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 연가] UFO가 떠 있는 바다, 코쟁이 맥주에 취하던 그 시절
사람들은 흔히 해수욕장 하면 부산이나 강릉을 떠올리지만, 진짜 '클래스'는 변산에서 시작됩니다. 1933년 개장, 서해안에서 가장 오래된 형님급 해수욕장이 바로 우리 고향 대항리에 있죠.
하얀 백사장 위에 그림처럼 서 있던 일본식 정자 관수정, 그리고 '백사청송(白沙靑松)'이라 불리던 울창한 해송 숲. 그 풍경은 마치 한 폭의 수묵화 같았습니다. 수심이 워낙 완만해 꼬마들이 놀기에 이보다 좋을 순 없었죠. 그 얕은 바다에서 개헤엄부터 시작해 '변산 물개'라는 칭호를 얻기까지, 제 유년의 8할은 그 푸른 물결 속에 있었습니다. 변산해수욕장에서 보는 일몰은 한 폭의 그림입니다.
변산 어디서나 고개를 들면 보이는 가장 높은 곳, 의상봉(508m). 그 정상에는 정체불명의 하얀 버섯 세 개가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어린 마음엔 "진짜 UFO가 구름 위에 떠 있는 건가?" 싶어 가슴이 두근거렸죠.
사실 그것은 북한 비행기까지 감시하던 미군 공군의 대형 레이더였습니다. 지도에도 안 나오는 비밀 구역이라 산신령 정도나 가야 발을 붙일 수 있었죠. 대신 우리는 남여치에서 출발해 쌍선봉을 지나며 그 신비로운 풍경을 눈에 담곤 했습니다. 직소폭포 선녀탕에서 발을 씻고 내소사로 넘어가는 그 길은 지금 봐도 한국 8경 다운 절경 중의 절경입니다.
국민학교 6학년 여름, 영화에서나 보던 '코쟁이' 미군들이 해수욕장에 나타났습니다. 호기심 많은 '변산 촌놈'들에게 그들은 마치 다른 행성에서 온 원숭이 같았죠. 미군들은 1 급수 남생이가 살던 시냇가 명당에 텐트를 쳤고, 거기엔 마법 같은 보물 상자가 놓여 있었습니다.
소꿉친구 상식이와 저는 풀숲을 헤치며 잠입 작전을 펼쳤습니다. 바위 동굴로 훔쳐 온 보물들의 맛은 그야말로 신세계였죠.
갈색 깡통: 한 캔 비우니 정신이 몽롱해지며 하늘을 날 것 같더군요. (나중에 알았죠, 그게 '맥주'였다는 걸요!)
빨간 깡통: 사카린 물만 먹던 혀에 폭탄이 터지는 청량함! 그게 바로 전설의 '콜라'였습니다. 머리털나고 처음 먹어봤던 음료였습니다.
길쭉한 물건: 아이스크림인 줄 알고 쪽쪽 빨았는데, 입안에서 고기 맛이 나며 녹아내리던 환상의 소시지까지!
동굴 속에서 기분 좋게 한숨 자고 일어나면, 왠지 미군들처럼 키가 쑥쑥 커 있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곤 했습니다.
욕심이 과했는지 다음 날은 결국 들키고 말았습니다. 꾀죄죄한 시골 소년들이 불쌍했는지, 거구의 미군 형님이 캔 하나를 툭 던져주며 외쳤죠.
"Don't drink! Get out of here!" (돈 드링 께라리어 마시지 마! 여기서 나가!) 돈 내고 마시라는 건지 도통 알아 들을 수가 었었죠.
그게 욕인 줄도 모르고 동네 영어 좀 한다는 고등학생 형님들, 중학교 선생님께 물어봐도 "그런 문장은 없다"는 대답뿐이었습니다. 원어민 발음을 평생 들어본 적 없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 말이 "술 마시지 말고 저리 꺼저" 뜻이었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 후로도 수년이 더 걸렸습니다.
지금 변산해수욕장에 가신다면, 백사장에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며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따보세요. 그리고 의상봉 쪽을 바라보며 상상해 보세요. 50년 전, 이곳 어딘가 동굴 속에서 처음 맛본 맥주에 취해 "나도 미국 사람처럼 키 커지겠지?"라고 꿈꾸던 소년들의 웃음소리를 말이죠.
역사와 낭만, 그리고 '첫 경험'의 맛이 살아있는 변산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