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중천에 떠올랐다. 방개는 짚더미를 쌓아 올린 짚가리에서 지푸라기를 털면서 밖으로 나왔다. 짚가리는 방개가 겨울이면 주로 이용하는 집이다. 가을에 벼를 베고 나면 벼이삭을 털고 난 볏짚의 낫가리를 높이 쌓아놓은 그곳이 방개의 방이고 지붕이고 추위를 피해서 잘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방개가 일하러 돌아다니는 마을에 사람들은 누구나 방개가 낫가리를 높이 쌓아놓은 짚가리에서 겨울이면 잠을 자는 것을 인근의 마을 사람들도 다 아는 기정사실이다. 생각보다는 지푸라기로 만들어진 건초더미라서 그 안은 무척이나 훈훈한 훈기와 따스함이 깃들여 있는 공간이었다. 한가운데를 깊이 파서 그 안에 잠을 자고 일어난 방개는 거름 냄새가 나는 지푸라기를 툭툭 털고 나니 갑자기 춥고 배가 무진장 고팠다.
방개는 우선 둥근 박을 반으로 잘라 만든 종그락 하나를 머리맡에서 소중하게 들어 올렸다. 박으로 만든 종그락은 그의 재산 일호였다. 그에게는 노란 종그락 하나가 전 재산이다. 두벌 옷도 없는 그에게는 밥을 먹어야 하는 밥그릇 대용인 노란 종그락은 너무나 중요한 물건이다. 지금 쓰는 종그락은 지난가을에 윗동네 사는 과부 박권사님이 한 개 주신 거다.
“방개야, 밥 굶지 말고 올 겨울에는 이 종그락으로 동네 사람들한테 밥 잘 얻어먹고 다녀야 혀. 에쿠, 내가 부자면 네 아침은 내가 매일 주면 좋겠는디 나도 자식 넷에 과부 신세니 너까지는 못 먹이겠다. 하나님은 과부에 기도를 잘 들어주신다고 부흥강사가 와서 말씀하셨응께, 언젠가는 우리 집 쌀 독에 쌀이 넘치고도 남을 겨, 그때는 나도 너한테 맘껏 밥을 한 양푼씩이 퍼서 줄 량이니께 그때까지만 참어봐 잉.”
박권사가 하얀 박꽃에 매달린 박을 잘도 익혔는지 노란색 종그락은 안이나 밖이 똑같이 그녀의 마음처럼 둥글고 매끄러웠다.
“아이구, 고맙구먼유, 박권사님, 이 종그락 지 밥얻어 먹는 밥그릇으로 잘 쓸게요, 그리고 박권사님한테 하나님이 쌀 많이 주시길 교회보문 저두 기도하구 다닐께유.”
방개는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떠돌이였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총각이었다. 그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지만, 그를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그다지 없었다. 이 동네 저 동네를 동냥을 다니기도 하고 일을 해주고 밥을 얻어먹기도 했는데, 그러나 그가 하는 행동은 특이하게도 알고 보면 아무나 절대 할 수 없는 선에 가치를 둔 아주 특별한 일들을 했다.
그런 그가 종종 우스개 소리도 잘하다 보니 그가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녀도 사람들은 그런 방개와 농담도 진담도 잘하며 지내기 일쑤였다. 다만 새로 시집을 온 새색시들이나 동네의 조무래기 아이들은 시커멓고 등치가 큰 방개를 조금은 무서워한 것도 사실이다.
“박권사님, 그런데 하나님이 계시문 권사님은 교회 가서 밤낮 이로 울고 불고 기도 많이 해야지유,
그래야 하나님이 쌀독에 쌀가마니를 보내시는 걸 보고 하나님이 계신가 아니 계신가 알 거 아녀유.
히히히.”
박권사가 방개의 실없는 농담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야단반 푸념반 대꾸를 한다.
“에이 이 방개가 날 또 시험하네,
이 녀석아 논밭에 가서 일해야 쌀이 생기고, 밭에 가서 고구마라도 캐야 고구마도 생기는 거지.
교회 가서 일도 안 하고 기도만 하고 쌀독에 쌓이게 하는 일이 어딨어,
일도 안 하는데 하나님이 밥을 어떻게 먹이냐.
너도 이 동네서 동네 사람들 심부름도 하고 이 집 저 집 일을 해주니까 겨울이라도 동네 사람들이 너를 밥을 주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아직 다 사는 게 힘들어서 누가 비렁뱅이들 밥이나 제대로 주더냐,
아직들 다 배골쿠 사는 집들이 많아.
나도 과부라서 내 새끼들도 하루 한 끼는 꽁보리밥도 겨우 먹이는걸 뭐,
아유, 전쟁통에 더 이 나라가 가난해졌지 뭐냐.”
방개는 박권사가 자식들에게 꽁보리밥이라도 먹일 재간이 있는 게 보통은 아니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니 이제 한 오십 정도 되어 보이는 박권사가 하루 종일 논과 밭에서 땀에 절도록 일을 하는 것 아니던가.
방개는 속으로 아는 것을 겉으로 다 말하지는 않고, 그저 농담처럼 우스갯소리를 또 한마디 더 한다.
“아이구, 그렇게 여느 때까지 소처럼 일만 하고 살어유, 남편도 없는 과부가. 얼른 시집가유,
박권사님 아직두 얼굴이 하얀 달덩이 같이 이쁘구 환혀유. 히히히.”
방개는 농담이 아닌 진담을 말했다. 방개가 볼 때는 박권사는 나이가 먹은 중년 여인이었지만, 얼굴이 달빛에 본 초가집에 올라간 하얀 박처럼 그렇게 얼굴이 희고 이뻤다.
서른 살 방개가 봐도 중골 동네에서 나이 든 아줌마 중에는 최고로 이쁜 건 사실이었지만, 과부 박권사는 갑자기 자기가 이쁘다는 방개의 말에 쌩하며 대문을 닫아걸고 들어가 버린다. 누가 들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방개는 얼음진 논을 재게 걸으며 논바닥을 걸어 나갔다. 동네에 가서 아침을 얻어먹으려면 아침밥을 할 때 나가야 밥을 얻어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논바닥이 얼음과 눈으로 미끄러운데 방개가 신은 검정 고무신은 발바닥이 뚫어져서 찬 얼음이 발바닥에 박히듯이 시리고, 갈라진 발 뒤꿈치가 바늘에 찔리듯이 따갑고 아팠다.
그가 서둘러서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은 중골동네에서 제일 부잣집인 안 씨 어르신 집에 가봐야 밥을 일단 얻어먹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 시간이 방개의 하루 중 제일 중요한 시간이었다. 이 밥때를 놓치면 그날 하루 종일 밥을 굶을 수도 있거나 아니면 저녁이 되어서야 밥을 먹을 수가 있었다.
이 동네에서는 식구들 밥 먹을 쌀이나 보리도 없는 집들도 있고, 가끔은 인색한 안주인이 밥을 주기는커녕 소리를 지르고 혀만 끌끌 차는 경우도 있어서 열 집 이상을 돌아야 겨우 허기를 면하는 경우가 많아서 검정 고무신이 미끄러져도 방개는 급하게 서둘러서 동네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논바닥을 이백 미터 정도 걸어서 논둑을 올라오니 앞 동네에 아침밥을 하는 굴뚝에 연기가 여기저기서 자욱하다.
방개의 입에서 침이 꼴깍하고 넘어간다. 약간은 움츠러든 어깨와 거북이 등처럼 휜 등짝과 두툼한 상체에 비해서 약간은 짧은 다리가 어쩌면 그렇게 물속을 돌아다니는 방개처럼 비슷하게 생겼는지, 사람들은 그를 ‘방개’ ‘방개’하고 불렀는데, 그가 그렇게 불려서 그의 이름이 방개인지 아니면 호적에 정말 ‘방개’라고 올려져서 ‘방개’인지를 대다수 사람들은 잘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방개’가 본명인지 아닌지는 그의 가족이 아니면 전혀 모를 만큼 그는 일찍부터 이 마을 저 마을을 거지와 날품팔이 일로 떠돌며 사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