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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풍경

by 자유여행자

작년이었나 동문 커뮤니티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글쓴이가 아는 동생이 갑자기 스스로 명을 달리하여 놀라서 장례식에 가봤더니 회사에서 스스로 준비하던 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고 상사랑 불화가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젊고 건강하며 쾌활하고 구김없어 보이던 동생이었고 사랑하는 여자친구도 있었는데 그리 갈줄 몰랐다고, 장례식장에서 서럽게 울던 여자친구의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수험생이던 그 당시에는 젊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는 사람이 뭐가 그리 힘들었을까 싶었다.

너무 힘들면 그냥 그곳을 나가면 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나도 작장생활을 하게 되었다.

권위적인 것과 강요하는 것을 유독 싫어하고 평등한 관계를 좋아하던 나에게 보수적이고 수직적인 직장 분위기는 늘 나를 숨막히게 했다.


사소한 행동 하나 하나까지 의미를 부여하고 예의를 따지는 곳에서, 다른 동기들과 선배들은 모두 이에 대해 수긍하고 있어 내가 추구하던게 과연 정당한 것이었을지 혼란스러워 졌다.


조직과 윗선을 향하던 분노가

동기들과 선배들을 향하던 답답함이

나를 향하는 자책감으로 되돌아 왔다.


문제가 있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너라고

세상의 모두가

그리고 나 자신이

나를 가리키며 노래하고 있었다.


겉은 웃고 다녔지만 속은 곪아들어갔고

한숨쉬는 나날이 많아지다 기분이 자주 침체되고

우울감이 찾아왔다.


이런 나의 감정을 자존심이라는 포장지로 꽁꽁 싸매고 있다가 그 포장지마저 터져버린 어느 날

가족들과 연인에게 슬며시 털어놔 본 적이 있다.


나의 편에서 목소리를 내줄 것이라 여겼던 그 사람들도

원래 사회가 그런 것이고 문제가 나에게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묵묵히 듣고 있다가 전화를 끊어버린 그날밤

창문에 서려있는 서리 너머의 세상을 보려 애쓰다가

나는 모든걸 놓아버리고 싶어졌다.




아. 그 때 보았던 그 글에서의 그 사람도

지금 내가 보고있던 이 풍경을 보았던 것일까.



분노와 답답함과 억울함을 억지 웃음으로 누른채

마지막까지 붙잡던 끈을 놓게 만들었던 것은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 마저 그들과 같은 노래를 불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창문을 손으로 계속해서 비벼본다.

흠이 많고 단점이 많은 나지만

이 답답한 창문을 닦고 닦다 보면

나만의 프레임을 보존한 채로도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나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창문을 계속해서 닦는 것이다.


이 서리가 지워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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