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행복 총량의 법칙

서른둘과 서른넷, 그리고 네 살

by 제이




삼십 년 동안 그럭저럭 잘 살아내 온 나의 고향을 떠나보기로 마음을 먹은 순간부터 한 가지 물음이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내가 과연 앞으로 더 행복한 삶을 꾸려나갈 수 있을까? 나는 이 질문에 명쾌한 답을 찾고 싶었다.


서울을 떠나며, 나는 내 부모님과 친구들과 작별해야 했다. 영영 못 보는 것은 아니지만 시차부터 삶의 속도까지 모든 게 달라져버리니 시시콜콜한 이야기라도 한번 나눌 참이면 시간을 정하고 바쁜 정도를 물어야 했다. 혹시 지구 반대편의 내가 궁금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는 게 아닐지 눈치를 보게 됐다. 한국에서는 나의 삶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알 수가 없었고, 나는 그들의 삶이 어떻게 지속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게 당연해지다 보니 조금은 외로워졌고, 이해를 하면서도, 조금은 행복하지 않게 느껴졌다.


한편으로 나의 가족은 자유로운 삶과 함께 그 어떤 사회적 기준에 맞출 필요 없는 우리만의 삶을 꾸려가기 시작했다. 서울의 너무 빨랐던 속도에서 벗어나 걸음마를 다시 배우는 것처럼 느리더라도 천천히 우리만의 속도를 만들어가고, 작은 것에서도 성취를 느끼며 조금씩 성장하는 기분을 만끽한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늘 로망이던 높은 층고와 커다란 창을 바라볼 수 있고, 다양한 문화를 접하며 새로운 친구를 사귀며 이곳에서의 작은 사회를 조금씩 만들어간다. 그리고 조금씩 행복하다고 느낀다.


종종 늦은 저녁 들어올 때 출출해지면 먹을 것이 도통 없는 이 나라의 문화를 체감해 버린다던지, 그리 좋아하던 우럭회에 매운탕이 없어서 못 먹는 지경이 된 현실은 불행하다. 하지만 너무나 저렴한 와인과 식자재들, 가끔씩 출몰해 깜짝 놀라게 하는 맛있는 식당, 그리고 케이가 한식을 만들어 줄 때면 또 더없이 행복하다. 어느 날엔 미치도록 친구들이 그립고 엄마의 반찬이 그립다가도, 내년에 이곳으로 휴가를 오려 비행기를 끊었다는 친구의 말 한마디에 기분이 높은 층고를 찌르고, 영상통화 화면 속에서 아버지와 소주잔을 기울이며 나에게 무한한 응원을 보내는 엄마를 마주할 때면 또 마음 한구석이 채워지는 기분이다. 이곳의 언어가 도통 늘지 않는 것 같아 스트레스를 받으며 언제쯤 나는 다른 이들 만큼 하게 될지 비교하며 불행해지다가도, 어느 날엔 정육점 직원과 자연스레 몇 마디를 나누거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냈을 때 조금씩 늘어가는 것 같아 행복해진다. 이렇듯 왔다 갔다 하는 기분 속이 반복되면서 행복이란 게 마치 총량이 정해져 있어서, 넘치지도 부족해지지도 않게 내가 너무 들뜨게도 혹은 너무 좌절하지도 않게끔 조절해 주는 것만 같이 느껴진다.


이런 느낌은 내가 더 행복할 수 있을까란 질문에 대해 명쾌하진 않아도 앞으로를 잘 살아낼 용기를 줬다. 매일 매 순간이 행복한 일만 가득하다면 얼마나 좋겠냐만 그럴 일은 없을 것이고, 모든 것이 새로운 환경에서 스스로를 행복하게 또는 불행하게 만들기는 오롯이 나 자신에게 달리지 않았을까. 누군가는 이 낯선 회색빛 아날로그 도시가 답답하고 피곤하며 도통 정 붙일 수 없게 느낄 수도 있겠고, 또 누군가는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좌절하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남 탓만 하거나 비관하여 우울감에만 빠질 수도 있다. 어쩌면 회색 하늘 사이에도 푸른빛이 살짝 비추듯 계속해서 행복은 조금씩 찾아오고 있는데 스스로 그것을 외면하고 있을 수도 있다. 언제나 좋은 일과 나쁜 일은 함께 오듯 그걸 어떻게 내가 받아들이고 지내느냐에 달렸다.


최근 한국에서는 이렇게까지 스트레스받을 일이 아닌 일인데, 이곳에선 누구나 무척이나 고민하고 스트레스를 받아야만 하는 일에 매달려있었다. 그리고 다행히 아주 운 좋게도 그 일이 마법처럼 해결됐고 나는 이 기쁜 소식을 몹시 들뜨고 행복한 마음으로 이곳부터 지구반대편 서울에 까지 동네방네 자랑했다. 하지만 역시나 행복 총량의 법칙인지, 이내 곧 행복을 깎아먹는 일이 놀랍게도 생겨버리더라. 예전의 나라면 꽤나 스트레스받았겠지만, 이번에는 그리 힘들지 않았다. 그저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며 나의 행복감을 잘 유지하려 노력 중이다. 너무 들뜨지 않으려 애쓰며 동시에 너무 비관하여 작아지는 마음이 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래도 늦게까지 하는 케밥집에 감사하고 바쁜 와중에도 종종 소식을 물어주는 내 친구들에게도 감사하고, 오늘은 뭘 먹고 싶냐 묻는 케이에게 감사하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면서. 내가 이곳에 처음 발 디딜 때 품었던 질문에 대해 그래도 평균적으로는 행복해지는 중이라고 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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