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연차만큼 오래된 살림살이들이 하나씩 고장 나기 시작했다. TV, 소파, 전기밥솥, 오븐, 냉장고. 얼마 전 바꾼 세탁기를 끝으로 지금은 대부분 새 물건으로 교체되긴 했지만 말이다. 하나씩 고장 나서 집 밖으로 내놓을 때면 곧장 그에 맞는 새 물건이 들어오곤 했다. 가구들도 대부분 교체되었는데 화장대와 책장만 남았다. 화장대도 얼마 전 손잡이가 부러져버렸으니 멀쩡하게 남은 건 책장뿐인 셈이다.
결혼할 때 샀었던 1200자 책장은 유일하게 낡지도 질리지도 않는 가구인 데다 갈수록 쓰임이 커져 오히려 몇 년 전에 같은 사이즈의 책장을 하나 더 들였었다. 인테리어에 별 감각이 없는 덕분에 질린다고 물건을 바꾸는 편은 아니지만 분명 손이 잘 가지 않고, 애정이 가지 않는 물건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멀쩡한 가구나 물건을 버리는 것에 죄책감을 느껴 집안 여기저기 공간을 내어주어야만 했다. 이제는 제법 쓰임에 맞게 교체되었지만 책장만은 다른 것들과 조금 달랐다. 늘 그 자리에 있지만 그 안에 담기는 책이 바뀌어서 그런지 질릴틈도, 쓰임이 다 할 일도 없다. 뒤에 들인 책장마저도 가득 차 있는 걸 보면 앞으로도 책장은 쭉 나의 favorite item이 되지 않을까.
책장에 들어앉은 책 모서리 보는 것을 좋아한다. 매일 책장 앞을 찾는 이유는 달라도 바람은 같다.
답을 찾고 싶다는 생각, 답답한 마음을 위로해줄 한마디를 찾고 싶다는 생각, 더 좋은 아이디어를 얻고 싶다는 생각. 지금 나의 결핍을 채워줄 무언가를 얻고 싶은 마음. 그런 이유로 책장을, 책을 애정 한다.
하지만 애정 하는 마음과 달리 내 독서량은 연평균 30~50권 정도로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러다 작년에 좀 더 높아지고, 올해는 한 달을 남겨두고 100권을 넘어섰다. 100권을 넘으면 채워진 느낌이 들지 않을까 했지만 오히려 더 궁금할 뿐이다. 오히려 결핍이 더 커진 느낌.
"얼마나 더 읽으면 채워짐을 느낄 수 있을까?"
읽었지만 아직 많이 성장하지 못했다
완전히 내 것이 되지 않았다.
그런 것을 느낄 때면 고개가 숙여진다.
세상의 지혜 앞에 고개가 숙여진다. 고민은 더 깊어지고, 사색할 시간은 더 필요하다.
때때로 이런 것들을 깨달을 때면 '나의 위치, 나의 무지'를 안다는 것에 감사하기도 한다.
내 세계가 이토록 좁았다는 것, 내 의식이 미치지 못한 세계가 무한히 크다는 것, 이제야 그것을 알았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책장에 책은 종류도, 깊이도 이전보다 많이 달라졌다. 분야도 확장되고, 읽고 느끼는 것도 깊어졌다.
나이 들어가면서 바라는 모습 중 하나는 기품 있게 늙어가는 것이었다. 돈으로 살 수도, 흉내로 가질 수도 없는 것이라 더 귀하게 느껴졌지만 어떻게 하면 그런 모습으로 나이들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 정답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쩌면 지금 느끼는 이 결핍을 나이에 맞게, 욕심부리지 않고, 정성스럽게 채워가면 기품 있게 나이 들어가는, 괜찮은 어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작은 생각들은 꺼내어 이어 붙여 보고, 지혜를 탐독하며,
그렇게 오늘도 '나'라는 그릇에 정성스레 채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