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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껴간 두가지의 불행

불행을 대하는 나의 올바른 태도를 위하여

by 자유여행자


한달 전쯤의 어느 주말 아침이었다.

평소처럼 늦잠을 푹 자고 일어나 습관처럼 폰을 켜보니 엄마로부터 전화가 수도 없이 걸려와 있었다.


무슨일이 생겼구나.

전화를 걸자마자 받은 엄마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아들 놀라지 말고 들어"


예전 박완서 소설중에 '놀라지 말고 들으라는 말처럼 놀라운 말이 또 있을까'라는 문구가 생각났다.


"아빠가 철인삼종경기 나갔다가 바닷물에 빠져서 의식을 잃으셨대. 형한테 전화를 해보렴"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지만 오히려 나는 침착했다. 형과 통화를 하고 충북대 병원으로 달려가는 기차 안에서 파악한 사고 경위는 다음과 같다.


아버지는 통영 철인삼종경기에 참가하셨다가 바다 수영 도중 의식을 잃으셨다.

이상 징후를 발견한 주변인들의 휘슬로 현장 심판이 곧바로 보트에 태워 뭍으로 옮겼으며, 팀닥터가 달려와 생존반응 등을 확인하고 통영 병원으로 빠르게 이송했다.

통영 병원에서 검사한 바로는 의식을 잃은 때에 폐에 물이 찼으며, 이대로 물이 빠져나가며 자연스레 나을 수도 있지만 염증이 생긴다면 패혈증 등으로 사망에도 이를 수 있는 상태라 하였다.

집근처 충북대병원으로 전원된 후 시행한 검사에서도 의사의 소견은 같았으며 앞으로 이틀은 지켜봐야 한다고 하였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인가.

부모님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야 늘 존재해 왔었다.

그런데 그게 이렇게 갑작스레 준비할 겨를도 없이 찾아온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리 머리로 대비해도 냉철해질 수 없다.


울며 전화 온 엄마를 달래며 나는 기차 안에서 나라도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고 계속해서 되새겼다.


곧바로 철인삼종경기 사무처장, 심판장, 목격자, 팀닥터와 통화를 시도해 사건경위를 추적하였으며 그것을 모조리 녹음했다.


혹시나 현장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는지 확인하고자 했고, 아빠가 의식을 얼마나 잃었던 것인지 파악하여 의학적 회복 가능성을 자세히 알아보고자 했다.


병원에 도착한 당일 아빠는 중환자실에 있어 볼 수 없었고, 먼저 응급실 앞을 지키던 동생, 형과 마주하게 되었다.


곧이어 택시를 타고 엄마가 달려왔다.

자식들 하나하나를 껴안으며 울부짖는 엄마 목소리늘 정말로 듣기 힘들었다.


겨우겨우 엄마를 안심시키고 난 후

나는 병원 근처 숙박을 잡았다.


형과 동생은 생업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우선 내가 연차를 쓰고 엄마곁을 지키며 아빠상태를 우선적으로 확인하기로 하였고, 후에 형, 동생이 와서 교대를 하라고 하였다.


그날밤 청주에서의 밤은 참으로 낯설었다.

호텔에서 다행히도 엄마는 어느정도 평온을 되찾으셨고, 밤새도록 나랑 떠들다 잠이 드셨다.

나는 엄마한테 내색하지 않았지만 하루종일 신경을 쓴 탓에 소화가 안되었기에 밖에 나가 수차례 토하고 왔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근처 병원에서 코로나 검사를 한 후 음성 결과지를 들고 아빠를 보러 왔다.


중환자실 앞에서 침대에 실린 아빠가 나왔고, 멀쩡한 얼굴로 "너 회사는?" 이라고 물어보셨다.


순간 화가 난 나는

"아빠 혼나야 해요. 온 가족이 그렇게 위험한거 하지 말라 해도 가셔서 사고나서 이렇게 우리모두 걱정하게 하세요? 정말 너무해요"

라고 말해버렸고

엄마가 그만하라 제지하여 말을 멈추고 아빠 침대와 함께 일반 병동으로 이동하였다.


다행히 예후가 나쁘지 않았던 아빠는 일반병동으로 옮겨진 것이고, 지병이 없어 잘 회복하고 며칠 뒤 퇴원하셨다.

처음엔 대회 관리자들의 관리 소홀을 의심했으나 대회 스태프들이 아빠를 빠르게 건져 주어서 다행히도 잘 회복하게 되신 것 같아, 관계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아빠가 쾌차 하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렇게 나와 우리가족은 첫번째 불행을 비껴갔다.



아빠가 퇴원한지 얼마되지 않은 때였다.

갑자기 내몸이 이상했다.


몸살부터 시작한 감기는 코감기, 목감기로 번졌고 하루종일 아픈 상태에서 출근하여 일을 했다.


그러던 도중 몸 어딘가에 혹같은게 생겼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갈수록 빠른 속도로 커지며 통증도 느껴지게 되자 곧바로 병원을 방문하였다.


첫번째 병원에서는 단순 염증덩어리 같다며 항생제 처방을 해주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차도가 없자 나는 회사 근처 병원에 가 다시 초음파 검사를 하였는데, 거기서는 피검사까지 해보더니 암일 수도 있다며 상급 병원에 가보라 하였다.


충격적인 소리를 듣고 회사로 돌아가는 길의 하늘은 분명 파란데 누르스름 했다.


회사에서 팀원들과 웃고 떠들며 재잘댔지만 내속은 썩어 문드러져 갔다. 감기에 더불어 암일지도 모르는 혹같은 것까지. 내 몸은 어디까지 망가진 것일까.


엄마로부터 걸려온 안부전화를 받은 나는 내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계속해서 캐묻던 엄마에게 나는 사실을 털어놓았고 엄마는 얼른 회사를 그만두고 검사받고 푹 쉬자며 나에게 설득했다.


일단은 대학병원 검사를 받고 얘기하자며 전화를 마친 나는 계속 커지는 혹과 거기서 느껴지는 통증에 일도 집중할 수 없었고 운동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다음날 아침 첫번째 방문했던 병원을 갔다.

거기 의사는 자기 생각에 암이 아닌 염증 같은데 두번째 병원에서 그리 말한 이상 이제 상급 병원에 갈 수 밖에 없다며 빨리 가보라고 했다.

그 의사의 조언을 받아 나는 그날 연차를 쓰고 순천향대 병원으로 가 정밀검사를 받았다.


검사결과 고름이 들어선 것이었다.

첫번째 병원의사 말처럼 염증덩어리였던 것이다.


다행히 나는 암을 피해갔고 강한 항생제 주사를 맞고 약을 처방받은 뒤 집에 돌아왔다.


그러다 주말쯤에 그 고름이 터지게 되었다.

그날은 학교에 수업을 들으러 가던 날이었는데 나는 교수님께 양해 메일을 보내고, 근처 병원에 가서 고름 제거수술을 받았다.


그 뒤 통증은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나는 잘 회복한 뒤 다시 일상으로 복귀해 일과 운동을 잘 해나가고 있다.


이렇게 나와 우리 가족은 두번째 불행도 비껴갔다.



물론 많은 경우가 이럴 것이다.

우리 호들갑에 비해 별 일 아닌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고, 소수의 경우만 심각한 경우일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이번처럼 비껴갈 수만은 없다.


운이 좋게도 모든 것을 빗겨가는 사람도 있을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다보면 큰 일을 한 두번 쯤은 마주할 것이다.


그 때 나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가.


부모님을 잃는 것

나의 건강을 잃는 것


정말로 저런 것들이 발생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버틸 수 있을까.


예전에 이병헌이 한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저는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 다른 사람들이 아버지를 잃은 것을 보면 '어떻게 살 수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저도 아버지를 잃었고 신기하게도 어떻게든 살아지더라구요."


또한 위라클 채널을 운영하는 박위라는 사람의 영상을 본 적도 있다.

"그 날 제가 취해서 추락했던 것은 제 잘못이니 어쩔 수 없다 생각해요. 그런데 다시 낫게 되면 좋아했던 축구를 다시 해보고 싶어요"



저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의연할 수 있을까.

어찌 저리도 강할 수 있을까.

내가 저런 일들에 마주하게 된다면 어떠할까.


지금의 나는 사실 알 수가 없다.


단지 나도 언젠가는 불행을 마주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며, 그 때 내가 취할 자세를 고민할 뿐이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나 자신이 불행한 자들을 보면서 현재 나의 상황에 위안을 얻는 역겨운 사람이 되고 있지는 않는지 계속해서 스스로를 경계하고 있다.


이렇듯 요즘의 나는 갑작스레 찾아온 불행의 물결을 한 끗 차이로 피해 보낸 후에, 그동안 두려워서 회피해왔고 외면해왔던 주제인 '불행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정면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언젠가 올지 모를 그 때를 대하는 나의 자세를 진지하게 탐구하지 않는다면 보다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 때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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