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의 미학(연재 20)

다시 채워질 내일의 기적

by 최경열

멀리 여수항의 불빛이 가물거리며 다가온다. 바닷바람을 타고 오동도 동백꽃의 짙은 향기가 여수1호의 갑판까지 날아와 닿는 듯하다. 돌아보니 참으로 긴 항해였다. 포화가 빗발치던 전쟁터, 끝없는 수평선의 인도양, 싱가포르의 화려한 밤, 남중국해에서 만난 보트피플, 그리고 동중국해의 집요했던 태풍까지…. 그 험난한 여정은 마치 굽이치는 우리의 인생과 닮아 있었다.

항해중 필지.jpg 항해중 필자

여수1호는 도선사를 태우기 위해 잠시 엔진을 멈췄다. 여수항은 입출항 시 반드시 도선사가 승선해야 하는 강제도선 구역이다. '해운업계의 사법고시'라 불리는 도선사 면허는 6,000톤급 이상 선박에서 3년 이상의 선장 경력을 쌓고도 바늘구멍 같은 경쟁을 뚫어야 얻을 수 있는 명예로운 정점이다.

이윽고 두 명의 도선사가 승선하고, 7,200마력의 예인선(Tugboat) 네 척이 거대한 여수1호를 감싸 안으며 밀고 당기기 시작했다. 축구장보다 넓은 이 거구가 항내에서 사고라도 내어 기름이 유출된다면, 어민들의 생계는 물론 회사의 존폐까지 위협받는 재앙이 된다.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여수1호는 도선사와 예인선들의 정교한 호흡에 맞춰 서서히 부두에 몸을 눕혔다.

접안이 끝나기 무섭게 하역암(Loading Arm)이 선박의 매니폴드에 연결되었다. 직경 800mm의 네 개 관을 통해 검은 액체가 쏟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펌프실에 터빈 펌프 3대가 동시 작동하였다. 국제해사포럼(OCIMF)의 엄격한 가이드라인에 따라 진행되는 하역 작업은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물에 잠겼던 22m에 달하던 풀로드 흘수(Draft)가 원유를 비워냄에 따라 점차 올라와, 거대한 섬이 물 위로 서서히 떠오른다. 파이프라인을 타고 흐르는 원유의 진동은 마치 거대한 심장의 맥박처럼 느껴졌다.

내가 목숨을 걸고 실어 온 이 검고 탁한 액체는 사실 대한민국의 혈관을 흐르는 '피'와 같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이를 100% 수입해 정제하고, 다시 경유와 휘발유 등 연료유와 플라스틱 등 상품으로 다시 만들어 역으로 세계 오일 수출국 1위를 하는 대한민국은 참으로 위대한 나라이다.

문득 어린 시절의 기억이 스친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시절, 호롱불 밑에서 공부하던 그때 '제7광구 산유국'의 꿈에 온 국민이 들떴던 적이 있다. 청와대에서 원유에 불을 붙이던 퍼포먼스는 희망의 상징이었으나, 훗날 호기심 많은 2기사가 직접 샘플링 콕을 열어 불을 붙여봤을 때 원유는 타지 않았다. 석유는 때로 정치적 도구가 되기도 하고, 중동을 피로 물들이는 전쟁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50년이면 고갈된다던 석유가 기술의 발달로 500년은 더 쓸 수 있다고 말이 바뀌는 것을 보면, 인간의 탐욕과 간사함이 이 검은 액체에 투영되어 있는 것만 같다.

이제 여수1호의 화물창은 텅 비었다. 30만 톤의 원유를 다 쏟아낸 배는 가벼워졌지만, 그대로는 항해할 수 없다. 다시 발라스트 탱크에 바닷물을 채워 평형을 맞춰야 한다. 불교의 '공(空)' 사상은 말한다. 모든 존재는 고정된 자아 없이 인연에 따라 잠시 나타날 뿐이라고. 유조선 역시 비워내야만 다시 채울 수 있고, 항구를 떠나야만 비로소 배로서의 존재 가치를 증명한다.

나 또한 이 배에서 나의 청춘을 비워냈다. 하지만 그 비워진 자리에는 새로운 꿈이 차오른다. 여수에서 제일 큰 백화점에 들러 링링을 위한 선물로 두툼하고 부드러운 겨울 코트와 가죽 부츠, 털모자와 장갑을 미리 장만했다. 일 년 내내 무더운 태양만 내리쬐는 열대지방 싱가포르에서 평생을 살아온 그녀에게 '겨울'이란 미지의 세계이자 꿈의 계절이다. 눈이 내리고 찬 바람이 부는 한국으로의 여행은 그녀 생애 난생처음 있는 커다란 사건이기 때문이다.

링링은 벌써부터 한국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 중화권 문화에서 자란 그녀에게 한국어는 어순과 한자어 덕분에 배우기 무척 친숙한 언어였고,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우리의 언어와 역사를 흡수하고 있다. 서툰 발음으로 한국말을 건네며 환하게 웃는 그녀를 볼 때마다 내 마음속엔 묘한 확신이 차오른다.

이번 하역이 끝나면 나는 배에서 내려 그녀와 함께 한국의 하얀 눈 위를 걸을 것이다. 이제 나도 청춘의 방랑을 마치고 정착해야 할 나이, 이번 여행은 단순히 구경시켜 주는 나들이가 아니라 나의 삶에 그녀를 정식으로 초대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링링의 부푼 꿈 속에 그려진 한국의 겨울 풍경 속에, 아마도 우리 두 사람이 함께 가꿀 가정이라는 따뜻한 온기가 이미 스며들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거친 바다에서 보낸 시간만큼, 내 삶의 평형수도 이제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채워질 준비를 마쳤다.

여수1호가 다시 기적을 울린다. 비워야 채울 수 있고, 떠나야 돌아올 수 있다는 진리를 실은 채, 우리는 또 다른 파도와 싸우기 위해 수평선을 향해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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