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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열 Oct 01. 2023

그때 그 시절 19(연재)

19편 득실이(2) 무작정 상경

우리는 어느덧 중학생이 되어있었지만, 득실이(상식이)는 중학교 입학은 엄두도 못 내고 이모님 농사일을 계속 도와야만 했다. 엄니를 안 본 지가 몇 달이 되었다. 그래도 득실이는 엄니가 정신 장애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어머니를 많이 보고 싶어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득실이 맘을 알았던지 엄니는 또 불쑥 나타나셨다. 그런데 이번에는 먹을 것을 갖고 오지 않고 건장한 어린애를 데리고 왔다.


이름은 안길수, 학교는 초등학교 2학년 다니다 말았다고 한다. 엄니는 그런 길수만 데려다 놓고 며칠을 보내더니 또 혼자서 훌쩍 떠나 버렸다. 득실이는 동생이 생겨 외롭지 않았다. 윤상식, 안길수, 성은 다르더라도 엄니는 같았다. 정확한 나이도 아빠도 모른다. 알 수가 없다.


둘은 이산가족 상봉한 것처럼 처음에는 서먹했지만, 엄니 피가 흘러서인지 곧 친해졌다. 서로의 처지를 누구보다 더 잘 알았다. 사랑이 메마른 형제들이었기 때문에 의지하고 아껴 줬다. 힘든 농사일도 함께 할 수 있어 좋았다. 이모님도 건장한 일꾼이 하나 생겨 든든했다.


두 형제는 사춘기가 끝나고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먼저 가출한 옆집 봉철이 형님이 추석에 귀향하여 서울 이야기를 해 준다. 그곳은 높은 빌딩과 많은 자동차도 볼 수 있고, 고기반찬에 쌀밥을 실컷 먹을 수 있고 지게를 안 지어도 되며 월급까지 준단다. 부안 읍내도 한번 안 가본 득실이에게는 꿈 같은 세상이었다. 


득실이는 귀를 쫑긋 세우고 듣더니 결론을 내린다. 가출이다. 봉철이 형님과 함께 상경하면 의심하고 오해할 수 있으므로 두어 달 정도 여유를 주고 실행 계획을 한다. 봉철 형님은 남파간첩 교육하듯 서울에 접견 장소까지 오는 방법을 지도를 보며 상세히 설명해 준다. 


다행히 득실이는 한글은 물론 지도 보는 방법 등 눈치도 빠르고 영리해서 금방 이해를 한다.


봉철 형은 서울 주소는 물론 경비 조달 방법, 부안에서 김제역을 거처 영등포 도착하여 공중전화하는 방법 등이 상세히 적어 주고 떠났다, 기밀문서를 꼬깃꼬깃 구겨서 장판 밑에 보관하고 두어 달이 지났다. 드디어 가출할 약속 날짜가 왔다. 


길수와는 마지막 밤이 될 수 있다. 동생을 남겨 놓고 떠나려니 마음이 아프다. 열심히 일하면 꼭 형이 성공해서 돌아오겠다고 약속을 했다. 두 형제는 두터운 솜이불속에서 꼭 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밤을 새웠다. 다음날 기밀문서에 적힌 대로 빈틈없이 기계처럼 움직였다. 미리 파악해 놓은 이모 집 벽장 속 현금과 귀중품을 털어 부안까지 도착했다. 처음 와보는 부안 읍내도 별천지였다.


어렵지 않게 김제 역에서 무궁화 열차에 몸을 실었다. 지긋지긋한 이모님 헛간 집에서 탈출에 성공했다. 창가로 지나가는 김제 평야를 보면서 마치 꿈속을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영등포역에 도착해 교육받은 대로 동전 10원을 넣고 다이얼을 돌려 공중전화 부스 앞에서 봉철 형을 만나게 된다. 여장을 풀고 바로, 다음날 신발공장에 취직하게 된다. 첫 출근이다.


수많은 젊은 남녀가 알지 못하는 기계 앞에서 바쁜 손놀림을 하고 있다. 줄지어 나오는 신발들은 신비 그 자체였다. 새로운 세상이었다. 농사일에 비하면 득실이 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짧은 시간에 인정을 받아 재단하는 일을 하게 된다. 


재단 기술자가 되었을 때 포장 반 아가씨를 알게 됐다. 김말자, 18세 소녀였다. 촌티는 났지만 순진하고 열심히 일하는 득실이에게 호감을 갖고 좋아하게 됐다. 달콤하고 짜릿하고 두근거리는 첫사랑이었다.


퇴근 후 둘이서 맛있는 것도 사 먹고 휴일은 극장이나 공원도 갔다. 커피도 맥주도 그때 알았다. 서울 생활은 날이 갈수록 즐겁고 익숙하게 되었다. 이제 옛날에 알던 득실이가 아니었다. 


새로운 상식이로 다시 태어났다. 검은 얼굴은 하얗게 변해 있었고 빡빡머리는 멋있는 장발로 변해 있었다. 떨어진 옷 한 벌로 일 년을 입었는데 이제는 청바지에 고급스러운 잠바와 번질번질한 하얀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전라도 사투리를 전혀 쓰지 않고 또박또박 서울말을 썼다. 이가 득실거리는 몸에서는 향수 냄새가 났다. 두꺼비 등처럼 불어 튼 손은 말끔한 여자 손보다 더 고았다.


사람이 일 년 동안 이렇게 변하리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 했다. 그러나 여전히 시골 이모 집에서 고생하는 동생 길수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길수는 한글도 제대로 띠지 못해 편지도 못 보내고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오라고 부르고 싶지만 혼자서 서울을 찾아오는 것도 불가능했다.


어느 날 내 앞으로 편지가 왔다. 상식이 편지였다. 날짜를 잡아 길수를 이모 집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어른들이 알면 난리 난다. 나는 사전에 길수한테 형이 올 거라고 준비를 하라고 귀띔해 주었다. 그렇게 날짜에 맞춰 길수도 보따리를 싸서 상경했다.


개울 건너 헛간 집 득실이 와 길 수가 없어 허전했다. 함께 웃고 싸우고 뛰놀던 개울과 바닷가를 혼자 걷게 됐다. 불쌍하지만 인정이 많은 친구였는데……


한편, 서울로 올라간 득실이 와 길 수는 가리봉동에 단칸방을 얻어 생활했다. 난생처음 둘만의 행복함을 경험했다. 아버지는 다르지만, 세상에서 유일한 피붙이 형제다.


남산을 올라가 한강을 보면서 꿈도 키우고 경복궁, 창경원을 구경하면서 역사와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일제와 6.25가 지나고 세상이 빠르게 바뀌고 있었다.


길수는 못다 한 한글 공부도 했고 득실이는 중·고등학교 검정고시 공부를 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날 즈음 길수가 밤에 외출한다고 나갔다. 그날 밤 들어오지 않았다. 좀 걱정은 됐지만, 다음날은 오겠지 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경찰에 신고했지만 특별한 소식이 없었다. 혹시나 하고 용산역과 서울역 노숙자들도 다 뒤져 봤지만, 거기에도 없었다. 한글을 제대로 읽지 못해 시내버스를 잘 못 탈 수도 있었다. 세상이 어지럽고 어려운 시대라 불길한 생각까지 들었다. 6개월 정도를 전단지도 돌리고 많이 노력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형제는 이산가족이 돼 버렸다.


길수의 빈자리를 보고 상식이는 죄를 지은 것만 같아 서울에서 살 희망이나 용기가 보이지 않았다. 살아 있다면 시골은 찾아오겠지 생각하고 서울 생활을 접고 귀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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