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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노바스코샤의 겨울

민재 미첼 MJ Mitchell

by 민재 미첼 MJ Mitchell

34. 노바스코샤의 겨울


우리 집 자동차 바퀴를 스노우 타이어 Snow Tire로 교체했다. 겨울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남편의 겨울 준비는 매해 11월 자동차의 타이어 교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타이어를 교체해 두어야 예고 없이 눈이 온다 해도 걱정이 없기 때문이다. 계절에 따라 타이어를 교체하는 일은 한국에서 살 때는 하지 않았은데 노바스코샤에서는 연중행사가 되었다.

노바스코샤는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서 내륙에 비해 덜 춥고 눈도 적게 온다. 그래도 캐나다는 캐나다다. 퀘벡이나 에드먼턴 같은 내륙 쪽으로 가면 진짜 혹독한 캐나다의 겨울을 맛볼 수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노바스코샤의 겨울도 충분히 춥고 길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나는 털부츠와 장갑과 모자를 꺼내 현관 옆에 준비해 둔다. 우리 집 현관에는 모자와 장갑만 넣어두는 작은 바구니가 있다. 매서운 북대서양의 찬바람에 귀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면 따뜻한 모자나 목도리가 꼭 필요하다. 모자를 썼다 벗었다 하려면 겨울에는 헤어스타일 따위는 포기하고 살아야 한다.

또 다른 겨울 필수품은 털부츠다. 이곳에 사는 한인들은 거의 모두 애착 부츠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 오래전 어느 해 겨울에 한인 친구들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현관에는 사람들이 벗어 놓은 각양각색의 털부츠가 가득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진풍경이었다. 그 당시 이민 초짜배기였던 내게는 참으로 인상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랬다. 노바스코샤에서 겨울을 나려면 털부츠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나도 캐나다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겨울에 방한 부츠를 장만했고, 몇 번의 겨울을 보낸 결과 기능에 맞는 부츠가 몇 개 더 늘었다. 그래서 나는 애착 부츠 두 개와 애착 장화 한 개가 있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긴 패딩 부츠와 매일 편하게 신는 어그부츠와 속에 털이 달린 장화가 하나 있다. 장화는 눈이 녹아 길이 젖었을 때를 위한 것이다. 나는 이 애착이들이 없으면 겨울을 날 수 없다. 소중한 나의 겨울 장비 Winter Gear 들이다.

캐네디언들의 윈터 기어 Winter Gear 준비는 철저하고 꼼꼼하다. 혹독한 겨울 날씨를 경험 삼아서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튼튼한 윈터 기어 상품들을 개발했다. 의류뿐 아니라 캐나다산 캠핑, 등산 장비는 전문가들에게 더욱 사랑받을 정도로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캐나다 제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아마 <캐나다 구스> 일 것이다. 세계 어디엘 가도 겨울만 되면 캐나다 구스 재킷을 입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이 제품은 품질이 좋은 만큼 가격이 비싸기로 유명하다.


대부분의 캐네디언들은 눈이 오기 전날 눈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한다. 눈 냄새가 난다고 한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눈이 왔다. 눈 예보 적중률 100%였다. 남편이 내게 눈 냄새가 난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날이면 눈이 내렸다. 우연인가 싶었는데 몇 번을 계속 맞추니까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의 다른 캐네디언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했더니, 그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자신들도 눈 냄새를 맡는다고 하면서 오히려 나에게 눈 냄새를 모르냐고 물었다. 눈 냄새가 난다고? 그것도 눈 오기 전날? 나는 눈 냄새를 맡는 캐네디언들이 신기했고, 캐네디언들은 눈 냄새를 신기해하는 나를 신기해했다. 그런데 캐나다에서 10년 넘게 살다 보니 이제는 나도 눈 냄새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아직 적중률 100%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눈 냄새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감이 온다. 그것은 묵직하고 축축한 공기 중에 풍겨오는 약간 비릿한 이끼 냄새 같다.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는 내게 내복은 절대 빼먹을 수 없는 겨울 필수품이다. 이민 온 첫해에 엄마는 내게 내복을 3벌이나 보내주었다. 엄마가 장날 샀다는 분홍색 ‘삼중 보온메리’를 10년 넘게 입었더니 이제 너덜너덜해졌다. 몇 년 전부터는 가볍고 얇은 발열내의가 나와서 몇 벌 사기도 했지만 나는 여전히 엄마가 사준 순면 보온메리가 좋다. 겨드랑이가 찢어지고 손목의 실밥이 다 풀려도 이 내복들을 버릴 수가 없었다. 몇 해 전에 우리 집을 방문 한 엄마가 추운 곳에 사는 딸 걱정에 또 내복을 사 왔다. 가슴에 주황색 레이스가 있는 화려한 꽃무늬 ‘삼중 보온메리’였다. 장에 가서 예쁜 내복을 고르느라 고생했을 엄마의 정성을 생각해서 입긴 입지만 나는 여전히 낡은 분홍 내복이 제일 좋다. 너무 낡아서 이제는 입지도 못하지만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드넓은 운동장에 하얀 눈이 쌓인 날, 나는 아무도 밟지 않은 숫눈을 밟아 보고 싶어서 아침 일찍 등교해 본 기억이 있다. 그러나 운동장에는 나보다 먼저 온 누군가의 발자국이 찍혀 있어서 실망을 했었다. 나는 한국에서는 이루지 못했던 어린 시절 버킷리스트였던 <눈 위에 나만의 발자국 남기기>를 캐나다에 와서야 실현할 수 있었다. 캐나다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겨울이었다. 운동장만큼 넓은 시댁 마당에 눈이 쌓이자 나는 이성을 잃고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에 내 발자국을 찍으며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다가 그만 주머니에 넣어 둔 안경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내 평생 처음으로 키보다 더 큰 눈사람도 만들고 눈 위에 누워서 팔다리를 흔들며 천사도 그려 보며 정신없이 노느라 언제 안경을 떨어뜨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시댁에서 키우는 강아지들, 오그닙과 하이디까지 동원해서 안경을 찾아보았지만 넓디넓은 눈밭에서 안경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남편과 시댁 가족 모두 안타까워하며 내년 봄에 눈이 녹으면 다시 찾아보자고 했다. 그러나 봄이 되어 눈이 녹아도 안경은 보이지 않았다. 감쪽 같이 사라진 안경이 어디로 갔는지 지금도 미스터리다. 그렇게 캐나다에서의 <눈 위에 나만의 발자국 남기기>는 안타까운 안경 실종사건으로 기억됐다.

캐네디언들은 확실히 눈과 친숙해 보였다. 폭설이 내리면 집안에 숨죽여 있다가 눈이 그치면 모두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집집마다 눈을 치우느라 바빠진다. 가정집에서는 주로 눈 치우는 삽이나 가정용 제설기를 사용한다. 겨울이 긴 캐나다답게 제설기의 종류가 아주 다양하다. 나는 특히 사람 다니는 인도 전용 제설차를 좋아한다. 볼 때마다 소인국의 트랙터 같아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추운 곳에서 나고 자란 남편은 비 Rain보다 눈 Snow을 표현하는 영단어를 훨씬 많이 알고 있다. 생각해 보니 나는 눈보다는 비에 관한 한국어를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었다. 온난한 농경사회에서 자란 한국인답다. 북극권에 사는 이누이트의 언어에는 눈을 표현하는 단어가 다른 언어에 비해 훨씬 많다고 한다. 역시 언어는 자연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바스코샤에서 살다 보니 한국에서 살 때는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눈의 성질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눈 Snow이라고 해서 모두 다 같은 눈이 아니었다. 건조한 눈 Dry Snow 은 눈이 잘 안 뭉쳐졌다. 아무리 눈을 굴려도 눈덩이가 커지지 않았다. 젖은 눈 Wet Snow 이 잘 뭉쳐져서 눈사람 만들기에 좋았다. 그런데 젖은 눈은 무거워서 눈을 치울 때 허리를 조심해야 했다. 이민 초기에는 나도 눈을 치우다가 허리를 삐끗하기도 했다. 이제 눈 치우기는 남편 전담이 되었다. 캐나다에서 연하 남편의 효용성이 극대화되는 순간은 역시 <눈 치우기>였다.

폭설이 내리거나 눈 폭풍이 불어오는 날이면 세상은 잠시 멈추었다. 지하철은 물론 이거니와 트램 같은 대중교통이 없는 노바스코샤는 악천후에 대부분의 학교나 상점이 문을 닫는다. 나는 캐나다의 추운 날씨를 싫어 하지만 거리에 오가는 사람, 자동차 한 대 없이 조용한 눈 내리는 날은 좋아한다. 눈이 펄펄 내리는 날, 창문을 열면 코끝이 쨍하게 얼어붙을 것 같은 냉기가 느껴지고 어디선가 장작 타는 냄새가 은은히 풍겨 온다. 그리고 가만히 귀 기울이면 조용하고 차분하게 눈 쌓이는 소리가 들린다. 온 세상이 눈을 덮고 얌전히 누워 쉬는 그런 날이 나는 너무 좋다.



예전에 일본 학생 홈스테이를 한 적이 있었다. 9월에 입학한 학생은 겨울이 되자마자 털부츠를 사 신었다. 그리고 며칠 뒤에 못 보던 겨울 재킷을 가져와서는 내게 자랑을 했다. 학교에서 유학생들을 위해 겨울 외투를 무료로 나누어 주고 있다고 했다. 새 옷은 아니었지만 깨끗하고 품질이 좋아 보였다. 무료 나눔 행사에는 괜찮은 브랜드의 재킷이 많이 있어서 탐이 났지만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서 하나만 가져왔다고 그 일본 학생은 아쉬워했다. 그러나 콜롬비아 Colombia라는 로고가 선명하게 찍힌 패딩을 입어 보이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난민자들이나 이민자들을 위해 봉사 활동을 하는 지인이 말하기를, 해마다 따뜻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위해 겨울 외투 기부를 꾸준히 받고 있다고 했다. 낯설고 추운 나라지만 조금이나마 따뜻하게 지내길 바라는 캐네디언들의 고운 마음씨가 느껴졌다. 겨울이 길고 춥기 때문에 핼리팩스는 홈리스들이 살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캐나다의 모든 홈리스들은 따뜻한 밴쿠버나 빅토리아로 모인다고 농담 삼아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노바스코샤의 겨울 하면 크리스마스를 빼놓을 수없다. 12월이 되면 집집마다, 상점마다 온통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가득 찬다. 처음 캐나다 여행을 왔을 때 크리스마스 장식품만 파는 가게를 보고 적잖이 놀랐었다. 크리스마스 즈음에나 살 법한 장식품들을 일 년 열두 달 팔고 있으면 과연 장사가 잘 될까? 하는 의구심을 가졌었다. 그러나 그 상점은 아직도 망하지 않았고 여전히 매일 문을 열고 있는 걸 보면 이곳 사람들이 얼마나 크리스마스를 사랑하는지 잘 알 수 있다.

시어머니는 12월이 되면 집안의 모든 것들을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바꾸었다. 전나무를 사다가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미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이었다. 트리에 걸어 두는 장식은 오래전부터 시어머니가 만들거나 선물 받은 것들이라서 하나하나에 이야기와 역사가 담겨 있었다. 트리 장식 중에는 60년이 더 된 것도 있었다. 시어머니에게 아무 장식이나 가리키며 ‘이건 어디서 났어요?’라고 물으면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그것을 주었는지 길고 긴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나는 함부로 시어머니에게 장식품들의 사연을 묻지 않았다. 시어머니의 크리스마스 장식품은 그 종류가 많아서 일일이 다 셀 수도 없었다. 담요, 식탁보, 접시, 컵, 냅킨, 컵받침, 오븐용 장갑, 양념통, 실내화, 사진틀, 전등갓, 인형, 거울, 수건, 변기 커버 등등 집안의 거의 모든 물건들이 크리스마스 용으로 바뀌었다. 나는 크리스마스에 열광하는 편이 아니라서 크리스마스 장식에 별 관심이 없지만 시어머니는 집안의 인테리어를 크리스마스로 둔갑시키는 수고를 해마다 했다.

TV 시리즈 <왕좌의 게임 Game of Thrones>에 이런 유명한 대사가 나온다.

“겨울이 오고 있다 Winter is coming”

이 대사는 잔인하고 가혹한 미래에 대한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 캐나다의 겨울을 싫어하는 나를 놀릴 때 남편이 자주 쓰는 말이다. 그만큼 나는 겨울이 오는 것을 두려워한다. 야외 활동을 별로 즐기지 않는 편인데도 공연히 외출이 자유롭지 못한 겨울이 싫다. 그런 내 입장에서 보면 봄이 되면서부터 계속 “Winter is coming”인 것이다. 해마다 어김없이 겨울이 오지만 여전히 겨울과 안 친하다. 스키도 탈 줄 모르고 스케이트도 탈 줄 모르는 나는 집 안에서 러닝머신 위를 걸으며 눈 내리는 창밖 풍경을 감상하며 아직도 캐나다의 겨울에 적응 중이다. 어느새 겨울은 와버렸다. 견뎌야 한다!


글-민재미첼 그림-조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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