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쥐불놀이

깡통이 그리던 불꽃 원, 산을 집어삼키다: 철부지들의 위험한 불놀이

by 최경열

평화로운 선산, 성냥 한 갑의 유혹

초등학교 4학년, 봄방학이 끝난 뒤 찾아온 갯마을의 하굣길은 유난히도 코끝이 찡했다. 5km나 되는 긴 하굣길, 고사리손을 녹여주는 건 주머니 속 몰래 챙긴 '각성냥'뿐이었다.

대항리 입구,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양지바른 우리 집 선산은 최고의 놀이터였다. 할아버지 묘역의 잔디는 폭신했고, 돌멩이 하나 없이 말끔했다. "잔디는 한번 태워줘야 새싹이 더 파랗게 돋는 법이야." 어디서 들은 얄팍한 지식이 머릿속을 스쳤다. 할아버지 산소도 깨끗이 해드리고 불놀이도 하고 싶다는, 이 무모하고도 순수한 충동이 화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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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갱열이 살려!" 한순간에 바뀐 운명

내가 주동이 되어 불을 지폈다. 처음엔 좋았다. 솔가지로 툭툭 치며 불길을 다스리는 모습이 마치 숙련된 농부라도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바다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갑자기 바다에서 불어오는 회오리 '휘이익!' 매서운 칼바람이 불어닥친 순간, 불길은 거대한 짐승처럼 돌변했다.

"불이야!"

불길은 순식간에 할아버지 봉분을 타고 올라 고조할아버지 묘까지 집어삼켰다. 그것도 모자라 밤나무골을 지나 마을의 수호신이 있는 당산 몰랭이(산봉우리)까지 미친 듯이 번져나갔다. 같이 놀던 상식이, 종회, 태금이는 혼비백산하여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 역시 뒷길로 숨어 집으로 달아났다. 뒤를 돌아보니 하늘은 이미 시커먼 연기로 뒤덮였고, 푸르던 산은 붉은 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다행히 인근 방포의 해안포 부대원 수백 명이 총동원되어 대형 참사는 막았지만, 내 가슴은 이미 재가 되어버린 산처럼 타들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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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 그리고 기적 같은 새봄

변산 지서의 조사가 시작됐다. 범인은 보나 마나 '최 씨네 자식들'이었다. 큰당숙과 큰아버지가 경찰서로 불려 가셨다.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내 얼굴에 묻은 숯검댕과 주머니 속 성냥을 보시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셨다. 나는 엉엉 울며 자수했다. "아부지, 제가 그랬어유..."

정읍 재판소까지 갈 뻔한 위기를 넘기고, 우리는 밤새 작두로 억새풀을 썰어 할아버지의 까만 봉분 위에 뿌려 흔적을 감췄다.

시간이 흘러 다시 봄이 왔다. 신기하게도 내 철없는 믿음처럼 불타버린 선산에는 예년보다 훨씬 진한 초록빛 잔디가 융단처럼 깔렸다. 하지만 불길이 스친 밤나무골 소나무들은 끝내 싹을 틔우지 못했다. 누렇게 죽어버린 나무들을 보며 나는 미운 바닷바람을 탓하면서도, 불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새겼다.


멈출 수 없는 스릴, 깡통 돌리기

산불 사건으로 혼쭐이 났지만, 우리네 불놀이는 멈추지 않았다. 다만 '노하우'가 생겼을 뿐이다. 이번엔 산에서 멀리 떨어진 바닷가 언덕, 태금이네 밭두렁이 아지트였다.

우리는 각자 제작한 '불 깡통'을 들고 모였다. 송곳으로 구멍을 숭숭 뚫고 철사를 연결한 뒤, 안에는 비장의 무기인 '간솔(송진이 엉겨 붙은 소나무 가지)'을 가득 채웠다. 황새목 낫으로 힘껏 내리쳐야 잘리는 단단한 간솔은 화력이 기가 막혔다.

"윙~ 윙~"

원심력을 이용해 깡통을 돌리다가 하늘 높이 던지면, 칠흑 같은 밤하늘에 황홀한 불꽃 궤적이 그려졌다. 누구의 깡통이 더 높이 던져지나 내기를 하며 팔이 빠지도록 돌렸다. 콧물과 숯검댕이 범벅이 된 채 잠자리에 든 다음 날 아침, 집안은 다시 발칵 뒤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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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의 자식! 옷을 다 해 먹었네!"

어머니가 겨우내 정성껏 뜨개질한 털옷(도꼬리) 상의가 불똥에 홀랑 타버린 것이다. 나이롱 바지며 잠바며 성한 곳이 없었다. 등짝이 남아나지 않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내 머릿속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다음번엔 기필코 삼촌의 군복(방위복)을 훔쳐 입고 나가리라.'


에필로그: > 지금은 사라져가는 풍경이지만, 그때 그 시절의 쥐불놀이는 단순한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자연의 무서움을 배우고, 친구들과 우정을 쌓으며, 타버린 땅에서 더 푸른 생명이 돋아난다는 이치를 몸소 깨닫던 우리만의 뜨거웠던 성장 의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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