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일이다.
오랜만에 광화문에서 친구들을 봤는데 꽤나 빨리 헤어져 버렸다.
저녁을 먹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배도 많이 부른 상태였고, 그냥 돌아가기도 적적하여 천천히 광화문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러다 미국대사관을 지나칠 무렵 코너에 누군가 꼿꼿이 서있는데 파란 근무복을 입고 있는 의경이었다. 새파란 옷색깔만큼 풋풋해 보이던 의경은 얼굴에 긴장이 잔뜩 묻어나오는 것이 기껏해야 이경이나 일경쯤 되어보였다. 손에 들려있는 봉은 아직 충분히 어두워지지 않은 탓인지 불빛이 새어나오지 않았다.
미국대사관은 보통 의경들이 많이 지키러 오는 시설이다.
근무를 서는 것은 고정이 있고, 이동이 있다. 고정근무는 정해진 위치마다 바로 서서 움직이지 않고 시설을 지키는 것이고 이동은 한 블럭 정도를 어슬렁거리며 거동이 수상한 사람들이 있나 확인하는 것이다. 보통 이동하는 근무는 선임들이 선호하기 때문에 막내들은 대중들에게 잘 노출되어 있는 코너에 고정근무를 서는 경우가 많다.
몇년 전의 나도 이 곳에 서있었다.
코하나라는 곳이 가장 힘든 곳이었는데, 날이 더운 여름날 햇빛을 정면으로 쬐기 쉽고, 날이 추운 겨울에는 거센 바람을 오롯이 맞이해야만 했다.
해가 중천을 지나가는 낮 2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축축해지는 모자 너머로 정면만 응시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기도 했고, 별들도 얼어붙은 듯한 새벽 한 시. 교대근무를 하러 나가라는 선임의 말에 컨테이너에서의 선잠을 깨고 정신이 덜 든 몽롱한 상태에서 겨울 칼바람을 느꼈다.
저 멀리 새벽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몇분이나 지났는지 알지도 못한 채 얼른 오늘 하루의 근무가 지나가고 지나가길 빌고 또 빌었다.
우리는 기동중대였기 때문에 시설근무보다는 시위진압에 더 많이 나갔다.
내가 막 일경이 되던 무렵, 광복절날 1박 2일에 걸친 대치상황에 처했었는데 하필이면 기동버스의 에어컨이 고장났었다. 모두가 씻지도 못한 채 20분씩만 잠을 자다가 교대로 나가야만 했고 다음날 오후가 되어서야 부대로 돌아왔을 때 전 부대원이 탈진해 깊은 잠에 빠졌었다.
이렇듯 몸이 피곤한 경우가 참으로 많았지만 가장 힘들었던 기억은 따로 있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슬금슬금 가을이 오기 시작했을 때였다.
쌀 한가마의 가격을 올리고 싶던 농민들이 지방에서 단체로 올라왔다.
그들은 시청에 쌀을 뿌리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하였고 쌀 가마니로 인형같은 것을 만들기도 하며 정부에게 자기들을 도와달라고 부르짖었다. 생존하고 싶다고, 한 가마니에 23만원을 보장해 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가 높은 분들에게 잘 전해질리는 없었다.
그들을 먼저 우리 의경들이 한번 둘러서 막고, 그 뒤는 직원중대 경찰들이 덮어버렸다.
그리고 더 먼 곳에서는 통행이 불편하다며 투덜거리고 지나가는 많은 시민들이 그들을 가렸으며, 빵빵거리며 신경질적인 크락션을 누르는 차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묻어버렸다.
밤이 깊어지자 그 앞 프라자 호텔에서 저녁 다이닝을 즐기는 양복입은 손님들의 모습이 비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밥을 먹다가 조용히 광장의 농민들을 내려다보며 구경을 하곤 했다. 내 앞에 있는 이 농민들은 이토록 격렬하게 울부짖는데 저들은 참으로 평화롭다. 그것을 가운데서 조용히 바라보는 나도 참으로 이상한 것 같다. 그래서 혼란스러운 마음에 밤하늘의 어두운 구름을 쳐다볼 뿐이었다.
어느덧 새벽이 찾아오고 호텔을 비롯한 많은 건물들의 불이 꺼졌다.
하루종일 목 터져라 외친 우리 남편들 수고했다며 아지매들이 김밥이머 떡을 돌리기 시작했다. 아재들은 막걸리 한사발에 설기를 한입 씹어먹으며 걸걸해진 목을 어루만지다가 서로 다정히 포개고 땅바닥에 누워 이내 잠들기 시작했다. 초가을이라 날이 추웠는데, 짚더미를 위에 덮어서 그런지 그들이 유난히 하얘보였다. 하늘을 쳐다보니 별들도 빼곡히 박혀있다. 저 위에 박힌 것이 별빛인지 쌀알인지 내 정신도 점점 몽롱해져 갔다.
저 멀리서 노오란 햇빛이 불쑥 고개를 내밀자 누워있던 쌀알들이 벌떡벌떡 일어난다.
얼른 돌아가서 농사지어야 한다며 자기들이 버린 쓰레기를 깨끗이 치우고 쌀들을 쓸어담느라 야단스럽다. 그렇게 돌아가면서 아재들은 우리에게 하얀 설기를 내밀면서, 자기들 때문에 고생했다며 이거 먹으라고 받으라고 다그친다.
의경인 우리들은 이것을 받을 수 없기에 그저 앞만 보고 서있었는데 답답했는지 우리들 주머니에 넣어버리고 간다.
생활관에 돌아온 나는 너무나도 피곤했지만 잠에 들 수가 없어서 공중전화기로 달려갔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목소리가 들리지 와락 눈물이 났다. 아들들 고생했다며 환하게 웃던 그 아재의 얼굴 너머로 울엄마, 아빠가 보였나보다. 난 그날 받은 설기를 먹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무게 잡는 상경, 수경을 거쳐 나의 군생활도 잘만 지나갔다. 이제 사회에 나온지도 몇년이나 지나버렸는데, 어째 미국대사관에 오니까 그날들이 새록새록 잘만 기억난다.
편의점에 들러서 초코바를 두 개 샀다.
그리고 여전히 뻣뻣하게 서있는 의경에게 나도 의경 나왔다고 말하며 초코바를 받으라고 했지만 괜찮습니다! 란 말이 되돌아 올 뿐이다.
나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에서 3년전의 내가 보인다. 옅게 미소짓고 주머니에 얼른 넣으면 된다고 말하며 집어넣어주고 도망쳐 버렸다.
내 어린 젊음을 잡아먹은 이 곳이 곧 그의 시간도 담아갈 것이다.
그 친구가 무사히 전역해 3년쯤 뒤에 다시 이곳에서 옅게 미소짓는 내가 되길 기도해본다.
모두 다치지 않고 행복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