가는 내가 나도 못 빠져 나올

함정에 빠질 수도 있겠어.’

하면서 은희는 자신의 감정을 먼저 추스르기 위해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서민기도 그런 은희의 마음을 아는 남자였다.

그 자신도 아내 외에 또 다른 감정에 순간 빠져 들어가는 건 아닌지 싶어서

얼른 자기의 마음을 도마질 해대고 있었다.

정말 모든 것은 순식간에 아주 짧은 순간에 일어 날 때도 많다.

그것이 불행으로 가는 순간이든 행복으로 가는 순간이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한 채로,

운명의 긴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에 아무런 생각도 없이 또 예고도 없이

자신의 몸을 실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그 운명의 기차에 함께 탄 동승자와 함께 울고 웃는 기가 막힌

사건들이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우리가 태어나자 만난 운명의 기차는 가족들이다.

그래서 이 땅위에서는 가족이란 운명의 기차에 탄 사람들은 가장 가까운 사이가

아닌가.

한 칸에 다 타고 평생을 가면서 늘 그 평행선의 긴 레일을 달리는 그 기차가

가족이라는 이름에서 벗어나는 일탈을 해버리면

그런 사람이 가족 중에서 한 사람이도 나온다면,

갑자기 그 가족들의 불행은 이루 말을 할 수가 없을 정도가 되어 버리는 게 아닌가?

그것이 바로, 갑자기 닥치는 죽음이나 깊은 병이나, 뜻하지 않은 사고들

아니겠는가?

물론 전 재산을 잃거나, 명예를 잃는 일도 있지만,

사실 그건 가족의 죽음이나 병으로 인한 고통, 재난 사고로 인한 고통에 비한다면

그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서민기는 방송국에서 뉴스를 다루는 피디로 일하면서 지구상의 숱한 사건 사고,

그리고 전쟁들, 최악의 범죄와 최악의 사태를 낳은 재난 사고들을 매일 전하며

살았다.

뉴스를 마감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밤이면 몸도 파김치였지만,

그런 뉴스 속에서 자신의 영혼이나 정신 역시 파김치로 변해갔다.

서민기는 뉴스 같은 세상에서 뉴스를 붙잡고 살았지만,

정작 자신의 눈앞 에는 드라마 같은 인생이 또 다시 펼쳐지고 있는 것을

까마득히 모르고 지냈었다.

방송국에 입사해서 갓 신입 딱지를 떼고 나서 보도국에 피디로 일하기 시작한지

일 년 만에 그는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됐었다.

녹음이 울창한 여름 저녁에 그녀는 방송국 로비에서 혼자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서민기는 저녁 뉴스를 앞두고 저녁 먹을 시간조차 없어서 방송국 로비에 있는

커피숍에서 샌드위치와 냉커피를 주문해 놓고 서서 기다리고 있던 찰나였다.

그의 눈길이 혼자서 아이스커피를 마시면서 울고 있는 여자에게 가서 머물렀다.

여자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한 채 혼자서 아이스커피 잔을 만지작거리며

울고 있었다.

누가 쳐다보는지는 신경도 안 쓰는지 여자는 눈물방울이 탁자에 떨어져도

닦아 볼 생각도 없이 울고 있었는데, 그 눈물은 왠지 누군가의 위로를

기다리는 듯한 눈물이었다.

그 사람이 그 여자와 상관이 있든 없든 ........그건 중요한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서민기는 왠지 모르게 그 여자에게 다가가서 그 여자에게 당신 지금

왜 우느냐고 물으면

그 여자는 그 사연을 다 상대방에게 다 털어 놔야 속이 풀리고,

그 눈물이 그때서야 멈춰질 것 같은 그런 상태로 서민기의 눈에는 보였던 것이다.

여자는 더군다나 자기보다 훨씬 어려보이는 분위기였기에 서민기는 바쁜

중이였지만 여자에게 십 분이란 시간을 할애 하리라 마음을 먹고

그녀 앞으로 걸어갔다.

“ 저, 죄송하지만 여기 자리에 좀 앉아도 될까요?”

여자는 눈물을 흘리다 말고 순간 당황한 듯.... 눈물이 그렁그렁 한 채 자기 앞에

서 있는 서민기를 올려다봤다.

그 눈이 참 귀엽고 예뻤다.

가까이 가서 본 여자는 초롱초롱한 눈빛에 발랄하게 생기가 도는 예쁜 여자였다.

“ 왜요? 전 지금 아무하고도 말하고 싶지 않은데요”

“ 아니요, 당신은 지금 누구하고든 당신의 가슴 아픈 얘기를 하고 싶어 합니다.

제가 그 상대로 당신께 십 분의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저도 지금 무지 바쁘거든요. 그런데 당신 우는 거 보고 그냥 지나갈 수가 없어서

무례하지만 저쪽에서 보고 이리로 온 겁니다.”

그리고 서민기는 여자가 안심할 수 있도록 방송국 신분이 확실하게 밝혀져 있는

자신의 명함을 한 장 내밀었다.

여자는 명함에는 관심이 없는지 쳐다도 보질 않고 서민기의 얼굴만 한번 뚫어져라

쳐다보고는 눈물이 묻어 있는 얼굴을 휴지로 닦아 냈다.

“ 왜 우셨어요....... 방송국 로비 커피숍에서 우는 건 무슨 큰 사연이 있지 않고는

흔한 일이 아닌데....... 대학생 인가요? 어느 대학 다녀요?”

서민기는 피디처럼 질문을 퍼부었다.

직업의식이 자기도 모르게 발동한 거였다.

“ 저 아저씨, 제가 지금 돈이 없는데요, 저 아이스커피 한잔 더 마셔도 되나요.

그거만 사주시고 가시면 안 될까요”


서민기는 적반하장인지.........아님 보기 좋게 여자한테 차이는 건지....

분간이 안 되는 말을 여자가 건네자 웃음보따리를 터트렸다.

“ 하하하.... 이 아가씨 보통이 아닌데....... 좋아 커피부터 시켜주지

하이....... 여기 아이스커피 한잔 더 부탁해요“”

서민기는 커피숍 카운터에 손을 들고 아이스커피를 한 잔 더 주문을 해줬다.

그날 여자는 정말 아이스커피를 다 마시는 동안 자기가 왜 울었는지는

말하지 않고, 눈물이 가득 고였다가 또 휴지로 닦아 냈다가 하면서

서민기의 얼굴을 두어 번 쳐다보고 말은 하기를 싫어했다.

서민기 역시, 십분 이상은 시간이 없었던 차라 오늘 난 이 사람에게 커피 사주는

사람으로 천사가 날 붙였었나보다 하고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었다.

울고 있는 여자를 더 이상 불편하게 하는 건 남자의 매너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 서민기는 그녀에게서 전화 한통을 받고 그녀를 만나러

신촌 앞으로 달려갔다.

그건 그날 이후, 그 여자의 그 초롱초롱한 눈빛과 그 눈물이 자신의 시선에서 늘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전화를 당연히 기다리던 참 이였다.

여자는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데가 많은 그런 여자였다.

여자는 대학교를 막 졸업하고 방송국에 일자리를 구하려고 이곳저곳 문턱이 높다는 방송국마다 시험을 보러 다니는 중이였다.

피디 시험을 보면 피디 시험에도 떨어지고, 작가를 공채한다고 하면 작가 공채

시험을 뽑는 자리에 가서 원고도 써보고, 아나운서 시험을 본다고 하면

또 아나운서 시험에도 원서를 내보고........그러다가 방송국에 알바자리까지

기웃거리고 다니는 중이였다고 했다.

방송국에만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하면

무슨 직종이든 상관하지 않고 여자는 입사원서를 들고 뛰어 다니는 중이였다.

“ 왜, 그렇게 방송국에 들어오려고 안간힘을 쓰는 거죠”

“ 방송을 하면 왠지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 확실하게 들 거 같아서요.”

여자는 뜻밖의 대답을 해서 서민기는 그녀가 더 귀엽다고 느꼈다.

여자는 고생이나 힘든 일을 전혀 해 본 적이 없는 여자였다.

서민기는 여자를 처음 본 날, 속으로 당신은 방송 같이 힘든 일을 할 게 아니라

그냥 여자로 집안에서 아이 키우고, 아기자기 살림을 하면 그게 훨씬 어울릴

여자인데요......하고 말해 주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 여자에게서는 캐리어우먼의 기질이 아닌 사랑스런 여인의 느낌이

많았고, 아내나 엄마의 역할이 방송국에서 피디나 작가 아나운서 이런 역할

보다 훨씬 어울릴 여자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서민기는 방송국이란 조금은 특수한 조직에 대해서 말해주면서

당신은 방송국에 일자리 알아보는 것 보다는 시를 읽고 음악을 들으면서

남편의 구겨진 와이셔츠를 반듯하게 다림질 하는 게 훨씬 더 어울릴 것

같다는 말을 하며 그녀와 일 년 가까이 연애를 했다.

서민기는 이미 서른둘이라는 결혼 적령기의 남자였기에

그가 만나는 대부분의 주변의 여자들은

그래도 격식을 갖추는 것을 좋아하는 수준의 여자들이였다.

“ 아파트는 몇 평짜리 장만해 두셨어요?

피디면 월급도 꽤 되실 텐데...”

어쩔 수 없이 맞선을 보는 자리에서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서민기는 시간이 없다고 핑계를 대고 십 분을 못 채우고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 으휴, 대한민국의 여자들이란 다 왜 이 모양이람. 나도 바보지.....

대학 때 연애를 했어야 하는데........ 하은희 .........너 찾다가 난 바보

된 거 너 아니........”

서민기는 그런 날이면 하늘에다 대고 공연히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 서른둘에 만난 눈빛이 초롱초롱한 이 여자는 뭔가 달라서 좋았다.

일곱 살이 어린 여자였지만, 그녀를 만날 때 면 가슴이 뛰고 콩닥거리며

그 여자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어서 마음에 안달이 났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기념으로 사준 것이 시집 이였다.

릴케의 시집에서부터 한국의 근현대시인들의 시선집을 전부 다 사주었다.

그녀는 그 시집이 그녀의 작은 책장을 거의 채워 가던 겨울에 곤색 털스웨터를

손수 짜가지고 왔다.

그 털의 촉감은 부드럽고 따스했는데, 그 스웨터 사이엔 여자가 자기랑 결혼하고

싶다는 청혼의 편지지가 한 장 들어 있었다.

그러면서 당신은 내가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해야 가장 잘 할지..... 정확하게

맞춘 사람이고, 난 정말 지나고 보니 당신의 그 말이 맞는 여자 같다면서

이제는 취직할 생각을 안 하겠다고 하며 당신의 와이셔츠를 꼼꼼히 다리는

그런 여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둘은 그해 겨울에 결혼을 했고, 일곱 살 어린 신부를 서민기는 사랑스러워했다.

그렇게 행복한 결혼 생활도 3년이 채 안되었을 때 아내는 어느 날 침대에서

아랫배를 붙잡고 뒹굴면서 울었다.

병원에서 본 암의 크기는 난소를 꽉 채운 4기에 가까운 상태였다.

의사는 양쪽의 난소를 다 제거하고 자궁을 다 드러내도 희망은 별로 없지만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고 수술에 들어갔다.

아내는 수술실에 들어 갈 때 까지도 눈빛이 초롱거렸다.

서민기는 아내의 손에서 땀이 나는 걸 붙잡고 그 눈에 입술을 갖다 대고

가만히 기도를 했다.

“ 하나님 , 당신이 정말 살아 계시다면 생명만 연장해 주셔도 되요.

우리에게 아이라든지 더 이상의 무엇도 바라는 건 없어요.

이 사람 생명만 연장 시켜주시면 돼요. ”

서민기는 수술실 밖에서 그날 처음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다.

신을 찾거나 믿어본 적도 없었지만, 그날만큼은 늘 자기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

다고 말하던 친구 허 선교사의 말을 기억하고 그의 말대로라면

하나님이란 신은 살아 계시다고 하는데,

오늘만큼은 꼭 내 아내를 살려주시기 위해 당신이

하늘에서 수술실 안으로 천사를 내려 보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를 했다.

그 기도 때문 이였는지........아내는 기적적으로 수술에 성공을 했고,

지금까지 살아있는 있는 것이었다.

몸무게가 48킬로였던 아내는 지금은 37킬로도 채 안 되는 아주 깡마른

상태가 되어서 이제는 뼈와 가죽뿐 인 너무나 가여운 모습으로 변해버린

것 말고는 아내는 그래도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있는 것이다.

누구에게는 목숨 그 자체가 기적이라면 그걸 어떻게 다 말할 수 있을까?

정말 서민기에게는 아내의 목숨 자체가 기적이었고,

그녀가 숨을 쉬고 자기 옆에 있는 것만도 감사했었다.

그러나 아내는 어느 날부터 서서히 그걸 거부해가기 시작했다.

여자로써의 삶을 살수 없는 절망도 절망 이였겠지만,

남편을 너무 사랑했던 그녀는 그 남편의 남아 있는 삶을 자기의 병치레라는

고통스러운 인생의 굴레에 묶어둘 순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언제까지 저 남자를 이런 힘든 끈에 묶어서

그렇게 답답하게 가둬두고 살 것 인가?

아내는 서민기를 진실로 사랑했기에 그걸 자꾸만 고통스러워했다.

사랑하기에 사랑하는 만큼 그 사랑의 대가를 남편에게 지불해주고 싶었지만,

자식 하나도 낳아 줄 수 없는 여자가 돼서 이 병의 고통을 함께 나누자는 건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이 몸을 가지고.

저 남자에게는 얼마나 긴 형벌일까?

그녀는 자신의 쇠약해지는 몸을 보면서 점점 깊은 회의감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점점 더 무겁게 내려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죽음도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맞이해야 하는 건데,

자신도 남편도 아직은 아무런 준비를 하고 있질 못했다.

오히려 죽음이 올까봐 너무나 두려워서 살려달라고만 고함을 치는 모습

이였고, 그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가 더 죽음 뒤에 것은 전혀 생각을 하려고 하질 안았다.

그러나 아내는 암 덩어리는 수술을 하면서 제거했지만,

자신의 몸이 회복은 불가능할 것이고, 완치가 불가능한 지금의 상태에서는

자신에게 남아 있는 시간도 길지 않을 거란 느낌이 아내에겐 확실하게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남편과 함께 준비하는 건 자기가 사랑했던 남자에게

너무 가혹한 형벌을 주는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살아 있는 동안 이별 연습을 해야 한다고 다짐을 하며

강과 호수가 보이는 양평으로 이사를 했고,

양지 바른 언덕에 있는 작은 별장에서 아내는 처음으로 시집을 읽는 게 아니라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하며 저녁이면 그에게 문자로 그날그날 쓴

짧은 싯귀를 보내왔다.

앞집 화가 할머니 작품


방송국에 취직자리 대신 사랑하는 남편을 얻게 됐다며 결혼하는 날

그렇게 화사하게 웃던 아내는 어느 사이 죽음의 그림자를 쫒아서

혼자 외로이 집을 나가버린 것이다.

그러나 서민기는 그런 아내의 죽음을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죽음을 넘어 다시 생명으로의 귀환을 그는 마지막 까지 꿈꾸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 이 여자를 내가 보낸다면 평생에 사랑스런 여자를 다시는

못 만날 것 같기도 했고, 아내의 사랑스런 행동들이 늘 그립기만 해서

어느 날은 뉴스를 진행하다가도 스튜디오를 뛰쳐나가고 싶기도 했다.

아내는 어렸지만, 지혜롭고 현명한 여자에다가 사랑스러움이 가득한

아주 귀여운 여자였기에 서민기는 그런 아내를 무척이나 사랑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은 너무 짧았고, 사단의 시기질투였나 싶을 정도로

그 달콤한 사랑은 금방 갈가리 찢긴 모습으로 자신 앞에 피투성이로

아내는 변해버렸다.

서민기는 그런 아내를 끌어안고 많이 정말 많이 울었다.

아내를 처음 본 방송국 로비에서 그녀가 그렁그렁하게 눈물을 흘리던

그런 눈물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그는 정말 많은 눈물을 혼자서

흘려야만 했다.


3. 신의 세계로 입문


아내가 시를 보내오는 날에는 더 많이 더 크게 혼자 빈 아파트에서

소리죽여 울기만 했다.


아내가 별장에 들어가서 혼자 시를 쓰면서 텃밭에서 상추를 뜯고

음악을 들으며 간병인과 보내는 시간동안

서민기는 긴박한 뉴스들에 하루하루 매달려서 온 몸이 퉁퉁 붓고 혈관이

다 꼬여서 숨을 잘 못 쉬는 신부전증 환자처럼 고통스러워했다.

매일 매일이 전쟁터의 총알이 튕겨져 날아오는 전쟁터 같은 보도국의

전화벨 소리나 긴박한 뉴스가 터질 때마다 소리소리 지르며 뛰어다니는

기자나 피디 아나운서들 틈에서 그도 정신없이 뛰다보면

여기가 도대체 어디지.........하는 집 잃은 아이 같은 막막한 두려움에

눈물이 왈칵하고 쏟아질 때가 있곤 했다.

그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아내를 혼자 별장에 두고

자신이 이런 곳에서 세상 뉴스에 미친 듯이 뛴다는 게 당혹스러워서였다.

아내가 가고 있는 곳이 죽음이라면 ........그 시간은 분명 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 내가 여기서 그녀의 인생과는 무관해 보이는

살아 있는 시청자들을 위해 방송을 하고 있는 게 맞는 것인가 ?

그는 의심스러웠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이 .....

자신이 지금 어디에서 있어야 하고, 무슨 일을 하는 게 옳은지 ...

판단이 서질 않았던 것이다.

서민기는 은희와 헤어지고 혼자서 케냐의 밤거리를 혼자서 걸었다.

나이로비에서 혼자서 밤에 거리를 걷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호텔에 지배인이 가르쳐 줬지만,

서민기는 그냥 이 낮선 이국땅을 하염없이 걷고 싶었다.

더운 열기가 후끈 후끈 땅속을 뚫고 올라오는 이 낯설고 더운 나라에서

나는 지금 무엇을 찾고 있는 걸까?

어린 시절 그렇게 좋아했던 여자 아이 은희.

그 여자 아이 은희는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서울에 있는 친아버지

집으로 혼자 떠나고 난 뒤, 그 엄마에 대한 소문은 온 동네가 무성했는데.......

정작 서민기는 은희를 만나고 나서 그 엄마에 대해서는 한 마디로 말을 해보질

못했다.

그 당시 동네에 난 소문대로라면 정말 은희의 엄마야 말로 어린 딸을 놔두고

절이나 수녀원에 들어가 버린 것인지..........아니면 남자가 생겨서 어디 멀리

외국으로 도망간 건 아닌지.........바람 같고, 구름 같은 뜬구름 같은 소문만

무성했던 은희 엄마에 대해서는 정작 둘은 한 마디로 하질 못했다.

은희는 알고 있는 건가? 자기 엄마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동네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듯이 은희도 자기 엄마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아직도 모를 수 있겠지.........

인간이란 다 알 수 없으니........그 엄마는 엄마대로의 어떤 운명의 굴레가

있었겠지........

내 아내가 아직 꽃다운 나이에 혼자서 죽음의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

그러다 서민기는 문득 아내의 시들이 다시 읽어 보고 싶어서 급한 마음으로

호텔방을 들어 왔다.

아내의 시에서는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아주 깊은 산골짜기에서 조용히 귀를 기울여야만 들을 수 있는

숲속의 아주 작은 물소리 같은 소리가 아내의 시에서는 들렸다.


풀잎 위에


내가 풀잎 위에 이슬로 왔다면

이 아쉬운 사랑을 어이 할까

내가 풀잎 위에 찬 서리로 왔다면

너의 그 작은 발이 시려울까봐

어찌 그 맨발을 볼 수 있을까


네가 이슬 맺힌 새벽부터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어

자꾸만 문을 열고 뜰 안을 거니는데,

풀잎아,

너는 왜 고요 속에서 물방울을 흔드는 거니

잠시 후,

해가 뜨면

나는

사라지는 너를 또 봐야 하니......


꽃이 진 자리


사월이 다 갔다

거리에 꽃잎들이 쏠려 다니며

그토록 사랑했던 한 사람의 이름을 바람에 쓸어 보낸다


저 만큼 꽃이 진 자리

너의 이름도 졌다


내가 그렇게 몰아냈던 죽엄도

그 꽃과 함께 너의 이름을 가지고 갔다

문밖으로 죽엄을 몰아내고

다시 꽃이 피길 간절히 구하는 시간

이 시간은 오로지

신 앞에 말없이 서서

침묵하는 시간뿐이다.

묵언의 깊은 기도만이

죽음을 이기는 능력이 되리라...


제비꽃 다발 앞에서


그리워서 몇 번을 전화를 들었다

보고 싶어서 수 없이

수화기에 대고 혼자 번호를 말했다

그립고 보고 싶은 간절함이

터질듯 부풀어서

입술 안에 꽈리 같이 보라색 물집이

생겨버렸다

너에게 하지 못한 말들이 너무 많아

입술을 깨물었더니

네가 보라색 제비꽃 다발로

그 가녀린 허리로

내 앞에서

쓰러질 듯한 그리움으로 피었다.

너는 내 앞에서 그리움 한 다발로 묶여

혈관 보다 가늘게

보랏빛 봄을 놓고 갔다.

소금


이 세상에 죽고 살아 난 사람은

딱 한 사람

예수 밖에 없다

오늘 나는

그 사람의 피를 좀 빌려 왔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의 피를 수혈 받고 싶어서였다

이 세상에 진정 소금과 같은 사람이 있는가?

그 답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 말씀을 이룬 예수라는 그 사람뿐이다

그는 세상의 소금이었다는 것을 나는 확실히 믿는다.

왜냐하면

그를 통해서 인류는 구원을 받았으므로 .......

오늘 나는 그 소금을 한 줌 마시고,

예수의 피를 수혈 받고,

인류의 한 귀퉁이에서 다시 살아났다.


좁은 문 앞에서


풀밭에 꽃을 깔고 앉아서 책을 읽는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이다

알리사의 일기를 읽는 마지막 대목....

그녀는 정원을 사랑했던 여자 같다

늘 정원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혼자 정원에서 있기를 좋아했다

그녀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복음서를 읽다가 영원한 잠이 들었다.


나는 오늘

내 아픔의 좁은 문 앞에서

영원한 죽음의 좁은 문 앞에서

복음서가 쓰여 있는 성경 한 줄을

다시 찾으려 마태복음을 연다.

마태복음 7장을 열면

그 곳에 예수께로 가는 좁은 문이 열려 있다.


아내의 시속에는 서민기가 아직 잘 모르는 신의 세계가 조금씩 펼쳐져 있었다.

아내는 아프기 전에는 신을 전혀 믿지 않던 여자였다.

아내는 별다른 상처 없이 삶을 살았던 여자였고, 방송국에 다니고 싶다는

소원 말고는 자신의 꿈을 대체로 이루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좋은 부모님 밑에서 명문 여대를 나왔고 , 하고 싶은 공부나 배우고 싶은 것은

어릴 때부터 다 배우고 자란 사람이라서 피아노부터 악기도 몇 가지를 다룰 줄 아는

교양과 학식을 겸비한 지성인이라면 지성인에 속하는 사람이었고,

신의 세계까지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그저 평범한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아내에게 너무 이른 나이에 죽음의 병이 왔다는 것은 정말 믿을 수 없는

현실 이였고, 아내의 밝고 긍정적인 성격 때문에 어쩌면 그 죽음의 그림자는

자신 스스로 더 견디기가 힘든 부채와 같았다.

왜냐하면 아내는 호박 넝쿨처럼 자식들을 주렁주렁 낳고 배가 불룩 나온 남편하고 행복하게 오래 오래 사는 게 어울리는 여자, 아내는 바로 그런 전형적인 여성성이 강한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방송국 시험에 계속 떨어지는 취업의 비운 하나 때문에 눈물을 그렁그렁

흘리는 그런 여자였을까 싶을 정도로 아내는 인생에서 별로 실패해 보거나 뭔가가

너무 부족해서 울어 본 적이 별로 없는 정말 어찌 보면 철없는 그런 여자였다.

그런 아내가 3년 전 갑자기 닥친 죽음의 병을 이길 힘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편의 등에 기대서 사랑스런 눈빛이나 보내는 천진한 아내는 그런 형벌을 받아

들일 어떤 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 또 자신 역시도 그런 생각은 상상도 하질

안했던 신혼이 막 지난 즈음이었기에 ........오직 태어날 아기 하나만 바라보고

서로의 삶에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이름만 화초처럼 키워가며 온 집안에

실제로 물만 주면 자라는 연약한 화초만 가득 사다 키우던 때였다.

아내는 집에서 화초를 하나하나 키워가는 법을 깨달으면서 아파트 구석구석에

화초들을 심고 꽃을 옮겨 심고, 늘 그 화분에 꽃들이 피어나거나 화초가 자라는

것을 자로 재듯 눈금으로 재며 좋아하곤 했었다.

그런 아내라서 그런지 지금도 시골에서의 생활은 나름대로 잘 견디어 갔다.

양지바른 언덕 위에 있는 별장 안에서 아내는 꽃을 심고,

또 어느 날은 풀밭에 앉아서 입술이 부르트도록 플롯을 분다고 했다.

아내는 늘 꽃과 악기와 책을 너무 좋아하는 여자였다.

사람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아내는 늘 혼자서 자기가 좋아하는 이 세 가지를

나름대로 재미있어 했고, 수준급이 넘는 악기 다루는 솜씨로 아내는 늘 나에게도

사랑을 받던 여자였다.

그런 아내가 양지바른 언덕으로 이사 간 후....... 얼마 안 있어서 그 언덕에서

마주 보이는 곳에 또 다른 양지바른 언덕에 교회가 하나 보여서 그 교회를

우연히 찾아 갔었다고 하루는 편지가 왔었다.

- 사랑하는 당신에게

여보, 이곳은 오늘도 봄바람에 창문 앞에 있는 벚꽃가지가

한없이 흔들리네요.

그런데 저 벚꽃가지는 봄바람에 아예 자기 몸을 맡겨 버렸나봐요.

저렇게 아름다운 꽃잎들이 다 떨어져 나가는데도,

조금도 불편한 기색이 없어 보여요.

여보, 보고 싶어요.

사랑하는 당신 얼굴이 지금도 내 얼굴 가까이에 있는 듯이

그리워서 잠깐 또 눈물이 나요.

오늘은 우리 집 맞은 편 언덕에 보이는 하얀 종탑이 있는 교회까지

걷다가 그 교회 안에 들어가 봤어요.

시골에 지어진 교회라서 그런지 교회 마당이 너무 소박하고

아름다웠어요.

그 마당에 핀 노란 개나리꽃을 문 밖에서 쳐다만 보다가 나도 모르게

교회 마당을 지나 현관문을 열고 교회 안에 들어가 보았어요.

유리로 된 큰 현관문이 열려 있었는데,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어릴 때 친구랑 교회를 몇 번 다녀 본 이후로

처음 들어가 보는 교회였어요.

왜 그런지 가슴이 두근거리고 심장이 마구 뛰었어요.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바로 예배를 드리는 예배실이었는데,

그곳엔 사람의 발소리도 너무 크게 들리는 깊은 정적만이 흘렀어요.

그래서 난 조심조심 내 발소리를 죽여 가며 작고 아담한 성전 안에

십자가 앞으로 걸어갔어요.

작은 나무 십자가가 걸려 있는 강단 앞에 서서 그 십자가를 아주 오래 오래

서서 바라보다가 무릎도 한번 꿇지를 못하고 저는 그냥 그 성전의

예배실을 나왔어요.

어쩐지 아직은 저 같은 죄인이 그곳에 계신 신 앞에 무릎을 꿇는다면

그건 위선이나 가식 같았어요.

그 이유는 제가 신이 주신 생명에 대해서 제 마음대로 논하면서

살려달라고 할 것 같아서였지요.

이 세상에 생명만큼은 누구에게도 권한이 없고, 오직 신께서만이 섭리하시고

간섭하실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분이 주관하시는 그 섭리를

제가 더 살고 싶다고 하거나 , 더 빨리 가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것은

참으로 신에 대한 모독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그동안 해 왔기 때문이지요.

여보, 저는 지금 까지 제게 부여해주신 생명의 시간들에 대해서

신께 감사했고, 앞으로 남은 시간, 그 시간이 한정되어 있고

비록 얼마 남아 있지 않다 해도 저는 그 시간을 허락하신 신에게

감사하고 싶어요.

그 이유는 제가 이 땅에서의 모든 삶이 저 위대한 신의 뜻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고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아가고 있기 때문 이예요.

기독교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자기 아버지이신 ,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누가 신의 뜻을 거역할 수 있겠어요.

예배실 의자에 앉아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저 높은 곳에 계신 신에 대해서

잠깐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교회 마당으로 나왔어요.

교회 마당에는 여전히 개나리꽃이 노랗게 피어 있었는데,

그 꽃들은 이상하게 내가 조금 전에 보고 들어갔던 봄이면 어느 집 담장

아래서나 흔하게 피는 그런 개나리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개나리꽃으로 보이는 것 같았었어요.

신 앞에 선다는 것은 ........ 어떤 존재든 그 존재를 다시 바라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주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여보.

당신을 사랑하지만 그동안 내가 못 본 당신의 모습도 그 개나리 꽃 속에서는

볼 수 있을 것만 같았어요.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오늘은 그 시골 교회의 마당에 피어있는 개나리꽃처럼

이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내 마음이길 ......간절히 원해요.

사랑하는 당신,

이 세상에 간절히 구할 것은 내 생명이 아니라........

어쩌면 그 교회 마당에 핀 개나리꽃처럼 말없이 누군가를 위해

자기의 전부를 활짝 드러내주는 것은 아닐까요....

당신이 나의 전부이기에 이제는 내 생명이 연장되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조금씩 조금씩 떨어져 나가면서

나도 어딘가에 떨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돼서 그 개나리꽃처럼 그렇게

내가 피어나야 할 곳에서 꽃을 피워내고 내가 가야 할 곳으로

그곳으로 가고 싶어요.

사랑하는 당신,

나는 당신을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어요.

늘 어디서든...........저는 당신의 숨소리를 들어요.

당신이 내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며 날 재워 줄때 마다

내 어깨 위로 당신의 숨소리가 들려왔었어요.

그 낮고 포근한 당신의 숨소리를 난 여기서도 때때로 듣곤 해요.

어느 때는 낮잠을 자려고 햇살이 드는 창가 앞에 흔들의자에서

몸을 기대고 있다가도

낯익은 당신의 숨소리가 들려와서 깜짝 놀라서 깰 때도 있어요.

당신이 곁에 와서 같이 자는 줄 알았던 거죠.

사랑하는 당신,

당신이 이번 주 일요일에 오면 우리 같이 그 양지바른 언덕에 교회에

가 보아요.

당신과 함께 그곳에서 신의 숨소리를 듣고 싶어요.

하나님이시라는 분.

그분도 그 아들 예수를 사람으로s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나게 해서

이 땅에 보내신 분이시니.......

하나님이 계신 곳에는 그분의 숨소리나 음성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분이 내시는 소리는 아마 아주 나지막하고 포근할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 분만이 인류를 구원하셨다고 하니......

또 다른 한 쪽으로는 그분의 거룩한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고 하니.....

얼마나 자비롭고 또 얼마나 포근할까요?

여보,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가야 할 곳은

어쩌면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물어야 하는 ....

신 앞에 서는 ......... 그 장소가 아닐까 싶어요.

사랑하는 당신,

당신이 오는 날, 우리 집 별장 마당에도 개나리 꽃 한 무더기를

옮겨 심어 놔야겠어요.

사랑하는 당신하고 그 꽃을 보면서 내가 처음 그 교회에 간 날을

기억하기 위해서요.

그리고 내가 떠나면 당신이 또 그 꽃을 보면서 오늘 나처럼 그런

시간들을 가져보면 좋을 것 같아요.

우리의 허락한 시간이 짧을 지라도 늘 사랑하는 당신에게 활짝 핀 노란

개나리꽃처럼 ...화사하게 기억되길......... 그리며 ......

봄에 오는 창가에서

아내는 신이 부여한 숙명과 같은 죽음을 잘 순응해 가려 노력하는

자세가 분명했다.

자기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시간을 그녀는 거부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왔고, 그것을 또 다른 한 쪽으로는 삶의 마지막을 잘 장식하려고

나름대로 애를 쓰는 흔적이 뚜렷하게 보여서 인지.....

서민기도 마음 한 쪽으로는 그녀가 자신의 곁을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떠날 까봐서 두렵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지만,

또 다른 한 쪽으로는 그 죽음을 신께 감사와 함께 껴안고 가려고 하는 아내의

담대한 마음이 놀랍기도 했다.

아내는 이제 겨우 서른이 조금 지났는데........

아내는 정말 꽃다웠는데......

굵고 검은 머리카락부터 희고 윤기 나는 피부에 포동포동한 앞가슴과

탄력 있던 엉덩이까지 아내는 육체의 어느 한 구석도 건강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정말 주부 습진이나 무좀 한번 걸려본 적이 없던 아내의 그 아름답던

살결이 이제는 물 빠진 고무풍선처럼 힘이 없고, 피부는 축 늘어져서

뼈에 가죽만 붙어 있다.

그래도 아내는 여전히 쌍까풀 진 예쁜 눈에 초롱초롱한 눈빛을 가지고 있다.

아내의 그 초롱한 눈빛은 어쩌면 그 내면에 죽음 앞에서도 누구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으며........그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마음의 빛이 눈빛으로

우러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서민기는 아내의 그 아름다운 눈빛을 보며

생각했었다.

정작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서민기 자신이었다.

그는 그 죽음을 시한부 인생을 사는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기 보다는

어떤 의학적 방법으로든 그것을 이겨보려고 미친 듯이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3 년 동안 아내의 암과 싸웠다.

어찌 보면 그는 암과 싸운 것이 아니라 , 세상의 온갖 의학적 지식과 능력으로

죽음의 병과 싸우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21세기 의학의 수준은 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병 일거라고 믿고 그 힘을 빌려보려고 갖은 애를 쓴 시간들이였다.

그러나 아내는 수술로도 긴 항암치료로도.........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고 의사가 예고한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아내는 너무도 잘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데,

정작 앞으로 아내보다는 더 살 시간들이 의학적으로는 충분한 자신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혼자서 몸부림을 치며 울며 때로는 믿어 본 적도 없는 신에게 항변을 늘어놔 보기도 했었다.

날이 밝고 서민기와 은희는 허 선교사를 만나러 가는 차에 함께 탔다.

두 사람은 렌트한 차에 뒤에서 서민기의 아내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서민기는 가방에서 아내가 쓴 시를 옮겨서 쓴 작은 노트 한 권을

은희에게 보여 주며 이렇게 말했다.

“ 아마도 아내가 저 세상으로 간다면 이 노트는 내가 가장 오래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아내의 유품이 될 거야.

아내가 떠난 다음에 시집을 내 줄 수도 있고.......

지금은 본인이 수준급의 시를 쓰면서도 시집 같은 건 절대 내지

않겠다고 하니까 .....해줄 수도 없지만 .....

읽고 싶으면 몇 편 읽어봐 .....

사마리아 땅

한 줌을 퍼 올려도

또 한 줌을 퍼 올려도

쉽게 마르지 않는 샘

그 샘을 찾아 천리를 왔다

그리고 그 주변을 천 번을 둘러보았다


하얀 찔레꽃 한 무더기 피어 있는 곳

그곳에

목마르지 않는 샘이 있었다.

주리고 목마른 내가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하루 종일 그 물을 마신다


헐벗은 나를 위해 마지막 기도를 하는 이 시간

물동이채 들고 허기진 듯이 물을 마신다


해 질 녘

샘가에 찾아온 그 분

2천 년 전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시던 예수라는 분이다

난 그 분을 만나고 마시던 물동이를

집어 던지고 그 분을 쫒아갔다.

꽃 한 송이

내게 베풀어주신 꽃 한 송이

당신께 다시 돌려드리고 싶어

아침부터 흙을 고릅니다

내게 베풀어주신 이 꽃 한 송이

당신이 얼마나 힘겹게 피어 냈는지

나만 아는 비밀이지요.

작은 모래알이 저 꽃의 뿌리 안에서

다 삭아질 때 까지........


당신이 흘린 눈물은 얼마나 많았는지

저만 아는 당신의 비밀이지요.

아버지의 눈물

당신이 눈물을 흘리시지 않으시는 것은

우리가 긍휼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까?

당신이 더 이상 우리를 위해

우시지 않으심은

우리가 당신의 자비하심을 이 세상의

가장 낮은 자들에게 이용하고 있는 것을

보셨기 때문입니까?

더 이상은 긍휼도 구하지 않고

자비도 구하지 않으며

인애하심도 구하지 않는

우리의 강퍅한 마음 한 끝이 돌처럼 굳어져

이 땅을 황무지처럼 바꾸어 버린 우리들

그런 우리를 위해 당신은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으시는 것은 아닐까요?


이 땅에서 종들의 눈물샘이 마르고

이 땅에서 당신의 자녀들이 황폐해져 갈 때

그럴 때 당신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깊은 울음을 삼키신 분

아버지 오늘 그런 당신을 만나고 왔습니다.


작은 새

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아주 조그마한 작은 새여 ....

나뭇잎 주워 먹으며

오늘도 바람을 따르려는가

구름을 따르려는가

햇살 한 조각 빌려

깃털을 모으고 있는

산비알 비탈길에서

너를 만났구나

생명의 긴 임재가

짧기만 한 시간 속에서

네 목소리에 실려

감사로 터지는구나

고맙다 ....

구름 위를 날아가는 작은 새야

은희는 서민기가 준 아내의 시집 노트에서 몇 편의 시를 읽다가

하마터면 차안에서 눈물보를 터트릴 뻔 했다.

그 시에는 암으로 죽어가는 자기 한탄이나 죽음이란 운명을 받아들이는

시한부 인생을 사는 여인의 모습이 전혀 없고,

오히려 신 앞에 겸허하게 다가가는 한 여인의 작은 마음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민기의 아내는 어쩌면 죽기 전에 자기의 전부를 시라는 짧은 글 속에

전부 쏟아 놓고 갈지 모르겠는데, 그 시는 자기만을 위한 노래가 아니라

자기 보다 더 힘든 고통 속에 있는 누군가를 위해 말기 암환자가 마지막

부르는 노래처럼 아름답게 씌여질 것 같았다.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은 내내.......

은희는 아무 말 없이 시집 노트를 서민기에 돌려주고,

차장 밖을 내다 봤다.

사막의 황량한 바람이 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차는 달리고

있었다.

생명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막막한 사막의 길을 가고 또 간다는 것은

참 지루하고 고통스럽기도 했다.

나무도 풀도 거의 없는 사막의 길에서는 누구도 힘들지 않을 수 가

없는데, 은희는 그래도 서민기의 아내를 위해 잠시라도 동행해주는 마음으로

잠잠히 사막의 길들을 바라보며 허 선교사님이 계시다는

곳을 향해서 차가 달리는 데로 몸을 맡기고 잠깐씩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 냈다.

서민기는 어제와는 달리 이상하게 진지함과 깊은 생각으로 빠져들어

운전석 옆에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깊은 생각 속에서 그는 아내의 죽음을 몰아낼 그 어떤 신의 계시를 듣고자

허 선교사에게 가는 것일까?

그것도 한국에서 아프리카 케냐까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

이라는 허 선교사를 만나러 온 것이다.

허 선교사라는 분은 정말 서민기에게 해 줄 말이 있을까?

은희는 그 것이 궁금했지만, 어쩌면 그 것은 서민기가 처음 한국을 떠날 때부터

이미 답은 없음 인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신은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때로는 너무도 오래 동안 침묵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일 것이다.

은희는 그것을 이미 체험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중풍으로 쓰러진 새 엄마를 간병하던 7년이란 시간 동안 죽음의 그림자는 수 없이

새엄마의 곁에 왔었다가는 가버리고 또 왔었다가는 가버리곤 했다.

죽도 넘길 수 없고 뼈만 앙상히 남은 그 상태에서 새엄마는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며 그 죽음의 고비를 수 없이 넘기며 7년을 버텼다.

그런데 새엄마가 그 죽음의 고비를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보다는 가족들 중에 자기와 가장 가까이 있는 은희의 따스한 손길에서

그 죽음의 고비를 넘길 수 있는 힘을 얻는 것 같았다.

숨을 헐떡이며 중환자실을 몇 번이나 드나들며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기를

수차례 했던 새 엄마는 언제나 집에 와서 은희가 끓어주는 미음을 한 모금

마시거나 그녀가 따듯한 물로 목욕을 시킬 때면 축 늘어진 눈꺼풀에

힘이 돋는지 어느 사이 다시 감고 있던 눈을 뜨곤 했다.

생명일진대.........어찌 하늘에 계신 신이 돌보심이 어느 누구에겐들

없을까?

은희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그 숨 한 자락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 엄마의 그 길고 힘들었던 7년의 병치레에서 깨달은

나름의 생명의 비밀을 생각하며 서민기의 아내를 위해 혼자 기도하듯이

그녀를 생각하며 스쳐가는 사막의 풍경들을 바라봤다.

허 선교사님이 계신 곳은 케냐에서는 지도에도 잘 나오지 않는 코어라는

사막지역이었다

허 선교사님은 의외로 까만 얼굴에 마른 체형의 키가 큰 아주 지적인 남자의

모습이었다.

서민기의 풍채가 좀 넉넉한 모습에 비해서 허 선교사님은 좀 마른 체형이었는데,

그가 가진 분위기는 방송국 보도국에서 일하는 서민기보다도 훨씬 지적이고

세련된 모습이여서 할렘가처럼 지저분한 선교지와는 아주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허 선교사님은 교회라고하기엔 너무 초라한 막사 같은 곳으로 서민기와 은희를

안내했다.

뜨거운 열기가 후끈거리는 교회 안에는 기타가 덩그러니 놓여 있고,

강대상이라기보다는 책상 같은 느낌이 드는 나무 탁자가 하나 중앙에

놓여 있을 뿐이고, 나머지는 몇 개의 나무 의자가 초라하니 놓여 있었다.

은희는 허 선교사님이 내놓은 커피를 마시며 가만히 그의 눈빛을 들여다봤다.

너무나 깊은 고요가 그 눈빛에는 있었다.

세상이 무너져도 전혀 요동함이 없을 것 같은 고요함이 그 안에 아주 깊은

정적을 품고 비장한 각오처럼 그렇게 그의 눈빛은 무섭도록 고요했다.

' 사람의 눈빛이 어떻게 저렇게 고요한 바닷속 같을까?'

은희는 서민기가 자신을 의식한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허 선교사의 눈빛을

잠깐 더 바라봤다.

너무 오래 보면 안 될 것 같은 금기사항이 그의 눈빛에는 있었지만,

은희는 그래도 그 금기사항을 잠시 잊은 듯이 그의 눈빛에서 흘러나오는

그 깊은 고요함이 무엇 때문 인지를 찾아보고 싶었다.

“아내는 좀 어떤가?”

허 선교사는 서민기를 향해 짧은 질문을 던졌다.

“응 아직도 그냥 시골에 있어.”

서민기 역시 짧게 대답했지만, 둘은 더 이상 묻고 대답할 어떤 것도

가까운 친구 사이라는 게 그 두 마디에 다 들어 있었다.

두 사람은 대학 때 부터 친구였고, 한사람은 신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길로 이곳

적도의 끝에 있는 아프리카 케냐를 온 것이고,

한 사람은 대한민국의 심장부라고 볼 수 있는 방송국 보도국에서 피디로 세상을

열심히 살아온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은 어느 날 부터인가 세상의 끝과 끝처럼 전혀 다른 세계를

가지고 살아 온 것 같다.

한 사람은 복음을 들고 영생을 찾아서 적도의 끝까지 왔고,

한 사람은 세상의 빅뉴스를 찾아서 세상의 모든 뉴스를 찾아 다녔고,

그런데 그 둘이 가진 우정만큼은 아직도 여전히 사막의 모래처럼 뜨겁게

그들의 가슴속을 데우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그 우정이 그 둘을 지금 이 시간 이 사막으로 부른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은희 자신과 서민기의 우정은 그런 우정에 비한다면 참으로 자신의 것이

초라해 보이는 우정이라는 생각이 은희의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지금도 서민기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리고 아내가 죽어가는 저 가슴 아픈 어릴 적 남자친구에게 오히려 부담 아닌

부담을 느끼는지도 모르는데,

저들의 우정은 그 두 사람 건넨 그 짧은 대화만으로도 그 속에서 느껴지는

공기는 뭔가 달랐다.

‘ 나한테는 어떤 답도 없어. 민기야 넌 그냥 네 아내를 끝까지

사랑하기만 하면 돼. 생명의 원천은 사랑이야. ‘

‘ 난 아내를 사랑하지. 하지만 내 이 작은 사랑이 아내를 살 릴 수는

없지 않니? 그러니까 답답하다는 거지.‘

‘ 아니, 넌 네 아내를 사랑하기만 하면 그 아내가 이 세상을 떠나든

남아 있든 그건 네가 관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기도해보니 ........네 아내는 이미 그걸 넘어선 상태로 들어 와 있어.

쉽게 말해서 네 아내는 이제 곧 하나님 안에 깊이 들어가게 될 거야.

다른 말로는 네가 말하는 사람과 사람의 사랑은 이미 끝이 난 사람일지도 몰라.

그 분은 이미 인간의 사랑을 깊이 원하지 않아. 왜냐하면 그분은 이미 자신의

생명을 누가 주관하는지 알고 있으며, 그 생명의 주관자와 깊은 만남이 이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야.‘


‘ 나는 잘 해석은 안 되네만, 허 선교사, 자네가 그렇게 말을 해주니

내 마음이 좀 가벼워지기 시작했네. 내가 이제 내 아내를 조금 놔줘도

된다는 얘기 같고, 내가 아닌 다른 어떤 분이 그녀를 도와줄 거란 얘기잖아.

안심이 되는 얘기군. ‘

‘ 민기야, 네가 3년 동안 할 수 있었던 일은 아내의 꺼져가는 육체와 그 생명만

안타깝게 붙들고 있었던 거라면, 그녀는 이미 자네보다 훨씬 멀리 가 있는 셈이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떨어져 나와서 아주 멀리서 인간을 보고 있을 수 있으며,

또 아주 멀리서 생명들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는 거지.

주관적인 자세가 아닌 객관적인 자세에서 그 사람은 이미 세상의 주관자는

자신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걸세.‘

‘ 하나님께서 그럼 우리 아내 같은 사람은 천국으로 인도해주는 건가?

만약에 이 세상을 떠난다고 해도......‘

‘ 자신을 용서하고 자신을 죄를 볼 줄 아는 사람..........그런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죄를 용서해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어.

자신을 용서한 사람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달아도 평안을 찾을 수가 있고,

죽음 앞에서도 두렵지를 않은 거야.

그러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죽음이 두렵지.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준다고 해도........ 그는 잘 믿지 않아.

왜냐면 우리는 사실 자신의 존재 안에 이미 죄의식이 깊이 들어 있거든.

그런데 세상을 살면서 또 얼마나 많은 죄를 짓는가....

그렇다보니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께서 흘리신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가 씻어진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사람들은 사실 이 복음을 잘 받아들이질 못해. 그 이유 중에 하나는 자기 스스로 자신의 죄를 용서하지 못하고

쌓아놓고 살기 때문이야.

분명히 예수님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에게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거든.

자네의 부인은 이미 자신의 정체성을 찾은 아주 현명한 사람일세.

이 땅에서 우리는 다 그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이스라엘의 이 천 년 전 여인과

똑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네.

죄를 지었으되, 그 죗값을 어떤 방법으로 치러야 하는지에 대한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그 죄를 진정 하나님께로부터

완전하게 용서함을 받은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더 두려워들 하고 있는 거지.

이것은 죄에 대한 회개를 했다고 해도 자기도 모르게 빠져 있는 정죄감이지.

그래서 그런 정죄감에 빠져 있는 사람은 죄에서 풀려난 속박과 자유함을

경험하지 어려운데..... 사람들은 그걸 잘 몰라.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도 자신을 지나치게 정죄하는 정죄감에 깊이 빠져 있는

그런 경우가 많아.

예수님은 사실 영혼과 육체의 위대한 의사셨어.

그분은 우리의 영혼을 고치시는 의사이기도 하시고, 육체의 질병도 완전하게

고쳐주시는 의사셨지

그래서 그분이 손댄 사람은 실패하는 경우가 없거든.“

“ 그래 허 선교사......내가 무엇인가 해보려고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만,

위대한 신이 개입을 하시면 나 같은 하잘것없는 인간이 버둥거리는 거 보다는

훨씬 낮겠지.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은 바로 그거였군.”

‘ 그래 민기야, 네가 하려고 하는 것을 다 내려놔봐. 넌 네가 아내에게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을 거야. 그러니 이제 신 앞에 겸허하게 맡기고 그분의 손길을

기다려봐.........그분이 어떻게 하시든........순종하면서....‘

은희는 허 선교사의 가슴속에서 인간이 성화되어 갈 때 뿜어내는 따스한 불꽃과 같은 밝은 빛이 보였다.

은희에게 그 불빛이...그 밝은 빛이 보인 것은 다른 것이 아니 허 선교사의 그 눈빛에서 처음부터 보았던 깊은 고요였다.

이 더운 나라에서........ 숨 쉬는 것조차도 힘든 이 환경에서 어떻게 저렇게 고요한

눈빛을 가지고 하나님을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은희는 허 선교사가 그런 눈빛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에는 어떤 일에도 요동치 않으며

이 적도의 끝에서 신 앞에 자기 할 일을 한 사람이 받게 된 하나님의 선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희와 서민기 그리고 허 선교사는 그날 밤에 셋이서 적도의 끝에 걸쳐 있는

집채만 한 달을 함께 보았다.

사막의 풍경이 겨우 끝나는 지점에 있는 허 선교사의 작은 교회와 사택이 있는

그 할렘가 같은 곳에서 보는 적의 달빛은 그날 밤 또 한 없이 아름답고

한없이 푸르러서 그 빛이 머무는 지상의 어디에도 슬픔이나 고통은 없을 것만

같았다.

은희는 그 적도의 달을 처음 보았을 때, 열 네 살 에 헤어진 친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날 밤 호텔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친 엄마에게 짧은 편지를 썼던

기억이 났다.

인간의 만남이라고 보기엔 특히 가족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기구한 운명처럼

엄마와 헤어지고, 그 가슴속에 상처가 너무 오래 돼서 꺼내 볼 수조차 없었던

자신의 모습이 발각 된 곳이 바로 이 적도의 달 앞에서라니 세상 어느 곳에서나

자연이 주는 영향은 사람을 본능적으로 깨우치는 어떤 힘이 있는 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리움이든.......사랑이든......상처였든지 간에.... 자신에게 숨겨진 무엇인가가

적도의 달 앞에서 각자 드러난 것이다.

서민기도 두고 온 아내를 생각하는지 아무 말 없이 그 적도의 달빛 아래서

오랜 시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다만 허 선교사만 서민기에 자신의 사역에 가는 길에 대해서 한 마디만

했을 뿐이다.

‘ 민기야.......여기까지 와줘서 고맙다. 내가 너에게 낮에 해준 그 긴 말들은

사실 너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될 수도 있어.

넌 아내를 살리고자 왔지.......그런 말을 들으러 온건 아니잖아.

그런데 난 정작 네 아내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고,

다만 그 분이 하나님을 만나고 있다는 확신은 오고 있어서 너에게 그분이 신과의

만남이 이루지고 있는 부분을 좀 보충 설명한 것뿐이야.

아마존에서 사역을 하셨던 어떤 한국 선교사님이 있었어.

그분이 암으로 십년 넘게 투병하시다가 아마존 정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이런 말을 했어.

그분이 어느 날 예수님께 성화되길 간절하게 기도 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셨대, 그분은 말기 암으로 아마존 정글에서 사역을 하고 계시던 중이였는데

하나님은 그분에게 이런 음성으로 답변을 하셨다는 거야.....

“ 네가 성화되고 싶으냐? 그럼 나 예수를 죽이고 지나가라”

하고 말씀 하셨다는 거야.

민기야, 난 아직도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다 해석을 못했어.

내가 그 선교사님이 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해석을 못하는 이유는 .....

내가 아직 성화의 단계에는 전혀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왜 내가 성화되어야 하는 과정에는 예수님을 죽이고 지나가야 하는 건지......

도무지 납득을 잘 못하고 있는 부분이 아직도 남아 있는 거지.

신을 만나서 변화되는 과정 중 가장 높은 단계가 성화의 단계거든.

그런데 그 단계를 올라가려면 예수님을 죽이고 지나가야 한다니....

성화에 몸부림을 치는 어린 종이 어떻게 예수님을 죽이고 지나갈 수 있겠니?

예수님을 죽음의 자리에 몰아넣는 자리........그런 행위..........죄성.......

그건 뭘까 싶어.

난 내가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간다고 생각했는데.......

그분을 죽이고 지나가라니..........아직도 전혀 납득 할 수 없는 얘기지.

서민기, 난 이제야 아마존에서 돌아가신 그 선교사님이 남기신 말,

“ 네가 성화 되고 싶으냐. 그럼 나 예수를 죽이고 지나가라”

그 말의 해답을 조금씩 조금씩 찾아서 조심스레 한 걸음씩 예수님

품으로 천천히 가고 있는 것 같아.‘


은희는 기독교에서 성화란 말의 뜻의 깊은 의미도 잘 파악이 안됐지만,

예수님이 성화 되고 싶으면 자기를 죽이고 지나가라고 하셨는지...

그리고 그 답변에 괴로워하며 종의 길을 걸어간 아마존 정글의 말기 암

환자였던 선교사와 지금 자기 앞에 앉아 있는 허 선교사와는 어딘가

분명 닮은 데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인간이 추구하는 세계가 어떠한 것이든 간에

그 높이에 거룩히 있다면 그 것이야 말로 가장 고귀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사람의 모습에서 거룩함이 보았다면

자신은 오늘이 처음이었고, 지금 바로 자기 눈앞에 있는 허 선교사였다.

은희는 자기도 모르게 허 선교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이 할렘가 같은

곳에서 사는 모습 자체가 거룩해 보였다.

그날 밤 서민기와 허 선교사는 오랜만에 우정의 샘을 퍼 올리며 둘의 시간의

보냈고, 은희는 허 선교사가 사는 마을과 그곳의 정황들을 들으며

새로운 정신적 자극을 받았다.

은희가 생각하는 그림에서의 내면세계는 표면적으로 들어나는 그림의 세계보다도

훨씬 중요했었다.

그런데 오늘 은희는 이곳에 와서야 비로소 자기가 아프리카를 그렇게 돌면서

여행했던 시간들이나 갤러리를 운영하지 않고, 다시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확실한 마음이 들었던 모든 이유는 바로 이러한 삶들에 대한 깊은 성찰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해 냈을 때 그 길고 지루한 사막을 걷던 외로운

나그네가 얼마나 통곡을 하고 그 사막에서 울고 싶을까 .......

하는 그런 막연한 생각고 함께 자신도 지금 그림의 세계에서 오아시와 같은

정신적 세계를 찾아서 혼자서 지루한 사막을 걷다가 비로소 이곳에서 맑은 물이

퐁퐁 솟아오르는 사막을 만난 기분이 들어가고 있는 게 신기했다.

아니 어쩌면 그건 신비롭다는 말이 더 옳았다.

이 지저분하고 쓰레기더미 같이 온갖 더러운 것이 모여 있는 이 마을 한 귀퉁이에

낡은 군대 막사 같은 교회를 지어 놓고 이곳에서 이 할렘가의 아이들과 이곳의

사람들과 함께 빵을 나눠먹고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허 선교사를 보면서

자신은 이제야 겨우 길고 긴 나그네의 여정이 끝이 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그 어느 것도 자신의 삶에서 기쁨을 가져다주거나 행복을 가져다 준 적은 별로 없지만, 여학교 시절 언덕 위에 좁은 길을 따라서 올라갔던 그 고아원의

모습이 지금 바로 적도의 끝에 있는 이 아프리카 케냐의 한 사막 끝에 할렘가에서

다시 찾은 것이다.

이곳에서는 타샤와 만나서 처음으로 나눴던 호텔에서의 저녁 식사처럼 뭔지

가슴이 뭉클 거리고 내 가슴을 다시 뛰게 할 뭔가가 숨겨져 있을 거란 생각이

은희는 들었다.

호텔에서 처음으로 타샤와 저녁을 먹고 난 뒤에 타샤에게 자기 집에서 같이

살자는 말을 했을 때 타샤의 눈동자에 비치던 그 생기가 지금에 와서 자신의 눈빛에

다시 되돌아와서 생기를 주면서 빛을 발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다.

‘ 난 이제야 내 목초지를 찾아낸 목동이 된 기분이야.......후 후 ’

은희는 행복했다.

아주 행복한 밤을 그 막사 같은 교회의 낡은 의자에서 잠을 자면서

처음으로 느꼈다.

영혼의 맑은 소리가 자신의 심장 박동 안에서 울려 퍼지듯이 어디론가 울려 퍼져

나가며 은희는 밤새 자신이 그려야 할 그림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 그림에는 타샤의 친구들도 되고 허 선교사가 기르는 교회의 아이들이 되기도 했는데, 은희는 그 아이들을 모델로 수백 장의 그림을 그리고 또 그리고 있었다.

그 그림에는 아이들이 교회 앞에서 줄을 서서 수프와 빵을 타면서 환하게 웃는 모습도 있었고, 또 허 선교사의 고요한 눈빛을 담은 자화상도 있었고,

서민기의 아내가 보내온 시집에서 시 한편을 꺼내서 그 시상을 그대로 가지고

그림을 그린 시골 교회 마당의 개나리 꽃 핀 풍경도 있었다.

은희는 그날 밤 빅토리아 폭포 앞에서 들었던 우레와 같은 물소리보다

더 큰 물소리를 메마른 사막 끝에서 들었다.

은희는 그제야 알게 되었다.

자신의 영혼이 얼마나 목말라 있었는지를...

그리고 그 영혼의 소리가 날마다 자신의 내면에서 목마르다고...

목이 마르다고... 목이 말라서 내가 타 죽을 것 같다고 ....소리소리 지르며

그렇게 자신이 삼십 칠년이란 세월을 살아온 것을 ....

은희는 그날 밤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영혼의 목마름이 비로소 그 가장 보잘 것 없는

아프리카 케냐의 허 선교사라는 낮선 선교사의 막사에서

처음으로 채워지는 것을....

그리고 그 긴 목마름의 끝에서 그녀는 비로소

폭포처럼 부어지는 우레 같은

영혼의 생수가 부어지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아! 그것은 정말 놀라운 소리 그 자체였다.

밤새도록 영혼의 끝없는 울림 끝에 들려오는 그 소리들은 ....

사막에서 백합화가 피어나는 소리....

벙어리들이 말을 하며 입이 풀리는 소리 ....

귀머거리가 소리 지르는 소리 ....

절름발이가 사슴처럼 뛰는 소리....

앉은뱅이가 겉옷을 벗고 달려가는 소리들 이였다.

여학교 시절에 다니던

언덕위에 고아원에서 어느 날 수녀님이 아이들에게 들려주던

성경의 한 대목이 들려오듯이 ....

끝없이 울리는 기적에 소리들이 우레처럼 들려오는 것을

그녀는 처음으로 들을 수 있었다.


은희는 생각했다.

인생이 풀어낼 수 없는 수많은 비밀이 이 낡고 허름한 허 선교사님이

사시는 막사 안에는 들어 있다는 것을 ...

그리고 은희는 그 막사에서 언제나 목마르지 않게 살아가는 법을

깨달은 허 선교사님에게는 십자가라는 순결한 샘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십자가의 길에는 순결함이 아니고는 그 어떤 것도

결코 섞이지 않는 법이란 것도

은희는 허 선교사를 그 후, 오래 만나면서 차차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은희 자신도 십자가의 순결함에 들어가기 위해서

얼마나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불순물을 빼내야 하는지....

살아가는 날 동안 불에 달궈진 순금으로 나오기에는

자신이 얼마나 더 달궈져야 하는지...

막사에서 처음 자는 그날 비로소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은희는 그날 밤 막사에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열네 살에 헤어진 엄마를 또 다시 만났다.

처음엔 케냐에 와서 그림을 그리기로 작정을 하고 도우미를 만나기 위해

약속을 해 놓고 호텔에서 낮잠을 잘 때였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은희는 그날 밤,

허 선교가 빌려준 막사에서

잠을 자다가 다시 엄마를 꿈에서 본 것이다.

처음엔 고향 옛집 앞에 복숭아밭에서 조금은 늙은 중년의 엄마가

거칠고 늙어버린 손을 가지고 복숭아꽃과 작은 봄꽃을 만지고 있었다면,

두 번째 엄마는 어느 유명한 오페라 극장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은희는 화려한 오페라 극장에서 서서 노래를 부르는 엄마가 이상하게

자기가 사는 세상과는 딴 세상에 사람 같았다.

결국 엄마가 얻고자 했던 것은 저렇게 화려한 세상 이였던가?

화려한 의상에 화려한 무대에 유명한 이름....

결국 우리 엄마가 얻고자 했던 것이 저런 것이라서 ...

나를 아무도 모르게 버리고 고향을 떠난 것이었나?

그래서 재벌 아버지에게 나를 맡기고 자기만의 꿈을 찾아서 떠난 것이었나?

그리고 새엄마에게 나를 그렇게 “ 네 엄마는 인간에 대한 예의도 없는 여자”란

소리를 듣고 자라게 해서 ...... 나에게 그렇게 무거운 짐을....

새 엄마의 병치레를 7년씩이나 해야 하는 그 허무한 의무감을 갖게

해준 것이었나?

은희는 꿈속에서도 자신의 마음이 어수선해 졌다.

그러나 은희는 잠에서 겨우 깨어나서야

새아버지가 친엄마가 죽었다고 말한 뒤 더 이상 친엄마를 찾지

못하게 한 이유는 ....바로 .... 오늘 밤의 꿈처럼 어쩌면 친엄마는

자신만의 인생을 찾아서 떠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만을 위해서 ...자식인 ... 딸인...나를 버리고 간 엄마.

그렇다면 더 이상 그 인생에 대해서는 찾으면 안 되는 것이었구나...

은희는 그날 밤에야... 열네 살의 어린 은희에서 서른일곱의 처녀

은희가 다 되도록 깨닫지 못했던 엄마에 대한 숙제를 풀어냈다.

은희의 꿈을 멀리하고 허 선교사가 있는 막사에

태양은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은희는 태양이 점점 가까이 떠오르는 미명에 가만히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기도에 손을 만들었다.

신 앞에 겸허하게 기도의 손을 만들어 본 것이다.

그 손은 이상하게 처음 엄마를 꿈꾸던 날 보았던 엄마의 거칠고 늙어버린

손과 똑같이 거칠고 쭈글거리는 늙은 손이 되어 버렸다.

은희는 처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다.

“ 하나님 제 손을 이렇게 거칠고 쭈글거리고 볼품없이

만들어 주세요.

이제부터는 이곳에서 굶고 배고픈 아이들과 함께

살면서 이런 손으로 살고 싶어요.

매끄럽고 물방울이 튕겨져 나갈 것 같았던

우리 새 엄마의 그런 고운 손이 아닌....

아주 못생기고 거친 손이 되어서 이곳에서

타샤 같은 아이들과 함께 살고 싶어요.

제 손에 그림물감보다 더 거친 모래바람을 실고...

저 굶주린 아이들의 배를 같이 움켜쥐고....

그 아이들에게 빵과 스프를 퍼주는 손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저 아이들의 배고픔과 외로움이 .... 상처 난 몸들이

내 살과 섞여서 내 살에서도 고름이 흐르고 그 더러운 피에

파리 떼가 엉켜 붙는다 해도 ... 난 그렇게 한 번 살아보고 싶어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

은희는 기도를 끝내고 예수님이 누군지도 잘 모르는 자기도

이제는 예수를 믿는 딸이 되었다고 확신을 했다.

은희가 기도를 끝냈을 때 서민기는 아내의 간병인에게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 사모님께서 방금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피디 선생님 사모님은 얼굴이 너무 평안해 보이세요,

꼭 잠을 자는 줄만 알았어요.

아무런 예고도 없이 흔들의자에 앉아서 잠을 자다가 돌아가셨어요.

오늘 낮에 개나리 꽃 나무를 여러 그루 화단에 심다가 호흡을

좀 가쁘게 하시더니 .... 졸리고 피곤하다며 흔들의자에서 주무셨는데

그대로 저 세상으로 가셨네요... 어떡해요 피디 선생님 제가 개나리꽃을

못 심게 할 걸 그랬나 봐요.

얼마 전부터 개나리 꽃 나무를 화단에다 너무 심고 싶어 하시더니...

개나리꽃나무를 심다가 이렇게 되었어요.

저 건너편 교회에 목사님이 며칠 전에 개나리꽃 나무를 주신거래요.

요즘엔 그 교회에 자주 갔다 오셨거든요.

거길 갔다 오면 사모님 얼굴이 정말 노란 개나리꽃처럼 그렇게 환해져

가지고 오셨는데.... 사모님이 이렇게 젊은데 아까워서 어떡해요.

그런데 정말 화단엔 온통 꽃들이 만발해서 여긴 진짜 천국 같아요.“

간병인은 아내의 죽음보다 개나리꽃 이야기를 더 오래 했다.

서민기는 아내의 사망통보를 먼 타국에서 듣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아직은 시간이 남아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가다니....

우리 아내는 이제 겨우 서른 살인데...

나랑 일곱 살 차이니까...

우린 결혼한 지 이제 겨우 오년이 지났다구..

신혼이 지나자마자 암이 걸린 거나 마찬가지야

암 투병한 지 삼년 째니까...그런데...왜 이렇게 빨리 가는 거야

우리 아내는 죄가 없는데... 내가 죄인이지“

서민기는 허둥거리며 허 선교사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 내가 도망자가 되었군.... 아내의 죽음을 피해서

아프리카 까지 도망 온 나쁜 놈이 됐어.

마땅히 받아야 할 비난이 또 남았군 내게는....

비겁한 인간 서민기일세 난.

허 선교사 하나님이란 분은 내게 아내를 맡기기는 맡겼던 걸까?

내가 이렇게 먼 곳에 와 있는데 데려가시다니 말이야 .

우리에게 이렇게 짧은 사랑을 허락하게 하실 거면

왜 우리를 만나게 하고 결혼하게 하신 걸까 모르겠어?

정말 신의 뜻을 나는 전혀 모르겠단 말일세. 흑흑“

서민기는 그 말을 하며 또 굵은 눈물방울을 떨어뜨렸다.

허 선교사는 서민기의 어깨를 가만히 끌어안고

그 어깨만 도닥여주고 아무 말을 안했다.

은희는 꿈에서 유명한 오페라 무대에서 노래를 하는

친엄마를 본 것 보다 더 낯선 풍경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새엄마를 저 세상으로 보내고 두 번째 보는

죽음의 풍경이었다.

그러나 서민기라는 이 초등학교 남자친구의 아내....

자신은 한 번도 본적도 없고 목소리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서민기의 아내가 죽었다는 이 당황스러운 아침시간에

자신은 왜 서민기라는 이 친구와 이 먼 타국에서 그것도

어느 선교사님의 막사에서 셋이 같이 있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지만,

서민기가 떨어뜨리는 저 굵은 눈물방울엔 분명히

그의 아내가 쓴 시처럼 서민기의 아내는

죽음 앞에서 새로운 신의 세계에 문을 열어가는

신의 겸허한 뜻이 있었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서민기의 아내를 결국 작은 새처럼 구름 위를 날아갔다.

그러나 서민기의 가슴엔 그녀가 쓴 시가 한 글자 한 글자

맺혀서 새로운 씨앗을 잉태할 것을

은희는 느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참 좋은 시들을 묶어서 서민기의 가슴 한 쪽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불꽃을 피워줄 것을

그녀의 시속에서 느꼈기 때문이었다.

허 선교사는 막사 한쪽에서 작은 십자가 나무를 하나 가져왔다.

십자가는 아주 정교하게 다듬어진 손으로 만든 십자가였다.

“ 내가 만든 걸세.... 이걸 아내의 무덤 앞에 세워주게나

내가 자네 아내가 아프다는 소리를 듣고,

그날부터 기도하며 하루하루 손으로 깎고 다듬고 해서

만든 것일세.

우리 인간은 누구든지 결국엔 다 만났다가 헤어지게 되어

있는 걸세...그건 죽음을 통해서 가장 확실하게 드러나지.

인간이 모든 만남에서 헤어짐이 있다는 것을 ...

부모와 자식에 만남이든

부부간의 만남이든

친구의 만남이든 인간은 결국 이 땅에서 사라지는 날에는

모든 사람과 작별을 하게 되어 있는 거야.

그래도 자네는 참 좋은 아내를 만났던 걸세.

둘인 서로 사랑했잖아.

그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원하시는 일일세.

서로 어떤 관계든지 만났다면.... 그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서로 사랑하길 원하시는 게 가장 큰 하나님의

뜻일세.

하나님은 큰 걸 바라지 않으셔.

우리가 살면서 가장 가까운 사람과 서로 사랑하길 원하시는 게

그게 바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이란 말이지.

자네 아내도 자네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그렇게 떠나서

이별 연습을 하고 있었던 것 같으네.

그러니 이제 자네는 자네가 하던 일을 더 열심히 하면서

주변에 사람들과 서로 어깨를 기대어 보게.

자넨 좋은 직장에 있으니까 그곳에서 세상의 빛이 되어주면

아내도 천국에서 기뻐할 걸세.

자네 아내는 죽음이 아닌 저 천국 본향의 집으로 갔다네.

그분은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다 갔으니까 ....

그분이 쓴 시를 내가 어젯밤에 다 읽고 참 깜짝 놀랐다네.

그분은 정말 하나님과 깊이 만나고 있었던 같으네....

자네는 이제 아내 걱정은 아무것도 안 해도 될 걸세.

그분은 좋은 곳으로 갔을 테니...

우리 인간이 당연히 가야할 본 향집.... 예수님이 계신

저 천국에 갔을 거야.... 힘을 내게 친구... 이제는 “

은희는 생각지도 못한 서민기와의 만남이 하룻밤 만에

그의 아내의 죽음으로 이어지자,

자신은 서민기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줘야 할지를 못했다.

그러나 은희는 서민기가 빨리 아내의 장례식을 위해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했기에

허 선교사와 둘이 서민기를 나이로비 공항에서 배웅해주는

일 밖에는 해줄게 아무것도 없었다.

서민기는 허 선교사가 만들어준 십자가를 포장해서 들고

비행기에 올랐다.

서민기는 비행기를 타러 나가기 전에 공항에서

처음 만날 때 메고 있던 독일제 수동식 카메라로

세 사람이 같이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카메라를 넘겨주고

세 사람은 사진을 찍었다.

수동 카메라의 셔터가 찰칵하는 금속성의 소리를 냈을 때

세 사람은 어느 사이 오래된 우정을 나눈 사람들처럼

아주 활짝 웃고 있었다.

서민기도 아내도 아내가 죽은 장례식장을 가는 남편의

얼굴 표정이 아니었다.

좀 전까지는 어두웠던 얼굴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는 오랜 휴가를 끝내고 방송국에 뉴스를 담당하러 나가는

보도국 피디답게 긴장감이 흐르는 생동감이 있었고,

허 선교사도 친구의 아내가 죽었는데,

장례식장에도 따라가지 않는 나쁜 친구가 아닌

선교사 본연의 자리를 지키는 평범한 종의 해맑은 얼굴이었고,

은희 역시 서른일곱까지의 긴 방황을 끝을 낸

마지막 종착지를 찾은 ..... 한 마리 일어버린 양이 아버지의 품에

안긴 듯이 ......너무나 기쁜 표정이었다.

사진을 찍어준 나이로비 공항의 행인은

이 세 사람이 지금 아내가 죽었다거나

친구의 아내가 죽은 것을 알고도 이렇게 각자의 웃음을 띠고

공항 한가운데서 기념 촬영을 하는 줄을

카메라 셔터가 깜깜하게 닫히는 순간까지도

조금도 눈치를 못했다.

다만 서민기의 아내가 남겨둔 시작 노트를 들고 있던

허 선교사만이 그 순간,

서민기의 아내의 영혼이 반짝하는 초고속의 빛의 광선을 따라

카메라 셔터가 불을 밝혔다가 꺼지는 것처럼

한 사람의 영혼도 그렇게 이 지구상에서 순식간에 태어났다가

사라지는 게 인생이구나 ....하며 영혼의 무게를 잠깐 느꼈을 뿐이었다.

은희는 서민기탄 비행기가 하늘을 오르는 것을

보며 나이로비 공항을 나섰다.

서민기가 탄 비행기는 아프리카의 강렬한 태양빛을 뚫고

창공을 향해 은빛의 새처럼 날아올랐다.

비행기가 하늘 높이 날아오를수록

비행기는 점점 작은 새처럼 작게 작게 날개를 펼치며 날아갔다.

그때 아프리카의 태양은 은희에게 다시 강렬하게

쪼이며 그녀에게 가장 뜨거운 불의 온도를 가지고

지금까지 그녀가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사람에 대한 사랑들을 열망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오늘 새벽에

그녀가 허 선교사의 막사의 했던 기도의 마지막 말이

다시 그녀의 가슴을 선명하게 두드렸기 때문 이였다.

.....저 아이들의 배고픔과 외로움이 .... 상처 난 몸들이

내 살과 섞여서 내 살에서도 고름이 흐르고 그 더러운 피에

파리 떼가 엉켜 붙는다 해도 ... 난 그렇게 한 번 살아보고 싶어요.

공항을 나오자 허 선교사는 언제나 그랬다는 듯이

혼자 구도의 길을 걷는 외로운 성자가 되어버린 채로

말없이 혼자 할렘가를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은희는 허 선교사가 탄 버스를 멀찍이 바라보며

혼자서 오래 오래 손을 흔들며 서 있었다.

그리고 그가 타고 간 버스길을 따라 계속 쉬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작열하는 아프리카 태양빛 아래를....

그리고 은희는 그날 그 버스길에서

처음으로 우레와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

은희는 우레와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처음 듣고

그 자리에 서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서른일곱 해의 긴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와

이제 막 빛을 본 태아처럼

밝고 우렁차게 그녀는 노래를 불렀다.

내가 살아갈 그곳

그곳에서 아이들이 춤을 추네요.

검은 얼굴엔 고름이 가득하지만

아이들이 춤을 추네요.

발랄하게 신나게 춤을 추네요.

부어오른 배는 배고픈 아픔이지만

목마른 심장엔 고통이 있어도

그곳에선 아이들이 춤을 추네요.

앙상한 뼈들이 팔다리 흔들어도

물푸레 잎처럼 싱그럽게 피어서

지상에 가장 행복한 만남이 있어

잃어버린 꿈을 찾아주는 사람이 있어

그곳에선 나도 아이와 춤을 추네요.

내가 살아갈 그곳에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곳에는

빛으로 환하게 둘러싼 빵 한 조각을 보고

아이들이 서로를 안고 춤을 춘 다네요.

은희는 혼자 노래를 지어 부르며 허 선교사가

타고 간 버스길을 끝없이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새벽에 쓰는 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