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방 청소를 했다.

by 자유여행자


오랜만에 방청소를 했다.

여자친구가 들른다고 했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대충 물건 정리를 하고 바닥만 쓸고 닦았을텐데, 오늘은 화장실 바닥까지 락스로 박박 닦고 물건도 한쪽에 몰아두고 혹시라도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이나 쓰레기가 있을까봐 물티슈로 여러번 바닥을 훑었다.


서랍을 열었을 때다.

문득 하나의 편지가 튀어나왔다.


이게 뭐지 하고 열어보니

과거 하나의 시간을 공유했었다가 이제 서로 다른 세계로 가버린 전 연인이 연애 초기 나에게 써주었던 글이었다.



안녕 여보

벌써 우리가 사귄지.. 어 음.. 오래됐네

너를 만나면서 많은 것들이 변한 것 같아

인생 목표도 생기고 웃는 날이 많아졌고 내 편이라는게 생긴 기분이야

쉴드 쳐주는건지 쉴드로 가끔 내려치는지 모르겠긴 해 그래도 좋아ㅎㅎ


나 사실 굉장히 부족하고 우울한 사람인데 니 앞에서 티를 안 내려고 많이 노력해

너 입장에서는 서운할 수도 있는데 일이 힘들거나 우울한 상황이 생기면 나 혼자 견뎌내고 싶어 말 안하는 경우가 있어


너에게 항상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고 나 혼다 견뎌내고 싶고 마음의 짐을 주기 싫거든

언젠가 지칠 수도 있으니까

굉장히 답답할거라 생각하는데 점점 나아지도록 노력할게 조금만 기다려줘


사랑스럽고 멋진 우리 xx이

내가 정말로 많이 아끼고 사랑해

요즘 내 인생의 낙은 너랑 함께 있는 시간이야

이 소중한 시간이 네 기억과 내 마음속에 항상 안착했으면 좋겠어(INFP식 표현 ENTP는 못함ㅋ)


새 삶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동반자로 생각하고 있어

너도 날 그렇게 생각해줬으면 좋겠다ㅎㅎ


앞으로 우리 해야할게 너무나 많아

이곳저곳 여행 가보고 재미있는 경험을 하고 맛있는 음식들을 먹고 싶어

더이상 할게 없을 때까지 계속 같이 다니자

정말 재밌을거야!


아 참고로 나 편지 써서 줘 본거 너가 처음이야

그만큼 널 사랑한다는거지


생일 축하하고 다시는 없을 편지니까 버리지 말고 보관해두렴


그럼 이만

From 알파카(생일이니까 오늘만 인정해줌)



무심코 읽은 글 속엔

예전 시간의 그 친구가 있었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뭐가 웃긴건지 하루종일 웃어댔다.

서로 뭔 말만 하면 빵 터졌고 웃고 또 웃다가 헤어지곤 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쌀쌀해지기 시작하는 어느 가을날이었다.

스벅에서 저 친구는 뭐가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재잘재잘 말이 끊이질 않았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저 친구의 말을 계속해서 듣고만 있었다.


그 해 가을에 우리는 연인이 되었고

함께 낙엽을 밟으며 여기저기를 걸어다녔다.

겨울이 되어 눈이 오자 하얀 눈보다 더 하얀 후리스를 입고 오들오들 떨면서도 많은 곳들을 구경다녔다.


저 글이 쓰여진 시간인 봄에는 볼 수 있는 벚꽃은 다 보고 다녔다.

꽃을 좋아하는 그녀를 위해 나는 벚꽃이 이쁘다고 하는 곳은 모조리 데리고 갔으니까.


그 이후에도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곧 다가온 여름에 부서지는 햇살을 받으며 모래사장을 밟으며 뛰어다니며 웃었고,

다시 찾아온 가을에는 알록달록 물들어가는 단풍을 바라보며 차를 타고 산길을 달렸다.


그렇게 4계절 모두를 함께 보내면서 우리 둘만의 시간들을 착실히 쌓아갔다.

마치 우리의 시간이 영원하게 이어질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간은 끝이 정해져 있었다.


또 찾아온 겨울에 사소한 말다툼을 하였다.

사소한 것이라 생각했으나 뚜껑을 열어보니 결코 가벼울 수 없는 내용들이 담겨있었다.


몇 번의 대화를 거친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시간을 종료시키기로 했다.

우리들이 함께한 시간을 과거 속에 묻기로 한 것이다.


견딜 수 없이 괴로웠던 4개월을 보내고

다시 힘을 되찾은 나는 새로운 여름에 새로운 인연을 만나서 다시금 새로운 시간들을 쌓아가고 있다.


그렇게 잊고 있었던 그 친구가 방 안 구석에서 갑자기 튀어나올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과거 나와 함께했던 그 친구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다른 누군가를 만나 다시금 하루종일 웃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과거 나와 그러했듯이 새로운 인연과 새로운 시간을 다시금 써내려가고 있을까.


너도 과거 시간속에 묻은 나를 가끔은 생각할까.



어느것도 알 수 없었고 사실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나는 이 편지를 앞에 두고 주저앉아 한참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이 편지를 통해 그 누구보다 행복했던 과거 우리의 시간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 시간들을 천천히 탐험한 후 마지막 가슴아픈 시간대에 도달한 후에야 다시 나는 지금 시간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우리의 찬란했던 시간들은 미래에 더이상 없지만

과거에 아름답게 묻어두고 새로운 시간을 잘 맞이하길 바랄 뿐이다.


지금 잘 지내고 있는 나처럼

너 역시 언제나 몸 건강히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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