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둘과 서른넷, 그리고 네 살
인사가 많이 늦었습니다. 사실 새해 하고도 12분의 1이 벌써 지났고, 이제는 2월에 들어섰다. 작년 11월 중순부터 온 거리가 조명을 켜고 모든 공터마다 화려한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동네마다 크리스마스트리용 나무를 잔뜩 가져다 놓고 판매했고, 밤이 되면 저 멀리서 폭죽 소리가 울리기도 했다. 이 도시는 온 성의를 다해 2025년이 끝나가고 있음을 나에게 알렸다. 전쟁이 난 것처럼 마트가 동나버린 크리스마스를 지나고 온 나라가 멈췄던 며칠을 지나 2025년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한국에서 한 해의 마지막 날엔 보통 친구들이 가득한 친숙한 공간에서 좋은 음악을 듣고, 술에 얼큰하게 취해서 케이와 함께 카운트 다운을 해왔다. 올해는 많은 친구들도, 친숙한 공간도 없기에 무엇을 해야 하나 꽤나 고민했었다. 다행히 매우 고맙게도, 우리의 이웃이자 사랑하는 친구인 브이와 브이의 파트너가 나와 케이를 초대해 주었고, 이곳의 전통적인 식사와 함께 한 해의 마지막을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그리고 이곳의 토박이인 브이의 파트너 덕분에, 우리도 이 도시의 여느 사람들처럼 동네 공원 언덕에 올라 폭죽을 터트리고, 온 도시에 폭죽이 터지는 광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으며, 북적거리는, 외롭지 않은 카운트다운을 만끽했다.
사실 나는 이 도시의 속도에 맞춰 연말 분위기를 체감하지 못했었다. 올해 7월에 이곳으로 이사를 했고, 아직 한 해를 다 채우지 않았기에 마무리의 기분이 너무 빨리 찾아왔다 느껴졌다. 생각보다 춥지 않았던 12월 초의 날씨도 한몫을 했다. 하지만 가장 내가 기분을 내기 힘들었던 이유는 잠시 찾아왔던 사소한 우울감이 컸다. 처음으로 한국의 친구들에게 조금 우울한 것 같다고 메시지를 보냈었다. 지난 연말 직전 마지막 글을 쓰고, 그 이후 더 이어 쓰지 못했던 이유도 생각이 정리되지 못한 채 스스로 계속 침전되는 마음을 어쩌지 못했기 때문이다. 평소에 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에 미숙한 90퍼센트 T인간인 나는 내 안의 우울감이 너무나 크게 느껴졌다. 종잡을 수 없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하루들과 인간관계 속에서 속 시원하게 내뱉지는 못한 채 이론적인 해결책만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것을 반복하며, 온 도시는 반짝거리고 모두가 새해에 대한 기대감으로 빛나던 작년의 마지막과 올해의 시작을 나는 오롯이 즐기지 못했다.
내가 어떤 상황이었든 간에 새해는 어김없이 시작되었고 한 달이란 시간이 속절없이 지나갔다. 나는 나름대로 나답게 해결책을 모색했다. 그리고 무던히 노력했다. 우울함을 헤쳐 나오기 위해 비타민 D를 챙겨 먹고, 요가와 필라테스를 규칙적으로 다녔으며, 이사할 집에 채워놓을 가구를 찾기 위해 이곳의 중고 시장을 기웃거렸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에너지를 위해 적성에 맞지 않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고, 이곳에 온 지 7개월 만에 처음으로 언어 시험에 도전하며 도서관에도 매일같이 드나들었다. 이상기후인 것처럼 이상하게 춥다는 이곳에서의 첫겨울을 뼈가 아리듯 체감한 뒤에, 꽁꽁 얼어버린 길을 이제는 꽤 익숙하게 미끄러지듯 다니며, 조금씩 길어지는 해에 희망을 느끼며, 그리고 이제 곧 봄이 찾아와 주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마침 특별한 기념일이 다가와 케이에게 튤립 생화 한 다발을 선물했는데, 케이보다 내 마음이 더 밝아지는 기분도 살면서 처음으로 느껴봤다.
이제 2월이다. 이달 중순에는 드디어 꽤 오래 정착해 살 집으로 이사를 한다. 이사를 마치면 케이는 새로운 직장으로 출근하기 시작할 것 같고, 고양이 식구도 새 집에 적응하며 새로운 기지개를 켜겠지. 나 역시도 잠시 가졌던 우울은 잠시 제쳐두고, 해외살이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것처럼 비자 연장을 위해 서류를 만들고, 프리랜서 디자이너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마련해 가며 새 집에서의 챕터를 만들어가볼 생각이다. 물론 쉽지는 않을 것이고 솔직히 지난 연말에 찾아왔던 우울이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속단할 수도 없다. 다만 나는 그 누구보다 춥고 외로웠던 겨울을 버텨내고 있는 중이기에 다가올 흔들림에 대해 전보다는 나은 대처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여전히 낯선 도시의 차가운 공기 속에 있지만, 길어지는 해가 말해주듯 곧 봄이 온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꽁꽁 얼어붙은 길을 미끄러지듯 걸어 꾸준히 어학원에 출석하고, 학원에 다녀온 후 수많은 서류와 씨름하고, 새로운 기회를 위해 낙담하지 않고 계속해서 문을 두들겨보는, 이 무미건조하고도 성실한 일상들이 결국 나를 지탱해 줄 것임을 잘 안다. 케이의 기분전환을 위해 산 튤립 한 다발이 오히려 나에게 환한 마음을 들게 한 것처럼, 무한한 가능성의 품 안에서 나도 올해를 잘 만들어 가리라 믿는다. 이제야 비로소 새해를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고, 늦었지만 다시 한번, 나에게 그리고 모두에게 인사를 건넨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