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숲 속 작은 오두막
내가 D와 J를 처음 만난 것은 밴쿠버 아일랜드에 있는 빅토리아 Victoria에서였다. 남편은 한국에 오기 전까지 밴쿠버섬에 살았었다. 그때 알게 된 자신의 친구인 D부부를 내게 소개해 주었다. 그 당시 D는 목수 전문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그들 부부는 결혼 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신혼이었다. D와 J는 순박했고 수줍음이 많았지만 상냥하고 친절해서 나는 단박에 그들의 매력에 빠졌다.
그다음 해 우리 부부가 두 번째로 밴쿠버섬에 갔을 때, D와 J는 빅토리아의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했고 J는 첫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그녀는 산책을 할 때 임신한 커다란 배를 하고도 늘 우리보다 앞서 걷곤 해서 나를 놀라게 했었다. 순박한 J는 꾸미지 않아도 아름다웠고 그녀의 환한 미소는 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다시 또 그다음 해에 우리는 세 번째로 밴쿠버섬을 찾았다. D는 기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했고 아내 J와 아담한 주택을 사서 이사했었다. 목수인 D는 전공을 살려 새로 산 집을 고치기에 한창이었다. 그들은 어느새 두 아이의 부모가 되어 있었다. 첫째는 아들 A, 둘째는 딸 B이다. 둘 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졌다. 오렌지색 뺨을 가진 귀여운 아이들은 뒷마당에서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걸 보면서 J는 내게 자신의 정원 설계 계획을 들려주었다. 남편은 D와 함께 그들의 집 지하실 바닥 공사를 마무리했다. 밴쿠버섬 여행을 끝내고 노바스코샤로 돌아오기 전에 우리는 D의 가족들과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기에 긴 포옹을 하고 헤어졌었다.
D의 가족과 우리 부부는 캐나다 대륙을 사이에 두고 동쪽 끝과 서쪽 끝으로 떨어져 살고 있었고 자주 연락하지 못하는 사이 어느새 두어 해가 훌쩍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D가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D - "이봐 친구, 자네는 언제까지 노바스코샤에 살 계획인가?"
남편- "나는 아직까지 노바스코샤를 떠나서 살 계획이 없는데 왜 그러나?"
D - "아 그렇군. 나는 우리 가족들과 함께 노바스코샤에서 살아보면 어떨까 생각 중이라네"
남편 – "그래? 그것 참 놀라운 소식이군. 내 아내가 들으면 매우 기뻐할 소식이야. 나 역시 기쁘다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다시 D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들 가족이 밴쿠버섬을 출발해서 캐나다 대륙을 횡단할 거라고 했다. 그들은 새로 태어난 셋째 아들 C까지 모두 5 식구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개 한 마리와 다섯 가족의 캐나다 대륙 횡단이 시작되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노바스코샤였지만, 캐나다 중부 지방에 사는 J의 친정 부모 집에서 3개월 정도를 살다가 다시 여행을 이어갔다.
봄에 밴쿠버섬을 출발한 D의 가족은 가을이 되어서야 노바스코샤에 도착했다. 그들은 당시 우리가 살던 울프빌 근처 마을에 집을 얻었다. 임시로 세를 낸 집에서 겨울을 보내고 다음 해에 땅을 사서 집을 지을 거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D와 J가 꿈꾸는 특별한 세상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D와 J는 집터를 물색하느라 노바스코샤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고 했다. 날이 풀리면 서둘러 집짓기 공사를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마음이 급해 보였다. 겨우내 집터를 물색하던 그들이 드디어 노바스코샤 북서쪽에 있는
아나폴리스 로열 Annapolis Royal 근처의 땅을 구입했다. 우리가 살고 있던 울프빌에서도 한 시간 반 이상 운전을 해야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우리 부부는 그들이 땅을 계약한 후에 어떤 땅을 샀는지 궁금해서 구경을 갔었다. 그런데 그들의 집터를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예상과는 다르게 아담한 집터를 산 게 아니라 아주 커다란 숲을 산거였다. 작은 강과 숲과 언덕이 있는, 마을 하나가 들어서도 충분할 듯한 넓고 넓은 숲을 사버린 것이었다. D와 J는 막내 C를 안고 올망졸망한 아이 A와 B를 앞세우고 걸으며 자신들의 땅을 보여 주었는데, 숲을 헤치며 한참을 걷다가 우리는 땅의 경계까지 가보는 것은 포기해 버렸다. D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땅을 다 둘러보려면 한 시간 넘게 부지런히 걸어야 한다고 했다. 땅덩이가 넓은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땅을 사는 스케일도 다르다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날이 따뜻해지자 D의 가족은 숲 속으로 이사를 했다. 아직 집도 지어지기 전이었지만 캠핑에 익숙해서 그런지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D의 가족은 언덕 위의 땅을 평평하게 고르고 천막을 쳤다. 커다란 천막 아래는 부엌 겸 거실이 되었고 텐트 두 개를 더 설치해서 침실로 사용했다. 큰길에서부터 텐트 있는 곳까지 제대로 된 길도 없어서 D가 풀을 깎고 나무를 베어 겨우 사람 다닐 수 있는 길을 냈다. 그들이 끌고 온 캠핑용 트레일러는 하는 수 없이 숲의 입구에 세워 두어야 했다. 나는 어린 아기들을 데리고 숲 속에서 어찌 살려고 저러나 걱정을 했는데 그들 가족은 오히려 행복해 보였고 숲 속 생활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내 걱정과는 달리 밝기만 했다. 꼬맹이들은 내 손을 잡고 자신들의 숲 곳곳을 구경시켜 주었다. 산딸기가 많은 곳과 라벤더 꽃이 자라는 곳과 야생 블루베리가 자라는 곳을 그들은 훤히 알고 있었다. 새 둥지를 찾거나 작은 시냇물에서 물고기를 관찰하는 등 숲에는 아이들의 놀거리 구경거리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숲 속 캠핑 생활의 시작과 동시에 본격적인 집 짓기가 시작되었다. 놀랍게도 그들의 계획은 <핸드메이드 handmade> 집 짓기였다. 가능하면 자신들의 숲에서 베어낸 나무를 사용하고 싶다고도 했다. D가 미리 숲에 와서 베어낸 나무들이 잘 마르고 있었다. 겨울이 오기 전까지 집을 지으려면 바삐 움직여야 했다. 남편과 나는 주말이면 텐트를 챙겨서 캠핑 가는 기분으로 D의 가족을 방문해서 집 짓는 일을 도왔다. 이렇게 무모해 보이는 집 짓기는 D가 목수이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D는 큰길에서 도보로 10여분 걸어 들어가는 곳을 집터로 정했다. 그곳은 다른 곳보다 지대가 조금 높아서 해가 잘 들었다. 제일 먼저 우물을 팠다. 식수로 사용할 우물이기 때문에 전문가를 불러서 공사를 했고 우물을 파서 물이 나오면 주정부가 정한 식수 기준에 맞는지 검사를 받아야 했다. 검사가 통과된 후에 D는 물을 퍼올리는 펌프를 설치했다. 마중물을 한 바가지 붓고 열심히 손잡이를 아래위로 움직여 줘야 하는 펌프가 신기했는지 아이들은 놀이 삼아 펌프질을 하기도 했다.
D와 J는 정말 공을 들여 핸드메이드 집을 지었다. J는 세 아이들을 돌보아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D 혼자 집을 짓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집의 기초 골격이 되는 큰 나무 기둥이나 서까래를 옮길 때는 중장비를 빌리기도 했고 남편과 나도 주말이면 그들의 숲에 들러 작은 일이나마 일손을 거들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나무껍질 벗기기가 제일 재미있었다. D가 베어 놓은 나무가 어느 정도 마르면 남편과 나는 손잡이가 양쪽으로 달린 초승달 모양의 도구를 이용해서 통나무의 껍질을 벗겼다. 양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힘을 주어 몸 쪽으로 강하게 당기면서 껍질을 벗겨내면 향긋한 나무 냄새가 났다. 나는 나무냄새가 너무 좋아서 껍질 벗기는 일을 제일 열심히 했다. 일을 하다 보면 힘이 들고 땀이 뻘뻘 나도 매끈하고 뽀얗게 껍질이 벗겨진 통나무를 보면 마음이 뿌듯했다.
D는 집터를 평평하게 다지고 사방으로 주춧돌을 놓고 나무 기둥을 세웠다. 본격적인 집 짓기가 시작됐다. 나무 기둥이 박혀 있는 바닥 면적은 그리 넓어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아담한 사이즈의 집이 들어설 면적이었다. 현실적으로 D 혼자서 통나무로만 집을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큰 기둥으로 쓸 나무만 숲에서 베어낸 나무를 썼다. 그리고 나머지 건축 자재, 예를 들면 단열재, 창문, 지붕, 문, 바닥재, 내부 마감재 등등은 사 왔다. D는 몸무게가 줄어들 정도로 열심히 집 짓기에 매달렸고 우리가 그들의 숲에 방문할 때마다 오두막집은 조금씩 조금씩 높이를 더하며 모양을 갖추어 갔다.
오두막에는 차츰 대들보가 올라가고 박공지붕이 얹혔다. 창문이 달리고 현관 문도 생겼다. 1층은 부엌과 거실이 있고 2층에는 다락방이 2개 있는 아담한 오두막이 만들어졌다. D는 태양광을 충전해서 사용하는 전기시설과 우물물을 끌어다 쓰는 수도 시설도 설치했다. 오두막 뒤에는 천연 발효 친환경 화장실도 만들었다.
집이 지어지는 동안 아이들은 여전히 캠핑 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느새 막둥이 C도 아장아장 걸으며 숲을 누비고 다녔다. 보통의 한국 사람들이 보면 쉽게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아이들은 그냥 야생에서 놀고먹고 뛰며 자라고 있었다. 그렇다고 D와 J가 아이들을 숲 속에 방치해서 키우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시간을 정해 아이들과 근처 YMCA 수영장에도 가고, 공공 도서관 아동 프로그램에도 참여하고, 책을 빌려와서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TV와 게임기 대신 책을 통해 세상의 모든 것을 배우고 있었다. 그 당시 6살이던 첫째 A의 독서 능력은 어른을 능가할 정도였다. 공룡이나 동물의 진화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책에서 읽은 고급 영어 단어를 사용해서 나를 당황시키기도 했었다.
D의 가족은 계획대로 겨울이 오기 전에 오두막 집을 완성하고 입주했다. 여름내 고생한 D는 자신이 지은 오두막집을 우리 부부에게 소개해 주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 서면 온통 나무 냄새가 가득했다. 목수인 D는 주방의 싱크대, 식탁, 의자 모두를 직접 만들었다. 투박하고 소박한 원목이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부엌에는 나무 장작을 사용하는 난로가 있었는데 그냥 난방만을 위한 장작난로가 아니라 조리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추어진 난로였다. 주방 옆에는 소파와 책장이 놓인 거실이 있었고, 계단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가면 박공지붕 덕분에 천장이 비스듬하게 기운 작은 다락방이 2개 있었다. 사방이 숲으로 둘러 쌓인 아담한 오두막은 5 식구의 행복한 보금자리가 되기에 충분해 보였다. 그렇게 D 가족의 숲 속 살이가 시작되었다.
D의 가족이 오두막에서 보낸 첫 번째 겨울은 그리 혹독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겨울에 눈이 오면 길이 막혀서 오두막은 고립되기도 했다. 그러나 D의 다섯 가족은 무사히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았다. 봄이 되자 그들은 텃밭을 만들기 시작했다. 각종 허브와 토마토, 피망, 옥수수, 감자 등을 심고, 닭장을 만들고 닭을 여러 마리 사서 길렀다. 아이들은 닭들에게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 주었고 아침이면 달걀을 가지러 앞다투어 닭장으로 달려갔다. 코요테가 닭을 물어 가서 닭장을 더욱 튼튼하게 다시 만들기도 했다.
D가 솜씨를 발휘해서 야외에 장작 화덕을 만들었고 J가 맛있는 화덕 피자를 만들어 주었다. 장작 화덕에서 구워낸 피자에서는 은은한 나무향이 나서 맛이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D가 구워주는 식빵을 제일 좋아했다. 장작 화덕에서 갓 꺼낸 따끈따끈한 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좋은 풍미가 났다. 고소하고 쫀득했다. D의 가족을 방문하는 날은 우리 부부에게는 캠핑이나 마찬 가지였다. 모닥불 주변에 둘러앉아 고기와 소시지를 구워 먹기도 하고, 마시멜로를 구워 스모어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해가지면 숲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태양열 전기만 쓰는 D의 집에서는 전기를 아끼느라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우리 부부는 D의 집 마당에 텐트를 쳤다. 텐트 속에서 침낭을 덮고 누워서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숲의 소리가 들렸다. 밤의 숲 소리는 낮의 숲 소리와는 달랐다. 부엉이와 코요테와 이름 모를 새소리와 바람 소리가 숲 속 깊은 곳에서 들려왔다. 낮에 내가 알던 숲보다 더욱더 깊은 숲이 텐트밖에 있을 것만 같았다. 그들의 숲 속 오두막은 그렇게 우리 부부에게도 특별한 장소가 되었다.
아이들은 숲 속에서 무럭무럭 자랐다. D와 J는 홈스쿨링으로 집에서 아이들을 교육했다. 내가 보기에도 아이들은 또래에 뒤지지 않게 잘 교육받고 있었고 3남매가 사이좋게 지내며 밝게 크고 있었다. D는 아이들을 위해 그네를 만들어 나무 가지에 걸어 주었고, 튼튼한 나무 위에 작은 트리하우스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꼬맹이 A, B, C는 하루 종일 나무와 나무 사이를 누비고 풀과 꽃과 햇살 아래에서 걷고 뛰고 뒹굴며 행복해했다. 나는 한 번도 D와 J에게 직접 물어본 적은 없었지만 그들이 자연 속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싶어 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들이 맞이한 두 번째 겨울은 혹독했다. 눈이 많이 쌓여서 오래도록 숲 속에 고립되었고, D 혼자 가까스로 눈 속을 헤치고 나와 마을에 가서 눈 치우는 트랙터를 빌려왔다고 했다. 트랙터로 눈을 밀고 오두막까지 도착하는 데만도 꼬박 하루가 걸렸다고 했다. 그래도 다시 봄이 되면 D의 다섯 식구들은 햇살처럼 환하게 웃으며 텃밭 농사를 시작했다. D는 그해 여름 내내 오두막을 넓히는 공사를 했다. 실내 화장실도 만들고 부엌도 넓혔다. 위층의 다락방 두 개는 아이들에게 내어 주고 아래층에 부부의 침실도 하나 만들었다. 이제는 제법 크고 번듯한 집이 되었다.
그들이 숲 속에서 사는 동안 내 남편은 이직을 하게 되었고 우리는 도시 근처로 이사를 해야 했다. 이사 후에 우리 집은 D의 오두막에서 차로 약 3시간이 넘는 거리만큼 멀어져 버렸다. 멀고 바쁘다는 이유로 우리 부부의 오두막 방문 횟수도 차츰 줄어들었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흘렀다.
몇 해를 숲 속에서 보내던 D의 가족은 어느 날 느닷없이 숲과 집을 다 팔아버리고 노바스코샤를 떠났다. 다시 그들이 살던 밴쿠버섬으로 돌아간 것이다. 수줍고 말수가 적은 D와 J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막연하게 외로움 때문이 아닐까 짐작했다. 그리고 우리가 도시 근처로 이사 한 이후 자주 찾지 못해서 더욱 외로움이 짙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 동네는 우리가 살던 곳 (밴쿠버섬) 보다 보수적인 것처럼 느껴져요. 젊은 사람은 별로 없고 노인들이 주로 거주하는데 교회를 중심으로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더라고요."
언제인가 J가 한 이 말을 통해 나는 그녀가 타향살이의 외로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었다. 외로워했던 그녀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 것 같아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들은 다시 캐나다를 횡단해서 서쪽 끝 밴쿠버섬에 도착해서 새로운 삶을 꾸렸다.
며칠 전에 J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녀와 그녀의 가족이 노바스코샤를 떠난 지 벌써 5년이 넘었으니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녀는 김치 담는 법을 알고 싶어 했다. 그들 가족의 소식을 알게 되어 기쁘기도 했지만 김치를 직접 담고 싶어 한다니 더욱 반가웠다. J는 아이들 소식을 먼저 전해 주었다. 어느새 십 대 소년이 된 첫째 A의 키가 아빠 D보다 더 크다고 했다. A, B, C 모두 건강하고 밝게 컸다고 전해 주었다. 꼬맹이들이 어느새 그렇게 컸는지 나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내 기억에는 여전히 작고 작은 꼬맹이로만 남아 있는데 말이다.
그들의 숲 속 생활은 D와 J는 물론이고 아이들에게는 더없이 값진 경험이 되었으라고 생각한다. 숲 속에서 자연의 변화를 느끼고 체득하는 것만으로도 큰 공부가 되었으리라. 그로 인해 그들이 여전히 몸도 마음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에게 그들의 숲 속 생활은 신선한 충격이었고 캐네디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경험이었다. 많은 아동 학자들은 숲이야 말로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놀이터라고 한다. 어디 아이들에게뿐이랴. 숲은 어른에게도 좋은 놀이터가 분명하다. 숲은 세상 모든 생명에게 좋은 놀이터가 틀림없다.
나는 이따금 D가 손수 지은 그 숲 속 오두막이 몹시 그립다. 비록 작은 일손을 보탰지만 그 오두막에는 나의 손길도 스며있어 더욱 특별했다. D의 가족이 노바스코샤를 떠난 후에는 내 마음속의 숲 하나도 사라진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도 언젠가는 나의 놀이터가 될 숲을 가져 보길 꿈꾸어 본다.
글-민재미첼 그림-조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