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하기를 별로 즐기지 않는 내게 가장 큰 숙제는 ‘끼니 해결’이다. <뭘 먹을까?>라는 고민은 모든 인류의 공통된 최대의 난제일 것이다. 나처럼 나고 자란 고향을 떠나서 살고 있는 이민자에게는 더욱 가혹한 문제가 아닐 수없다. 하기야 외국도 외국 나름일 것 같긴 하다. LA 같이 한인들이 많이 사는 대도시에는 한식당도 많고 한인마트도 많다고 하니 한식을 접하기가 쉬울 것이다. 나는 대도시를 좋아하지 않지만 한인타운이 있다는 것은 조금 부럽다. 한인타운이 근처에 있다면 먹거리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한국에서는 식사에 대한 고민을 배달음식으로 가볍게 해결할 수 있었지만 우리 동네에서 한식 배달은 그야말로 남의 나라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이따금 한국 TV 속에서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음식을 배달시켜 먹는 장면을 보면 놀랍고도 부러울 따름이다.
음식을 요리하고 대접하는 것을 기쁨과 보람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나는 그런 성향과는 거리가 멀다. 나에게 요리는 생명유지를 위한 방편일 뿐이다. 한국에서는 엄마 찬스도 있었고 반찬가게의 도움도 받았다. 게다가 든든한 배달 음식이 있으니 끼니 걱정이 지금처럼 심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바스코샤에 와서 살다 보니 매일매일이 <뭘 먹을까?>라는 고민의 연속이다.
식문화가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캐나다의 음식은 한식과는 아주 다르고 내 입맛에는 안 맞는다. 그런데 일본인 친구 K도 캐나다 음식에 대해 혹평을 하는 것을 보면 적어도 극동아시아 사람들에게는 캐나다 음식이 인기가 없는 게 분명하다. K와 나는 캐나다 음식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너무 기름지다!> <너무 달다!> <너무 싱겁다!>
캐나다 음식은 대체적으로 이 세 가지 중 하나에 속하거나, 두 가지, 혹은 위의 세 가지 맛이 섞여있다. 생각해 보시라. 기름지고 싱거운 음식, 혹은 너무 달고 기름진 음식을 맛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극동아시아 사람 둘이서 내린 극단적인 결론이지만 어느 정도 근거는 있다고 본다. 길거리 음식의 천국 일본에서 온 K와, 역시 길거리 음식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한국에서 온 나는, 캐나다에는 왜 맛있는 거리 음식이 없는 것이냐고 성토를 하곤 했다.
감자튀김 위에 그레이비 gravy소스 와 치즈를 얹어 먹는 <푸틴 Poutine> (러시아 대통령 아님 주의)은 캐나다의 대표적 전통 요리이다. 캐나다 음식이라는 것이 유럽 이주민들의 식생활에서 비롯되었을 테니 서양 어느 나라에나 있음 직한 음식이 대부분이다. <푸틴>도 마찬가지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먹는 감자튀김 아니던가. 그래서 <푸틴>은 캐나다 전통 음식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군색해 보인다. 캐네디언에게는 미안하지만 극동아시아에서 온 K와 나에게 그것은 그냥 기름지고 축축한 감튀일 뿐이다.
남편과 나는 둘 다 요리를 즐기지도 않고 요리에 소질도 없다. 그래서 우리의 쇼핑 리스트에는 <Easy Cooking Thing>이라는 항목이 항상 들어 있다. 간편하게 오븐에 넣어 요리할 수 있는 냉동식품을 우리는 그렇게 부른다. 어차피 캐나다에는 내 입맛에 맞는 냉동식품은 없기 때문에 선택은 대부분 남편이 하는데 주로 고기 파이, 라쟈냐, 피자 등을 고른다. 나는 냉동식품 요리를 위해 오븐을 켠 김에 이것저것 오븐에 넣고 한꺼번에 요리를 한다. 감자를 껍질째 썰어서 오븐에 익혀 웨지 감자 Potato wedges를 만들고, 베이컨도 오븐에 넣고, 마늘 가루를 뿌린 삼겹살도 오븐에 넣고 익힌다. 은박지로 싼 고구마도 넣고, 달걀물을 풀어 오븐 달걀찜을 만들기도 한다. 요리가 귀찮은 내게 오븐 켜는 날은 한꺼번에 다양한 요리를 하는 날이다. 한국에서는 거의 써본 적 없는 오븐인데 경험해 보니 매우 간편한 조리 기구란 걸 알게 됐다. 그냥 뭐든지 오븐 속에 다 때려 넣고 익을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나처럼 요리에 소질 없는 사람에게 안성맞춤인 <원시적인 조리기구>가 아닐 수 없다.
요리가 귀찮은 나는 한꺼번에 대용량으로 조리해서 몇 날 며칠 두고두고 먹는 것을 좋아한다. 마치 엄마들이 여행 가기 전에 끓여 놓는다는 곰국이나 카레처럼 말이다. 그렇게 한 솥 가득 끓여 놓고 당분간은 요리에 대한 걱정을 안 하고 싶은데 남편은 이 대용량 음식 조리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생각해 보니 캐나다에서는 한국처럼 완전 조리된 음식을 냉장고에 보관하다가 끼니때마다 꺼내 먹는 문화가 거의 없다.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은 먹다가 모자라는 것보다 많이 해서 남기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음식도 넉넉하게 준비하고 먹다 남는 음식은 통에 담에 냉장고에 보관한다. 그런데 서양 음식은 일단 반찬이라는 개념이 없고 조리도 딱 먹을 만큼 한다. 크리스마스나 추수감사절 같은 명절에는 남은 음식을 냉장고에 보관하기도 하고, 소스 종류는 미리 만들어 보관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보통은 먹을 만큼만 조리를 하고 냉장고에는 조리하지 않은 식재료를 보관한다. 그래서 우리 집 냉장고에 들어 있는 완전 조리된 식품은 대부분 한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조리를 하지 않고도 냉장고에서 밥과 반찬을 꺼내서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지만, 남편의 메뉴는 대부분 그때그때 조리가 필요하다. 만약 조리하기 귀찮다면 그냥 빵에 버터나 잼을 발라 먹는 수밖에 없다.
남편은 꼭 토스터에 식빵을 구운 후 버터를 바른다. 그런데 나는 토스터에 구운 식빵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구운 식빵은 너무 건조하고 딱딱해서 싫다. 나는 부드럽고 폭신폭신한 식빵에 마가린을 발라 먹는 것을 선호했다. 그러나 남편의 마가린 반대에 부딪혀서 나는 마가린과 이별을 해야 했다. 다른 이의 취향에 별다른 의견을 내지 않는 남편이지만 마가린만큼은 건강을 위해 절대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기 때문이다. 마가린을 떠나보내고 나서 나는 식빵에 딱딱한 버터를 바르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남편은 토스터에서 막 구워져 나온 따끈따끈한 식빵 위에 딱딱한 버터를 잘도 펴 바른다. 작은 버터 덩어리를 식빵 위에서 녹이며 살살 바르는 폼이 역시 하루 이틀 해본 솜씨가 아니다. 내가 사는 노바스코샤에서 버터는 한여름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 딱딱한 채로 굳어 있다. 때문에 차가운 빵에는 잘 발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버터 대신 크림치즈로 취향을 바꿨다. 식빵 하나를 먹어도 한국 사람과 캐나다 사람의 취향은 이렇게 다르다.
요즘 우리 동네 Costco에서 김치와 조미김을 팔기 시작했다. 내 이민 초기에는 꿈도 못 꾸었던 일이다. 덕분에 김치 담는 수고를 덜었고 짭조름한 조미김을 손쉽게 먹을 수 있게 되었다. 한국 사람은 밥과 김, 김치 만으로도 뚝딱! 한 끼 해결이 가능하다. 오래전에 시댁 식구들에게 조미김을 보여 주었을 때 다들 ‘검은 종이’ 같다고 하며 입에 대기를 꺼렸었다. 그런데 이제는 시댁 식구들도 조미김을 좋아한다. 다만 밥반찬이 아니라 그냥 과자처럼 간식으로 즐긴다. 간식이면 어떻고 반찬이면 어떠랴. 내 바람은 Costco에 김과 김치가 항상 있어주길 바랄 뿐이다. 이따금 Costco에 김치와 김이 떨어졌을 때는 <오늘 뭐 먹지?>에 대한 고민이 길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 울프빌 살 때, 그 동네에 유명한 푸줏간이 하나 있었다. 그곳은 정육점보다 푸줏간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정도로 작은 시골마을에 있는 가게 치고는 규모가 꽤 컸다. 그곳에서는 고기는 물론이고 소꼬리, 우족, 돼지족 등도 살 수 있었다. 요즘은 가격이 조금 오르기도 했지만 한국에 비하면 여전히 싼값으로 소꼬리, 우족등을 살 수 있다. 아마 10~20 달러어치 사면 4인 가족이 먹기에 충분할 것이다. 내가 이 푸줏간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따로 있다. 소꼬리나 우족은 맛도 좋고 건강에도 좋지만 무엇보다 한번 끓여 놓으면 오래 두고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며칠 동안 끓이고 또 끓이기를 반복하며 먹을 수 있으니 한동안 메뉴 걱정을 안 해도 되어서 더욱 좋다. 더구나 추운 캐나다와 뜨끈한 곰탕은 썩 잘 어울린다.
요즘은 귀찮아서 돼지족을 사서 족발을 만들어 먹지는 않지만 이민 초기에는 그 푸줏간에서 족을 사다가 족발을 많이도 만들어 먹었었다. 한국에서 살 때 자주 배달시켜 먹었기에 이민 후 족발 금단증상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아무튼 족발을 자주 만들어 먹었다. 캐나다에서 돼지족을 사는 사람은 거의가 한국인 아니면 중국인일 게다. 수요가 적어서 그런지 가격이 쌌다. 족발에 들어가는 부대재료도 동네 슈퍼마켓에 가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서 그렇지 비용면에서는 경제적이었다. 남편의 친구 C는 그때 맛본 족발에 반해서 손수 족발을 만들어 먹는다. 요즘은 나보다 그 친구가 더 자주 족발을 만들어 먹는 것 같다.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K-족발이 자랑스럽다.
한국에서는 배달 음식은 물론이거니와 외식도 잦았지만
이민 후에는 한국에서 만큼 외식을 자주 하지 못한다. 가격도 비싼 데다가 내 입맛에 그다지 맞지 않으니 돈 주고 사 먹기가 아깝다. 그래도 이따금 외식을 하긴 하는데 우리 부부는 주로 중식당이나 일식당을 찾는다. 캐나다의 일식당에는 활어회는 없지만 숙성된 생선으로 만든 회와 생선 초밥은 있다. 일식당은 한국의 일식당과 큰 차이가 없지만 중식당은 좀 다르다.
캐나다의 중식당에는 짜장면이 없다. 탕수육, 짬뽕도 물론 없다. 알고 보니 캐나다 뿐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중식당의 메뉴가 비슷한데, 이것은 서양식 입맛에 맞게 계량된 것 같았다. 그래서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계량된 한국식 중식당과는 메뉴 구성이 다르다. 계란볶음밥이나 소고기 볶음, 돼지고기 볶음, 볶음 국수, 생선, 해산물 요리 등이 있는데, 서양인의 입맛에 맞게 변형되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먹던 것과는 조금 다르다. 나는 튀긴 고기를 생강과 함께 볶아 내는 진져 비프 Ginger Beef를 제일 좋아한다. 맛과 식감이 탕수육과 비슷하다. 노바스코샤 옆에 있는 뉴브런즈윅주에 가면 한국식 중식당이 있다고 들었다. 한국인 사장님이 직접 만들어 주는 짬뽕이 맛있다고 소문이 자자하다. 언젠가는 나도 꼭 들러서 캐나다 해산물로 만든 얼큰한 짬뽕을 먹어 보고 싶다.
아무리 요리를 즐기지 않는다 해도 먹고 싶은 게 생기면 내 손으로 만들어 먹어야지 별수 없다. 그런데 노바스코샤에서는 요리 재료를 구할 수가 없어서 요리를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언젠가 물엿이 떨어져서 마트에 물엿을 사러 갔었다. 여기서는 물엿 대용으로 콘시럽 Corn Syrup (옥수수당)을 쓴다. 그날은 마트를 아무리 돌아다녀도 콘시럽이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서 점원에게 물어보았다. 내 질문에 점원은
“옥수수당이요? 그거라면 저쪽의 아침식사를 위한 공간에 있잖아요”
이렇게 대답했다. 아침식사라구? 나는 콘시럽이 아침식사용이라는 말을 그때 처음 들었다. 점원이 가리키는 곳은 입구 바로 앞이었다. 그곳에는 <아침식사 Breakfast>라는 글이 커다랗게 적혀 있었고 각종 시리얼과 잼, 땅콩버터, 꿀, 메이플 시럽, 콘시럽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아, 시럽! 내 머릿속에서는 물엿만 생각했기 때문에 빵이나 커피에 넣어 먹는 그 시럽이 바로 콘시럽, 즉 물엿이라는 걸 연결 짓지 못하고 있었다. 물엿이 시럽인 것을 까먹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나는 진열장에 줄지어 서있는 물엿, 아니 콘시럽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곳에서 발견한 예쁜 유리병에 담긴 콘시럽은 요리용이 아니라서 내가 평소에 쓰는 콘시럽보다 대여섯 배는 더 비쌌다. 콘시럽 병을 들었다 놨다 하다가 결국 나는 빈손으로 돌아왔고 그날 물엿이 들어가야 하는 요리는 만들지 못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에 다운타운까지 나가서 요리용 콘시럽을 샀다.
이처럼 재료가 없어서 먹고 싶은 음식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생각지도 못한 내 입맛의 변화로 인해서 포기하는 음식도 생겼다. 어느 날, 물냉면이 너무 먹고 싶었던 나는 한인 마트에 가서 인스턴트 냉면을 사 왔다. 나는 포장 겉면에 쓰인 대로 조리를 했다. 고대하고 고대하던 물냉면이었다. 머릿속으로 수십 번 상상했고 동영상 먹방을 보며 입맛을 다시던 물냉면이었다. 드디어 물냉면 완성! 나는 천천히 냉면 육수부터 한 모금 마셨다. 근데 어?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면발을 한 젓가락 먹어 보았다. 역시 어? 이게 뭐지? 나도 모르게 또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맛이 없었다. 그냥 질긴 면발이 밍밍하고 시큼한 소금물에 담겨있는 것 같았다. 나는 조리법을 다시 꼼꼼히 확인해 보고 유통기한까지 확인했다. 모두 이상이 없었다. 이상하다 싶어서 나는 다시 새로운 물냉면을 만들었다. 쓰여있는 조리법을 다시 한번 꼼꼼하게 확인했고 신중하게 조리했다. 새로운 물냉면 완성! 서둘러 맛을 보았다. 그런데 어?! 실망스럽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맛이 이상했다. 아무리 인스턴트 냉면이라지만 그 제품은 내가 한국에서도 즐겨 먹던 대기업에서 만든 것이었다. 한국에서 먹을 때는 너무 맛있게 먹었는데, 똑같은 물냉면이 지금은 왜 이리 맛이 없는 건지 한참을 생각했다. 결론은 내 입맛이 변한 거였다. 생각해 보니 나는 물냉면을 먹어 본 지가 무려 10여 년이 넘었다.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비빔냉면만 먹었다. 그러니 이제는 정말 물냉면의 맛이 가물가물 할 지경이 된 것이다. 믿기지도 않고 슬프기도 했다. 그리고 오랜 해외생활로 인해 내 입맛이 변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요리에 관심이 없는 만큼 나는 주방 도구에도 별 관심이 없어서 우리 집 부엌에는 주방용품이 빈약하기만 하다. 그렇지만 내 부엌에서 유일하게 폼나는 주방가전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전기압력밥솥이다.
나는 처음 이민 올 때 한국에서 쓰던 주방가전을 하나도 가져오지 못했다. 한국과 캐나다는 전압이 달라서 한국에서 쓰던 것들은 모두 친지나 친구에게 주고 왔는데 전기밥솥을 가져오지 못한 것은 후회가 됐었다. 다행히도 캐나다에 이사 오자마자 밸류 빌리지 Value Village라는 중고품 상점에서 전기밥솥을 발견했다. 보온이 안되고 밥 짓는 기능만 되는 전기밥솥인데 가격은 고작 1달러 49센트였다. 나는 그 전기밥솥을 사서 무려 6년 넘게 사용했다. 그리고 그 밥솥이 고장 나자 시어머니가 자신의 집에 있는 안 쓰는 전기밥솥(역시 밥 짓는 기능만 있음)을 내게 주었다. 시어머니에게 얻은 전기밥솥도 몇 년 동안 사용하다 보니 그마저도 고장이 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냄비밥을 지어먹었다. 한동안 전기밥솥을 사지 않고 몇 년을 버틴 이유는 순전히 누룽지 때문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누룽지를 먹기 위해 귀찮음을 감수하고 냄비밥을 지어먹었는데 2년 전 크리스마스 선물로 남편이 한국산 전기압력밥솥을 사준 것이다. 골든핑크빛이 감도는 우주선을 닮은 이 밥솥은 우리 집 부엌에서 제일 빛이 난다. 새 밥솥은 나의 최애 간식 누룽지를 만들어 주지는 않지만 친절하고 상냥하게 Starting the Rice!라고 말해준다. 한국산 쿠쿠도 캐나다에서는 영어로 말한다. 한국 사람이라면 맛있는 밥만 있어도 먹거리 고민이 반으로 줄어들기 때문에 내게 밥솥은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으뜸 주방가전이 아닐 수없다.
여름에는 나의 식사 메뉴 고민이 짧아진다. 작지만 소중한 텃밭의 깻잎 덕분이다. 나는 우리 집 현관문만 열면 있는 깨밭에서 깻잎을 잔뜩 따다가 쌈을 싸 먹는다. 소고기 돼지고기는 물론 캔참치, 소시지 등 닥치는 대로 깻잎에 싸 먹는다. 깻잎쌈이 질리면 깻잎 비빔밥, 깻잎 비빔국수를 해 먹는다. 뒷마당에 가득한 야생 참나물까지 곁들이면 더욱 향긋한 비빔밥을 먹을 수 있다. 나의 여름 식탁은 푸성귀들 덕분에 싱싱하고 향긋하다. 요리에 게으른 나 같은 사람이 밥상을 차리기에는 여름이 훨씬 유리한 것 같다.
한국 손님이 우리 집을 방문하면 내가 제일 많이 하는 요리가 카레와 김밥이다. 우리 집에는 일 년 열두 달 김밥용 김과 단무지가 준비되어 있다. 샌드위치용 햄, 치킨너겟, 해쉬브라운, 핫도그, 타코 소스 등 모든 게 다 김밥 재료가 된다. 일명 막김밥이다. 이것저것 막 넣어서 만드는 막김밥이라고 해도 절대 빼먹으면 안 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단무지다. 단무지가 들어가야 비로소 김밥 다운 김밥이 된다. 놀러 다닐 때는 김밥만큼 영양가 있는 간편식이 없다. 캐네디언들에게도 김밥은 인기가 많아서 파티나 피크닉 갈 때 내가 김밥을 싸가면 다들 너무 좋아한다.
한국에서 우리 집을 찾는 손님들이 오면 더없이 기쁘지만 내게 가장 큰 어려움은 역시 식사 문제다. 손님이 오기 전에 설레고 기뻤던 마음도 일주일 넘게 식사 대접을 하다 보면 마냥 신나고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집을 찾는 손님들을 위해, 게스트와 호스트 모두의 행복을 위해 새로운 법을 하나 만들었다. 그것은 바로 <집은 내 집같이, 부엌도 내 부엌같이!>이다. 손님들이 직접 부엌에서 손수 음식을 해 먹길 바라는 나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수칙이다. 잠 잘 방과 조리할 수 있는 부엌은 얼마든지 제공할 테니 제발 알아서 식사문제를 해결했으면 하는 부탁과 바람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누구나, 언제나 우리 집 방문은 환영이며 나 역시 그들과 기쁘고 행복하게 놀아줄 준비가 되어있다.
살기 위해 먹느냐? 먹기 위해 사느냐?라는 문제로 학창 시절 친구들과 설전을 벌인 기억이 누구나에게 다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철학, 문화학, 사회인류학, 생물학, 식품영양학 등과 더불어 세계 식량자원의 문제까지도 고찰해야 하는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생각할수록 복잡하고 어려워서 쉽게 결론 내릴 수가 없다. 먹고사는 문제는 여러 가지 영향을 받겠지만 무엇보다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요건이 되는 것 같다. 캐나다 노바스코샤에서 사는 나의 먹거리가 한국에서 살 때와 같을 수 없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외국에서 사는 교포들에게 신토불이는 어렵기만 하다. 그렇지만 생각 없는 내 ‘혀’는 아직도 한국의 맛을 기억하고 신토불이를 달라고 떼를 쓴다. 그래서 우리 집 주방 한쪽에 각종 인스턴트 라면을 쟁여 두었다. 한국 라면이라면 한식 맛을 기억하며 떼를 쓰는 내 혀를 잠시 잠재울 수 있다. 어디까지나 잠시뿐이지만 말이다.
오늘은 뭘 먹을까? 아무래도 오늘은 냉장고에 있는 것들을 다 넣고 막김밥을 싸 봐야겠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에는 막걸리에 파전이 간절하지만 캐나다 시골에 사는 이민자는 막김밥에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아! 그리워라 시골 장터에서 파는 막걸리와 파전!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