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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캐나다에서 헤어커트

민재 미첼 MJ Mitchell

by 민재 미첼 MJ Mitchell

27. 캐나다에서 헤어커트


이민 초보 시절에는 미용실 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캐나다에서는 전화로 예약부터 하고 약속된 시간에 가야 한다. 미용실을 가기 위해 전화로 예약하는 것이 익숙하지도 않았고 귀찮기도 했지만, 긴 머리를 참지 못하는 나는 미용실에 가야만 했다. 동네에서 여러 곳의 미용실을 다녀보았는데 가는 곳마다 실망스러웠다. 미용실에서 원하는 스타일을 잘 설명했다고 해서 완성된 스타일이 한국에서 만큼 마음에 들 거라는 기대는 버려야 했다. 운이 좋게 한인 미용사를 만난다면 모를까, 보통의 캐네디언 미용사들은 동양인의 모발을 잘 다루지 못했다. 유행하는 스타일도 다르고 미의 기준도 달랐다. 게다가 입체적인 서양인의 두상에 비해 동양인의 두상은 동글납작해서 그런지 완성된 스타일은 왠지 모르게 어색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13년 전의 일이다. 영어가 서툰 나를 도와 남편이 예약을 해 주었다. 당일 예약은 거의 없었다. 예약을 하고 보통 일주일을 기다려야 했다. 드디어 미용실 가는 날이 되었다. 그날은 내가 캐나다에서 처음으로 미용실을 간 날이었기에 몹시 긴장했던 기억이 또렷하다. 미용실에 들어서자 마음씨 좋아 보이는 중년의 미용사가 반겨주었다. 비치된 헤어스타일 사진 중에서 마음에 드는 커트머리 사진을 골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렇게 잘라 달라고 부탁했다. 나를 의자에 앉힌 미용사는 머리를 자를 준비를 했다. 한국에서는 보통 목에 수건을 먼저 두르고 그 위에 망토를 두른다. 목에 두르는 수건은 잘린 머리카락이 옷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준다. 그런데 캐나다 미용사는 목에 긴 티슈 같은 띠 종이를 대고 그 위에 망토를 둘러주었다. 나는 조금 의아했지만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랬다고 그냥 고분고분시키는 대로 얌전히 앉아만 있었다. 미용사는 친절했고 수다스러웠다. 머리를 자르는 동안 나에게 이것저것 말을 걸었지만 나는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보다 더 큰 문제가 생겼다. 잘려나간 머리카락들이 내 옷 속으로 마구 들어왔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뭉텅이로 잘려 우수수 떨어지는 머리카락들이 속수무책으로 그냥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잘린 머리카락은 따끔따끔하게 내 몸을 찔렀다. 남들에 비해 유독 두꺼운 내 머리카락은 수천 개의 바늘이 되어 피부에 박혔다. 마음속으로 다음에는 이 미용실에 오지 말아야겠구나 생각하며 꾹 참았다.

한국 미용사들은 머리를 자르고 나면 스펀지를 사용해서 얼굴에 묻은 머리카락을 꼼꼼하게 제거해 준다. 그런데 중년의 백인 미용사는 시늉만 내는 것 같았다. 마치 스펀지가 내 얼굴에 닿으면 큰일이라도 날것처럼 스펀지로 얼굴을 살짝 스칠 뿐이었다. 머리 모양이 마음에 들고 말고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몸속 따가운 머리카락과 얼굴에 묻은 머리카락 때문에 짜증이 났지만 역시 꾹 참았다. 몸속에 머리카락을 잔뜩 붙인 채 팁까지 지불하고 나왔다. 팁을 준 이유는 순전히 한국사람 인색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게 하려는 노력일 뿐 미용사가 고마워서 팁은 준건 절대 아니었다.

나는 집에 오자마자 옷을 벗어 탈탈 털었다. 그런데 머리카락은 잘 떨어지지 않았다. 섬유 사이사이 박혀 있는 속눈썹 길이의 짧게 잘린 머리카락은 끈적한 의류용 돌돌이를 이용해서 일일이 떼어 내야 했다. 옷을 털고 빨아도 다시 입어 보면 숨어있는 머리카락 때문에 따끔따끔했다. 그러면 옷을 뒤집어서 이 잡듯 샅샅이 뒤져 머리카락을 찾아야 했다.

다음번에는 다른 미용실로 갔다. 여전히 친절하고 수다스러운 미용사였고, 여전히 목에 수건을 둘러주지 않아서 목과 망토의 틈 사이로 잘린 머리카락이 파고들었다. 그날도 팁을 포함한 비용을 지불했고 집에 와서 옷을 홀랑 뒤집고 머리카락을 떼내느라 의류용 돌돌이를 돌리고 또 돌렸다. 헤어스타일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후 다른 미용실을 몇 곳 더 가봤지만 그곳의 캐네디언 미용사에게도 실망했다. 그즈음 나는 한인 미용사인 Y 씨를 알게 되었다. 미용실을 개업한 것은 아니고 알음알음 소개로 집을 찾아오는 손님만 받았는데, 솜씨도 물론 좋았지만 무엇보다 몸속으로 머리카락이 들어가지 않게해주어서 너무 좋았다. 영업장이 아닌 집에서 미용일을 하니까 시설은 미비했으나 마음은 더없이 편했다. 얼마 후 Y 씨는 핼리팩스에 있는 미용 살롱에 취직했다. 반가운 마음에 그녀를 찾아 살롱에 가서 머리를 깎았다. 그런데 살롱은 보통 미용실보다 가격이 두세 배정도 비쌌다. Y 씨가 솜씨 좋고 친절한 미용사인걸 잘 알지만 나는 살롱에 가서 머리를 자를 정도로

헤어 관리에 돈과 정성을 들이는 타입이 아니었기에 아쉽지만 더 이상 살롱에는 가지 않았다.

팀벌리로 이사 후 동네 미용실에 간 첫날, 나는 최대한 상냥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와 표정으로 미용사에게 다음과 같은 부탁을 했다.

"내 머리카락은 아주 두껍고 강해요, 그래서 잘린 머리카락이 내 몸속으로 들어가면 온몸이 따가워요. 마치 수천 개의 바늘이 옷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답니다. 그러니 제발 내 옷 속으로 머리카락이 안 들어 가게 도와주세요"

이 말을 들은 미용사는 환하게 웃으며

"걱정 말아요. 내가 도와 줄게요"

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 역시 목에 수건을 둘러 주지 않았다. 내가 수건을 둘러 달라고 정중히 부탁을 했는데도 잘 못 들었는지 아니면 못 들은 척한 건지는 몰라도, 아무튼 그녀 역시 긴 티슈 같은 목 띠를 두르고 망토를 둘러 주었다. 나는 또 옷 속으로 머리카락이 들어올 것 같아서 숨이 막히기 일보직전까지 망토의 목부분을 졸라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머리카락이 몸속으로 들어왔다. 속에서 부글부글 화가 끓어올랐지만 참았다. 안 참고 어쩌겠는가. 교양 있고 이해심 많은 한국사람이 이런 일로 미용사와 싸울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날 캐네디언 미용사들의 서비스 관념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웃는 얼굴과 상냥한 말투가 서비스의 모든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고, 두꺼운 머리털이 아주아주 짧게 잘려서 옷 속으로 들어가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짐작하려 하지도 않는 듯 보였다. 그날의 미용사는 눈치도 없고 배려도 없었다.

대부분의 백인 모발은 병아리 털처럼 보드랍고 숱도 적다. 가늘고 부드러운 것이 꼭 아기들 배냇머리 같다. 그러니 짧게 잘린 머리칼이 몸에 닿아도 따갑거나 거북하지 않은가 보다. 그래서 그런지 캐네디언 미용사들은

헤어커트를 할 때 잘린 머리카락이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에 큰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보였다. 나처럼 커트 머리를 자를 때는 목과 어깨 부분에 잘린 머리카락이 수북하게 쌓여서 몸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데도 말이다. 게다가 목에 수건을 둘러 달라고 따로 부탁을 해도 들어주지 않는 것을 보면 수건의 용도에 대한 특별한 고정관념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무튼 그 후에 또 다른 미용실로 옮겼다. 그런데 이 미용사는 한 술 더 떠서 자신의 손가락으로 내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어마나 세상에 이 머리카락 좀 봐! 난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머리카락을 본 적이 없어. 어떻게 이렇게 두껍고 강한 머리카락이 있을 수가 있지. 게다가 머리숱이 너무 많잖아!"

이렇게 말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녀가 말한 ‘too many hairs’는 내 머리숱이 너무 많다는 표현이 분명했다. 그녀의 호들갑은 ‘인종차별’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날도 옷 속으로 따가운 머리카락이 잔뜩 들어갔고 헤어 커트 솜씨도 맘에 들지 않았지만 팁까지 지불하고 나왔다. 그 이후로 나는 캐네디언 미용사를 다시는 찾지 않았다. 한국에 사는 흑인들이 이태원의 흑인 전용 미용실만 찾는 심정을 백분 이해했다.

얼마후 또 다른 한인 미용사 P 씨를 소개받았다. P 씨는 전화하면 집으로 출장을 와주었다. 한인 미용사는 말이 통해서 편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손기술이 좋고 서비스가 섬세했다. 친구 S는 이따금 ‘머리 하는 날’을 잡고 자신의 집으로 한인들을 초대했다. ‘머리 하는 날’이면 S의 집은 잠시 P 씨의 미용실이 되었고 한인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10여 명이 넘는 한인들이 모여 머리를 하며 이야기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잠시 한국의 동네 미용실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어 행복했다.


내가 한국에서 살 때는 동네 상가 단골 미용실이 있었다. 아무 때나 길을 가다가 문을 열고 들어가면 할머니가 파마를 말고 있는 풍경이 펼쳐지는 작고 소박한 미용실이었다. 중년의 미용사는 솜씨가 좋았고 말수가 적은 대신 웃음이 넉넉했다. 그즈음 미용실 단골 할머니들의 관심사는 문구점 노총각 장가보내기였는데, 누구네 손녀딸이 좋겠네 아니네 하며 너도 나도 중매를 서겠다고 나서기도 했었다. 고불고불하게 파마가 되기를 기다리는 할머니들에게 미용사는 찐 고구마와 열무김치를 대접하기도 했다. 참으로 정겹고 훈훈한 미용실이었다.


친구 A는 적지 않은 나이에 노바스코샤 미용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용사가 되었다. 손끝이 야무지고 똑똑한 그녀는 자격증을 따고 바로 미용실에 취직했다. 한인 미용사들은 솜씨 좋고 서비스 좋기로 노바스코샤에 소문이 자자하다. 캐네디언에게 없는 ‘눈치’가 있어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 노바스코샤에는 내가 아는 한인 미용사가 6명이나 된다. 내 남편도 한인 미용사가 있는 미용실만 간다.

나는 이따금 친구 A의 집에 들러 머리를 자르곤 했었는데 그것도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면서부터는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나는 머리 자르러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 중도 못한다는 ‘제 손으로 제 머리 깎기’, 그 어려운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게 다 팬데믹 덕분이다. 팬데믹 초기에는 머리를 마냥 길렀다. 그러다 긴 머리가 귀찮기도 하고 어차피 외출할 일도 없고 하니 내가 한번 잘라 볼까 하고 가위를 들었다. 고무줄로 머리를 묶고 밑 부분을 댕강 자르면 대충 길이는 맞았다. 그리고 가위로 큰 틀을 잡아 주고 숱가위로 다듬었다. 다 자르고 나니 생각보다 만족스러웠다. 어차피 세상 사람들은 내 헤어스타일에 별 관심도 없고, 매일 보는 남편은 언제나 예쁘다 말해주니, 가위를 들고 머리카락을 자를 용기가 생겼나 보았다. 외모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손으로 내 머리 깎기는 점점 더 자신감이 붙어갔다. 생각해 보니 내 머리 내가 깎기는 다른 사람들 머리를 깎아 준 경험이 큰 도움이 된 게 아닌가 싶다.

대학 다닐 때 나는 학생회실 구석이나 동아리방에서 많은 남학우들의 머리를 깎아 주었다. 엄마에게 받은 미용비로 밤새 술을 마시고는 머리 안 잘랐다고 엄마에게 야단맞을 까 봐 내게 머리를 깎아 달라고 하는 학우들이 꽤 많았다. 학생회 안에서 유일한 미대생이라는 이유로 내게 머리를 맡긴 선배를 시작으로 밤새 술을 퍼 마신 남학우들의 미용사가 되었다. 내 솜씨는 제법 소문이 나서 점점 많은 학우들이 엄마에게 받은 미용비로 마음껏 술을 마시기도 했다. 나는 학보를 망토 삼아 목에 두르고 날이 무딘 문구용 가위로 그 당시 유행하던 장국영 스타일로 머리를 잘라주곤 했다. 그때 갈고닦은 실력이 오늘날 캐나다에서 꽃을 피워 <내 손으로 내 머리 자르기> 신공을 펼치고 있는 중이다.

이민자들이 생활에서 느끼는 불편함이 어디 한 둘 뿐이겠는가. 익숙한 곳을 떠나 산다는 것은 혼란과 불편함 속에서 다시 안정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이 물론 쉽지만은 않지만 인간은 어떻게든 적응한다. 특히 한국사람은 더욱 강력한 적응 DNA를 가지고 있다. 나는 헤어커트 정도는 내손으로 해내는 기술을 연마하며 캐나다에 적응 중이다. 요즘은 스님들도 전기면도기로 스스로 머리를 깎는다고 들었다. ‘중도 제 머리 못 깎는다’는 속담은 이제 수정되어야 하고 ‘내 머리 내가 깎기’는 세상과의 격리 중에 찾아낸 내 주특기가 되었다. 결국 나의 캐나다 미용실 가기는 실패로 끝이 났다.


글-민재미첼 그림-조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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