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나에게 ‘캐나다에서 제일 불편한 것’ 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병원 가기’라고 대답한다. 평화로운 캐나다에서 병원 가는 일은 평화롭지 않은 고난의 여정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캐나다 정부는 1984년 ‘병원 진료 보장법’과 ‘의사 진료 보장법’을 통합하고 ‘환자 본인 부담 제도’를 전면 폐지하며 <사회 의료 체계 The social medical system>를 법제화했다. 모든 국민은 진료와 치료에 대해 무료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캐나다의 병원에 가면 접수창구는 있어도 돈을 내는 수납창구는 없다. 10개의 주와 3개의 준주로 이루어진 캐나다 전체가 ‘단일 의료 보건법’ 적용을 원칙으로 한다. 그래서 미국처럼 각 주마다 의료법이 다를 수가 없다. 전 국민이 경제적 부담이 없는 <무료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커다란 장점이 아닐 수 없다. 적어도 가난해서 치료받지 못하고 사망하는 국민이 생기지 않도록 국가가 보호해 준다는 것인데, 내가 캐나다에서 경험해보니 보호는 보호인데, 딱 죽기 직전이 되어야 보호해 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캐나다에서 의료는 서비스가 아니었다. ‘서비스’의 사전적 의미는 ‘ 손님이 요구하는 일을 해주다’, ‘값을 깎아 주거나 덤을 주어 고객에게 이익을 베풀다’라고 되어 있는데, 캐나다 병원에 가면 이런 ‘서비스 정신’은 없고 환자의 생명을 지킨다는 ‘기본 의료 정신’만 있는 듯 보였다. 참 여러 가지로 기본기에 충실한 캐네디언답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모든 의료재가 '공공재'라는 의식이 투철해서 그런지 의사나 간호사들은 반창고 하나도 환자 마음껏 붙여주지 않았다.
언젠가 청소를 하다가 새끼발가락을 침대 모서리에 부딪힌 적이 있었다. 침대 모서리 보호용 플라스틱이 네 번째 발가락과 새끼발가락 사이에 걸리면서 새끼발가락이 바깥쪽으로 완전히 꺾여 버린 것이었다. 엄청난 고통을 느낀 나는 단발의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정말 너무너무 아팠다. 내 비명 소리를 듣고 뛰어 온 남편이 발을 살피더니 당장 응급실로 가자고 했다. 새끼발가락은 그 짧은 사이 벌써 새까맣게 피멍이 들었고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급히 차를 몰아 응급실에 도착해서 접수하고 복도에서 하염없이 의사를 기다렸다. 나는 집에서 가져온 얼음주머니로 발을 감싸고 있었다. 캐나다에서는 ‘응급실’에 왔는데 아무도 나를 ‘응급’하게 도와주지 않았다. 피가 철철 흐르지 않는 한, 의사를 만나기 위해서는 길고 지루한 시간을 견뎌야 했다. 그래도 그날은 운이 좋게도 약 2시간 만에 의사를 만났다. 대기 시간 2시간은 노바스코샤에서는 완전 초대박 행운에 속했다. 드디어 만난 의사는 사고 경위를 들으며 나의 발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여기저기 눌러보고, 두드려 보고, 이리저리 발가락을 돌려보고 내게 걸어보라 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상태로 보아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집으로 돌아가서 쉬세요."
이게 무슨 말인가! 나는 그의 영어를 잘못 알아들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옆에 있는 남편의 황당해하는 얼굴을 보니 내가 잘못 알아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X-ray 사진을 찍어 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남편이 물으니 의사가 이렇게 답했다.
"아니요. 그럴 필요 없어요. 다른 발가락이나 발목은 이상이 없어 보여요. 어쩌면 새끼발가락 뼈에 금이 갔을 수도 있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말이에요."
나는 그의 대답이 의사로서 너무 무책임하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물었다.
"뼈가 부러졌는데 해줄 게 없다니요? 깁스 cast 같은 건 안 해주나요?"
젊은 의사는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새끼발가락이 부러졌을 때는 깁스를 해도 아무 도움이 안 돼요. 오히려 걷기와 샤워할 때 불편할 뿐이에요. 새끼발가락은 뼈가 부러지나 안 부러지나 별도의 처치는 필요치 않으니 굳이 사진을 찍을 이유가 없잖아요. 그러니 집에 가서 휴식과 안정을 취하세요. 통증이 심하면 타이레놀을 복용하시고요."
나는 이 황당한 설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발이 새까맣게 피멍이 들고 퉁퉁 부었는데, 이렇게 아픈데, 뼈가 부러졌다한들 해줄 게 없다니! 나는 막 화가 나고 눈물도 났다. 그래서 의사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나의 불쌍한 발을 보고도 아무것도 해줄 게 없다는 건가요?"
그러자 나의 간절함을 눈치챘는지 의사가 이렇게 말했다.
"그럼 내가 네 번째 발가락과 새끼발가락을 반창고로 고정해 줄게요. 그럼 보행에 도움이 될 거예요"
그는 흰 반창고를 조금 잘라 내더니 내 발가락 두 개를 한데 모아 테이핑을 했다. 그런데 의사는 참 야박하게도 반창고를 딱 한 바퀴만 돌렸다. 두세 바퀴를 돌려서 단단하게 고정해 주면 좋으련만 겨우 한 바퀴라니! 몇 걸음 걷다가 떨어질 것처럼 엉성하게 붙인 반창고를 내려다보며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반창고를 몇 바퀴 돌려 감는 것도 아까운 것인가? 모두에게 공평하다는 캐나다의 의료는 ‘세심한 보살핌’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절뚝거리며 집으로 돌아와서 이 야박한 의료 행태를 기억하기 위해 반창고로 딱 한 바퀴 감긴 내 발가락 사진을 찍어 두었다. 퉁퉁 부은 발가락에 엉성하게 겨우 붙어 있는 반창고를 내려다보니 서글픈 마음이 들면서 이것이 정확한 캐나다 의료의 현실이라고 생각했다. 생명에 큰 지장이 없으면 반창고 한 바퀴로 만족해야 하는 현실이었다. 어쨌거나 의사의 반창고 처방은 결과적으로 걷는 데는 도움이 되었고, 새끼발가락의 통증도 시간이 지나니까 차츰 사라졌다.
그때 새끼발가락이 부러졌었는지 아니면 뼈에 금이 갔었는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건 몇 주 후에 새끼발가락이 다 나았다는 것이다. 반창고로 발가락 두 개를 모아서 테이핑 해 준 것 말고는 특별한 처치가 없었는데도 의사의 말대로 낫긴 나았다. 반창고 한 바퀴! 딱 그 정도만 돌보아주는 캐나다 의료지만 그것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살고 있다.
뭐든지 빠른 대한민국에서는 병원 진료와 치료도 역시 빨랐다. 한국에서 안 살아 봤으면 모를까, 한번 이 빠른 속도의 맛을 본 후에 캐나다에 오면 캐나다의 모든 ‘느림’에 적응이 안 된다. 특히 병원 진료와 치료의 속도는 정말 답답해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느려도 너무 느렸다. 처음 이민 왔을 때나 13년이 지난 지금이나 속도에는 별 변화가 없다. 캐나다의 응급실은 인내심의 한계를 테스트해서 통과해야만 의사를 만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캐나다의 의료 시스템이 하도 느리다 보니 이곳 한인들은 ‘정관 수술’을 기다리다가 애가 하나 더 생기겠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내가 아는 지인은 둘째를 낳은 후에 남편이 정관 수술을 신청했는데 수술까지는 8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그 부부는 수술 전까지 셋째가 생기지 않아 다행이라고 안도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과 의료 기술은 전 세계에서 손꼽을 만한 수준이다. 게다가 국민 건강 보험 제도가 탄탄하게 되어 있어서 각종 질병에 대한 본인 비용 부담이 해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고 들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빨리빨리' 문화가 만든 초고속 의료 속도는 전 세계가 특히 부러워한다. 물론 속도도 중요하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대한민국 의사들의 솜씨, 즉 ‘의술’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대한민국은 인구가 많고 병원 접근성이 좋아서 의사들이 수많은 다양한 케이스의 환자를 경험하게 된다. 많은 경험을 한 의사들의 의술이 발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전 세계 사람들이 한국의 병원을 일부러 찾는다고 들었다.
캐나다에서는 수재를 뽑아 공부시켜서 의사 만들어 놓으면 돈 벌러 미국으로 가버린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캐나다 의사들의 미국 취업률이 높다고 한다. 그래서 신규 의사 면허 취득자에 한해 미국 취업을 제한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고 한다. 그만큼 캐나다에는 패밀리 닥터는 물론이고 전공의 및 각종 의료 종사자가 부족하다. 의사는 부족하고 국민들의 병원 접근성은 점점 떨어지니 캐나다 의사들이 한국처럼 다양한 케이스의 환자를 경험하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니 ‘의술’을 쌓을 기회가 한국의 의사보다 적을 것이다.
예전에는 교포가 한국에 가서 건강검진을 받고 오거나 병을 치료하고 왔다고 하면 나는 속으로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하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여건이 된다면 한국에 가서 병을 고치라고 권하고 싶다. 권위주의나 관료주의가 없는 캐나다의 의사들은 상냥하고 친절하다. 그러나 상냥과 친절만으로 환자를 치료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의사는 의술, 즉 의료 기술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직업이다. 경험의 양적 축적은 다양한 위기 대처 능력을 키울 수 있어서 기술력 향상에 있어 큰 핵심이 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환자의 병원 접근성이 좋고, 인구 밀도가 높은 대한민국은 의사들이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살아있는 교육 현장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심각한 내성발톱으로 고생을 하는 중이다. 양쪽 발의 엄지발톱이 둘 다 심하게 말려 들어가서 살을 파고드는데 해가 갈수록 증세가 더욱 심해졌다. 패밀리 닥터와 상의하고 발톱 전문의에게 발톱 영구 제거 수술을 신청했다. 그런데 수술을 신청한 지 어느덧 4년이 지나도 여전히 감감무소식이다. 나는 그동안 두 번이나 응급실에 가서 발톱을 부분적으로 잘라내야 했다. 응급실에서는 부분 마취를 한 후에 살 속으로 파고드는 발톱의 가장자리 부분을 잘라냈다. 너무너무 무섭고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발톱은 잘라내도 다시 내성발톱으로 자랐다. 응급실에서 발톱을 잘라 주던 의사가 이렇게 말했다.
"한평생 이렇게 주기적으로 발톱을 잘라내며 살던지 아니면 발톱 영구 제거 수술만이 해결 방법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나는 발톱 제게 수술을 신청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수술 병원에서 연락이 없었다. 나는 패밀리 닥터를 졸라서 다른 발톱 전문의를 소개받았다. 몇 달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발톱 전문 의사를 만나기 위해 병원에 갔다. 내 발톱의 상태를 관찰한 의사가 원한다면 오늘 발톱을 제거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발톱이 다시 자라지 않게 하는 시술은 추후에 따로 받아야 한다고 했다. 제거 수술 외에 따로 시술을 받아야 한다니 조금 성가실 것 같았지만 수술을 할 수 있는 기회가 흔하게 오는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흔쾌히 동의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부분 마취가 시작됐다. 그런데 이 젊은 의사가 마취주사를 주사하는 폼이 영 엉성했다. 심지어 마취주사 세대 중 한 대는 주사 바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서 주사약이 밖으로 줄줄 흘러 버렸다. 주사는 또 왜 그렇게 아픈지 나는 이를 깨물며 고통을 참아야 했다. 나에게 마취주사를 놓은 후 젊은 의사는 밖으로 나갔다가 얼마 후에 좀 더 나이 든 의사와 함께 들어왔다. 그리고 두 의사는 내 발이 마취가 잘 되었는지 여기저기 눌러보았다. 그런데 나는 모든 감각을 다 느낄 수가 있었다. 어머나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마취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었다. 의사는 마취가 되지 않아서 오늘은 발톱을 제거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젠장! 나는 아픈 마취 주사를 세대나 맞고도 발톱 제거에 실패했고 그날은 내가 최악의 똥손을 가진 캐나다 의사를 경험한 날이 되었다. 이런 경우 한국에서라면 의사에게 항의라도 하겠지만, 모든 의료가 무료인 캐나다에서는 항의 같은 건 할 수 없다. 의사도 사람이고 사람은 실수할 수 있다는 전제는 의사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기 때문에 의사의 작은 실수를 항의했다가는 안전요원이나 경찰에게 쫓겨날 확률이 높고, 가뜩이나 의사 만나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운 곳에서 나의 치료를 거부하는 의사가 생긴다면 내게 이로울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하는 수없이 수술 대기자 명단에 다시 이름을 올리고 집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났지만 병원에서는 여전히 아무 연락이 없다. 캐나다에서는 의료에 관한 것은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아프게 배웠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도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다 보니 여기저기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하나 둘 몸의 부속품들이 고장 나기 시작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난봄부터는 오른쪽 다리가 저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저리기만 하더니 어느 날 샤워를 하는데 오른쪽 다리는 뜨거운 물이 닿아도 온도를 느낄 수가 없었다. 깜짝 놀랐고 무서웠다. 패밀리 닥터에게 전화해서 예약 잡고 하면 시간이 너무 걸릴 것 같아서 나는 남편과 함께 바로 응급실로 달려갔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내가 병원에 도착 한 시간은 오전 11시쯤이었다. 접수를 하고 하염없이 기다렸다. 오후 1시 30분쯤 드디어 내 이름이 불려졌다. 나는 겨우 응급실의 침대 하나를 배정받았다. 그리고 또 기다렸다. 시간은 천천히도 흘렸다. 응급실 안을 살펴보니 환자는 많은데 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 옆의 침대에서는 중년의 여자가 숨이 넘어갈 듯 기침을 하고 있었고 다리를 절뚝이며 지나가는 십 대 소녀도 보였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조용히 침대에 누워서 의사를 기다렸지만 카운터에서는 간호사가 전화 통화를 하며 수다 떨기에 바빴다. 간호사는 무려 한 시간을 전화를 붙들고 수다를 떨었다. 내가 누워 있는 침대가 카운터 바로 옆이다 보니 나는 본의 아니게 간호사의 파티 음식 목록과 조리방법을 들어야 했다. 간호사는 주말에 있을 파티를 매우 기대하고 있는 듯이 들렸다. 도대체 왜 의사는 나타나지 않는 것인지 알 길이 없어서 옆에 있는 남편에게 투정을 했더니 ‘의사가 부족해서 그래. 미안해’ 라며 캐나다 정부를 대신해서 내게 사과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오후 3시 30분에 의사가 나타났다. 내가 병원에 도착한 지 4시간 30분 만에 의사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캐나다에서는 의사를 만났다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 아닐 수없다. 내 증상에 대해 묻고 몸을 여기저기 두드려 보고 눌러보며 관찰하고는 의사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허리에 약간의 문제가 생겨서 신경이 예민하게 작동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리에 감각이 없는 거예요. 특별히 걱정할 문제는 아닙니다. 집에 가서 생활하다 보면 저절로 나을 겁니다. 당신의 허리에 통증이 없다는 것은 큰 다행입니다."
나는 어떻게 X-ray 촬영 없이 문진과 촉진 만으로 진단을 내릴 수 있는지 의아했지만 의사의 경험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운전에는 문제가 없을까요?"
내가 이렇게 물으니
"운전이나 운동 능력에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단순히 감각 신경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당신이 이문제에 대해 전문적인 소견과 치료를 원한다면 <물리치료사>와 상담하기를 권합니다."
의사는 2차 진료소에 제출 하라며 나의 증상에 대한 소견을 간단하게 적어주었다. 그날도 나는 병원에서 특별한 검사나 치료도 받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내 돈을 내더라도 한국에서처럼 속 시원하게 엑스레이 사진이라도 찍어보고 하면 좋으련만 캐나다에서 환자는 아무런 권한이 없었다.
그 후에 패밀리 닥터에게 전화해서 전문의를 소개해 달라고 했지만 패밀리 닥터도 응급실 의사와 같은 말을 하면서 물리치료사를 만나 보던지, 아니면 내가 지금 경추 치료를 받고 있는 카이로프렉틱 닥터와 상의해 보라는 말을 했다. 나는 카이로프렉틱 닥터의 도움으로 X-ray 사진을 찍고 척추 지압 치료를 시작했다. 허리뼈가 압력을 받아 신경을 건드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요즈음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치료를 받고 있다. 증상이 시작된 지 어느덧 6개월 여가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다리의 감각에는 별다른 차도가 없다. 여전히 뜨거운 물의 온도를 감지하지 못할뿐더러 다리의 저린 부위는 점점 더 넓어지고 있는 것 같다. 이제는 다리 전체와 옆구리까지 저리기도 한다. 카이로프렉틱(도수치료)이 그나마 내게 유일한 치료의 길이라 생각하는데 카이로 치료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다.
한국에서는 병원 가면 무조건 주사를 놔준다. 그래서 병원에 가면 최소한 영양제라도 맞고 와야 안심이 되는데 캐나다에서는 내가 원한다고 병원에 가서 영양제 그런 거 맞을 수없다. 정말 ‘얄짤’ 없다. 얼마 전에는 한인 한 명이 맹장으로 핼리팩스의 병원에 갔다가 제시간에 진단받지 못해서 결국에는 맹장이 터져서 응급 수술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자칫하면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는 문제였다. 캐나다의 의료 시스템의 한계를 단적으로 볼 수 있는 사고였다.
캐나다에서도 선거철이면 의료문제 개선이 큰 이슈로 떠오른다고 들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캐나다의 국민들이 의료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매번 새로 들어서는 정부는 의료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한다고 했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진척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지구상에 완벽한 나라가 없는 것처럼 완벽한 의료체계를 갖춘 나라도 없겠지만 캐나다의 <사회 의료 시스템>은 문제가 많아도 너무 많다. 확실한 변화가 절실하다.
나는 앞으로 캐나다 시민권을 신청할 계획이다. 그리고 선거권이 생기면 가장 먼저 ‘의료 개혁’의 의지가 있는 사람을 뽑아 줄 생각이다. 내가 점점 나이 들어서 아픈 곳이 더 많이 생기기 전에, 아니 미래를 살아갈 젊은 세대를 위해서라도 캐나다에 획기적인 의료 개혁이 일어나길 소망한다. 간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