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채석강의 겨울

눈꽃으로 핀 링링과의 약속

by 최경열

원목선 군산 1호가 연료 수급을 위해 싱가포르항에 잠시 닻을 내렸다. 상륙조차 허락되지 않은 짧은 정박이었지만, 링링은 대리점을 통해 기적처럼 승선 허가를 받아 작은 통선을 타고 군산 1호에 올랐다. 나는 다가올 한국 여행을 위해 준비한 두툼한 털코트와 부츠, 장갑을 그녀에게 건네며 초청 비자 절차를 서둘러 상의했다.

항차를 마치고 마침내 찾아온 특별한 휴가. 나는 열대에서 온 그녀에게 생애 첫겨울을 선물하기 위해 휴가 시기를 겨울로 맞췄다. 인천공항이 없던 시절, 링링은 김포공항의 찬 공기를 가르며 입국했다. 80년대 후반의 한국은 싱가포르에 비하면 낙후된 개발도상국에 불과했지만, 그녀를 데리고 간 나의 고향 변산면 대항리는 따스한 정이 살아있었다.

부모님은 한국 사람과 꼭 닮았지만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외국인 링링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나는 그녀에게 내가 공부하던 작은 골방과 소 외양간을 보여주며 나의 유년 시절을 들려주었다. 유교적 정서는 같아도 문화의 골은 깊었고, 외국인과의 연애가 생경하던 시절이었지만 그녀의 맑은 눈망울은 우리 집 풍경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채석강 2.png 80년대 공부했던 골방과 외양간 <이미지 제미나이>

우리는 비포장도로를 달려 변산의 끝자락, 채석강으로 향했다. 한 시간에 한 대뿐인 전북여객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친구가 운영하는 언덕 위 카페였다.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겨울 바다는 외롭고 쓸쓸했으나, 낙조가 시작되자 온 세상이 붉은 마법에 걸린 듯했다.

나는 여수에서 산 모직 코트를 그녀의 어깨에 살포시 걸쳐주었다. 겁먹은 토끼처럼 코트 깃 속으로 얼굴을 파묻은 그녀는 영락없는 동화 속 신데렐라였다.

"링링, 이게 진짜 한국의 겨울이야. 조금 춥지만, 곧 마법이 펼쳐질 거야."

내 말이 신호라도 된 듯, 무거운 구름 사이로 주먹만 한 함박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링링은 가던 길을 멈추고 아이처럼 외쳤다.

"오빠! 하늘에서 설탕이 내려요! 아니, 차가운 솜사탕인가요?"

난생처음 마주한 눈의 경이로움에 취한 그녀가 미끄러운 바위 위에서 휘청일 때마다, 나는 그녀의 가냘픈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30만 톤 유조선의 중량감보다, 3만 톤 원목선의 아찔한 복원성보다 더 묵직한 책임감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채석강 3.png 링링과 채석강의 겨울 <이미지 제미나이>

해식동굴 안에서 바라보는 서해의 낙조는 황홀경 그 자체였다. 흰 눈밭이 선홍빛으로 물들고 멀리 위도가 아른거릴 때, 링링이 내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물었다.

"저 태양은 보르네오의 것보다 차가울 텐데, 왜 오빠와 함께 보는 겨울 태양이 더 따뜻할까요?"

나는 대답 대신 그녀의 주머니 속에 슬며시 시계 하나를 쥐여주었다. 화려한 보석은 아니었지만, 우리가 함께할 미래를 새긴 증표였다.

"링링, 유조선이 실어온 원유가 따뜻한 연료가 되고 원목선의 나무가 집의 기둥이 되듯, 이제 나의 시간은 너를 지탱하는 기둥이 될 거야."

채석강.png 해식동굴에서 본 바다 <이미지 제미나이>

그녀는 코트 속에서 시계를 꼭 쥐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원시림의 독주보다 더 진한 취기가 채석강의 겨울밤 속으로 깊게 스며들었다.

전주로 이동해 뜨끈한 온돌방에서 몸을 녹이며 먹은 김치찌개 한 그릇에 정글의 습기와 바다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다. 뱀탕으로 기운을 쓰던 갑판장도 부럽지 않은 행복이었다.

전주 김치찌게.png 전주 민속촌에서

이제 휴가가 끝나면 다시 거친 파도와 싸워야 하겠지만, 내 마음의 복원성($GM$)은 그 어느 때보다 견고하다. 내게는 언제든 돌아와 닻을 내릴 '링링'이라는 이름의 항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김해공항에서 싱가포르행 비행기에 그녀를 실어 보냈다. 그렇게 우리의 짧고도 강렬했던 겨울 여행은 가슴속에 깊은 갈고리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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