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대로 생각하게 되는 시간을 그저 흘려보내다 보면 나는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 마련이다.
그 다음 뒤따라 오는 생각은 '나는 행복하기 위해 여기에 왔는데 과연 행복한가'라는 의문이다.
그런 시간을 마주할 때면
나는 하던 일을 잠시 놓고
구석에 박아두었던 기억들을 끄집어 내며
그 속에 있는 행복을 찾아보게 된다.
과거의 나는 행복을 과연 어떤 방식으로 구매하였던 것일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과거의 연인들 및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보냈던 시간들이다.
여행을 다니거나 술자리늘 갖기 위해 소정의 돈을 지불하긴 하였으나, 이 시간들을 사기 위하여 나는 특별한 돈을 추가로 지불하지 않았다.
이 때 내가 행복을 사기 위해 구입하였던 돈은 0원일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을 사는데 드는 돈은 0원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다음으로 기억나는 것은 스무살 무렵 과외를 마치고 지하철을 탔을 때였다.
정오가 지났을 무렵, 그 전철을 당산과 합정 사이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햇살에 반사되는 보석같은 빛들을 보고 있는데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구걸을 하며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별다른 생각이 없이 창밖만 보았는데 옆칸에서 뛰어온 꼬마애 하나가 그 장애인의 바구니에 천원을 넣고 돌아갔다.
나도 모르게 지갑을 꺼냈고 나도 그 꼬맹이를 따라서 천원을 집어넣었다.
지하철을 같이 내린 장애인 분은 나에게 미소지으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졌는데, 그 날의 나는 1000원으로 행복을 살 수 있었다.
행복을 사는데 드는 돈은 0원이거나 적은 돈이라 할 수 있을까?
그 다음 행복의 순간은
내가 나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냈다고 믿은
대학과 자격시험의 합격 순간일 것이다.
이 때의 나는 합격통지를 받고 나서
그동안 내가 보낸 시간들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위로와 함께 행복감을 얻었다.
그럼 이 때 행복을 사기 위해 내가 쓴 돈은 수험기간 소비한 돈이라고 할 수 있는가?
행복을 사기위한 금액은 왜이리 제각각일까?
저 때 내가 얻은 행복들의 크기는 같은가?
나는 저 경험들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
아.
나는 왜.
행복을 사는 데 지불한 것이.
돈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 순간들의 나의 행복은
모두 사람들로부터 얻은 것이었다.
연인 및 친구들이 전달하는 달달하고 유쾌한 에너지.
장애인이 나에게 보내준 은은한 미소.
합격발표 전달 후에 나를 끌어안고 눈물흘리시던 부모님.
아 그래.
내가 지불했던건 돈이 아니었지.
나는 저 순간 저들에게 나의 마음을 담은 시간을 지불하였던 것이다.
연인 및 친구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기 위한 나의 그 경쾌한 마음, 꼬맹이를 보고 깨달아 세상이 보다 따스해지길 바라며 돈을 넣었던 그 포근한 마음, 그동안 뒤에서 묵묵히 나를 응원해주며 속 쓰려 하셨을 부모님에 대한 그 먹먹한 마음.
내가 지불한 상대를 위한 작은 마음은
행복이라는 급부로 커져서 돌아왔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삶에서도 행복을 사기 위해서는
꼭 많은 돈을 지불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행복을 기대하며 상대방을 위한 좋은 마음들을 계속해서 지불하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올해의 마지막 시간대를 맞아,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하여 살아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떠올리며,
사는대로 생각하던 나의 시간을 다시 멈추고
앞으로의 각오를 다잡아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