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카페에 공부를 하러 들어와 노트북을 켰을 때였다.
친구가 카톡으로 눈오는 풍경을 보내왔다.
어두운 밤하늘에 가득히 내리는 눈송이들과 이미 하얗게 덮여버린 집들이 보이는 사진이었다.
올해는 유난히도 눈이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반가워 그 사진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눈에 대한 기억의 첫번째는 5살때쯤 될 무렵이었다.
부모님은 어느 눈썰매장에 나를 데려갔고 썰매를 타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내가 혼자타려 하자 두분은 걱정스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마냥 좋았던 나는 썰매를 타다 데굴데굴 구르면서도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구르자 놀라서 달려오던 엄마 아빠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다음 기억속에 남은 눈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엄마는 바람을 피던 아빠와 이혼을 하고 나를 혼자 맡게 되었다.
하루종일 가게일을 해서 나를 키우기도 빠듯했던 엄마는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롯데월드에 가자고 했다. 늘 집에서 혼자 티비만 보던 나는 그날이 너무도 즐거웠다.
이런저런 놀이기구를 타고 구슬아이스크림을 먹고 퍼레이드를 보고 집에돌아오는 길에 눈이 펑펑 내렸다. 모처럼 엄마랑 하루종일 놀 수 있어서,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려서 정말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 때의 눈은 귀가길의 모자를 한참동안 따라왔다.
고2에서 고3으로 올라가던 겨울이었다.
성적이 차차올라 상위권 대학도 꿈꾸게 되었던 나는 야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늘상 11시정도가 되었다.
그 날도 야자를 10시에 마치고 버스를타고 김밥 한줄을 먹으며 집에 걸어오는데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그냥 가기 아쉬워진 나는 한동안 밤하늘을 쳐다보다가 손이 얼 때까지 눈을 주물러보기도 하고 여기저기 던져보다가 푹신하게 쌓인 자동차 옆 바닥에 누워버렸다.
눈이 그친 저 밤하늘에는
거대하게 수놓아진 오리온 자리가 떠있었다.
조용하고 아름다웠다.
나는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을까?
1년뒤 대학에 합격할지 궁금해하며
어두운 공간 속 반짝이는 눈과 별을 계속해서 바라보다
온몸이 젖은 채로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다음 눈은 대학에 합격하고 20살이 되던 겨울방학이었다.
친구들과 속초여행을 가보기로 하고 속초의 팬션을 잡았다.
속초에 왔으니 설악산에 가봐야하지 않겠냐고 떠들고는 울산바위에 무턱대고 올라갔다. 당시 눈이 많이내려 우리는 여러번 미끄러지며 겨우겨우 올라갈 수 있었다. 아이젠도 하지 않고 올라갔기 때문에 내려올 때가 더 무서웠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한참을 웃으며 내려오던 길에 파전을 먹었던 기억이 났다. 신발속에 들어왔던 차가운 눈의 감각이 기억속에서 되살아나며 발을 꽁꽁 얼린다.
군대에 들어가서 슬슬 병장이 되던 무렵이었다.
눈을 치우라는 지시에 후임들이 장비를 챙겼는데 병장이라고 누워있기가 그래서 나도 나갔다. 한참 눈을 치우다보니 후임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찾으러 여기저기 돌아다니다보니 체단실 근처에서 울고 있었다. 집에 안좋은 일이 있었나보다. 얘기를 들어주다 안고 등을 좀 두드려주니 더 펑펑 울어댔다. 다른애들이 눈을 다 치웠는지 봐야했기 때문에 좀 더 쉬다 진정되면 들어가라고 말하고 그곳에서 나왔다.
물론 그일에 대해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는데 그뒤로 그 후임은 전역때까지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새하얀 눈만큼이나 마음이 여린놈이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눈은 전역한 뒤 1년쯤 지났을 때였다.
그당시의 우리는 눈을 맞으며 조용한 길을 거닐고 있었는데 서늘한 눈송이 사이로 이별의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오랫동안 함께 추억을 쌓았어도 헤어짐은 한순간이다.
시린 눈들이 텅 비어버린 내 마음속으로 계속해서 들어와 쌓이는 것 같아서
몸이 추운건지 마음이 추운건지 분별할 수조차 없었다.
그 날을 기점으로 나는 눈이 너무도 싫어졌다.
그뒤로 삶에 치여 바쁘게 살아오느라 눈을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올해의 눈이 느리기도 했었지만 눈과 함께한 나의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새하앟게 쌓이다 사라지는 눈송이들처럼 기억들도 어느덧 하얗게 저멀리 녹아만 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