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와 모르스 신호(연재 18)

사막의 오아시스 싱가포르

by 최경열

죽음의 그림자를 털어내다

호르무즈 해협의 검은 연기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30만 톤의 원유를 실은 여수1호는 대한민국 산업의 '검은 피'가 이제 인도양의 푸른 품에 안겼다. 등화관제가 해제되고 배에 다시 불이 들어오자, 선수 창고(Bosun Store)에서 어둠을 견디던 동료들의 얼굴에도 비로소 생기가 돌았다. 죽음의 문턱을 넘은 자들만이 나누는 짧은 눈인사. 우리는 살아남았고, 이제 목적지를 향해 전속력으로 나아간다.


거울 같은 바다 위를 걷다

전쟁터 같던 거친 파도가 언제 그랬냐는 듯 잦아들었다. 지금 눈앞의 바다는 마치 거대한 호수처럼 평온하다. 가끔 은빛 비늘을 털어내며 튀어 오르는 참치 떼를 쫓는 원양어선만이 이 적막한 풍경의 점을 찍을 뿐이다.

30만 톤급의 거대한 고철 덩어리 여수1호, VLCC(초대형 원유운반선)는 수평선 너머 뭉게구름을 향해 느릿하게 미끄러져 간다. 갈매기 소리조차 아득하게 들리는 이 평화로운 바다에서, 우리는 잠시 팽팽했던 긴장의 끈을 내려놓는다. 항해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2등 항해사와 Gymnasium에서 땀 흘리며 탁구채를 휘두르는 시간이 유일한 해방구다.

"형님, 바다가 매일 이렇기만 하면 서울 명문대 애들이 다 배 타겠다고 덤벼들지 않겠습니까? 그럼 우리 같은 지방대 출신들은 설 자리가 없을 텐데, 참 다행입니다."

2등 항해사의 농담 섞인 푸념에 쓴웃음이 터졌다. 맞다. 이 고독과 위험을 견디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 같은 고요함이다.


배와 여자

싱가포르항의 불빛이 아련하게 다가올수록 동료 2 항사와 나는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았다. 배와 여자의 기묘한 공통점 말이다.

곡선이 생명이다: S라인의 여성처럼 배도 곡선 설계에 따라 저항이 결정된다.

화장(페인트) 없이 살 수 없다: 햇볕과 녹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배는 끊임없이 두꺼운 화장을 덧칠해야 한다.

닦고 조이고 기름 쳐야 한다: 애정 어린 관리가 없으면 관계도, 기계도 한순간에 망가진다.


무전기 끝에 실린 간절함, 모르스 신호

지금이야 위성 인터넷으로 언제든 고향의 소식을 듣지만, 1986년, 그 시절엔 통신실의 둔탁한 신호음이 세상과 연결된 유일한 끈이었다. 나는 통신장에게 부탁해 링링에게 보낼 메시지를 둔탁한 모르스 신호에 실어 보냈다.뛰뛰 쥐띠 뛰디 쥐띠- 하고 울리는 무미건조한 통신음이었지만, 그 신호가 전리층을 타고 싱가포르의 어느 수신기에 닿아 링링이 읽을 때쯤 나의 간절함이 전해 것이다. 도착 예정 시간(ETA)을 보내는 그 짧은 암호 같은 신호는 그녀에게 세상에서 가장 감미로운 세레나데가 될 것이다. 내가 살아있음을, 그리고 곧 당신 곁에 닿을 것임을 알리는 유일한 생존 보고서다.


2 기사의 숙명, 1,500톤의 에너지

싱가포르항의 불빛이 수평선 끝에서 아련하게 번지기 시작할 무렵, 2기 사인 나의 몸은 본능적으로 긴장하기 시작했다. 나의 일터는 여수1호 가장 깊은 곳, 기관실이다. 28,000마력의 거대한 2 행정 엔진이 80 RPM으로 묵직하게 회전하며 하루 60톤의 기름을 집어삼키는 여수1호에게, 싱가포르는 거대한 주유소와 같다.

이번에 수급해야 할 연료는 저유황 벙커C유 1,500톤. 보일러와 발전기, 그리고 연료 수급을 책임지는 2 기사에게 입항은 휴식이 아닌 가장 치열한 작업 시간이다. 기름 한 방울이라도 바다에 흐르는 날엔 국제적인 재앙이 되기에, 2 기사의 상륙(Shore Leave)은 꿈도 꿀 수 없는 사치였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나의 전보를 받은 링링이 직접 배로 찾아온 것이다. 가족과 스폰서에게만 허락되는 특별 승선 허가. 그녀가 갱웨이(현문 사다리)를 타고 거대한 강철 성벽 같은 우리 배로 들어왔다.

나는 연료 게이지와 링링을 향한 마음의 게이지를 동시에 살폈다.

20180330_110410.jpg 선박 CARGO CONTROL ROOM 내부 (필자 OIL 수급 중)


기름 냄새 밴 작업복, 그리고 첫 키스

"링링!"

연료 수급 상황을 체크하느라 기름 냄새가 펑펑 풍기는 작업복을 갈아입을 시간조차 없었다. 2 기사 집무실 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오는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땀과 기름기로 범벅이 된 몰골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열대의 뜨거운 햇살이 창을 통해 쏟아지고, 서로의 숨결이 맞닿았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진한 키스를 나누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지독한 열대의 땀인지, 재회의 기쁨이 만든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내 품에 안긴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귀여운 존재였다.

남고를 거쳐 공대(해양대), 그리고 사방이 거친 사내들뿐인 선박 기관실까지. 나는 20대 청춘을 오직 기계와 바다에만 바쳐왔다. 여자를 접할 기회도, 사랑을 나눌 여유도 없었던 나에게 링링은 생애 '첫사랑'이었다. 그저 책에서나 보던 첫사랑이 이토록 달콤하고 가슴 벅찬 것인지, 나는 서른이 다 되어가는 이 바다 위에서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세상을 모두 갖은 기분이었다. 내가 서투른 영어로 쓴 편지를 마치 암호를 해독하듯 정성껏 읽어주던 링링. 그녀는 내 다음 휴가에 맞춰 한국에 오고 싶다고 했다. 한국의 사계절을 보고 싶고, 붉게 물든 낙엽과 하얀 눈이 내리는 겨울 길을 걷고 싶다며 눈을 반짝였다.

나는 벌써 4개월 뒤의 휴가를 머릿속으로 그린다. 한국의 추위를 처음 경험할 그녀를 위해 보들보들한 털코트와 따뜻한 부츠, 가죽 장갑을 선물하리라 다짐해 본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 세계를 지배한다

사실 바다는 동경의 대상이기 전에 처절한 생존의 현장이었다. 일찍이 유럽은 항해술을 터득해 바다로 나갔고, 군함과 무역선을 앞세워 전 세계를 식민지로 개척했다.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을 만든 것은 14세기 흑사병의 절망을 딛고 15세기부터 바다로 뻗어 나간 그들의 조선기술과 탐험 정신이었다.

우리에게도 장보고의 기개와 거북선의 용맹함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조선은 바다를 닫아걸었다. 항해술, 통신기술, 지리학, 천문학... 그리고 죽음을 각오한 모험정신. 이 모든 것이 갖춰져도 국가의 정책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장보고 같은 영웅도 결국 해적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다. 양반의 나라 조선에선 꿈도 꾸지 못했던 그 넓은 바다 위에, 지금 우리가 서 있다.


다시 사선으로, 그리고 태풍의 전조

재회는 짧았고 이별은 다시 찾아왔다. 1,500톤의 연료를 가득 채운 여수1호는 이제 여수항을 향해 무거운 머리를 돌려야 한다. 싱가포르를 떠나 남지나해를 지나자 평온했던 바다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내뿜기 시작했다.

필리핀 북상 중인 거대한 저기압의 소용돌이. 일본 오키나와 인근 해상에서 발생한 강력한 태풍이 북상을 시작했다는 전문이 통신실에 도착했다. 브리지에는 WEATHER FAX를 받아본 선장도 표정이 굳어 있다. 30만 톤의 원유와 1,500톤의 연료, 그리고 링링의 온기를 실은 이 거대한 쇳 덩어리가 대자연의 분노와 마주할 차례다.

"링링, 반드시 돌아갈게. 우리 함께 겨울 낙엽을 밟기로 했으니까."

나는 다시 기름때 묻은 렌치를 잡았다. 20대의 청춘을 담보로 조국의 불빛을 지키는 2 기사의 임무. 이제 나는 사랑하는 여인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 태풍을 뚫고 나가야만 한다.

싱가포르 야경.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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