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만 톤 원유를 짊어진 청춘
30만 톤의 원유를 가득 채운 유조선 여수1호는 호르무즈 해협을 향해 출항했다. 바레인에서 채운 15만 톤에 이어 나머지 15만 톤까지 선적을 마친 배의 하부는 해수면 깊숙이 가라앉아 묵직한 진동과 긴장감이 발바닥을 타고 전해온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다. 입항해서 선적할 때보다 출항이 더 위험하다. 만선(滿船)이 된 유조선은 그 자체로 거대한 떠다니는 폭탄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 검은 액체를 단순한 상품이라 보겠지만, 우리에게는 국가의 명줄이다.
한국은 단 한 방울의 기름도 나지 않는 비산유국이다. 원유의 100%를 외국에 의존하며, 그중 80% 이상이 이곳 중동에서 온다. 만약 우리가 이 해협을 뚫고 나가지 못한다면 대한민국 산업 전반은 일순간에 멈추고 말 것이다. 공장은 가동을 멈추고 도로 위의 차들은 설 것이며, 온 나라는 유례없는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목숨을 걸고 이 원유를 운반해야만 한다.
전쟁 중인 이 해역은 모든 것이 비정상적이다. 선원들의 위험수당과 선박 보험료가 치솟고, 이는 곧바로 석윳값과 물가의 폭등으로 이어진다. 더 심각한 것은 돈을 아무리 많이 준다 해도 이 지옥 같은 전장으로 들어오겠다는 선원도, 선박도 없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가야만 한다.
조타실의 불빛은 여전히 차단된 상태였다. 오직 레이더 화면의 푸르스름한 빛만이 항해사의 얼굴을 유령처럼 비추고 있었다. 레이더망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소형 고속정들과 미사일 궤적들이 점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적들의 일차적인 타깃은 명확하다. 사람이 거주하는 브리지(조타실)와 배의 심장인 기관 구역이다. 저들이 언제 여수1호를 향해 미사일을 쏘아 올릴지, 혹은 자폭 공격을 감행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전방 2마일, 미확인 선박 접근 중." 당직 항해사의 낮은 목소리에 침을 꼴깍 삼켰다.
우리배 여수1호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안전을 위해 조타실과 기관실 당직자 각 한 명씩만 제외하고, 전 선원은 거주실에서 200m나 떨어진 선수 보승스토어(로프나 선용공구를 보관하는 창고)에 임시 피난처를 마련하였다.
폭격으로 배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일 것에 대비해 모두가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로프에서는 나오는 짭짤하고 매퀴한 냄새를 맡으며 웅크린 채 어둠을 견뎠다. 공포는 파도처럼 밀려왔다. 다행히 포탄소리는 멈추었다.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가봤다. 선수 포카슬데크(영화 <타이타닉>에서 두 주인공이 포옹했던 배의 가장 앞부분)에서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그 지옥 같은 풍경 위로, 역설적이게도 별들은 무심할 정도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었고 저 멀리 수평선 아래는 폭격 맞은 유조선이 꺼지지 않는 불꽃을 내뿜으며 바다 위의 등대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이 비극은 이란과 이라크, 종교와 종파가 얽힌 전쟁으로 참으로 허망하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고, 이권 앞에선 동네 개싸움하듯 아군과 적군이 수시로 뒤바뀌는 이 혼돈 속에서 우리는 그저 무사히 지나가기만을 기도할 뿐이다. 그 불꽃놀이를 바라보며 나는 엉뚱하게도 링링이 살고 있는 싱가포르의 화려한 야경을 떠올렸다. 대조적인 환상이다.
해협의 가장 좁은 구간을 통과하자, 멀리서 여수1호를 호위하던 미국 항공모함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보였다. 거대한 성벽 같은 그 존재가 잠시나마 안도감을 주었다. 기관실에서 들려오는 육중한 엔진 소리가 마치 심장 박동처럼 힘차게 울려 퍼졌다.
"총원 이상 무. 호르무즈 해협 통과 중."
무전기 너머로 들려오는 여수1호 선장의 목소리에 그제야 참았던 숨을 크게 내뱉었다. 이제 우리배는 인도양의 넓은 품으로 접어들 것이다. 대한민국 일주일치 소모량인 30만 톤의 원유를 싣고, 우리는 여수항을 향해 전속력으로 나아갈 것이다.
등화관제가 해제되고 배에 다시 불이 들어오는 순간, 나는 가장 먼저 링링에게 부칠 편지를 쓸 것이다. 아직은 부치지 못할, 하지만 내 생존의 기록이자 사랑의 증거가 될 그 편지를. 20대의 청춘을 담보로 국가의 명맥을 잇는 이 막중한 임무 끝에, 그녀가 기다리는 항구가 있음을 믿으며~~~
나는 이제 겨우 20대 초반의 젊은 총각이다. 국가에서는 일정 기간 승선하는 조건으로 군 면제 혜택인 '승선근무예비역' 특례를 주었다. 총 대신 기름때 묻은 렌치를 잡고 있지만, 이 위험한 바다를 지키는 것 또한 군 복무 못지않은 막중한 임무임을 절감한다. 내가 여기서 무너지면 조국의 불빛 하나가 꺼진다는 생각에 어깨가 무거웠다.
별빛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보며 싱가포르의 화교 여인, 링링을 생각했다. 죽음이 코앞에 닥친 순간에 떠오르는 이름은 결국 하나였다. 링링. 그녀와 싱가포르 보트 키(Boat Quay)의 어느 노천 바에서 마셨던 시원한 맥주 한 잔이 간절했다. 습한 열기 속에서도 서로의 손을 잡으면 느껴지던 그 보송보송한 온기. 방콕의 시장통을 헤치며 함께 웃던 그녀의 눈매는 이 살벌한 전쟁터의 화염보다 훨씬 선명하게 내 망막에 박혀 있었다.
이번 항해를 무사히 마치고 여수항으로 가기 전, 우리는 연료유를 수급하기 위해 싱가포르에 잠시 기항할 예정이다. 그 짧은 찰나에 그녀를 보기로 했다.
'링링, 내가 갈 때까지 제발 무사히...'
막연했던 그 다짐이 링링을 떠올리자 날카로운 생존 본능으로 바뀌었다. 그녀에게 줄 편지와 선물을 챙겼다. 작은 보석함이 Second Engineer 선실 사물함 안에서 잠자고 있었다. 이 육중한 강철 괴물이 미사일에 찢겨 바닷속으로 가라앉는다면, 나의 그리움도, 그녀에게 전하지 못한 진심도 모두 검은 원유 속에 잠겨버릴 터였다.
밤하늘의 별 하나가 유독 반짝였다. 링링의 눈동자를 닮은 별이었다. 나는 미사일이 그리는 죽음의 선을 보며, 속으로 그녀의 이름을 되뇌고 또 되뇌었다. 전쟁은 인간의 증오가 만들었지만, 이 지옥을 견디게 하는 것은 결국 누군가를 향한 지독한 사랑뿐이었다.
전장의 불꽃보다 더 뜨거운 그리움이 가슴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그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나를 믿고 기다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해서라도 나는 반드시 죽음의 해협을 통과해야만 했다
나는 2등 기관사다. 이제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은 끝났다. 배의 심장을 돌려야 한다. 뜨거운 열기와 소음이 가득한 기관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30만 톤의 원유와 대한민국의 미래, 그리고 나의 사랑을 싣고 이 사선을 반드시 뚫고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