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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열 Oct 05. 2024

원고청탁

1. 서론

  변산면지에 기재될 1970~80년대 지역생활이야기 집필 청탁을 받고 영광으로 생각하였지만 한편으로 걱정이 앞섰다. 내 직업이 글과 전혀 관련이 없고 문학이나 역사에 대한 글을 써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7080 변산 이야기는 친구들과 밤새워도 끝이 없다. 글에 나오는 이름은 친구들 실명이고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선배들은 씨로 표현하였다.          

2. 변산국민학교.

  학교가 있는 지서리 옛 이름은 문헌에 나와있듯이 지포 혹은 지지포라 하여 옛날에는 배가 들어올 수 있는 포구라고 하는데 흔적은 없다. 지서리에서 변산해수욕장까지 펼쳐진 유일한 변산평야는 송포와 해수욕장이 막아준 간척지라고 추측할 수 있다.  지서리에서 동쪽은 지동리, 남쪽은 지남리다. 지남리와 중산리 중간에 사자대가리라고 부르는 야산 있다. 사자 대가리 왼쪽은 세미꼬랑이고 고랑을 따라 산등성을 넘으면 운산리이다. 운산리에서 더 올라가면 월명암 길이 보이고 내려가면 중산리, 더 내려가면 지서리 윗 똥이 나온다. 사자 대가리에 올라가면 변산국민학교뿐만 아니라 바다가 보이고 변산해수욕장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정월대보름날 당산재도 지내는 곳이다. 상여가 지나갈 때 상주는 절을 3번 해야 한다. 변산을 지키는 수호신이었다.     

국민학교는 일제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목조교실이 6개가 있었다. 오래된 건물이라 천정은 구멍이 뚫려 비가 샌다. 피난민들이 사용했던 아부라(아스팔트)를 입힌 종이를 지붕에 몇 겹으로 덮은 뒤 비는 새지 않았다. 교실 바닥도 구멍이 송송 뚫려있다. 바닥 공간에는 굴러 다니는 구슬, 동전, 학용품이 많이 빠졌다. 보물 창고였다. 공간에 들어갈 수 있는 좁은 개구멍이 교실 밑에 하나씩 뚫려있다. 겨우 들어가면 지하실처럼 쾌쾌한 냄새와 어둡고 귀신이 나올 것 같다. 구멍을 못 찾으면 못 나올 수도 있는 무서운 곳이었다. 우리 60년 쥐띠들은 쥐새끼처럼 그 구멍으로 쑥쑥 잘만 들어갔다. 연필, 지우게 , 칼 등 한주먹을 들고 나온다. 일제강점기 때 쓰던 녹슨 동전도 나왔다. 오래된 판자에 옹이 빠진 둥그런 구멍으로 위를 올려다보면 여자애들과 선생님 팬티도 볼 수 있었다. 온통 빨간 팬티만 입고 다녔다. 그때 그 시절 유행한 팬티였다. 교실 바닥은 양초를 바르고 걸레로 문지르고 조약돌로 광을 내어 반질반질 윤이 났다. 한 학년에 2~3반으로 구성이 되어 교실이 부족하였다. 2부제 수업도 부족하였다. 책상도 부족하여 바닥에 앉아 수업을 받았다. 한때는 변산해수욕장 언덕에 있는 임해학교분교까지 걸어가 수업을 받아야 했다. 5학년쯤 부로꾸(벽돌)와 공구리(콘크리트)로 신축건물을 단단히 지으면서 임해학교까지 갈 일은 없어졌다. 변산국민학교 분교로는 묵정국민학교 중계국민학교가 있었지만 산골 깊은 곳에 있어 어디에 있는 줄 도 몰랐다. 지금은 중계국민학교는 부안댐에 수몰되었고 묵정국민학교는 폐교되었다. 

   변산국민학교에는 박 소사가 계셨다. 학교 건물을 관리하시고 부러진 책상과 의자를 수리하시는 분이었다. 운동장 구석에 100년 묵은 느티나무가 썩어 넘어졌다. 박 소사님이 나무를 베어내면서 속에서 잠자고 있는 구렁이를 죽였다고 한다. 학교를 지키고 곧 용이 될 이 무기였다고 한다. 구렁이의 저주로 운동회나 소풍 때만 비가 온다고 했다. 마포나 격포국민학교는 한 번도 비와 겹친 날이 없었다. 비가 오면 화가 난 학생이나 학부모들이 만만한 박 소사한 테 책임을 전가하는 일화였다. 능구렁이를 본사람도 없고, 사실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학교 뒤뜰에는 푸세식 화장실이 있었다. 냄새가 진동을 하였고 밑을 구다보면 하얀 구더기들이 득실거렸다. 일부 많은 구더기들은 벽을 타고 올라왔다. 화장실 뒤쪽, 학교 북쪽은 측백나무 와 탱자나무로 이루어졌다. 측백나무 사이를 두고 개구멍이 뚫어져있었다. 개가 뚫은 게 아니고 60년생 쥐새끼들이 뚫어 노았다. 산내(변산면은 1987년 개칭) 면사무소 쓰레기 통을 뒤지기 위해서다. 쓰레기를 뒤지면 신문쪼가리, 찢어진 우산, 깡통, 보루바꾸, 볼펜등 재활용해서 쓸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머리가 좋은 어린애들은 재활용에 도사들이었다. 폐품으로 총을 만들었다. 총알은 측백나무 열매를 사용했다. 파란 유리구슬만 한 것이 오돌 토돌 흉측하게 생겼다. 맞아도 그렇게 아프지는 않지만 맞으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적중률은 대한민국 여자양궁 수준이었다. 시중에서 파는 장난감 총하고 비교가 되지 않았다. 총알을 철사 끝에 장전하여 정조준하여  발사한다. 타깃은 만만한 여자애들이다. 제수가 나빠 덩치가 큰 여자애들한테 잡히면 디지게 맞고 총도 뺏겨 아작을 내버린다. 측백나무 사이로 아름들이 오동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가을이 되면 오동나무 열매가 많이 떨어진다. 쥐새끼(60년생)들은 호두로 착각하여 열매를 주어 먹었다. 호두맛도 나고. 땅콩처럼 고소했다. 그런데 약간 비릿하면서 쓴맛도 느꼈다. 독이었다. 복통과 설사 두드러기로 몇 마리 쥐새끼들이 죽을 뻔했다. 친구들 중 한 살 더 먹고 입학한 돼지(59년생)들은 멀쩡하였다.           

3. 경원반점

   집에 갈 때 운동장을 가로질러 학교 정문으로 나오는 것보다 산내면사무소 개구멍을 통과하는 게 훨씬  빠른 지름길이었다. 오른쪽은 우체국이고 왼쪽은 경원반점 중국집이 있었다. 6년 동안 짜장면 딱 3번 먹어본 기억이 있었다. 졸업식날, 간첩신고 표창장 받는 날, 글짓기 대상 받던 날, 그때는 세상에서 최고급 요리가 짜장면인 줄 알았다. 경원반점을 지날 때 구수한 음식냄새를 맡기 위해 우체국 담벼락에서 서성거리며 코를 실룩거릴 때도 있었다.           

4. 우체국

  우체국은 다른 건물에 비해 약간 높은 빨간 기와집이었다. 당시 우체국의 주 업무는 편지와 소포 배달이었다.  아버님 전상서 혹은 사랑하는 그대에게로 시작하는 편지는 답장이 오기까지는 1주일 이상이 걸렸다. 그래도 연애편지라도 받으면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었다. 글을 읽지 못하시는 어르신들에게는 편지도 읽어 주고 대필도 해 주었다. 특히 연애편지는 글을 배웠던 사람에게도 쉽지 않았다. 서점에서 편지교본을 구입하여 아름다운 구절을 외우고 베껴 옮겨 적었다. 전화기가 들어오면서 사랑하는 편지는 사라지고 우편함에는 반갑지 않은 청구서나 교통위반 범칙금 통지서만 도착해 있다.          

5. 전화기와 교환수

   변산반도에도 70년도 전기가 들어오면서 전화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전화기도 비싸고 통화비도 비싸 일반가정에서 보편화되지는 못하고 관공서에서 주로 이용을 하였다. 마을 회관에 1대가 있어 특별한 일 외에는 사용하지 못하였다. 변산우체국에는 최 양, 박 양, 윤 양 3명의 전화교환원이 3교대 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여성에게 이름 뒤에 "양"을 붙여 부르는 것이 존중을 의미하였다. 여성에게는 교환원이라는 직업은 인기가 있어 높은 경쟁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다. 권한도 막강하였다. 교환원은 우체국 교환실에서 비행기 조종사처럼 해드폰을 쓰고 근무를 하였다. 책상 앞에는 벌집보다 총총한 구멍이 뚫려있는 콘센트 군집 판이 놓여 있었다. 수백 개의 콘센트 구멍에는 각 번호가 적혀있다. 일반인이 전화기를 낚시 릴 돌리듯 부지런히 돌리면 아리다운 교환수 아가시 목소리가 나온다. 상대 전화번호를 불러주면 콘센트에 번호대로 꼽아서 연결을 확인한다. 쌍방이 연결이 되면 통화시간과 통화 품질을 알아야 되므로 교환수는 어쩔 수 없이 쌍방의 통화를 들어야만 했다. 변산면에서 돌아가는 정보를 모두 알고 있었다. 교환수는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해야 한다. 교환원은 대화내용을 들으면서 싸움을 하거나 욕설을 한다면 차단할 수 있는 권한도 있다. 사랑하는 연인사이 은밀한 대화도 들을 수 있었다. 장거리나 섬에서 걸려오는 전화는 연결해 줘도 상태가 좋지 않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면 교환원이 듣고 전달하는 경우도 있다. 중간에서 뉘 집 아들이 명절에 오는지 무엇을 하는지 면사무소 호적계장보다 집안일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교환수는 전화기가 보급되면서 새롭고 빠르게 탄생된 직업이었다. 80년대로 접어들면서 또 새로운 기술인 장거리 자동전화(DDD)가 개발되면서 빠르게 없어진 직업이었다.           

6. 부안댁

   부산에 있을 때 엄니 목소리를 듣고 싶어 100원짜리 동전을 한주먹 바꾸어 DDD 공중전화박스 앞에서 줄을 서 기다렸다. 차례가 되면 박스 안으로 들어가 전화다이얼을 돌린다. 대항마을회관에 전화기 한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누구나 전화가 오면  마을회관에 설치된 마이크로 바로 방송을 해 주었다. 전봇대 위에 높이 달려있는 마을 확성기에서 "반떡 아들 깽녀리가 부산에서 전화 왔씅게 후딱 달려와 받으쇼" 엄니는 밭에 일하시다 반가운 아들목소리를 듣고 싶어 헐레벌떡 100m 단거리 선수처럼 달렸다.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고 돌부리에 고무신발 앞코가 쭉 ~찢어져 벗겨진 검정 고무신을 양손에 들고 전화기 앞에 도착하여 흙 묻은 손을 툴툴 털고 전화기를 받으면 이미 뚜~뚜~뚜 끊어져 버렸다. 엄니를 위해서 대항리에서 1호 가정집 전화기를 구입했다. 반떡은 이제 전화받으러 뛰어갈 일은 없다. 어려서부터 우리 엄니를 동네사람은 "반떡"이라 불렀다. "부안댁"을 그렇게 불렀다. 내가 깽녀리가 된 것은 반떡이 저녁이 되면 "경열아 밥 묵어라" 동네가 떠나갈 듯 나를 부르는 엄니 목소리였다. 여러 번 불러도 들은 척도 안 하니 악센트를 집어넣어 "깽녀라 밥묵으라" 엄니 목소리를 따라 동네 사람들도 그렇게 불렀다.      

세월이 흘러 이제 스마트폰 시대에서 살고 있다. 이제 반떡은 깽녀리를 부를 필요도 없이 다이얼 번호를 눌러 전화를 하셨다. 신발 벗어 뛸일도 없다. 몸이 불편하셔서 농사일도 그만두셨다. 귀도 잘 안 들리면서 아들, 딸 손자, 손녀 목소리 라도 듣고 싶어 수시로 전화를 하셨다. 전화번호를 못 찾아 엉뚱한 곳에 전화를 할 때도 있었다. 깽녀라 밥묵어라하는 동네가 떠나갈듯한 반떡 목소리는 작고 희미한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깽녀리 맘이 좋을 일이 없다. 전화 좀 그만하시라고 투덜거렸다. 깽녀리는 반떡 맘을 조금도 이해를 못 했다. 이해는 했지만 인정을 하지 않았다. 반떡은 우리에게 강하고 엄한 엄니였다. 한동안 전화가 없었다. 궁금해서 전화를 해봤다. 놀랍게도 반떡이 깽녀리 전화번호를 잊어 묵었다. 자식들 생일과 전화번호를 줄줄이 다 외우고 계셨던 엄니였다.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깽녀리는 반떡이 치매가 온 걸 늦게 알아차렸다. 불효자식이다. 용돈도 넉넉히 드리지 못하고 전화요금 많이 나온다고 투덜거린 적이 있었다.     

  하늘에 계신 엄니한테 알뜰폰 전화기 한대 보내고 싶다. 하루 종일 전화하면서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손자, 손녀와 화상전화도 하고 사진이나 동영상도 보내 드리고 싶다. 이렇게 좋은 세상에 반떡은 어디 가셨어요?. 엄니가 많이 보고 싶다. 엄니의 희미한 전화 목소리라도 하루 종일 듣고 싶다.          

7. 학교점빵

    학교 운동장 서쪽에는 정문바로 앞에 학교점빵이 있었다. 없는 물건이 없었다. 쥐띠들이 보기엔 문구점이 아니라 대형 백화점이었다. 학교 문구는 물론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놀이기구등 초등학생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팔고 있었다. 학생수가 많아 매출도 많았다. 전 학년 600여 명이 넘었다. 언덕 위에 중학생까지 합하면 학교점빵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돈을 긁어모았다. 대기업 제벌쯤 생각하였다. 등록금이 없어 중학교 진학을 못하는 숫자가 반이 넘었던 시대였다. 가난한 동네였지만 학교점빵 돈통에 돈이 수북하게 쌓여만 갔다. 학교점빵 주인은 우리의 로망이었다. 현금이 귀할 때라 물물교환도 가능했다. 농사진 곡식이나 계란을 가져가면 노트, 크래용, 연필등 학용품으로 교환해 줬다. 계란 두 개면 노트 한 권과 바꿀 수 있었다. 엄니는 학교 미술준비시간에는 현금이 없으면 갓 나온 토종계란 두세 개를 싸준다. 등굣길 5km 되는 자갈길을 뛰고 장난치면서 학교점빵에 도착해서 흔들어본다. 계란 속에서 출렁출렁 물소리가 났다. 너무 흔들었다는 것이다. 상품가치가 없다. 그날도 미술시간에 그림은 못 그리고 연필로 만화만 그적거리면서 글을 썼다. 돈을 긁어모았던 학교 점빵도 한참뒤에 문을 닫았다.           

8. 풀빵집

   학교점빵 한집 건너에 풀빵집이 있었다. 단팥을 넣은 풀빵은 2개에 10원이었다. 배고픈 아이들에게 최고의 간식거리지만 10원은 큰돈이었다. 지날 때마다 침만 꿀꺽꿀꺽 삼키고 빵 굽는 기계만 구경하였다. 전북여객 조수로 따라다니는 외삼촌이 계셨다. 집안중에 그래도 현금을 만질 수 있는 직업이었다. 삼촌이 나를 많이 이뻐해 주었다. 제수가 좋아 삼촌을 만나면 공짜 버스도 탈 수 있고 삥땅인지 몰라도 100원을 몰래 손에 쥐어 주었다. 버스 조수로 따라다니는 삼촌이 자랑스러웠다. 풀빵 20개를 사 먹을 수 있는 큰돈이었다.          

9. 이발소

   풀빵집을 지나면 이발소가 있었다. 곰보아저씨가 주인이고 수습생인 삼식이는 기술을 배우고 청소하였다.  면도를 하는 이모 한분이 계셨다. 미군이나 카우보이가 사용하던 가죽 혁대에 면도날을 삭삭 문지르면 날카로운 면도날이 된다. 이발사도 현금을 만질 수 있는 좋은 직업이었다. 미장원이 없어 여학생 단발머리도 이발소에서 깎았다. 곰보사장님과 아버지는 잘 아는 사이라서 나는 항상 외상을 주고 머리를 깎았다. 상고머리는 70원 빡빡머리는 30원이었는데 초등학교 6년 동안 한 번도 상고머리를 해본 적이 없었다. 바리깡으로 스님처럼 시원하게 빡빡 깎고 다녔다. 이발소를 지나면 버스가 다니는 큰길이 나온다.           

10.전병갑네집

   학교 가는 길 마지막 큰 길가에 쥐띠 전병갑이네 집이 있었고 길건너에 사촌인 전경수 집이 있었다. 옛날 기와집으로 제법 큰 집이었다. 병갑이 집은 마당과 학교 뒤뜰이 브로꾸 담하나로 학교에서 제일 가까운 집이었다. 이로 인하여 객지에서 발령받은 학교 총각선생님들이 병갑이 집에서 하숙을 하였다. 이러한 든든한 뒷배경으로 6년 동안 반장을 하였고 6학년때는 전체 반장을 하였다. 공부를 잘하고 똑똑해서 반장이 되었는지 지금도 아리송하다. 병갑이네 집을 사이로 비포장 좌회전하면 바로 왼쪽에 신발가게가 나온다.           

11. 검정고무신 

     1년 후배 유지창이네 집은 신발 가게였다. 짚신은 없고 고무신과 장화 그리고 운동화가 진열이 되어있었다.      

할아버지는 짚신시대라면 아버지는 고무신 시대다. 우리는 고무신에서 운동화로 변화되는 과도기였다. 고무신이 닳아 떨어지면 운동화를 사준다고 어머니와 굳은 약속을 믿고 운동화 신을 날만 고대하고 있었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운동화를 신고 싶어서 칼로 흠집 내 일부러 찢어지게 만들어 어머니한테 탄로 나 반칙이라며 혼을 나고 다시 고무신을 신어야 만 했다. 아무튼 열심히 뛰어다녀 자연마모가 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야 운동화를 신을 수 있었다. 아버지 부안 장에 가실 때 식구들 발 사이즈 보릿대로 재어 갖고 가신다. 터덜거리는 비포장도로 달려서 부안 장에 도착해 보면 이미 보릿대는 호주머니 속에서 부러지고 휘어지고…… 신발 가게 들어선 울 아버지 동생들 것은 있는데 내 것이 부러 저 없어졌다.  대충 “십 문 칠 주세요~”. 새신 사 왔다고 신어 보면 맞을 리 없다. 손가락 하나가 들락날락…… 십문칠은 255mm인데 초등학생인 나에게 맞을 리 없다.

   신발 앞 코를 눌러보고 “발은 금방 크니 대충 신어라” 한다.  바꾸려면 또 다음 장날 때까지 지달려야 하니 그냥 “아부지~ 기워 떨어진 양말 신고 신으면 대충 맞아요” 하면서 머리맡에 두고 잠을 잔다. 생고무 냄새마저 상큼했지만, 다음날부터는 헐컹대는 고무신을 질질 끌고 다녀야만 했다.

   고무신도 검정과 흰 고무신 두 가지였다.  흰 고무신은 때가 쉽게 타고 빨리 떨어져 할아버지들만 신고 다니셨다. 검정고무신은 문수만 틀리지 일률적으로 검은색이라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돌아오면 늘 남의 신발이다. 신발을 벗어야 하는 잔칫집이나, 여럿이 모이는 곳에 한번 갔다 오면 남의 신발은 그렇다 치고 여하튼 짝을 맞춰 오는 적이 드물다.

   대항리에서 지서리까지는 5㎞, 십 리가 넘는 거리였다. 또 자연마모를 증명하기 위하여 시멘트 담벼락에 박박 문지른다. 하굣길에 해수욕장 복지호텔 올라가는 층층 계단이 문지르기 좋은 시멘트였다. 당시 복지호텔에서 사는 장옥희는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옥희는 층층 계단에서 신발을 문지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이해를 못 하는 표정을 지었다. 설명은 못하고 얼마나 창피했던지 몰랐다.

  참외 서리하다 들키면 무조건 신발 벗어 손에 들고 튀어야 했다. 땀에 잘 미끄러져서 뛰기도 힘들 뿐 아니라, 뛰다가 그냥 확~ 벗겨져 버리면 환장을 한다. 그거 주으러 돌아갔다간 바로 그냥 멱살 잡히니 신발 하나 버릴 것 각오한다. 그때 고무신 중에 인기 있었던 상표가 타이아표 진짜 고무신이다. 왕자표, 범표도 있었고 기차표 고무신도 있었는데 대항리 우리 집은 전부 타이아표였다.

   엿장수조차 검정 고무신은 안 받고 흰 고무신만 받았다. 얼마나 엿이 먹고 싶었으면 외 할아버지가 팽나무 밑에서 주무시고 있던 사이 흰 고무신과 엿을 바꿔 먹어 할아버지와 엿장수 간 다퉜던 적도 있었다. 결국에 자연마모는 실패하여 중학생이 되어서 꿈에 그리던 운동화를 신을 수 있었다.           

12. 이우룡네 집

     지창이네 신발가게 앞에는 쥐띠친구 이우룡이 집이 있었다.

아버지는 안 계시고 어머니 혼자서 찐빵, 라면, 국수, 계란, 부침개를 파는 분식집을 운영하셨다. 우룡이와 나는 짝꿍이었다. 우룡이 집에 가면 엄니가 찐빵과 라면을 반으로 나눠주면서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당부하셨는데 제일 많이 싸웠던 친구가 우룡이었다. 불알친구라서 지금도 옛날 이야기 하면서 잘 지내고 있다. 우룡이가 50년 만에 아버지에 대하여 나한테 들려줬다. 할아버지 집은 광주였는데 일제 때 변산으로 피난 와 임시 거처를 하셨다.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독립군이며 시인이며 작곡가였다. 그리고 우룡이 아버님도 유명한 교수이며 작가였다. 전쟁이 끝나고 변산을 떠나고 나서 연락이 두절되었다. 최근에 연락이 되었다고 하였다.           

13. 방앗간과 돼지

   우룡이 집 옆은 넓고 큰 주조장과 방앗간이 있었다. 명절이 되면 떡 빼는 방앗간은 줄을 서야 했고 평상시에도 막걸리 발효 냄새가 향긋하였다. 막걸리를 빚고 남은 찌개미는 돼지를 줬다. 지서리에서 주조장에 뒤뜰을 통하면 제법 큰 오솔길이 있었는데 사망바위 가는 길이다. 100m쯤에 동창 쥐띠 최필열, 조동진, 김영곤이가 살고 있었다. 이 동네는 집이 세 가구가 있어 세 가구똥이라 불렀다. 동진네 집에 기르는 수퇘지가 발정이 났다. 동진이가 막걸리 찌개미를 얻어와 돼지에 먹였다. 술 취한 돼지는 흥분하여 소리를 꽥꽥~~  지르더니 돼지우리를 탈출하여 동네에 있는 암퇘지 우리를 침법 하여 교미를 하고 도망쳤다. 마을사람들이 돼지 소탕작전을 벌였다. (주)한국합판 철조망 안에서 돼지가 잡혔다.  발정 난 숫퇘지에게는 막걸리 찌개미를 줘서 안 된다는 것을 늦게 알았다.           

14. (주)한국합판

    지서리 아랫동 윤신네 집 뒷마당과 새가구똥 필열네 집 사이에 넓은 밭이 있었다. 군부대처럼 철조망이 굳게 처있었다.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간판도 없었다. 철조망 사이로 보이는 것은 군인들이 아닌 작은 묘목들이었다. 묘목 농장이었다. 군산에 있는 (주)한국합판 산내 출장소라고 하였다. 지금의 변산송림아파트와 농협하나로마트 뒤편이다. 

      변산의 무성한 나무들은 일제강점기 때 무차별 벌목과 6.25 전쟁 때 불타고 전쟁이 끝나면서 주민들이 땔감나무를 채취하면서 민둥산이 되어 버렸다. 박정희 정권 때 새마을사업과 동시에 산림복구 녹화사업이 진행이 되었다. 식목일을 공휴일로 정하여 전국적으로 나무 심는 날로 정했다. 그러나 90%가 산인 산내면은 복구가 쉽지가 않았다. 군산에 있는 제법 큰 합판회사는 많은 나무가 필요하였다. 원목은 거의 수입에 의존하였다. 정부나 기업차원에서 국내 나무를 최대한 활용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했다. 나무를 재배할 수 있는 기술, 인력, 자본, 토지가 필요하였다. 방침으로 산림청과 합판회사가 손을 잡았다. 국유림과 공유림을 합판회사에 분양하여 필요한 나무를 키워 공급하는 국가정책을 세웠다. 묘목은 지서리 산내출장소에서 직접 키우고 재배를 하였다. 비교적 빨리 자라서 상품으로 이용할 수 나무들이었다. 포플러, 은사시나무, 낙엽송, 편백나무, 오동나무 등 수십만 그루 재배에 성공하였다. 묘목들은 도청, 유유동, 은호리, 운산리, 대항리, 지남리, 중계, 묵정리 변산 각 지역으로 배달이 되어 심기 시작하였다. 은사시나무계통은 종이, 성냥, 합판. 낙엽송은 전봇대와 철로 버팀목, 편백이나 오동나무는 건축과 가구로 팔려나갔다. 변산에 연탄이 들어오면서 더 이상 땔감나무가 필요 없게 되었고 변산에서 나무꾼이 사라졌다. 숲이 울창하여 나무를 하러 다녔던 오솔길도 정글로 바뀌어 길이 없어졌다. 그 길은 고라니나 멧돼지가 다니는 길이 되어버렸다.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동물이 쥐와 참새가 아니라 야생동물로 바뀌었다. 한 해 농사를 송두리째 날릴 수 있다. 농부들의 골칫거리다. 숲이 우거진 단점도 있었다.          

15. 대장간 이야기

    우룡이 옆집은 대장간이었다. 매일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있었다. "따당따다 따당따다" 쇠 두드리는 소리였다. 기술을 배우는 조수 김 씨는 화덕의 불을 피우고 풀무로 바람을 불어넣어 빨갛게 아궁이를 달구었다. 대장장이 오 씨는 그 속에 쇳덩어리를 집어넣는다. 시뻘건 쇳덩어리를 꺼내어 모루 위에 놓고 대갈마치로 수백 번 두드리고 식기 전에 찬물에 넣는다. "치직" 쇠는 불과 물을 반복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오 씨의 손에서 여러 농기구가 탄생하였다. 대장장이 기술은 이 담금질에서 나온다. 농경시대에 좋은 연장은 전쟁터에 장군의 칼처럼 참으로 소중하였다. 오 씨의 손은 불똥에 데이고 망치에 단련되어 우직하고 단단하였다. 아무리 단단한 쇠도 오 씨의 손에서는 반죽된 밀가루가 되었다. 엿가락처럼 맘대로 늘렸다 휘었다 하면서 원하는 농기구를 만들었다. 괭이, 호멩이, 왜낫, 쇠시랑, 후쿠는 물론 작두날까지도 만들었다. 농부들은 산내면에 이런 편리하고 기술 좋은 대장간이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였다. 멀고 먼 부안읍내까지 나가지 않아도 되었다. 쇠망치 두드리는 소리는 소음이 아니라 풍악소리로 들렸다.           

16. 자전거뽀

     대장간을 지나면 지서리 끝에 자전거뽀가 있었다. 자전거는 그래도 좀 산다고 하는 집에만 있었다. 지금 자동차보다 더 귀했다. 비포장 도로라서 자전거 펑크가 자주 났었다. 낡은 안장도 바꾸고 체인도 바꾸고 브레이크 페드도 바꾸었다. 신사용 자전거를 보조훅쿠를 여러 개 달고 자전거 바퀴를 큰 걸로 바꾸어 짐 자전거로 개조공사도 하였다. 이 짐자전거는 20리터 막걸리 4통은 옆으로 매달고 2통은 짐칸에 실어 밧줄로 묵어 배달을 하였다. 120kg을 싣고 다니는 튼튼한 자전거였다. 주인은 황 씨였는데 가난골 김기곤이 매형이었다. 친구 기곤이는 헌 자전거에서 나오는 바퀴 휠(림) 외 쇠구슬(베어링)  매형한테 얻을 수 있는 특권을 갖고 있었다. 도롱태(굴림쇠)로 동네를 휘젓고 다니면 애들이 많이 부러워했다. 구슬치기 할 때 쇠구슬 하나면 동네를 주름잡을 수 있었다. 지금 세대로 최신 아이폰정도 되는 물건이었다. 자전거뽀를 지나면 냇물이 흐른다.  냇가를 사이로 모장동과 지서리로 마을이 구분이 되었다.           

17. 보건소

자전거뽀 앞에는 보건소가 있었다.

   70년대부터 국가정책으로 콘돔을 나눠주며"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그것도 부족하여 80년대는 "잘 키운 딸 열아들 안 부럽다"는 슬로건을 산내면 주민들은 잘 따라줬다. 보건소에서 나눠주는 콘돔은 우리에게는 좋은 놀잇감이었다. 일반풍선보다 질기고 오래갔다. 아버지는 보건소만 갔다 오시면 풍선 한 박스를 선물로 갖고 오셨다. 어른들이 쓰는 놀잇감이 아니라 어린이 놀잇감으로 알았다. 보건소에서는 임질, 매독, 코로나, 장티푸스등 전염병 치료에 중점을 두었다. 정부에서 나눠주는 콘돔의 효과로 산내면은 갓난아기 숫자가 많이 줄었다. 그로 인하여 북적였던 학교는 전교생 학생수가 50명으로 줄었다. 학교는 폐교가 되어 격포 초등학교와 합병이 될지 모른다. 모두가 콘돔과 산아제한 덕분이었다.          

18. 예비군 중대본부

     보건소 옆에는 예비군 중대본부가 있었다. 중대장은 김성곤 씨였다. 중대장을 퇴역하고 부안군의원에 당선이 되었다. 산내면은 현역 1급 판정을 받아도 취약지역으로 향토방위로 빠졌다. 현역을 가고 싶으면 주소지를 옮겨야 했다. 주로 전투경찰과 함께 해안포 근무를 하였다. 출퇴근하면서 점심은 집에서 도시락을 싸왔다. 허름한 군복에 "방위"라고 적힌 안장을 차고 다녔다. 군인행세는 하지만 어딘가 어색하였다. 현역출신은 물론 지역주민도 노랑방위라고 무시를 하였다. 노랑방위는 행안면 군부대에 수시로 보고를 하기 때문 우체국 교환원 아가씨와 자주 통화를 하였다. 운산리 사는 김형규가 우체국 교환원과 성회롱(그때는 시아까시라 함) 발언을 하다가 수모를 격었다. 화가 난 교환원 장양이 200m쯤 되는 중대본부까지 달려와 형규 면전에 대고 "방위좆도 좇이냐?"라며 한방 갈긴 것이 화재가 되었다. 그 사건으로 장양별명은 장닭이 되었고 형규는 번데기다 되었다.           

19. 당골래미

     지포개울 건너 첫 집이 무당집이었다. 일치감치 신들린 당골래미였다. 당골은 귀신 이름이었다. 사주팔자를 보는 점쟁이도 아니었다. 주역을 공부한 철학자도 아니었다. 직접 귀신을 불러 굿을 하시고 미례를 예측하시는 분이었다. 울 엄니는 종교는 없지만 당골래미를 믿고 추앙하였다. 당골래미 말씀은 곧 하나님 말씀이었다. 우리 집 식구들 생일날 모두 기억하여 아침 일찍  방문하여 큰 대야에 물을 받고 바가지를 그 위에  엎어놓고 두드리면서 한두 시간 주문을 외운다. 하얀 백지를 태우고 마당에서 짚을 태웠다. 액운을 몰아내는 일종의 굿이었다. 식구들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였다. 어머니는 당골래미가 왔다 가시면 편안한 마음으로 1년을 보내셨다. 물가를 조심하고 동쪽에서 귀인을 만날 것이라는 예언도 해 주셨다. 당골래미 말씀대로  항상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기대를 하면서 살으셨다. 집안의 걱정거리가 있으면 당골래미를 불러 해결하셨다. 닭 한 마리를 제물로 바쳤다. 당골래미 신통력은 부안까지 알려져 전국구가 되었다.           

20. 원질래

    지서리와 모장동 사이로 흐르는 냇물이름은 지포 계곡이다. 운산리 삼신산에서 시작하여 쇠꼬랑날을 지나 운산리, 중산리, 지서리, 모장동, 사망암을 거처 최종 변산해수욕장 송포항구에 머물다가 서해 바다로 빠진다. 냇가를 건너는 큰 다리 하나가 있었다. 버스가 다니는 다리였다. 다리 건너면 모장 동이고 언덕에 운산중학교가 있었다(현 변산서중학교). 다리밑 웅덩이에는 피라미, 송사리, 모래 무치 작은 물고기가 많았다.  냇물이 흐르는 중산리와 지서리 중간에 농업용수를 사용하기 위하여 콩구리(콘크리트)로 막아서 조그만 수문을 만들었다. 어릴 적에는 큰 댐으로 보였다. 큰 웅덩이를 원질래라고 불렀다. 깊은 곳은 사람키보다 깊었다. 학교에서 가까워 시간만 되면 홀라당 벋고 불알만 잡고 물속에 툼벙 들어갔다. 개구리헤엄이지만 수영도 잘했다. 숨 안 쉬고 1~2분은 거뜬하게 물속에서 잠수도 할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 근질거리는 불알밑을 만져보면 오동토동한 거머리가 피를 빨아먹고 있었다.

   원질래를 조금 더 올라가면 버드나무 밑에 조그만 둠벙이 또 하나 있었다. 중산리 저수지 밑에서 솟구치는 물이었다. 여름은 얼음처럼 차고 겨울은 온천처럼 따뜻한 물이나 왔다. 이런 명당자리를 일치감치 어른들은 아내들한테 양보를 해 주었다. 동네 아낙네들의 전유물이 되어 빨래하고 수다 떨고 온천욕을 즐기는 곳이었다. 여자들의 유일한 휴식공간이었다. 그곳은 나무와 숲이 울창하여 바람막이도 잘되었다. 또한 남자들의 시선도 막아 줬다. 밤에는 여성 전용 노천 온천탕으로 바뀌었다. 간판은 없지만 남성 출입금지라는 지역 관습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전기와 수도가 들어오면서 원질래 노천탕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21. 조각선 대서소

    지서리 중심에 버스 정거장이 있었다. 그때는 차부라고 불렀다. 완행버스인 안전여객과 전북여객 두 회사가 번갈아 시간을 정하여 운행하고 있었다. 버스 운전사는 비행기 파일럿 정도 대우를 받았다. 운전학원도 몇 개월 다녀야 했고 대형면허 시험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차부에서는 버스표를 팔았다. 여자 쥐띠 조보연집이었다. 조보연 아버지는 변산면장을 역임을 하셨다. 버스표도 팔고 조각선 대서소를 운영하였다. 지역주민들 대부분 한글을 모르는 까막눈이였다. 편지도 못 읽었다. 한글을 더듬더듬 읽으면 다행이었다. 출생신고와 사망신고 모든 서류들이 한자로 기입해야 하기 때문 그때 그 시절은 보통사람들조차 어려운 숙제였다. 형과 동생이 출생연월 및 이름이 바뀌는 것이 다반사였다. 이러한 문제를 조각선 대서소에서 다 해결하여 주었다. 변산의 변호사나 법무사 역할이었다. 손님이 끊이지 않아 돈벌이도 좋았다. 보연이 집을 쪽문으로 들어가면 별채에서 미국사람이 살고 있었다. 평화 봉사단 브라이언베리 씨였다.          

22. 브라이언베리

    외국인 베리 씨를 보연이 할머니는 병으로 죽은 막내아들이 환생했다고 믿었다. 보연이 가족과 똑같은 한국 생활을 하셨다. 전기가 없는 초가집에서 요강을 사용하였다.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변산의 최초의 다문화 가정이었다. 베리 형님이 정월 대보름날 풍물놀이를 구경하고 즐기면서 동네를 활보하였다. 지남리 원호네 밭귀퉁이에 똥 웅덩이가 있었다. 녹지 않은 하얀 눈에 살짝 덮여있었다.  웬만한 시골 사람들은 똥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베리형은 성큼성큼 하얀 눈밭을 다니다 지뢰를 밟은 것이다. 똥통에 배꼽까지 빠져버렸다. 눈에 뒹굴면서 "항쿡사람 텅 드러워요~~" 농악보다 더 우스운 광경이 눈밭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똥통에 빠진 베리형님의 유명한 일화였다.  봉사활동을 마치고 변산이 그리워  한국 불교로 귀화하여 많은 불교 업적과 변산의 70년대 관련 사진과 작품을 남기셨다. 베리 씨의 유언대로 변산에 위치한 창녕조 씨 상호군공파 묘에 묻혔다. 묘지석에는 "살래에 살아서 큰 출세 했고만 그려!" 글이 새겨져 있었다.(당시에는 산내면이었다)          

23. 유성곤 전파사

    조보연 집옆에는 유성곤 전파사가 있었다. 쥐띠 영곤이 형님이었다. TV는 없고 고장 난 국산 라디오나 전축 수리가 전부였다. 국산은 때려야 말을 듣는다. 접점이 안 좋다. 몇 대 두드리면 소리가 잘 났다. 그러다 소리가 멈춘다. 그럴 때 주먹으로 휘어 갈긴다. 소리가 멈춘다. 그때 전파사에 들고 와 수리를 했다. 덤으로 벽에 걸린 괘종시계나 사발시계도 수리를 하였다. 전파사 앞에는 10번 집이라는 제법 큰 가게가 있었다. 학교 점빵보다는 큰 가게였다. 전화번호가 10번이라 가게 이름을 그렇게 불렀다. 변산면의 현대백화점이었다.           

24. 안창당

    우체국 옆집에 허름한 초가집이 있었다. 처마에 "안창당"이라는 초라하게 간판이 걸려있었다. 한문으로 적힌 한약재료가 천정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수십 개 되는 작은 서랍에도 약초가 가뜩하였다. 약방을 지나갈 때 한약냄새가 진동을 하였다. 약방의 주인은 나이가 드시고 소아마비인 듯 약간 절둑거리며 항상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계셨다. 침도 놓고 주사도 놓았다. 종기가 났을 때 쇠젓가락처럼 큰 대침으로 수술을 하셨다. 바늘보다 긴 장침을 진맥을 짚고 아픈 곳이 있다면 쑥쑥 집어넣었다. 다리가 삐거나 허리 아픈 시골사람들은 침의 효과를 많이 봤다. 청진기를 이용하여 아픈 배도 진단하였다. 눈에 이물질도 빼주고 앓던 이빨도 빼주었다. 견적이 많이 나오는 금이빨 시술도 하였다. 외부로 돌출된 치질이나 종기도 수술하였다. 임질 매독도 치료하였다. 돼지나 소불알도 까고 동물도 치료하였다. 어린애들 홍역이나 감기도 치료하였다. 80년 초 변산면 보건소가 생기기 전에는 그야말로 한의사, 수의사, 안과, 치과, 내과, 산부인과, 소아과, 피부과, 비뇨기과등 종합병원이었다. 먹고살기도 힘든 시대에 병원비가 없어 치료를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낙후된 치료나 처방일지 모르지만 그 시절 안창당 약방의 치료 효과를 본 주민들이 많았다. 잘 사는 집이라도 당시에 암 같은 큰 병으로 큰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모든 제산 탕진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아 사망한 사연도 많았다. 옛말에 큰 병과 재판은 살림 망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고 있었던 시대였다. 그래서 큰 병원에 갈 엄두도 낼 수 없는 형편에 이런 시골 초가집 종합병원이 활약을 하여 많은 생명을 구했다고 했다. 갱열이는 독사에 물려 안창당에서 치료를 받고 살아났다. 오광진이는 배가 아파 죽기 직전 토끼똥 같은 알약을 먹고살았다고 했다. 어린 아기가 급체했을 때 안창당에서 목에 걸린 음식을 꺼내어 생명을 구했다는 일화도 있었다. 프라시보효과라는 의학용어가 있다. 가짜약을 좋은 약이라면서 환자에게 처방하여 먹인다. 환자는 의사말을 믿고 산다는 확신으로 엔도르핀이 생겨 정말로 병이 호전되는 의학적인 실험결과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대의 의료 시스템이 얼마나 잘되었는지 세계적인 수준이다. 아무리 큰 병도 살림 말아먹을 일은 없다. 안창당은 70년대 변산에서 화려하게 의료활동을 하다 갑자기 사라졌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면허 의료행위로 의료사고가 발생했을 수 있었다. 가난골에 살고 있는 최 씨 집안의 정의에 불타는 청년이 있었다. 군대를 갔다 오더니 워카발로 안창당을 쳐들어가 작살을 냈다는 소문이 돌았다. 바로 옆에 산내면 지서가 있었다. 경찰 수사도 안 했다. 무슨 이유인지 아무도 몰랐다. 안창당은 변산 역사에서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지고 약방 주인은 전주로 도망갔다고 했다.               

25. 아이스케키집

    지서리 동쪽끝 지동리 가는 길에  만화방이 있었고 앞에는 아이스케키를 만드는 조 씨 공장이 있었다. 얼음도 만들고 케키도 만들었다. 대나무 같은 통에 젓가락을 꼽아 사카리 물을 얼려서 만들었다. 색소와 향도 넣었지만 영업비밀이라서 말할 수 없다. 60년생 쥐띠 중에 1년 늦게 입학한 전재인이는 59년생 돼지띠였다. 우리보다 키와 덩치가 크고 좀 괴팍하였다. 뱀을 잡아 목에 걸고 다니며 과시를 하였다. 여자애들 앞에 던져 까무러치기도 하였다. 조폭끼가 있었지만 한편으로 생활력도 강했다. 일치감치 날품팔이 소년이 되었다. 아버지 호주머니에서 500원을 세비와 조 씨 공장에 저당을 잡히고 케키통에 아이스케키 100개를 배분받았다. 조 씨한테 “아이스케키 ~얼음과자” 엑센트를 넣어 수십 번을 번복하여 영어수업이 통과되면 케키통을 짊어지고 나왔다. 반절은 녹고 반은 먹고 저당 잡힌 500원은 결국 날리고 말았다.           

26. 참기름집

     마지막 집은 교회와 떡 방앗간이었다. 평소에는 참기름이나 고춧가루를 빻았다. 선반에는 참기름을 짜고 난 깻묵이 보관되어 있었다. 하굣길에 고소한 참기름 냄새를 맡기 위해서 쭈그리고 앉아 기름 짜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불쌍하게 여겼던지 방앗간 주인이 깻묵 반절을 잘라 던져줬다. 운이 좋았다. 따끈따끈하고 고소한 깻묵을 쥐새끼 친구들과 야금야금 나눠 먹으면서 대항리까지 걸어왔다. 고소한 깨소금 하굣길의 추억은 지금도 잊을 수 없었다.          

27. 옹기골

   고사포에 우리 쥐띠 친구들만 열댓 명이 살고 있었다. 동네는 서낭댕이, 담촌, 윗똠, 아래똠, 셋터, 노리목, 성천으로 나눴다(성천은 마포편입됨). 친구들은 김유진, 김철상, 김종순, 홍석순, 채희동, 서상교, 채희성 등, 희성이 집은 담촌에 있었다. 집 옆에는 큰 옹기굴이 있었다. 큰 아궁이에서 크고 작은  항아리가 쏟아져 나왔다. 운송수단은 구루마나 리어카였다. 개인 옹기장수는 지게를 사용하였다. 지게 위에 차곡차곡 쌓아 올린 옹기그릇은 예술이었다. 제일 밑에는 어른 키만 한 똥통항아리, 그위로 간장통, 된장통, 고추장통이 올라갔다. 그 끝은 어른키 두 배였다. 옆으로는 요강, 젓갈통, 막걸리통, 떡시루통, 콩나물 통등 작은 통을 올려 노았다. 마치 항아리 진열장 같았다. 왜소한 지게꾼은 짝대기는 왼손, 오른쪽 무릎을 고정한 다음 무게 중심을 이용하여 왼발과 등에 힘을 주어 지게를 뿔껑 들어 올린다. 다음은 짝대기를 틍태 밑에 집어넣어 발란스를 조절하면서 이동한다. 흔들거리다가 중심을 못 잡으면 와장창 항아리가 깨질 수 있다. 한 달 일당이 날아갈 수 있다. 노련하고 왜소한 지게꾼은 세월의 무게처럼 얼굴에 깊은 주름이 많았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밸런스를 잘 조절하였다. 지게는 최소의 힘으로 최대의 집을 질 수 있는 경이로운 운송도구였다.  6.25 전쟁 시에 길이 없는 고지까지 지게부대들이 폭탄을 옮겨 많은 공을 세웠다고 하였다. 항아리를 굽고난 토굴 속에는 며칠은 뜨뜻한 훈기가 남아 있었다. 고사포 애들은 아궁이 속에 기어 들어가 놀이방을 만들었다. 쌈치기, 군기 치기, 구슬치기, 딱지치기등 그 속에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자연 황토찜질방이었다. 땀이 나고 놀다 지치면 그을린 숯으로 얼굴과 온몸이 시꺼먼 오소리가 되어 기어 나왔다. 천연 숯 효과를 톡톡히 본 것이다. 고사포 친구들이 건강한 이유를 알았다.     

고사포는 행정구역상 운산리에 속하는 조그만 동네지만 면적과 인구는 운산리보다 훨씬 큰 마을이었다. 항아리를 생산하는 토굴은 담촌이고 흙을 퍼오는 곳은 노루목과 가난골 사이 언덕 서낭댕이였다. 항아리를 만들기 위해서 좋은 흙은 필수이고 땔나무가 풍부하고 운반할 수 있는 교통이 좋아야 한다. 장작 중에서도 숯이 덜 생기고 높은 온도를 낼 수 있는 소나무를 선호했다. 고사포는 이 세 가지를 갖춘 최적의 입지조건을 갖추었다. 항아리는 가까운 부두 성천을 통하는 바닷길도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성천도 고사포에 속해 있었다. 서낭댕이 흙은 곱고 미세하여 고온에 견디어 단단한 질그릇이 되었다. 대장간은 쇠를 불과 물의 성질을 이용하여 단단하게 만들었고 항아리는 흙을 불과 물의 조화로 만들었다. 물은 아래로 흐르는 성질이고 불은 위로 타오르는 성질을 잘 이용하여 옛 선조들은 쇠와 옹기의 예술 작품을 만들었다. 항아리는 미세한 구멍으로 숨을 쉰다고 하였다. 음식이 변질이 안되고 오래 보관할 수 있다고 한다. 옹기그릇은 한민족의 서민의 발효 음식과 함께 발전해 왔다. 김치, 젓갈, 고추장, 된장 모두 항아리에 오래 보관하여 발효시킬 수 있었다. 옹기그릇은 깨지지 않으면 반영구적이다.  인간과 자연환경에게도 전혀 피해를 주지 않는다.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 반면 플라스틱 용기는 열에 약하며 환경호르몬 방출로 문제가 많다. 흙속에 들어가도 300년 동안 썩지 않는 물질이다. 옹기그릇은 이러한 좋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무겁고 다루기 어려워 플라스틱 용기와 냉장고에 밀려 일반 가정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다. 변산의 옹기 기술은 전수자도 계승자도 사라졌다.     

변산에서 원조 옹기 굽는 곳은 지동리 옹기골(일명 띠빠동)이었다. 지금은 흔적만 남았고 고사포에서는 7080년대까지 생산을 하였다. 띠빠동은 잔디를 뙤라고 하는 사투리에서 지역이름이 나왔다. 이곳은 옹기보다 원래 잔디가 많아 묘지를 쓸 때 뙤빠동에서 잔디를 많이 재취해 갔다.           

28. 전기 들어오는 날 

국민학교 등굣길은 멀기만 하였다. 무슨 공사인지 모르지만 신장로를 따라 100m마다 구덩이를 파기 시작하였다. 길이는 수십 km가 되었다. 호기심에 구덩이를 구다 보았다. 사람 키보다 깊었다. 구덩이에는 뱀도 있었고 개구리도 있었다. 부안에서 전깃줄을 잇는 철롱대를 세워야 하는 구덩이라 했다. 변산에 머지 안아 전기가 들어온다. 마침내 구덩이 공사가 끝나고  전봇대를 세우고 전깃줄을 팽팽하게 늘리는 공사를 마쳤다. 1972년 변산국민학교 가을 운동회가 있는 날이었다. 마을의 큰 잔치였다. 운동회는 큰 행사이지만 오늘은 역사에 남길만한 더 큰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해는 채석강 쪽으로 기울면서 어둠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순간에 요란한 폭죽과 함께 운동장에 환한 불이 들어왔다. 생전 처음 접해보는 불이였다. 변산국민학교 운동장에서는 국회의원 이병옥 국회의원(무임소장관)이 참석하여 축하 기념사를 낭독하였다. 산내면 주민들은 태극기를 흔들어 축하하였다. 환호성이 변산반도에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호롱불에서 전기불로 바뀌고 산간벽지가 환하게 밝혀졌다. 완전 다른 세계였다.           

 할머니께서는 도깨비 불은 봤어도 이런 희한한 불은 70 평생 처음 보신다고 하셨다.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는 귀신같은 불이였다. 전봇대에서 초가집 지붕에 전선 인입선이 늘어 저 있다. 처마밑에는 두꺼비 집이 있었다. 스위치와 차단기가 있는 커버를 두꺼비 집이라고 불렀다. 그 속에서 작은 접시 같은 계량기가 돌고 있고  숫자는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겁이 덜컹 나셨다. 세간 살림에 벌써부터 전기세 걱정을 하셨다. 계량기 돌아가는 속도를 늦추기 위해 60와트 전구를 모두 5와트로 바꾸었다.

    그래도 호롱불보다 밝았다. 호롱불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밤을 밝혔다. 이제 방가운데 자리 잡고 식구들과 애환이 깃든 등잔대와 호롱불과 이별을 하여야 한다. 하지만 버리기는 너무 아까운 정든 물건이다. 집에 골동품이 되었다. 언젠가 필요할지 몰라 잘 닦아서 창고에 보관하였다.      

호롱불과 함께 방에서 사라진 것이 요강(소변통)이다. 또망(화장실)은 마당을 지나 음침한 구석에 있었다. 한밤중 대나무 숲에서 바람과 함께 들려오는 사그락 소리는 귀신 신나락 까먹는 소리라 하였다. 더듬더듬 찾아가서 한밤중에 일을 보려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발을 잘못 디뎌 똥통에 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한밤중에는 요강이 더 친숙하게 되었다. 도깨비불을 직접 봤다는 동네 어르신들의 증언이 있었다. 헛것을 본 것인지 정말 귀신을 본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전기가 들어오면서 동네에 얼씬거리는 귀신은 모두 사라졌다. 대항리에 월남전에 참가하신 아재(삼촌)가 계셨다. 월남에서 미군 탱크를 몰고 다니셨다고 한다. 일치감치 전쟁터에서 왕복동 내연기관 원리를 습득하셨다.  몸에서 항상 석유냄새가 풍기어 우리는 세고(석유) 아재로 불렀다. 겨울철 발동기 시동이 안 걸리면 세고통에서 고무호스를 쪽 ~ 빤다. 몇 모금 입에 들어가도 그냥 마셔 버린다. 입속에 충치와 뱃속에 기생충이 죽는다고 했다. 효과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세고아재는 충치도 없고 회충도 없었다. 가솔린인지, 디젤인지, 휘발유인지 맛을 보고 구별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세고 아저씨뿐이었다. 일치감치 서울도 갔다 오신 현대인이고 문명인이었다. 교류전기도 잘 아셔서 계량기를 통하지 안 하고 도둑전기를 사용하는 것도 알았다. 나중에 발각이 되어 수십 배의 벌금을 물었다.     

배터리를 이용하여 냇가에서 물고기도 잘 잡았다. 아재를 따라가 배터리 충전한다고 자전거에 붙어있는 소형 발전기를 돌리기 위해서 빈 자전거를 3시간 동안 쎗바닥이 나올 정도로 힘 있게 돌렸다. 대가로 손바닥만 한 붕어 다섯 마리를 얻었다. 배터리로 재미를 보던 세고아재는 욕심을 부렸다.      

세고아재는 전봇대에서 냇가까지 고압전기를 이용하면 큰 물고기도 잡을 수 있겠다는 발상을 하였다. 날씨 좋은 날 드디어 실행으로 옮겼다. 나는 시키는 데로 전선을 잡아당기는 일을 맡았다. 전선은 군용 통신케이블 삐삐선(PP Cable)을 이용하였다. 해안가 전투경찰이 사용하고 버린 전선이었다. 대나무 끝에 삼각대를 만들어 깊은 물속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팔뚝만 한 가물치가 꼼작도 하지 않고 떠 올라왔다. 세고아재가 뜰채로 물고기를 뜨는 순간 악~ 소리를 내면서 물속에서 개구리처럼 쭉 뻗어 버렸다. 물고기와 함께 감전이 되었다. 나는 위험을 감지하고 대나무 삼각대를 순식간에 들어 올렸다. 세고아재는 아무 일도 없고, 거짓말처럼 다시 일어났다. 220 볼트 고압전기는 정말 위험하였다. 순식간에 세고아재가 저세상으로 갈 뻔했다. 이일로 세고아재는 석유도 마시지 않았고 전기로 고기를 잡는 무모한 일은 하지 않았다. 세고 아재의 무례한 행동은 입소문을 타고 변산반도에 널리 퍼졌다. 무지한 시골에서 누전과 감전사고가 잇따르고 있었다. 세고아재는 몸소 체험학습을 통한 얻은 지식으로 전기 안전교육을 널리 알려주었다.          

29. 흑백 tv

   전기가 들어오면서 변산면에 최초로 흑백 티브이가 들어왔다. 지서리 광진이네 집이었다. 광진이는 영화관 사장이 된 것처럼 목에 힘을 주고 다녔다. 조그만 박스 속에서 정말로 사람들이 모여서 노래하고, 춤추고, 쇼를 한다고 말로만 들었다. 그런 신비의 TV를  보기 위해 친구들이 광진이 문 앞에 서성거리고 있었다. 평상시 광진이와 친하지 않던 인구와 형규는 제외되었다. TV 한번 보려면 광진이 한테 아부하고 구걸해서 선택을 받아 합격을 해야 겨우 대문을 통과하여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필름이 자주 끊기는 부안읍내 동양극장보다 선명하고 재미가 있었다.

    이제 돈을 모아 극장에 갈 필요가 없었다. 머지 안아 부안에 있는 동양극장과 제일극장이 문을 닫을지도 몰랐다. 여름철 마당에서 옹기종기 모여서 모기를 쫓아가며 전설의 고향을 보고 있으면 등골이 오싹하여 어떤 납량특집 영화보다 더 감동을 주었다. 구구단도 못 외우고 학교 공부는 꼴찌인 지동리 장미숙이는 전 방송국 시간대 프로그램을 모두 외우고 있었다. 여로, 꽃피는 팔도강산, 김일의 박치기, 배삼룡과 웃으면 복이 와요, 타잔, 수사반장, 전원일기, 쇼쇼쇼, 주말의 명화~~~

    대한민국 70년대는 필리핀과 북한보다 국민소득이 낮고 못 살았다. 한국축구는 버마(미얀마)나 태국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어쩌다 태국을 이겨 호주나 이란과 결승 경기라도 하면 TV가 있는 집은 그때만큼은 안방이던 마당이던 다 개방해 주었다. 경기를 보면서 변산반도가 떠나갈 듯 응원하였다. 그 열기는 월드컵 운동장보다 더 뜨거웠다.

   살기 힘든 가난한 농촌에 흑백 티브이한대는 온 동네에 감동을 주어 눈물과 웃음 그리고 행복을 한 보따리 선사해 줬다. 동네마다 생선가시 같은 안테나가 지붕 위에 하나 둘 설치되었다. 바람불거나 비 오는 날이면 틀어진 안테나를 이리저리 돌려서 티브이 화면을 바로 잡았다. 화면은 열 수 있는 자바라 문이 있었고 열쇠로 잠글 수 있었다. 70년대만 해도 변산에서 흑백 TV는 제산목록 1호였다.          

30. 변산해수욕장 겨울바다

    겨울이 되면 변산해수욕장은 더욱 썰렁하다. 모두가 떠난 폐광촌과 같았다. 부안 읍내에서 1시간 이상 꼬불꼬불한 비포장 도로를 달려야 도달할 수 있는 산간벽지였다. 자동차는 거의 왕래가 없고 완행버스인 안전여객과 전북여객이 번갈아 가며 하루에 두어 번 왔다 갔다 한다. 노루목에서 곱고 하얀 모래를 퍼 날라는 도락구(truck 트럭, 일본발음)가 신장로를 흙먼지를 내면서 달리고 있다. 노루목의 모래는 건축용 모래로 최고의 품질로 평가받아 건축용으로 각광을 받고 있었다. 당시는 노루목은 해수욕장이 아닌 산업용 모래 채취하는 장소였다. 격포 채석강과 수락동 바닷가는 얼씬도 못하였다. 무장공비 10명을 소탕하였다. 그때는 관광지가 아닌 비무장지대와 같았다.     

 변산 해수욕장은 임시로 지은 허름한 집들은 세찬 겨울바람에 반쯤 날려 보냈다. 여름의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불빛도 어둠으로 변했다. "조개껍질 묶어 그녀에 목에 걸고 물가에 마주 앉아 밤새 속삭이네"  음악과 함께 광란의 춤도 고요한 아침으로 바뀌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비던 식당이나 숙박업도 간판이 떨어져 덩그러니 덜렁거리고 있었다. 산등선에 지어진 임시 디젤 발전소도 문을 닫아 전기와 수도도 끊긴 지 오래되었다. 철롱대의 전깃줄은 끊어져 칡넝쿨처럼 엉켜있었다. 전쟁터에 폭격을 맞은 마을과 같았다. 확 트인 백사장과 바다는 정적만이 맴돌고 있다. 아름다운 낙조도 저녁이 되면 무서움이 엄습해 온다. 귀신처럼 소름 돋는 여자 울음소리도 들렸다. 고양이 울음소리였다. 들 고양이가 빈집의 주인이 되었다.          

  붉은 노을이 지고 있는 텅 빈 바닷가에 이상한 물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얀 물거품이 일고 있었다. 큰 파도는 아니지만 바람에 날리는 해무 같기도 하였다. 너무 신기하여 가까이 가봤다. 하얀 소복을 입고 머리를 풀고 춤을 추고 있었다.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바닷바람에 휘날리는 머리는 휩사 전설의 고향에서 나오는 귀신과도 같았다. 춤을 추다가 주문도 외우고 있었다. 귀신이 아닌 사람이라고 직감하였다. 안도의 숨을 쉬었다. 무당이었다. 굿을 하고 있었다. 한여름에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넋을 건져 한을 풀어주는 무속신앙이었다. 영혼을 달래주어 집으로 모셔와 제를 지내어 승천시키는 굿이었다. 무당 옆에 40대로 보이는 여자 한 사람이 울고 있었다. 한 여름에 바다에서 아들을 잃었다. 옆에는 그릇에 쌀이 반쯤 담겨있었다. 그릇은 죽은 사람이 사용했던 것이다. 쌀이 움직이거나 바람에 머리카락이라도 날아와 그릇에 담기면 혼이 들어왔다고 한다. 70년경 바닷가나 강가에서 익사 사고가 많았다. 바닷가에서 넋건지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해수욕장 소나무 숲과 모래밭에는  으스스한 소설 같은 이야기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31. 쌈치기

    변산해수욕장 여름에는 사건사고와 도박이 성행하면서 소나무 숲에는 돈도 넘쳐났다. 그 당시는 은행도 멀었고 카드도 없었고 오직 현금으로 거래가 되었다. 지폐보다 동전 거래가 많았다. 모래사장에 피서객이나 장사꾼이 흘리거나 잃어버린 동전들도 많았다. 겨울철에 사람들이 떠난 빈 곳에 회오리바람이 불면 모래는 날아가고 쇠붙이와 동전은 남는다. 금속 탐지기기 필요 없었다. 시계와 귀금속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바람의 혜택이다. 매서운 바람이 부는 등굣길은 무섭기도 하지만 노다지 캐는 날이다. 바다에서 물고기 길목을 잘 아는 어부처럼 우리는 사람이 몰렸던 곳을 정확히 기억했다. 광부가 광맥을 찾듯 원주민에게 주어진 특혜이고 노하우다. 호주머니에 동전이 수북해지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등교시간을 훌쩍 넘겨 버릴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은 학교는 공치는 날이다. 지각했다고 두들겨 맞는 것보다 결석하는 게 차라리 낫다. 선생님은 장거리 통학하면서 날씨 탓도 있지만 농번기에 결석하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라 확인도 안 했다. 전화도 없어 확인할 수단이 없다. 돈을 줍다가 쓸만한 빈집을 찾아 들어갔다. 지붕이 제법 튼튼하여 바람에 날아가지 않았다. 비를 피할 수 있는 집이었다. 독립투사처럼 상해 임시 정부를 비밀리 결성하였다. 광맥도 지키고 돈도 많이 벌어 부자가 되기로 결의를 했다. 피는 마시지 않았지만 모래밭에서 도원결의를 맺었다. 어머니가 싸준 밴또도 맛있게 먹어치웠다. 빈집에 들어가 서로 주어온 동전을 확인했다. 동전은 1원, 5원, 500 환, 50원, 100원 5종류다. 합치면 수백 개가 된다. 짜장면 한 그릇에 300원 했다. 모래밭에서 검은돈이 나오는 곳은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변산해수욕장뿐이다. 이 사업이 널리 알려지면 대기업에서 금속탐지기로 샅샅이 뒤진다. 우리의 밥줄이 끊긴다. 모래밭에서 유골이 나오는 리스크만 빼면 투자금 없이 노다지를 캐는 사업이다. 알고 있는 사람은 대항리에 60년생 쥐새끼들이었다.     

어른들보다 많은 동전을 취급하였다. 10원짜리 동전 치기는 시시한 게임이었다. 빈집의 응접실에서 봉구가 먼저 쌈치기를 제안한다. 일종의 도박이다. 그렇다고 타짜처럼 남을 속이고 짜고 치는 도박은 아니다. 동전을 쥐고 흔들면 짤짤 소리가 난다. 그래서 일명 짤짤이라고도 한다. 홀짝게임은 2 배수 홀짝만 맞추는 게임이고, 쌈치기는 3 치기에서 나왔다. 잡는 쪽(선수)의 주먹 속에 동전의 숫자를 3으로 나눠 남는 것을 맞추는 게임이다. 남는 게 하나면 ‘아찌’, 두 개면 ‘두비’, 세 개면 ‘쌈’이 된다. 셋 중에 찍어야 한다. 확률은 삼 분의 일이다. 벳팅 한 만큼 잃거나 딴다. 못 찍으면 전부 선수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동전의 녹도 벗겨지고 손바닥은 검게 된다. 때가 껴 손등이 거북이 등처럼 두껍다. 짝짝 갈라진 사이로 피가 보이지만 아랑 곳하지 않는다. 고수가 되면 동전 들어 있는 주먹을 폈다 오므렸다 두어 번 하면 아찌, 두비, 쌈을 정확히 알 수 있다. 경지에 오르면 상대방 손에 든 동전도 소리만 듣고 정확하게 알아맞힌다. 도박은 하교 시간까지 계속된다. 쌈치기 하다 빈털터리가 되기도 한다. 잠깐 섭섭하지만 모래밭에 광맥을 한번 뒤지면 된다. 절망할 필요는 없었다. 고민해야 되는 것은 새까맣게 녹슨 많은 동전을 어떻게 안전하게 보관하는 방법이다. 신발주머니에 쏟아부었더니 묵직하였다. 신발주머니는 금고이며 보물단지였다. 철저하게 위장된 신발주머니 었다. 외양간에 여물통 옆에 보관하였다. 우리 집 제산 1호가 외양간에 있는 소다. 편하게 누워서 아구를 틀고 있었다. 보물단지를 보더니 큰 눈만 깜빡깜빡하였다.

    봉구는 검게 녹슨 동전을 반짝반짝 빚이 나는 새 돈을 만드는 기술을 갖고 있었다. 월남 갔다 온 세고아재가 알려 줬다. 우선 검게 녹슨 동전을 소금과 식초에 담갔다가 시간이 지난 후 헝겊으로 닦아 낸다. 여물 쑨 아궁이에서 제를 꺼내어 땅에 놓고 발로 밟아 문지르면 거짓말처럼 은행에서 갓 나온 동전처럼 눈이 부실정도로 빛이 났다.     

   해수욕장 주위는 가난한 동네이다. 대항리, 마웅개, 자미동은  어촌도 농촌도 산촌도 아닌 어중충한 마을이었다. 여름한철 해수욕장에 조개 캐어 팔고, 옥수수나 체소를 팔아 겨우 현금을 만질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국민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학교 진학하는 것은 엄두를 못 내었다. 대부분 중학교는 포기해야 했다. 산에서 나무나 하고 여름에 해수욕장에서 아이스케키나 팔면서 집안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그러나 앞길이 총망한 소년들이었다. 신발주머니를 털어서 중학교 입학금으로 사용하자고 입을 맞추었다. 부모님께는 죄는 짓지 안 했지만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많은 동전을 내놓았다. 내 인생에서 제일 잘한 선택이었다. 해수욕장 모래밭과 신발주머니 덕분에 모두 중학교 진학을 하게 되었다.          

32. 변산해수욕장 지금은

     지금은 부안에서 변산해수욕장까지 20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고속도로 같은 4차선 도로가 격포까지 뚫려있다. 국립공원으로 승격이 되어 4계절 모두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해안가 무장공비도 사라지고 해안초소도 사라졌다. 전투경찰 순찰통로는 변산반도 둘레길로 단장이 되었다. 경관은 제주도 올레길보다 더 아름답다. 모래밭 동전도 사라지고 모두 카드로 거래가 된다. 귀신 나오는 판잣집은 고급 펜션이나 호텔로 새로 탄생하였다. 해골 나왔던 소나무 숲도 더 울창하였다. 숲에서는 아름다운 미녀가 매년 탄생한다.  미스변산선발대회가 해마다 개최된다.           

33. 채변봉투

     21세기 최첨단 과학과 의학세계에서 평균수명 100세 시대가 머지않았다. 병도 아닌 바이러스가 퍼지는 감기 비슷한 하찮은 코로나로 인하여 세계가 호들갑을 떨었고 대한민국 문화가 바뀌었다. 7080년대 우리 어릴 적에도 코로나와 비슷한 전염병이 돌았다. 이름도 비슷하다. ‘코로나’ 아닌, ‘콜레라’다. 이 전염병은 오염된 물과 채소 그리고 주위에 감염된 어패류에서 옮기는 병이다. 대부분 시골에서는 수돗물이 아닌 우물물을 마셨다. 

     전염병이 돌면 제일 먼저 우물물을 소독해야 한다고 정부에서 우물소독약을 배급하여 의무적으로 공동 우물물에 쏟아부었다. 소독약 성분이 염소인지 염산인지도 모른다. 희석시켜야 할 양도 비율도 모른다. 제일 중요한 인체에 영향이 있는지도 모른다. 채소는 농약 없이 거름만 주어 키웠다. 거름에는 화학비료가 아닌 가축똥이나 사람똥을 섞어 발효시킨 유기질 퇴비이다. 인분을 준 배추나 무도 기생충 투성이었다. 가난했던 국민학교 시절은 비 위생적인 음식으로 회충, 요충, 십이지장충이 뱃속에 한 주먹씩 들어 있었다. 먹는 음식도 부실했지만 그것마저 기생충과 나누어 먹는 바람에 얼굴은  혈기가 없고 노랗게 떠 있는 친구들이 더러 있었다. 뱃속에 있는 기생충이 먹을 것이 없으면 밖으로 빠져나올 때도 있다. 회충약을 먹지 않았어도 하얀 굵은 국수 비슷한 것이 항문을 통하여 기어 나온다. 

   정부에서도 방관만 할 수 없기에 전국적으로 기생충 소탕 범국민 운동을 시행하였다.  1년에 두 번 보건소에서 채변 검사를 하여 기생충 약을 무료로 보급해 줬다. 그로 인하여 기생충은 많이 없어졌으나 채변 검사는 귀찮은 일이었다. 냄새 풍기는 푸세식 똥통에서 성냥개비로 비닐봉지에 퍼 담는 일은 여간 고역이 아니다. 등굣길을 멀기만 하다. 장난기 있는 어린애들이 책 보자기 속에서 터지기라도 한다면 난리가 나는 것이다. 숙제처럼 아침에 등교하자마자 제출하여야 한다. 변비가 있는 나는 제때에 똥이 나오지 않아 우리 집 강아지 똥을 넣어 간 적이 있다. 결과는 정확하였다. 사람에게 나오지 않는 기생충이 나왔다고 큰 병원에 가서 특수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한다. 겁이 덜컹 났다. 울며 겨자 먹기로, 개똥을 넣었다고 자수했다. 그날도 선생님에게 불이 나도록 손바닥을 맞았다.          

34. 간첩신고

    1970년경 국민학교 다닐 때다. 대항리에서 학교가 있는 면소제지까지는 10리가 넘는 비포장길이였다. 

기성회비도 내지 못하는 형편에 버스를 타고 통학하는 것은 사치였다. 어쩌다 소달구지라도 만나 태워주면 큰 행운이고 비가 오는 날 마음씨 좋은 운전기사를 만나면 공짜 버스를 탈 수 있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우리의 등하굣길은 계절과 날씨를 감안 그때마다 편리한 선택을 할 수 있었다. 꼬불꼬불 산길은 1km 정도 더 길지만 계절에 상관없이 인기가 좋았다. 이 길은 산골짜기 마을을 4개를 지나야 한다. 마웅개, 자미동, 옹기골, 지동리를 지나야 학교가 있는 지서리에 도착한다.  노랗게 익은 보리를 따다 바위 밑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살짝 구워서 양 손바닥으로 문지르면 껍질이 벗겨지고 파란 알맹이만 나온다. 이것도 우리에게는 별미였다. 손바닥이 검게 변하고 주둥이도 검은 고양이가 되었다. 겨울에는 추위를 피해 산기슭에서 모닥풀을 피워놓고 얼었던 손과 발을 녹이다가 예상 못하는 겨울 회오리바람에 산불은 내어 파출소에도 간 적도 있었다. 소년원에 갈뻔했다.           

며칠 후 파출소를 또 갔다. 이번에는 착한 일이다. 간첩신고를 하였다. 학교에서는 수상한 사람을 보면 신고하라고 귀에 따갑도록 교육을 받았다. "반공방첩"이라고 사망암 앞산에 크게 보였다. 반공방첩은 마을 수호신이 되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외치면서 무장공비에게 살해당한 이승복 군이 우리의 우상이 되어 학교마다 동상이 세워졌다.  한글을 띠기 전에 국민교육헌장을 무속인이 주술 외우듯 줄줄 외웠다. "우리는 민족중흥에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50년이 지났어도 다른 것은 못 외우더라도 국민교육헌장, 애국가 4절, 새마을노래만큼은 머릿속에 남아있다. 간첩신고 포상금은 500만 원이었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로또 1등 당첨금액이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수상한 사람을 신고해서 포상금을 받아 가난한 집 아들에서 부잣집 아들로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학교 가는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누렇게 익어 가는 보리밭에서 종달새가 울고 있었다. 책보를 어깨에 메고 팔을 돌리면서 노래를 불렀다.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내 꿈은 부자가 되는 것이다. 수상한 사람이 산타 할아버지처럼 나타나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간절히 바라고 기다리면 꿈은 이루어진다. 산길을 걷다가 정말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내 눈을 의심하였다. 나무가 우거진 숲 속에서 수상한 사람을 발견했다. 간첩일지 몰라 가까이가지 못했다. 긴장감이 돌았다. 나에게도 이런 행운이 올 줄 몰랐다.  자세히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다행히 서로 눈은 마주치지 안 했다. 그래도 안심할 수 없었다. 다른 곳으로 도망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제발 거기에 그대로 있길 바라면서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학교는 뒷전이고 산내지서에 헐레벌떡 도착하여 옹기골에 수상한 사람이 있다고 신고를 하였다. 옹기골, 큰골, 작은골은 빨치산이 기거하기 좋은 장소였다. 해골바위 밑에는 유골이 발견되어 사람들이 접근하지 않아 정글처럼 숲이 우거진 곳이다.      

변산반도는 바다와 산이 어울려 섬보다 더 섬 같은 아름다운 국립공원이다. 수려한 경치 뒤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있다. 6.25 전쟁 후 마지막 빨치산이 저항했던 곳이며, 튀어나온 반도는 무장공비가 상륙하기 적합한 장소였다. 격포 채석강에는 60~70년대에 간첩들이 수시로 침투했던 곳이었다. 무장공비 소탕작전 때 쏘아 올린 대낮같이 밝은 조명탄을 경험했었다.      

산내 지서에서 간첩 신고를 받은 경찰은 바로 예비군과 전투경찰과 연합하여 비상경계태세로 전환하여 무장공비 소탕작전에 돌입하였다. 철모를 쓴 병력은 옹기골 골짜기를 사방으로 포위하여 좁혀 나갔다. 숲 속의 긴장은 고조되어가고 있었다. 집게손가락은 방아쇠를 잡고 있어 당기면 16발의 실탄이 자동으로 발사된다. 일촉즉발이다. 멧돼지라도 출몰하면 방아쇠는 당겨진다.  긴장의 시간은 짧게 자나 갔다. 한 발의 총탄 발사 없이 무장공비를 생포하였다. 숲 속에서 손을 든 사람은 나무꾼이었다. 띠빠동에 사는 친구 양영배 외삼촌이었다. 외삼촌은 사람들이 꺼리는 해골바위에서 나무를 하다가 졸지에 간첩으로 몰리게 되었다. 

    다음날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에서 나는 영웅이 되었다. 간첩이 아니라 로또는 날아갔지만 반공정신이 투철하다고 부안경찰서장에게 상장을 수여받았다. 상품으로 노트 한 묶음과 연필 한 타스를 탔다. 상장은 가족사진과 함께 안방에 걸어 놨다. 애국열사 이승복이가 된 기분이었다.          

35. 해방조개

     70년대의 변산해수욕장은 물 반 사람 반이었다. 서해안에서 유일하게 물에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대천과 변산해수욕장뿐이었다.  1933년 일제에 의해 개방된 국내 최초 해수욕장이었다. 하루 20만 명이 몰렸다는 기록도 있다. 상상할 수 없는 인파였다. 그 당시 부안군 전체 인구가 16만 명이고 2024년 현재 인구는 5만 명으로 감소되었다.  해수욕장 개장은 무장공비들의 침투로 인하여 지역과 시기가 제한이 되어있었다. 전국의 해안가는 전투경찰이나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로 인하여 극히 일부 해수욕장만 개장하여 피서객이 몰려왔다. 여름이 되면 변산해수욕장 주차장이 만차가 되었다. 비포장 도로 인 해창까지 차량이 줄을 이어졌다. 변산은 이름이난  해수욕장으로 전국에서 몰려왔다. 강남과 동서울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변산해수욕장까지 직통버스가 운항하고 있었다.     

납량특집 공개방송하는 날은 해안은 콩나물시루였다. TV는 없고 라디오만 듣던 시절이었다. 좋아하는 유명 가수들을 딱 한번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전북가수 송대관의 "쨍하고 해 뜰 날" 이 바다에 울려 퍼지면 비키니를 입은 남녀관중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방송이 끝나면 야구장에 관객 빠지듯 하나 둘 사람들이 빠져나간다. 그렇게 해변은 8월 중순이 되면 해수욕장은 텅 빈 운동장이 되어 버린다.      

가을이 되면 수많은 인파들이 남기고 간 발자국 마저 파도에 씻겨 흔적도 없다. 여름의 열기와는 대조적이다. 동네 주민 한두 사람 지나갈 뿐 인적이 끊긴 지 오래되었다. 해안 초소에서는 전투경찰이  M1 소총과 망원경으로 해얀을 경비하고 있었다. 밤이 되면 써치라트로 해안가를 불을 밝혔다. 해수욕장의 먼바다는 고운 모래 덕분에 썰물이 되면 소라, 해삼, 배꼽(골뱅이) 각종 조개들이 갯벌에 널려있었다. 조개들이 몰려오는 이유는 여름의 사람의 온기인지 몰랐다. 사람의 냄새를 제일 좋아하는 고기는 상어이고 다음에 갈치 그리고 소라와 해삼이라 한다. 물 반 사람반인 갯벌은 물 반 조개 반으로 바뀌었다. 갈미조개, 개량조개, 바보조개, 삼베조개, 노랑조개, 명주조개, 새조개, 해방조개가 수도 없이 묻혀있었다. 사실 조개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조개이다. 조개의 혀가 새의 부리를 닮았다고 해서 새조개라고 불리는 지방도 있다. 이 조개는 전국 갯벌에 분포가 되어 있어 이름도 지역마다 다 다르다. 변산에는 는 해방조개라고  불렀다. 일제강점기에서 해방 직후 가난하고 먹을 것이 부족한 마을 주민에게 먹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그래서 조개 이름을 해방 조개라고 불렀다.     

갯벌에 씨를 뿌려 놓은 것처럼 버글버글 하였다. 네발 달린 갈쿠리로 한번 긁을 때마다 수십 개의 조개가 뻘 위로 솟아 올라온다. 한 시간만 긁어도 한 푸데를 캘 수 있다. 케도 케도 조개는 줄어들지 않는다. 산란기에 닭이 알을 낳듯 계속에서 뻘 속에서 생산이 된다. 보름간격으로 돌아오는 사리 때는 해방조개를 캐러 오는 마을사람들이 몰려와 바닷가 갯벌을 진을 치고 있었다. 운산리, 지동리, 지서리, 지남리 주민들은 집안식구들이 동원되어 리어까(REAR CAR 후방차, 일본식 발음)를 끌고 와 몇 푸데를 긁어갔다. 전화기도 없던 시절인데 산너머까지 소문이 돌아 내변산 중계 주민들도 몰려왔다. 해방조개와 더불어 변산의 바지락도 맛이 있다. 해방조개는 영글기 전에 보드랍고, 바지락은 통통하게 영글어야 국물도 맛있고 씹는 촉감이 좋았다. 껍질을 까서 날것으로 무와 초장에 묻혀 먹으면 최고의 반찬이었다. 말려서 부안장에 팔기도 하고 도시락 반찬으로 인기가 좋았다. 풍부한 영양과 단백질을 제공하여 주었다. 해감이 잘 되지 않아 뻘이 서그럭 거려도 쫄깃한 맛으로 그냥 넘긴다. 아무리 먹어도 배탈이 난적이 없었다. 의학적인 근거는 없지만 할아버지께서 뻘 속에는 철분과 칼슘이 풍부하다면서 서그럭 거려도 괜찮다고 하셨다.  변산반도 주민이 머리가 좋고 뼈가 튼튼하여 건강한 이유가 뻘 속의 해방조개 덕분이라고 생각하였다.               

36. 내 고향 대항리 

   내가 살던 고향은 변산면 대항리다. 변산해수욕장과 바닷가를 경계로 첫 번째 동네다.

행정구역상 새만금방조제 전시관이 있는 서두터를 시작으로 묵정리, 조개미(합구), 해수욕장 방포(마웅개), 자미동이 모두 대항리에 포함이 되어있다. 새만금 세계 스카우트 잼버리 시작하는 동네이다. 

   대항(大港)이라서 먼 옛날 혹시라도 큰 항구가 있었는지 나름 조사해 봤지만, 유례는 없고 큰 항구가 아닌 다른 한자 대항(大項)이다. 그도 그럴 것이 변산해수욕장과 마찬가지로 밀물과 썰물 사이가 거의 1km나 되어 수심이 나올 만한 바다가 없다. 기껏해야 1톤짜리 어선을 댈 수 있는 바닷가다.

  대항리는 앞에는 비안도가 보이고 맑은 날은 멀리 위도와 선유도까지 보이는 곳이다. 영화"변산" 촬영한 곳이다. 주인공 소녀는 작가이며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마지막 엔딩 부분도 변산 국민학교 강당에서 촬영하였다. 영화 줄거리와 주인공이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보는 도중 몇 번이나 울었다.

   대항리 우리 산밭에 올라가면 비안도와 고군산 열도가 훤히 보인다. 그곳에서 할아버지께서 오래전에 예언을 하고 돌아가셨다. 먼바다에 떠있는 고군산열도를 가리키며 내 생전에는 볼 수 없지만 너희 생전에 바다가 육지가 될 날이 올 것이다. 예언은 적중하셨다. 군산에서 대항리까지 뚝이 생겼다. 새만금 방조제다. 

  동네 앞에는 할매 바위와 검은 바위가 있다. 정확히 네이버 지도를 확대해 보면 이름도 없는 조그만 바위섬이 좁쌀 두 개로 표기돼 있다 양 섬 거리는 1km쯤 된다. 실제 거리를 재보진 않았지만 사람마다 느낌이 다르다. 그 사이 펄에는 호주머니에 소금 한 주먹 갖고 가서 똥그란 구멍이 아닌 타원형 구멍에 살짝 뿌리면 죽합이 기어 나온다. 잽싸게 삽이나 호멩이로 파면 잡을 수 있다. 똥그란 구멍은 개불 구멍이다. 죽합은 모양이 대나무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사람들은 맛조개라 한다. 어릴 때 잡았던 조개는 대나무 한 마디, 20cm나 됐다. 맛조개와 죽합은 생긴 것만 비슷하지 크기로는 다른 종이다.

   할매바위와 검은 바위는 변산해수욕장이나 대항리에서 고개만 살짝 돌리면 볼 수 있는 바위섬이다. 할머니바위는 밀물과 썰물 조금때와 사리 때를 불문하고 그냥 떠 있는 바위섬이고 검은 바위는 물때에 맞추어 나타났다 사라지는 신비의 바위섬이다. 실제로 검은 바위는 무서운 곳이다.     

해수욕장에서 물놀이 중 익사하면 해류를 따라 검은 바위까지 떠밀려 온다. 그 바위틈에서 시체가 발견된 적이 있어 대항리 사람은 송장 바위라고도 불렀다. 어릴 때 우리 할머니한테 거기에 물귀신이 살고 있으니 절대 가지 말라고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익사 사고도 자주 일어나는 곳이다. 할머니는 국민학교도 졸업 못했지만 밀물과 썰물 시간대를 정확히 계산해서 알고 계시고, 대항리 앞바다의 해류와 암초등을 손바닥 보듯 다 알고 계셨다. 큰 항구에는 도선사가 있지만 대항리 항구에는 우리 할머니가 계신다. 물귀신 나오는 바위는 해마다 계속해서 사망사고가 난다. 할머니는 귀신도 보이는 것 같다. 꺼문바위에는 조개류도 많이 살지만, 해초류가 많아 검게 된 것 같았다.

잘 찾아보면 파래와 톳, 쎄미, 지초문. 꼬시래기등 해초들이 바위에 붙어 파도에 펄럭이고 있었다. 작은 돌멩이를 들어 올리면 방칼기(꽃게종류이나 집게발이 유난히 큼), 똘짱기(돌게), 다시락(다슬기), 고동, 소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잘못하다 방칼기에 물렸다 하면 손가락 하나는 잘라지는 아픔을 견뎌야 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쇠벵이(멸치와 벤딩이 중간 어종) 떼를 발견하면 마을 사람 누구든 첫 발견자는 웃통을 벗고 바위 위에서 돌리면서 “호야~호야~” 신호를 보냈다. 그러면 밭일하다가도 모두 맨발로 뛰어가 바닷가에 보관된 삼마이 그물을 짊어지고 바다에 나갔다. 그물을 펼쳐 잡아 땡 기면 대한통운 한 트럭만큼 올라올 때가 있었다. 모두 곰소 젓갈시장으로 직행했다. 남는 것은 대항리 바닷가 바위에 널어 놓았다. 멸치 대용으로 말려 먹고 젓 담아 먹었다. 가끔은 전와와 함께 잡혀 생것은 회로 버무려 먹고 호박 넣어 매운탕 해 먹었다. 

대항리, 합구, 사망암, 노리목. 성천 등  주로 바닷가에 마을 사람만 기억할 뿐 사라진 물고기다. 새만금 방조제로 인하여 사라진 어종이다. 

쇠벵이 만큼 또 많이 잡았던 고개미(작은 새우종류)도 한 소쿠리씩 잡아 올렸다. 고개미는 더위가 한풀 꺾이는 해수욕장이 패장 될 때쯤 찬 바닷물과 함께 대항리, 합구, 노리목등 갯벌로 몰려 들어왔다. 이럴 때면 아무리 들일이 바빠도 고개미 떼를 놓칠 수 없다. 대나무와 모기장을 이용해 만든 그물을 밀고 다닌다. 건져 올려 식초를 넣고 매운 고추장과 버무려 입에 넣으면 살살 녹는다. 또한, 젓갈로 담고, 김장할 때도 여지없이 고개미 젓을 넣는다.

대항리 갯벌은 예로부터 동죽, 바지락, 맛등이 풍부하여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살았던 것으로 추정이 되었다. 1967년경 대항리 패총이 발견이 된 것이다. 8000여 년 전 선사시대의 유적으로 빗살무늬토기가 발견이 되었다. 어릴 적에 조개 무덤에서 나오는 토기나 유물로 소꿉놀이 하였는데 그것이 선사시대 유물이라는 것이 믿어지지가 안는다.           

37. 쥐 잡기 운동

    내 초등학교 6학년 때쯤, 들에는 들쥐, 집에는 집쥐, 쥐들의 세상이었다. 얼마나 쥐가 많았으면 정부에서 쥐 잡기 운동이 무슨 국책사업처럼 전국 총동원령을 내렸다. 쥐꼬리를 학교 숙제인 것처럼 의무적으로 가져가야 했다.

쥐를 못 잡으면 쥐꼬리 비슷한 검정 고무줄을 쥐꼬리 크기에 맞춰 끊어갔다. 들켜서 배기택 선생님에게 손바닥을 쥐꼬리 가져오라는 숫자만큼 맞은 적이 있다. 쥐는 번식력이 엄청나게 강해 새끼를 10마리씩 한 달이면 몇 번을 낳는지 모른다.

시골에는 완전 쥐들 세상이었다. 밭두렁이나 논두렁에는 쥐구멍도 많았다. 쥐구멍인지 두더지 구멍인지 뱀 구멍인지 좌우지간 불쏘시개를 구멍에 넣고 불을 지피는 순간 서너 마리 쥐가 갑자기 튀어나와 겨울철 땔감용으로 준비해 둔 태금이네 나무 벼늘(나무를 쌓은 더미)로 뛰어들어가 버렸다. 털에 불이 붙은 쥐는 폭탄이나 마찬가지다. 나무 벼늘에서 자폭한 것이다. 일치감치 이슬람 자폭테러를 경험했다. 영문도 모르고 있는 사이 나무 벼늘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나오고 있었다. 친구들 몇몇이 진압하려고 했지만, 순식간에 붙은 불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119 소방대원도, 수돗물도 없다. 양동이로 가까운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퍼다가 불을 꺼 야는 데 마을 사람들 모두 동원되어 양동이 하나씩 들고 와 부었지만 꺼질 리 없다. 그렇게 태금이네 나무 벼늘이 순식간에 새까맣게 재로 변해 버렸다.     

그날도 안 죽을 만큼 아버지한테 두들겨 맞았다. 옆에서 엄니 그러신다. 감옥까지 갈뻔한 아들을 보고 집안 망신은 다 시키고. 속창아리가 없던가 쓸게 빠진 놈, 너갱이 빠진 놈, 지금까지 들어 보지도 못한 심한 욕을 하신다. 당신이 어렵게 낳은 자식한테 얼마나 분하셨으면 그랬을까. 그래도 태금이 아버님과는 이웃사촌처럼 지내는 사이라서 애들이 다 그럴 수 있다고 이해를 하신다. 변상 안 해도 된다는데 울 아버지 나무 몇 다발을 태금이 집에 가져다주시고 그날부터 아버지와 나는 나무를 하기 위해 산으로 올라가야 했다. 두 집 나무를 아버님 혼자 하시기에는 벅차 셨는지, 평소에 아들 한 테만큼은 가난과 지게를 물려주지 않으려는 확고한 신념도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내 과실로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미니 지게를 지어야만 했다. 아담하고 나에게 딱 맞는 지게였다. 6학년이지만 5km 먼 통학 거리를 맨날 뛰어다녀 다리는 튼튼하고 부모님한테 수시로 맞았기 때문에 몸은 단단하고 강건했다. 키도 다른 애들보다 약간은 컸다.

   아버지는 먼저 지게 운전 법을 알려 주셨다. 물건을 떨어지지 않도록 센터를 잘 맞추고 멜빵을 조절해 어깨에 멘 다음 양다리를 기마자세로 벌린 후 짝대기를 땅에 고정하고 힘을 주면서 일어나야 한다며 시범까지 보여 주셨다.

일어나자마자 중심을 잡아야지 그냥 넘어진다. 넘어지지 않으려면 동작 빠르게 지게 위쪽 구멍에 짝대기를 꼽아서 평형을 유지하며 걸어야 하고 힘이 어느 정도 들면 언덕에 받쳐놔야 다음에 일어날 때 힘이 덜 든다고 하셨다. 그렇게 해서 비록 6학년이지만 지게로 30kg은 거뜬히 지고 다녔다.

     짝데기는 없으면 안 될 보조 기구였다. 일어설 때 지렛대, 짊어지고 걷기 시작하면 밸런스 유지, 내려갈 땐 브레이크, 올라갈 땐 지팡이, 쉴 때는 지게를 세워놓은 상태에서 고정할 수 있는 파킹용 사이드 브레이크다.. 지게는 짝데기 없으면 아무런 쓸모없는 농기구다. 짝대기는 Y 형자로 잘 부러지지 않는 단단한 박달나무나 참나무가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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