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겨울

서른둘과 서른넷, 그리고 네 살

by 제이




나는 겨울에 태어났고, 그래서인지 겨울을 좋아했다. 지난 일 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몰라도 모든 것이 용서되는 것만 같은 연말의 분위기도 좋아하고, 코 끝 시린 어느 날 일과가 끝나고 오뎅바에서 안경에 김이 서리는 따뜻한 사케를 마시는 것도 좋아했다. 두껍고 무거운 코트를 걸치고 포근한 눈길을 걷는 것도, 폭설이 올 때면 마을버스조차 다니지 못하게 되어 10분이면 갈 거리를 30분을 빙 둘러가던 나의 동네도 좋아했다. 날은 춥고 볼은 에이는 것 같지만 청명한 하늘과 시원하게 맑은 공기를 좋아했다.


내가 이 도시에 처음 이사를 결정했을 때, 사람들은 여름에 속아 겨울까지 살 것이라 이야기했다. 그리고 여름의 이 날씨를 최대한 즐기라고 했다. 끈적한 한국의 여름과는 다르게 건조하며 햇살은 따사롭고, 모두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선글라스를 낀 채 잔디밭에 누워있는 계절. 하지만 나에게는 이 여름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주중이 바빠야 주말이 행복하듯이, 나는 언젠가 보았던 웹툰의 한 장면을 기억했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누군가 죽어 천국에 갔지만 평화롭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완벽한 상태가 매일이 반복되니 그 또한 하얀 천국의 탈을 쓴 지옥이었다는 이야기였다. 나에겐 이곳에서 맞은 첫여름이 하얀 천국이었다.


즐기지 못하고 불평만 하던 여름이 아주 빠르게 지나고, 내가 사랑해 마지않던 겨울이 왔다. 어라, 내가 알던 겨울은 이게 아닌데. 날씨는 눈에 띄게 습해져서 잠깐만 요리를 해도 창가에 이슬이 송글거렸다. 바닥 난방이 없는 탓에 하루 종일 양말을 신고 있어도 발이 시려졌고, 하늘은 디폴트로 회색이었다. 언제 올지 모르는 비와 무거운 공기에 익숙해져야 했다. 오후 4시면 해가져서 조금이라도 늑장을 부리는 날에는 첫 끼를 먹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캄캄해졌다. 체감 시간은 실제 시간보다 늦게 느껴지고 평소 잘 먹지도 않던 비타민 D를 황급히 매일 챙겨 먹기 시작했다. 나의 고양이 식구는 발바닥이 차가운지 어떻게든 나와 케이의 무릎 위로 올라오기 바빠졌고, 라디에이터를 켜고 난 후에는 그 위에 올라 늘어져 버렸다. 여름을 대하던 내 옹졸한 마음에 대한 보복인 것처럼, 이곳의 겨울은 나의 시간을 앗아갔고 짧은 하루를 선물했으며 나를 점점 더 조급하게만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야 사람들이 누누이 이야기했던 여름에 속아 겨울까지 산다는 말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겨울이 빨리 지나가주길 바라기 시작했다.


그렇게 12월이 된 지금에서야 어김없이 4시 30분에 온 도시가 캄캄해진 것을 바라보며, 밤이 긴 하루에 조금씩 적응하고 있는 중이다. 해가 떠있을 때는 패딩으로 중무장을 하고 비바람을 헤치며 어떻게든 바깥활동을 하려 노력하고, 해가 지고 난 후에는 불이 환하게 켜지는 요가 스튜디오로 향해 마음을 다스린다. 낮시간 내내 자야 하는 루틴을 가진 나의 고양이 가족은 애먼 시간에 자꾸 일어나 잠투정을 한다. 눈부신 계절의 카페테라스에서 만나던 친구들과는, 이제는 돌아가며 각자의 집으로 초대해 함께 카드게임을 하거나 와인을 마시며 서로를 다독여준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회색 하늘에 푸른빛이 비치는 날이면 우습게도 날씨가 너무 좋다는 말을 연발한다. 도시 곳곳에 열린 크리스마스 마켓과 트리를 판매하는 상점들을 지나치며 신기해하고, 올해의 마지막에 펼쳐진다는 불꽃놀이를 기대한다. 여름이 지나고 후회한 것처럼, 겨울은 그렇게 보내지 않으려 모든 것을 불평 없이 받아들이고자 노력하고 있다. 내가 한때 사랑했던 겨울을 그리워하며 그래도 제법 이 도시에서의 또 다른 겨울을 잘 지내고 있다.


잘 지내는 것과 별개로 이제는 더 이상 가장 좋아하는 계절로 겨울을 꼽는 것이 어려워졌다. 이곳에는 안경에 김이 서리는 오뎅바도, 청명하고 파란 하늘도, 포근하고 소복하게 내리는 눈도 없다. 지루할 정도로 매일이 눈부셨던 직사광선과 푸른 잔디와 반짝이던 호수가 그립고, 얇은 셔츠 한 장과 반바지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맞던 바람이 그리워졌다. 나와 다르게 여름과 따뜻한 날씨를 사랑하는 케이는 며칠 전 꿈속에서 직사광선을 온몸으로 맞는 꿈을 꿨다고 내게 말했다. 웃고 말았지만 나 역시도 조금 지나면 그런 꿈을 꾸고 깨어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기다리면 오지 않고, 가지 않길 바랄수록 빨리 지나가버리는 게 계절일 테니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괜히 여름을 기다리지 않으며 겨울이 가지 않길 바라본다.

작가의 이전글7. 아파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