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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사람에게 상처받고 사람에게 치유받는다.

민재 미첼 MJ Mitchell

28. 사람에게 상처받고 사람에게 치유받는다.


‘한국사람 없는 곳을 찾아왔어요’ 이곳에 사는 한인에게 왜 노바스코샤로 이민 왔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을 여러 번 만났다. 나의 경우는 시댁이 이곳이니 큰 고민 없이 이민 정착지로 이곳을 선택했지만 가족이 함께 이민을 오는 한인들에게는 정착지를 선택하는 일도 큰 고민이었을 것이다. 왜 ‘한인 없는 곳’이 정착지 선택에 중요한지 되물으면 대부분은 ‘영어 교육’ 때문이라고 답했다. 한인 없는 곳에서 더 빨리 영어가 늘 것 같다는 기대감에서였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로는 ‘한국 사람에 대한 피로감’ 때문이라고 했다. 교포 중에는 ‘한국사람들과 엮이고 싶지 않다’고 극단적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민을 꿈꾸거나 잠시나마 낯선 곳에서 살아보고 싶어 한다. 그들에게는 각기 다른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모두가 갖는 공통의 이유 중 하나는 ‘사람에 대한 실망, 권태, 피로감’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민은 새로운 사회관계, 인간관계의 시작을 뜻하기도 한다. 마치 삶을 ‘리셋 - 초기화’ 하듯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받은 사람이라면 더욱 간절하게 삶의 ‘리셋’을 꿈꾸며 이민을 계획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세상 어디엘 가도 사람이 산다. 그리고 세상 어디엘 가도 한국사람이 있다. 노바스코샤에도 수 천명의 한인들이 산다.

유학이나 단기 비자(워킹홀리데이)등의 유동인구로 인해서 정확하게 집계하기는 어렵지만 노바스코샤 한인회에서는 2018년 기준 약 3,000여 명의 한인이 살고 있다고 했다. 팬데믹으로 인해 한인 학생의 수가 다소 감소했겠지만 여전히 많은 이민자와 유학생과 그들의 가족이 노바스코샤에 살고 있다. 나처럼 결혼 이민으로 온 사람도 있고 유학을 왔다가 이곳에 정착한 사람도 있다. 학업, 취업, 사업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많은 한국 사람들이 이민을 온다. 그래서 여기서 만난 한인 친구들은 나이, 직업, 고향 등이 다양하다. 당연히 학연, 지연을 따질 수 없다. 그냥 ‘대한민국’ 사람이라서 처음 만나는 사이라도 반갑고 좋다.


나는 노바스코샤로 이사 오자마자 한인 마트에 들렀다가 상점 주인의 소개로 한인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한인회에 가입을 했다. 한인회에서는 이따금 출장 영사 업무에 대한 소식 등을 이메일로 알려주었다. 나는 한인회에 이름만 올렸을 뿐 특별한 관심도 없었고 기대하는 것도 없었다. 그러다가 한국에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시끌시끌할 즈음 한인회에서 날아온 이메일 한 통에 나는 큰 실망을 했고 당장 한인회에서 탈퇴하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이메일은 특정 정당의 후보를 지지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때는 나도 잠시 ‘한국 사람 없는 곳’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한국을 떠나면서 한국의 정치에 대한 관심도 끊었다. 아주 딱! 싹둑! 단호하게 관심을 끊었다. 대부분의 한국 국민이 그렇듯 나 역시 한국 정치에 대한 피로감이 어마어마하게 컸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이민을 가는 김에 지긋지긋한 정치 피로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게다가 한국을 떠나 사는 사람이 한국의 정치에 대해 감 놔라 배 놔라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정말 한동안은 한국 뉴스를 딱 끊고 살았다.

한적한 전원 동네 울프빌에서의 생활은 매일매일이 평화롭고 조용했다. 스님들이 도를 닦으러 조용한 산속으로 들어가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치열하게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들으면 비겁하다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세상일에 무심하기로 했고 그렇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한인회에서 보낸 한 통의 이메일 (특정 정당의 후보를 대통령으로 지지하라는)이 내 평화를 잠시 흔들었고 나는 한인회를 탈퇴하는 것으로 다시 평화를 회복했다.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서 세상으로부터 도망쳐야 한다는 것이 안타깝고 슬펐다. (요즘은 한국 뉴스 매일 봄)


이민 초기에 나와 같은 처지의 ‘결혼 이민자’들의 모임을 알게 되었고 제법 열심히 모임에 참여하기도 했었다. 캐네디언과 국제결혼을 한 공통점 때문에 쉽게 가까워졌고 자주 어울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니까 끼리끼리 모이는 소모임으로 쪼개졌다. 나는 사는 지역이 가까운 사람들과는 더 자주 만나니까 그럴 수 있다고 이해했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소모임들 간에는 서로 드러내 놓고 말하기 껄끄러운

미묘한 갈등이 있는 듯 보였다. 나는 사람 사는 세상은 다 그러려니 하고 무심하게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와는 전혀 갈등이나 감정 상할 일이 없다고 생각한 친구가 갑자기 나를 모르는 사람 취급하는 일이 생겼다. 점잖게 말하면 ‘안면몰수’였고 감정대로 말하면 ‘쌩까다’였다. 알고 보니 그녀와 친한 또 다른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소위 말하는 끼리끼리 모임으로 쪼개진 후 둘 사이는 더욱 가까워졌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런지 도통 이유를 알 수 없는 나는 그녀들에게 여러 번 연락을 시도했지만 여전히 아무 대답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 중 하나는 영어를 쓰면서 자신은 한국사람이 아니라고 했다고 전해 들었다.

그녀들은 우리 집에 수시로 놀러 와서 함께 밥을 해 먹을 정도로 가깝게 지냈던 사이였다. 그래서 나는 더욱 큰 충격을 받았다. 혹시 나도 모르는 실수를 했다면 얼마든지 사과할 의향도 있었고 오해가 있다면 오해를 풀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나에게 아무런 기회도 주지 않았다. 이일을 겪은 후 나는 한인을 사귀는 일에 더욱 소극적이 되었다. 같은 한국 사람이라고 해서 무작정 같은 편이라는 생각은 철없는 순수함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들과 나는 아무런 금전적 거래가 없어 다행이었지만 ‘하루아침에 연락을 끊고 잠적한 교포가 알고 보니 곗돈을 들고 도망갔다더라’ 하는 전 세계 한인들 사이에 전설처럼 떠도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얼마든지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었다.



흔히들 외국에 나가면 한국 사람을 더욱 조심하라고 한다. 이 말이 다 거짓말이었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이 아닌가 보다. 나는 실제로 한인에게 사기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약 15년 전에 밴쿠버섬에 놀러 갔을 때의 일이다. 그 당시 밴쿠버섬에는 한인들이 드물었고 한인마트는 구경도 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내가 두 번째로 밴쿠버섬에 갔을 때 코트니에 한인이 하는 마트가 생겼다. 정확히 한인마트라고 하기는 좀 뭐 했던 게 한국인을 상대로 하는 마트는 아니었다. 아무튼 마트를 운영하는 한인 사장님을 만났는데 처음 보는 나에게도 자신의 사기당한 이야기를 했었다. 마트 사장님은 토론토에서 한인에게 사기를 당한 후 ‘한인 없는’ 밴쿠버섬으로 이사를 왔다고 했다.

이민이라는 것이 누구에게는 쉬울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한국 사람에게는 인생을 건 모험과도 같은 일이다. 먼저 정착한 가까운 가족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정말 ‘맨땅에 헤딩’이라는 말이 꼭 맞다. 모든 것이 낯선 나라에서 부동산 계약, 취업, 사업 등이 다 막막할 것이다. 그래서 조력자의 도움이 필요한데, 사기꾼들은 주로 이런 조력자의 얼굴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같은 동포끼리 더욱 경계해야 하는 일이 슬프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악인은 소수이고 대부분의 한국 교포들은 근면하고 성실하며 정이 넘친다.

나는 팀벌리로 이사한 후부터 한인들과의 만남이 더욱 줄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개인 성향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나는 어렸을 때부터 ‘단짝’ 친구가 없었다. 지금도 연락하며 지내는 오랜 친구들이 있기는 하지만 늘 함께 붙어 다닐 정도의 단짝 친구는 없었다. 학창 시절에는 쉬는 시간에 친구와 함께 화장실도 가고 매점도 가고는 하는데, 나는 친구와 화장실 가는 게 귀찮았다. 그리고 쉬는 시간마다 매점에 갈 수 있을 만큼 용돈이 넉넉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나 스스로를 외톨이라고 느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천성이 혼자 잘 노는 사람이라 그런가 보았다. 나는 아주 가끔 친구들에게 연락하는 것이 익숙하고, 아주 가끔 연락해도 별로 서먹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나도 어제 헤어진 사람같이 오래전 감정 그대로다. 나의 오랜 친구들은 내가 하는 ‘띄엄띄엄’ 연락을 견뎌주고 반겨준 사람들이다. 그래서 더욱 소중하고 고맙다.

그렇다고 내게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느덧 10여 년이 넘는 이민 생활을 하다 보니 이곳에서도 좋은 친구가 생겼다. 그러나 다른 주에 사는 친구는 말할 것도 없고 같은 주에 살아도 자주 만나지는 못한다. 더구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비대면’이 일상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직접 만나는 기회가 더욱 줄어들었다. 나 같은 집순이들은 ‘비대면’이 편하기도 하지만 역시 수다는 만나서 떨어야 제맛이다. 그런 면에서 ‘비대면’은 불완전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이민자에게는 비대면이 한국과의 유일한 소통방법이기도 하다. 비대면이라도 소통할 수 있다면 감사하기만 하다.



장수의 비결을 연구하는 저명한 학자들은 ‘좋은 친구’를 장수의 비결 중 하나로 꼽는다. 친구도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고 한다. 나는 캐나다에 이민 오고부터 사람 관계가 단순해졌다. 캐나다의 라이프 스타일이 가족 중심인 데다가 동호회 같은 단체를 싫어하는 나는 자연스럽게 양보다 질의 만남을 갖게 되었다. 내 적성에는 딱 맞는다. 캐나다의 문화는 가정을 중심으로 사는 단순한 삶을 가능하게 해 준다. 모임이나 회식이 빈번한 한국의 삶에 비하면 지극히 담백하고 사람과의 거리가 적당해서 좋다.

우리는 사람에게 상처받고 사람에게 치유받는다. 친구가 나를 이해해 주고 함께 분기탱천해 줄 때 그것만으로 충분한 위로가 된다. 그러나 모두가 내 편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한결같지는 않다. 집단생활을 해야 하는 호모 사피엔스는 단체나 사회를 떠나 살 수 없으니 따지고 보면 사람으로 인한 ‘피로감’은 호모 사피엔스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세상 어디에도 사람은 살고, 세상 어디에도 한국사람은 있다. 어디에서 어떻게 살든 간에 호모 사피엔스의 삶은 거기서 거기다. 어울리다 갈등하고 삐치고 싸우고 화해하기도 하고, 더러는 화해가 안되어 헤어지기도 한다.

헤어짐을 두려워하지 말자. 사람으로 인한 피곤감 실망감이 쌓여있다면, 그리고 외로움을 견딜 용기가 있다면

단순한 인간관계 만들기를 권하고 싶다. 그렇다고 은둔자가 되라는 소리는 아니다. 소중한 사람과 소통하며 마음을 나누고 따뜻한 심장을 유지하다가, 어느 날 문득 왜 꽃보다 사람이 더 아름다운지를 발견하는 순간 ‘사람’만이 ‘사람’을 구할 수 있음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호모 사피엔스는 이따금 실망스럽기도 하지만 때때로 감동적이다.


글-민재미첼 그림-조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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