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12년 차. 10년 고비를 넘겼으니 다음 고비가 올 때까지 우리는 잘 살아낼 수 있지 않을까?
사는 게 다 비슷하고, 별 남자 별 여자 없다지만 각자가 느끼는 고유한 결혼 생활은 결코 같은색이 될 수 없다. 그 넓은 스펙트럼 속에서 비슷한 채도와 명도 사이를 오가는 결혼 생활에 가끔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낀다.
20년을 같이 살아도 꼭 말해줘야 안다며 답답해하는 부부도 있지만 우리 집의 경우는 대체로 상대의 언어와 비언어 사이에 머무는 감정을 잘 알아채는 편이다. 그가 왜 힘들어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하는 편이고, 그 역시 그런 편이다. 알고도 모른 체하는, 또는 더 못살게 구는 고약한 심보가 생길 때도 있지만 대게는 평화를 위해서 지난한 싸움이 될 만한 선은 넘지 않도록 조심한다.
사랑에도 색깔이 있다면 10년이 넘은 부부의 사랑은 무슨 색깔일까? 보라색쯤 되지 않을까?
불타는 사랑의 상징인 빨강과 이성적인 사랑의 블루를 섞은 색깔, 보라.
신비로워 보이는 색깔처럼 결혼도 그런 것으로 보였던 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미친 짓'을 할 수 있을까?
아, 어쩌면 결혼은 그냥 '미친 짓'이 아니라 '미치고 환장할 짓'인지도 모른다. 어느 감독의 말처럼.
토요일 밤에 종종 남편과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곤 한다. 소주 한 병으로 사이좋게 나눠 마시는 것이 가장 적당한 우리로서는 서로가 술친구로도 최고다. 가끔 와인을 마시기도 하고 주종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한 병으로 나눠 마시는 건 똑같다. 안주를 고르는 취향도 비슷해서 집에서 누리는 야간 포차가 내심 기대되는 날도 있다.
그러면서 고맙다 말하지 못한 것, 미안하다 말하지 못한 것 등 일간의 감정이나 묵혀뒀던 속내를 나누곤 한다. 두 손 부여잡고 잘 살아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날도 있고, 시시껄렁한 이야기로 끝나는 날도 있고, 시작은 비슷하지만 마무리는 다양한 야간포차다.
애석하게도 오늘은 조금 슬펐다.
요 근래에 우리는 각자 바쁜 날이 많았고, 장기간 몸 쓰고 머리 쓰느라 힘든 날도 많았다. 그러다 보면 살만하던 인생이 참 지독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이제는 각자 삶의 무게를 담담하게 견뎌낼 줄 알아야 한다는 걸 알만큼의 나이가 되었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힘듦의 대상마저 모호한 채로 마구 쏟아내는 날이 있다. 그와 나는 어떤 종류의 '화'에도 큰 소리를 내는 편은 아니지만 나는 가끔 그의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리고 번개처럼 무섭다. 그 속에 날카롭게 나를 저격하는 단어가 들어있지 않음에도.
나는 그가 힘들어하는 정도에 따라 어쩔 때는 미안하고, 어쩔 때는 화가 나다가, 또 어쩔 때는 미안과 화남과 슬픔과 인생의 덧없음이 함께 몰려오며 서글퍼진다. 그의 힘듦을 덜어 줄 방법이 없다는 것에 내 존재가 한없이 작아지는 것 같아서. 우리가 서로의 술잔에 부어주는 술처럼 그의 마음에 알맞은 무언가를 부어줄 수 없다는 것을 느껴서. 단지 사랑이나 미움이 아니라 현실이기 때문에.
나는 우리 결혼 생활에 이런 순간이 찾아올 때면 결혼이 '미치고 환장하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결혼 생활에서 '둘이 사는데 철저하게 하나'라는 생각이 들 때면 몹시 슬퍼진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것을 알기에 상대를 이해하려고 할수록 슬퍼지는 순간이 있다. 항상 좋은 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고 해도 말이다. 이런 야간 포차의 슬픔이 오고 나면 삶에 대해 겸허해진다. 서로의 나약함을 인정해야만 하니까.
나는 절대 착한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한없이 착해질 수밖에 없고, 나쁜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철저하게 나쁜 사람이 되고 만다. 그러니까 둘이 하나가 되는 일은 평생에 걸쳐서 마무리 해햐 하는 숙제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한 손은 마주 잡고 남은 한 손으로는 각자의 삶을 살다가, 마침내 마지막 날에 두 손을 마주 잡는 건 아닐까? 아니면 맞잡은 한 손을 놓아버리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