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꼬리와 맞바꾼 지게, 70년대 소년의 뜨거웠던 참회록
70년대 중반,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쥐들의 천하였다. 안방 천장은 쥐들의 전용 운동장이었고, 골방 곡식 창고는 쥐들과 수익을 배분하는 공유 경제의 현장이었다. 오죽하면 정부에서 '쥐잡기 운동'을 국책 사업으로 내걸었을까.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쥐꼬리를 잘라 학교에 제출해야 했다. 쥐를 못 잡은 날엔 잔머리를 굴렸다. 검정 고무줄을 쥐꼬리 길이만큼 잘라 검은 기름을 발라갔다. 하지만 담임 배기택 선생님의 눈은 매서웠다. 가짜 꼬리를 들킨 대가로, 가져오지 못한 쥐꼬리 개수만큼 손바닥을 맞으며 눈물을 쏙 뺐던 기억이 난다.
사건은 밭두렁 쥐구멍에서 시작됐다. 쥐를 잡겠다고 구멍에 불쏘시개를 넣고 불을 지핀 순간, 불붙은 쥐 서너 마리가 '끼익!' 비명을 지르며 튀어 나왔다. 혼비백산한 쥐들이 도망친 곳은 하필 이웃집 태금이네가 겨울 땔감으로 쌓아둔 커다란 '나무 벼늘(나무 더미)'이었다.
털에 불이 붙은 쥐는 그 자체로 움직이는 화염병이었다. 쥐가 나무 더미 속으로 자폭하듯 파고들자, 잠시 후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올랐다. 119 소방차도, 수돗물도 없던 시절. 마을 사람들이 양동이를 들고 달려와 두레박으로 퍼 올린 우물물을 부어댔지만, 바싹 마른 나무 더미는 순식간에 시커먼 재로 변해버렸다.
산불 소동에 이어 이웃집 땔감까지 태워 먹었으니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어머니는 "집안 망신 다 시키는 너갱이 빠진 놈!"이라며 평생 들어보지 못한 험한 욕을 쏟아내셨다. 자식을 향한 분노보다 미안함과 속상함이 더 크셨으리라.
아버지는 묵묵히 태금이네 집으로 나무 몇 다발을 옮기셨다. 그리고 그날부터 내 인생에 '지게'가 들어왔다. "자식에게만큼은 가난과 지게를 물려주지 않겠다"던 아버지의 확고한 신념이 사고뭉치 아들 때문에 하루아침에 무너진 순간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소년의 몸에 딱 맞는 '미니 지게'는 내가 짊어져야 할 죗값의 무게였다.
아버지는 엄한 스승이 되어 지게질을 가르치셨다. "기마 자세로 다리를 벌리고, 작대기에 힘을 주며 일어나야 한다. 중심을 못 잡으면 그대로 고꾸라지는 거야!"
지게 작대기는 단순한 막대기가 아니었다. 일어설 땐 지렛대, 걸을 땐 밸런스 유지 장치, 내리막에선 브레이크, 쉴 때는 지게를 세워두는 '파킹용 사이드 브레이크'였다. 때로는 뱀이나 멧돼지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호신용 무기이기도 했다. 50kg이 훌쩍 넘는 나무 짐을 지고 고개를 넘으며, 나는 그렇게 철이 들어갔다.
집 근처 산은 그림의 떡이었다. 산림청 감시원들의 눈초리가 시퍼랬고, 까딱하다간 산 주인에게 잡혀가기 일쑤였다. 우리 부자(父子) 나무꾼은 타짜처럼 은밀하게 움직여야 했다. 족히 고개 하나는 넘어야 나오는 깊은 오지, 흑나산이 우리의 타깃이었다. 부안 댐과 변산 해수욕장 사이를 가로막은 험준한 산맥이었지만, 태금이네 나무 벼늘을 채우기 위해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의 주 종목은 ‘북새기’ 채취였다. 갈퀴질 한 번에 바스락거리며 모이는 마른 솔잎과 솔방울, 그리고 넙데데한 활엽수 잎들이 내 사냥감이었다.
"얘야, 산 나무는 절대 손대면 안 된다. 감방 간다!"
아버지의 엄명을 받들어, 나는 오직 땅에 떨어진 '죽은 것'들만 공략했다. 갈퀴로 산 비탈을 박박 긁다 보면 어느새 가마니 두 개가 빵빵하게 차올랐다. 초등학생 몸뚱이만 한 푸대 두 개를 지게에 얹으니 30kg이 훌쩍 넘었지만, 죄책감을 털어내기 위한 발걸음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반면 아버지는 '진짜 사나이'의 장르를 보여주셨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놈들이 소나무를 죄다 베어가고 남은 썩은 그루터기, 일명 '클틍(끌틍)'을 공략하셨다. 땅속 깊이 박힌 그 단단한 뿌리를 캐내 지게에 산더미처럼 쌓아 올린 아버지의 뒷모습은 거대한 바위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부자지간이 나란히 지게를 지고 흑나산을 내려오는 풍경은 흡사 패잔병의 퇴각이 아닌, 전리품을 챙긴 승전국 군대 같았다. 산을 내려와 새까맣게 타버린 태금이네 빈터에 '쿵' 하고 나무 짐을 부려놓을 때의 그 쾌감! 텅 빈 지게를 등에 지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게 작대기가 땅에 닿는 "톡, 톡" 소리가 그날따라 참 경쾌했다.
십수 년이 흘러 나는 60년생 쥐띠 중년이 되었다. 쥐를 끔찍이 싫어하는 아내는 가끔 내 굽은 어깨를 보며 핀잔을 준다. "남들 클 때 뭐 하고 어깨가 그렇게 구부정해요? 좀 펴고 다녀요!"
그럴 때면 나는 괜히 큰소리를 친다. "이 사람이 뭘 모르네! 이게 다 중학교 때부터 지게 지고 농사 도와서 생긴 자존심의 훈장이야. 남자의 자존심 건들지 마!"
이제는 나무를 하지 않아 정글처럼 변해버린 고향 밤나무골과 당산 몰랭이 길. 아버지와 함께 지게를 지고 오가던 그 길은 사라졌지만, 내 어깨에는 여전히 아버지와 함께했던 뜨거운 숨결이 남아 있다.
[작가의 한마디] 산불은 한순간의 실수로 시작되지만, 그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수십 년의 세월이 걸립니다. 밤나무골에 다시 밤이 열리기까지 십수 년이 걸렸던 것처럼 말이죠. 건조한 봄철, 우리 모두 산불 조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