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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오그닙과 하이디

민재 미첼 MJ Mitchell

29. 오그닙과 하이디


오그닙과 하이디는 시댁의 반려견 이름이다. 지금은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아름다운 시간을 함께한 가족이었다. 처음 시댁에 들어서자마자 그들은 나를 격하게 환영해 주었다. 오그닙은 온몸이 하얀 중대형 믹스견(수컷-중성화)이고, 하이디는 온몸이 까만 중소형 믹스견(암컷-중성화)이었다. (‘믹스견’ 대신 우리말로 쓰려고 사전을 찾아보니 ‘잡종견’이라고 나옴. 혹시 견들이 ‘잡종’이라는 말에 기분 나빠할까 봐 기존에 널리 쓰이고 있는 ‘섞다, 혼합, 혼혈’의 뜻인 ‘믹스견’을 그대로 쓰기로 함. 믹스견을 대체할 우리말 필요함- 혼종견渾種犬 혹은 ‘다종견多種犬’은 어떨는지) 오그닙과 하이디는 바둑돌처럼 흑색과 백색으로 대비되어 보였지만 둘은 사이좋은 친구였다.

오그닙은 시부모님이 퇴직하기 전에 살던 도시 ‘레브라도’에서 구조된 개였다. 영하의 추운 겨울 날씨에 목줄에 묶인 채 거리에 방치된 개를 남편의 여동생 A가 구조했다고 들었다. 레브라도는 북극권에 가까운 추운 도시이기 때문에 겨울철에 개를 실외에 방치하는 것만으로도 동물학대가 된다. A는 겨울 거리에 방치된 어린 강아지를 보자마자 품 안에 품고 집으로 달려왔다고 했다. 가족들은 유기견센터에 신고하고 주인이 나타나길 기다렸지만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고 A는 자신이 원하던 대로 그 하얀 강아지를 키울 수 있게 되었다. A는 강아지에게 ‘빙고 Bingo’라는 영어 알파벳을 거꾸로 한 <오그닙 Ognib>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된 자식들은 집을 떠났고 은퇴를 한 시부모님은 오그닙과 함께 노바스코샤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새로운 가족 <하이디>도 입양했다. 우리가 잘 아는 동화책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좋아한 시어머니는 작고 천진난만한 까만 강아지에게 ‘하이디’라는 예쁜 이름을 붙여주었다.

내가 처음 오그닙과 하이디를 만났을 때, 오그닙은 이미 늙고 병이 든 상태였고 하이디는 이제 막 성견이 된 생기발랄한 아이였다. 오그닙은 녹내장으로 앞을 거의 볼 수 없었고 흰털은 빠져서 앙상하고 볼품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나 순하고 착한지 편치 않은 몸으로 사람을 따르는 것이 더욱 안쓰러웠다. 비틀비틀 집안을 걸어 다니다가 여기저기 부딪혀서 종종 콧잔등에 상처가 나곤 했다. 그래도 사람만 보면 좋다고 느릿느릿 그러나 최선을 다해 꼬리를 흔들었다.

그 당시 하이디는 생기발랄한 모습으로 온 집안을 휘젓고 다녔다. 시아버지는 특별히 하이디를 아꼈고 동네방네 데리고 다니며 하이디의 총명함을 자랑하느라 바빴다. 똘똘한 하이디는 수많은 개인기로 시아버지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 하이디는 한번 가르쳐주면 한 번에 척척 다 배웠다. 앉아, 일어서, 굴러, 누워, 기다려 같은 기본기는 하이디에게 완전 껌이나 마찬가지였고 ‘빵’ 소리와 함께 죽는시늉 정도는 표정연기까지 곁들일 정도였다. 시아버지의 오토바이에는 하이디를 위한 특별 좌석을 만들어 달았고, 시아버지의 스포츠카에는 하이디를 위한 특별 안전띠를 달았다. 시아버지가 요트를 탈 때 하이디는 개 전용 구명조끼를 입었고, 시아버지가 트랙터 열쇠를 집어 들면 하이디는 어느새 트랙터에 올라탔다. 주인보다 먼저 침대 위를 차지하는 오그닙과 하이디 때문에 시부모님은 당신들의 침실에 특대형 사이즈의 침대를 새로 들이기도 했다. 하이디는 시아버지의 껌딱지였다. 우리는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하이디를 질투하기도 했지만, 그녀의 사랑스러움은 모두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이디의 개인기 중 가장 놀라운 것은 오그닙 돌보기였다. 시아버지가 하이디에게 "가서 오그닙 데려 오렴 Go get Ognib"이라고 하면 하이디는 쪼르르 달려가서 오그닙을 찾아 데리고 왔다. 코와 머리를 사용해서 오그닙을 일으켜 세우고 길을 안내했다. 특히 배변을 위해 정원으로 나가는 시간에는 오그닙에게 하이디가 꼭 필요했다. 오그닙이 천천히 정원을 걷다가 용변을 볼 때까지 기다린 하이디는 볼일을 마친 오그닙을 문 앞까지 데리고 왔다. 하이디가 멍멍 짖으며 몇 발자국 앞서 걷고 오그닙이 그 소리를 듣고 방향을 잡았다. 까만 아기 염소 같은 하이디가 폴짝폴짝 오그닙 주변을 뛰어다니던 풍경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느 해 겨울에 있었던 일이다. 남편과 나는 잠시 오그닙을 돌보기 위해 시댁에 며칠 머문 적이 있었다. 시부모님이 시누이네 가족들과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기 위해 하이디까지 데리고 캘거리로 떠났었다. 시댁에 남겨진 오그닙을 돌보는 일이 우리의 임무였다. 덕분에 남편과 나는 크리스마스 연휴를 오그닙과 함께 시댁에서 보내야 했다. 시댁은 큰 숲을 끼고 있는 한적한 시골이다. 넓은 집을 생기 있게 해 주던 하이디는 시부모님을 따라 여행을 가고 없어서 집은 더욱 썰렁하고 크게 느껴졌다. 우리는 시간에 맞추어 오그닙 밥을 챙겨주고 배변을 위해 정원 산책을 시켰다. 그러다가 잠자리에 들기 전, 마지막 배변을 위해 오그닙이 잠시 정원으로 나갔을 때 사고가 생기고 말았다.

오그닙은 경광등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시댁 정원은 넓고 (정원이라기보다 그냥 운동장 만한 잔디밭이라고 보면 됨) 밤에는 깜깜하기 때문에 강아지의 목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경광등 목걸이는 필수였다. 남편과 내가 경광등 목걸이만 믿고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순식간에 정원에서 오그닙의 경광등 불빛이 사라진 것이었다. 우리는 렌턴을 들고 온 정원을 뛰어다니며 오그닙을 찾았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겨울밤이라 찬바람이 제법 매서웠다.

얼마나 오그닙을 부르며 뛰어다녔을까. 어둠 속에서 남편이 오그닙을 찾았다고 소리쳤다. 세상에! 오그닙이 연못에 빠져있었다. 오그닙의 배변 장소와 연못까지의 거리는 약 70m~ 80m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어떻게 거기까지 걸어간 것인지 의아했다. 게다가 연못은 집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연못이 오그닙에게 위험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고 그것은 남편과 나의 큰 실수였다.

남편은 지체하지 않고 연못에 뛰어들어 오그닙을 건져 올렸다. 다행히 연못이 깊지 않아서 익사의 위험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추운 겨울에 온몸이 물에 젖었으니 노견에게는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재빨리 오그닙을 집안으로 옮기고 담요로 감싸고 벽난로 앞에 뉘었다. 수건과 헤어드라이기를 가져와서 정신없이 털을 말렸다. 오그닙이 잘못될까 봐 남편과 나는 사력을 다했다. 다행히 오그닙의 상태는 나빠 보이지 않았다. 약간 몸을 떨다가 난로의 따뜻한 기운 때문인지 잠이 들었다. 오그닙이 잠든 것을 본 후 그제야 남편과 나는 우리의 실수를 자책하며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담요를 덮고 새근새근 잠든 오그닙에게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무사해서 고맙다고 수십 번 감사하고 수십 번 사과했었다.

연못 사건 이후 오그닙은 2년여를 더 우리 곁에 있어주었다. 그리고 어느 날 시어머니가 전화로 오그닙의 사망 소식을 알려주었다. 시부모님의 품 안에서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고 했다. 그렇게 오그닙은 18년 동안의 지구행성 생활을 정리하고 먼 길을 떠났다.

오그닙이 떠나고 시아버지의 하이디 사랑은 더욱 애틋해졌다. 그야말로 물고 빨고 언제나 옆에 끼고 다녔다. 그러나 하이디도 시아버지도 흐르는 세월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오그닙이 떠나고 약 5년여 후에 하이디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하이디는 뇌졸증으로 갑자기 쓰러졌고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그날 바로 무지개다리를 건너 버렸다. 하이디는 그렇게 황망하게 우리들 곁을 떠났고 시아버지를 비롯한 가족 모두가 몹시 슬퍼했다.

지금 시댁에는 ‘찰리’라는 반려견이 있다. 초콜릿 색의 곱슬 거리는 털을 가진 중소형 믹스견이다. 시누이가 캘거리에서 입양한 강아지인데 여름휴가 때 노바스코샤에 데려 왔다가 시댁에 두고 갔다. 시누이 말이 찰리는 캘거리보다 노바스코샤를 더 좋아한다고 했다. 넓은 시댁 마당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걸 보면 찰리는 도시보다 시골에서 더 행복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시아버지는 찰리에게 개인기를 가르치다가 포기했다. 그러나 찰리는 개인기가 없어도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사랑만 받고 자라서 눈치 없이 짖고, 뛰고, 뒹굴고 하며 여간 정신 사나운 게 아니지만 반려견다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한국에서 살 때 나는 ‘들레’와 ‘버들’이라는 강아지를 키웠었다. 몸집이 작은 요크셔테리어 종인데 들레가 엄마이고 버들이가 아들이다. 그리고 버들이는 장애견이었다. 버들이 아기 때에는 조금 움직이고 대소변도 혼자 해결하곤 했는데 커가면서 점점 근육이 굳어져서 움직이질 못했다. 사료를 먹고 물을 마시고 배변을 보는 모든 일에 내 도움이 필요했다. 어미인 들레는 그런 버들이를 끔찍이 아꼈고 하루 종일 버들이 근처를 떠나지 않았다. 버들이는 하루 종일 누워서 나만 바라보았다. 버들이의 눈동자는 나의 동선을 따라 움직였고 내가 시선에서 사라지면 불안해했다. 그래서 나는 버들이를 위해 특별한 ‘주머니’를 만들었다. 마치 캥거루의 ‘육아낭’처럼 버들이를 주머니에 넣고 내 가슴 쪽에 둘러맬 수 있게 만들었다. 그 후부터 집안일을 할 때는 언제나 내 품에 버들이가 있었다.

그렇게 내 품에서 4년여를 키웠지만 버들이의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었다. 나는 사료를 갈아 물에 반죽해서 작은 콩알 같이 동그랗게 만들어 버들이의 입속에 넣어 주곤 했는데 버들이는 이것을 삼키는 것도 힘겨워했다. 급기야는 물도 삼키지 못하고 코가 막히기 일쑤였다. 점점 더 여위어 가고 불안해하는 버들이를 진찰한 동물병원 의사는 이제 편히 보내주어야 할 때라며 ‘안락사’를 권했다.

나는 며칠을 울면서 고민을 했다. 버들이와 들레를 안고 울며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며칠 밤을 보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버들이의 상태는 급격하게 나빠졌다. 이따금 경련과 동시에 불규칙하게 호흡했다. 나는 무섭고 두려웠지만 이제 결정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고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도움을 청했다. 내 손으로 버들이를 병원에 데려갈 수가 없었다. 들레와 나는 버들이를 사이에 두고 한참 동안 작별인사를 건넸다. 마지막인걸 알리 없을 텐데 어미인 들레는 유난히 정성껏 버들이를 핥아주었다. 버들이가 마지막으로 우리 집 현관문을 나서는 모습을 나는 차마 볼 수 없어서 방안에 있었다.

그렇게 버들이는 약 4년여의 짧은 생을 마치고 별이 되었다. 버들이가 떠나고 들레는 매일 버들이를 찾아 헤맸다. 온 집안을 다니며 냄새를 맡다가 버들이 냄새가 나는 물건을 찾으면 앞발로 그것을 정신없이 긁었다. 나는 온 집안을 샅샅이 뒤져 버들이 냄새가 나는 물건을 찾아 세탁을 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들레의 발톱에서 피가 날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응급실에 실려갔다. 폭발할 듯 터져 나오는 기침과 호흡 곤란으로 거의 실신 지경이었다. 의사는 처음에는 폐렴을 의심했으나 검사 결과 폐렴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약 일주일에 걸쳐 온갖 검사를 다 했는데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산소호흡기를 끼고 1주일째 입원해 있는 나를 걱정하던 울 엄마가 의사들에게 원인을 좀 밝혀서 우리 딸 병을 고쳐 달라고 애걸복걸을 한 후에 담당 의사가 조심스럽게 이런 말을 했다.

"혹시 알러지 반응 검사해 본 적 있어요? 안 해봤다면 알러지 검사 한번 해 봅시다"

엄마는 무엇이든지 해서 얼른 원인을 찾아 달라고 재촉을 했다. 드디어 알러지 검사가 시작됐다. 간호사들이 내 몸에 여러 가지 시약들을 바르고 번호를 매겼다. 그리고 얼마 후 나를 찾은 담당 의사가 내게 말했다.

"혹시 집에 개 기르세요? 개털 알러지 수치가 위험할 정도로 높게 나왔어요"

세상에! 개털 알러지라니! 나는 그때까지 들레와 10년 넘게 함께 살고 있었다. 게다가 어렸을 때부터 우리 집에서는 개를 키웠다. 그런 내게 개털 알러지가 있다고?? 그것도 아주 위험 수치로 나왔다고? 헐! 상상도 못 했던 충격이었다. 작은 견종이지만 개와 함께 살고 있다는 내 말을 들은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죽기 싫으면 개를 다른 집으로 보내세요"

결국 나의 기침과 호흡곤란은 ‘개털 알러지’ 때문이라는 결론이 났고, 나의 증상은 항알레르기 약을 복용하는 것으로 차차 호전되었다. 그러고 나서 생각해 보니 나는 한평생 ‘알러지성 결막염’, ‘알러지성 비염’, ‘알러지성 피부발진’을 달고 살았다. 어렸을 때 병원에서 '알러지성 어쩌고"하는 진단을 내릴 때 어째서 의사들은 나에게 ‘알러지 반응 검사’를 한 번도 권한적이 없었을까?

아무튼 나는 더 이상 개를 기를 수 없게 되었고 퇴원과 동시에 들레를 엄마 집으로 떠나보내야만 했다. 나와 함께 10여 년을 함께 한 들레였다. 버들이를 낳은 건 들레지만 우리는 함께 버들이를 양육했고 버들이를 먼저 보내고 함께 아파했었다. 들레는 내 삶의 일부였다. 그러나 나는 의사 말대로 죽기 싫어서 들레를 떠나보냈다. 들레에게는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버들이와 들레를 모두 떠나보낸 후 나는 더 이상 반려동물과 함께 살지 않기로 했었다. 아이들을 끝까지 책임지지 못했다는 죄책감도 있었고 그것을 감당해야 하는 고통과 슬픔이 크기 때문이었다.

캐나다로 이민 오고 보니 집집마다 반려동물과 함께 산다. 나는 개털 알러지 때문에 시댁이나 친구 집 방문 전에 항알러지 약을 꼭 복용해야 한다. 그래서 더욱 반려동물을 꺼렸다. 그런데 남편의 고집까지 꺾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고양이(트릴리언)가 한 마리 주인행세를 하며 우리와 살게 되었다. 이제 9살인 트릴리언이 오래오래 우리 집의 주인이기를 기원한다.

누구나 가슴속에 평생 잊을 수 없는 반려동물 하나씩 묻고 산다. 어디 한둘뿐이겠는가. 잠시 나와 함께 살던 여러 동물들 개, 닭, 오리, 토끼, 염소, 거북이, 거위, 고양이, 장수풍뎅이 등등등 이 많은 아이들이 나에게 따뜻한 마음을 나누어 주었다. 우리는 함께 지구를 여행하는 여행자였고 친구였다. 때로는 재밌고 때로는 고단한 삶을 나눈 가족이었다. 여전히 이별을 생각하면 두렵지만 이제는 이별을 받아들일 용기가 조금 생겼다. 소중하기 때문에 가는 길도 곁에서 지켜주리라고 다짐한다. 언제나 마음을 나누어 주는 그 아이들이 있었기에 덜 외로웠고 더욱 행복했다. 오늘 밤에는 하얀 오그닙 곁에서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까만 하이디 꿈을 꾸고 싶다. 그리고 내 사랑 들레와 버들이도 꿈에 나타나 주었으면 하고 바라본다.


글-민재미첼 그림-조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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