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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간대에 맞는 여행이 있다.

by 자유여행자

대학에 막 입학했을 때의 일이다.

신입생이던 나는 무전여행의 로망에 빠져있었다. 아무것도 없이 그냥 떠나보는게 청춘의 특권인 것 같기도 했고, 그로인해 만나는 사람들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아직 카드를 찍으면 청소년 소리가 나오는 어린애였지만, 나는 그런 여행을 할 수 있을만큼 어른이 되었다고 느꼈던 것이다.




결단을 내리는데는 그닥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걱정하시며 하지 말라고 말리셨지만, 아버지는 남자가 그정도는 해보라며 최소한의 교통비만 가지고 떠나고 나머지는 니가 여행지에서 직접 구해서 여행을 지속해보라고 하셨다. 나는 신이 나서 밤을새며 어디를 여행갈지 고민하고 경로를 짰으며, 이런저런 후기들을 읽어나갔다. 그 중에 자전거로 전국을 도는 사람의 후기가 너무도 좋았기 때문에 나 역시 그런 여행을 떠나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자전거를 들고 떠난 나는 하루만에 지쳐버렸다. 생각보다 엉덩이가 너무 아파왔으며 탈진하기도 하는 등 고생의 연속이었다. 위험한 차 때문에 국도는 국도대로 위험했고, 그렇다고 길이 제대로 이어지는지 알 수도 없는데 다른 길로 빠질 수도 없었다.



그렇게 국도를 따라서 해안가에 겨우 도착했을 때, 새까맣게 타버려 후끈거리는 피부와 탈진한 몸 때문에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해안가에 자전거를 묶어두고 바닷가에서 혼자 놀고 있는데 어느 가족이 말을 걸어왔다. 그들은 내가 하는 여행을 궁금해 했으며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어린 나는 우쭐대며 신나게 이야기를 풀어나갔고, 그들은 재밌어하며 복숭아와 과자 등을 잔뜩 주고 갔다. 꼭 성공리에 여행을 마치라는 이야기와 함께 말이다.




계속 여행을 하다가 어느 마을에서 해가 져버리자 나는 잘 곳을 찾아야만 했다. 그래서 그냥 눈에 보이는 교회에 들어가서 무작정 재워달라 부탁하였는데, 그곳의 목사님은 난감해 면서도 구석에 자리를 잡아주셨다.


구석에서 씻지도 못하고 지쳐서 잠들었다가 새벽쯤 깼는데 새벽기도를 드리러 온 시골 할머니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창피하였으나 딱히 나가서 갈 곳도 없었기 때문에, 등을 돌리고 잠을 계속 잤다. 잠결에 그들의 기도소리가 들려왔던 것 같다.




어느 여행지에서 만난 형은 나와 똑같이 자전거 여행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혼자 다니다 귀신을 본 이야기도 해주었고, 어느 길이 위험한지에 대한 정보도 알려주었다. 그 형과는 하루정도 같이 여행을 하였는데 군대를 갓 전역한 형이라 그런지 엄청 어른스럽고 멋있어 보였다. 그 형과 헤어질 때 다시 혼자가 되는 것 같아 아쉬웠으나 다음 여행지에 대한 설렘 덕분에 금새 잊고 여행을 계속 해나가게 되었다.




그렇게 전국의 많은 곳들을 돌고 돌아오니 몇 정도의 시간이 흘러있었다. 친구들은 나를 보고 군대갔다 왔냐고 깜둥이라고 놀려댔다. 나는 술자리마다 여행의 썰들을 풀어대곤 했고 그 여름이 끝나갈 때까지 그것은 계속되었다. 친구들은 흥미로워하면서 곧 입대한다는 이야기를 하며 전역 후 자기들도 그런 여행을 해보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나도 군대를 갔다왔는데 복학 전 다시 그 때의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다.


그런데 이 때는 자전거로 무작정 전국을 도는게 아니라 기차여행을 계획했다. 내일로 기차여행이 당시 선풍적 인기를 끌었는데 기차를 타고 전국을 돌아다닌다는게 참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바로 준비하고 떠나게 되었다.




그렇게 떠난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은 다 내 나이 또래들의 기차여행객들이었다. 우리는 게스트하우스에 모여 맥주파티를 하기도 하고, 택시를 같이 타고 유명한 관광지에 들러 컨셉 사진을 찍으며 뛰어놀기도 했다. 헤어질 때는 카톡 교환을 하면서 또 이런 여행을 함께하자는 약속을 하였고, 실제로도 여행이 끝난 이후 연락을 이어나가곤 했다.



우리 모두 비슷한 20대 초중반 나이대였기 때문에 빠르게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시간이 흘러 학교를 졸업하게 된 나는 최근 다시 국내여행을 하고 싶어졌다.


한동안 해외여행만 다니기도 했고, 어렸을 때 가보았던 국내 여행지에 대한 추억들이 떠올랐기에 이번엔 국내로 가고 싶어졌다. 어느덧 나이 제한을 넘겨버려서 내일로 기차여행은 갈 수가 없었고, 그 때 그 때 기차표랑 버스표를 끊어서 끌리는 곳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로 했다.





그렇게 게스트하우스도 가보고 좋은 여행지를 가봐도 예전의 느낌이 나지 않는다.


게스트하우스에는 여전히 맥주파티를 하고 있었지만 우리 때와 다르게 참여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아보였고, 새로운 여행지에 대한 설렘도 딱히 일어나지 않았으며, 몸이 고생하는 여행을 하고 싶지도 않아졌다.




나는 과거 내가 해왔던 여행들을 할 수 없는 시간에 도달해버린 것인가.




때는 넘어져서 몸이 까지고 태양빛으로 온몸이 새까매져도 마냥 좋았었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두근거리고 설레곤 했었는데, 지금의 나는 그러한 것들이 그저 귀찮고 피곤하게 느껴질 뿐이다.


아무 옷이나 입고 그게 다 뜯어질 때까지 여행을 다니던 나의 모습은 더이상 찾을 수 없고, 몸을 깔끔하게 하고 옷이 상하지 않는 여행을 하고 싶어졌다.




같은 장소를 돌아다녀봐도 같은 감정이 나오지 않는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나는 싱숭생숭해져서 글을 써나가는 것이다. 이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 때의 어린 나에 대한 그리움일 수도 있고, 지금은 그런 것들을 할 수 없다는 아쉬움일 수도 있겠다.


한없이 철없고 어렸던 시절에 대한 향수가 주된 감정인 것은 분명하겠지만..




다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시간이 싫거나 우울한 것은 아니다.


그저 내가 느낀 것은 그 나이대에 맞는 여행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린시절 성인이 처음 되었다는 설렘과 함께 맞이한 새로운 세상이 나에게는 우주와도 같았지 않았을까. 마치 어린아이가 보는 것마다 흥미를 가지고 빨아들이듯, 나도 새로운 여행지와 새로운 사람들을 보기만 해도 환하게 웃어버렸던 것이다.




그러한 여행을 할 수 있는 시간을 거쳐 또 다른 시간대에 도착했었다.


거기서는 답답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친구들을 만나 신나게 뛰어다니곤 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파티와 함께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우리들은 그저 즐겁기만 했었고, 전국의 우리들을 이어주는 철로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이제 그 시간도 건너뛰어 도착한 이 곳은 조금 피곤하고 무료하긴 하다.


하지만 나름대로의 편안함이 존재하며 안락함도 느껴진다. 굳이 과거와 똑같은 여행을 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미 그 시간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 내게 주어진 이 시간에 맞는 여행을 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닐까.




그 시간대에 맞는 여행이 있다.


그냥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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