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재 미첼 MJ Mitchell
어느새 해가 바뀌었다. 캐나다로 이사 온 후 벌써 열네 번째 맞이하는 새해다. 처음 캐나다 땅에 발을 내려 디딘 때가 어제처럼 눈에 선한데 벌써 까마득한 일이 되었다. 우리 부부는 캐나다행 비행기를 타기 2주일 전까지만 해도 캐나다에서 살 계획이 없었다. 그런데 남편의 급작스러운 퇴직으로 정말 정신없이 짐을 꾸려야 했다. 그렇게 허겁지겁 도착한 낯선 땅에서 벌써 여러 번의 새해를 맞이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추운 나라 캐나다에는 아주 길고 긴 겨울 방학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은 내가 서구식 학기제를 잘 몰랐기 때문에 생긴 오해였다. 서구식 학기제는 겨울방학보다 여름방학이 훨씬 더 길다. 겨울에는 크리스마스 연휴를 끼고 약 2~3주 정도를 쉬는 게 전부이고 한국과 같은 긴 겨울 방학은 없다. 그 대신 여름 방학이 약 3~4개월이나 된다. 겨울에는 주로 실내에서 활동하고 여름에 야외 활동을 할 수 있는 자연환경을 지닌 캐나다에 특히 적합한 수업일정인 것 같다.
긴 겨울 방학이 없다는 것은 한국과 다르지만 연말연시에 쇼핑을 많이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캐나다 뿐 아니라 연말연시에 선물을 주고받는 문화권에서는 거의 비슷할 거라고 생각된다. 아무튼 캐나다의 연말 풍경은 크리스마스와 박싱 데이 Boxing Day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박싱 데이는 원래 <성 스테파노>의 날이고 크리스마스 다음날이다. 크리스마스와 박싱 데이를 묶어서 <크리스마스 연휴 Christmas holidays>가 되는 것이다. 원래 <박싱 데이>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고 기부를 하는 날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은 크리스마스 재고를 할인 판매하는 <자본주의적 박싱 데이>로 인식이 굳어졌다. 남편과 나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기 때문에 박싱 데이 쇼핑은 못 참는다. 성 스테파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할인 행사를 많이 하는 박싱 데이는 역시 쇼핑하기에 제격인 날이 되었다. 아무튼 캐나다의 연말은 크리스마스를 기준으로 나뉜다. 크리스마스 전에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위한 쇼핑을 하고, 크리스마스 후에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교환하거나 선물로 받은 상품권으로 쇼핑을 한다. 결국 캐나다의 연말 풍경은 쇼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내가 이민 온 후 세월이 꽤 흐른 만큼 지금은 한국도 많이 변했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국의 연말 풍경은 겨울방학과 크리스마스와 샛노란 귤이다. 겨울 방학 때마다 손바닥이 노랗게 되도록 새콤달콤한 귤을 까먹었던 기억이 난다. 동네 가게마다 노란 귤을 탑처럼 쌓아놓고 팔곤 했었다. 알록달록한 크리스마스 장식들과 노란 귤은 내 머릿속에 사진처럼 찍혀있는 그리운 한국의 연말 풍경이다. 귤은커녕 오렌지도 자라지 않는 캐나다에는 귤대신 수입 만다린을 판다. 그런데 만다린은 껍질이 두꺼워서 제주산 귤처럼 쉽게 까지지 않는다. 귤은 맛도 좋지만 손쉽게 까먹는 재미가 있는데 만다린은 그런 재미가 없다.
내 기억 속 한국의 <연말> 풍경은 크리스마스와 귤이고, 한국의 <새해> 풍경은 보신각 타종과 해돋이다. 뉴욕의 타임스퀘어 광장에 <볼 드롭 Ball Drop> 행사가 있다면, 서울 종로에는 보신각 종을 치는 <제야의 종> 행사가 있다. 나는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33번의 종소리를 들어야 비로소 해가 바뀌었다는 것을 실감하곤 했었다. 어렸을 때부터 <제야의 종> 행사를 티브이 중계로 보고 자랐기 때문에 이민 후 얼마간은 12월 31일 에서 1월 1일로 넘어가는 순간에 뭔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새해를 맞이하는 절차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캐나다에서는 보신각 종소리를 들을 수 없지만 그 대신 불꽃놀이 폭죽 (중국식 폭죽 아님 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12월 31일, 그 해의 마지막 해가 지면 여기저기서 크고 작은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단체에서 대형 규모의 불꽃놀이 행사를 주최하기도 하고, 가족이나 친구들끼리 모여 뒷마당에서 폭죽을 터뜨리며 묵은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했다.
한국에서 손꼽히는 새해맞이 행사는 단연코 <해돋이>라고 본다. 새해 첫날에는 유명한 해돋이 명소마다 사람들로 바글바글한 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 해마다 보았었다. <해돋이>는 떠오르는 해를 보며 소원을 빌고 마음을 새로 다지는 개인적 시무식始務式인 샘인데,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행사가 아닐 수없다. 태양은 매일 뜬다. 아니 해가 뜨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자전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해를 다시 볼 수 있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1월 1일 뜨는 태양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해돋이 명소에서 빈 소원이 더 잘 이루어진다는 생각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나도 새해가 되면 계획을 세우고 다짐도 하고 소원도 빈다. 게다가 은혜로운 해님은 집안까지도 환하게 비춰주니 집에서도 얼마든지 해를 보며 소원을 빌 수 있다. 그러니 굳이 사람 많은 시간에 사람 많은 장소에 가서 소원을 빌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캐나다에 이민 오고 보니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나는 캐나다에서 1월 1일 날 해돋이 구경을 간다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내 주위의 캐네디언 친구들은 대부분 새벽까지 놀다가 새해 첫날 느지막이 일어나서 구운 베이컨으로 해장을 했다. 주로 맥도널드 햄버거로 해장을 하지만 새해 첫날에는 맥도널드도 쉬기 때문이다.
울프빌에 살 때 우리 부부는 '그 집'에서 동네 사람들과 함께 파티를 하며 새해를 맞이하곤 했었다. 12월 31일이 되면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씩 M과 P부부의 집(이하 '그 집’)으로 모였다. 연주할 수 있는 악기가 있는 사람은 악기를 들고, 나누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음식을 가지고 모였다. 물론 빈손으로 오는 사람도 많았고 그것 또한 아무렇지 않을 만큼 자유로운 파티였다.
그 집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일일이 포옹하며 인사를 나누는 데만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스몰 Small 하지 않은 스몰 토크가 시작되었고 대화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한없이 이어졌다.
영어권에서 가볍게 안부를 주고받는 친근한 잡담을 <스몰 토크 Small Talk>라고 한다. 이 스몰 토크는 전 세계 영어권에 사는 비영어권 이민자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원흉 중의 하나이다. 결코 스몰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원에서 모르는 사람과 눈만 마주쳐도 스몰 토크가 시작될 수 있다. 쏟아지는 구어체 영어에 진땀 빼기 싫은 사람은 다른 사람과 함부로 눈도 마주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파티에서 만난 동네 친구들과의 스몰 토크는 주제가 방대해서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려면 집중이 필요했다. 스몰 토크는 주로 ‘구어체’인 데다가 관용구와 농담이 많다. 그래서 아무리 정신을 바짝 차려도 나 혼자 대화의 길을 잃을 때가 많았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대화의 주제를 놓치면 눈치껏 살며시 음악이 연주되는 방으로 자리를 옮기면 되었다.
그 집의 어딘가에서는 항상 음악 소리가 들렸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신의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하면 하나둘씩 자연스럽게 악기가 보태어졌다. 혹은 누군가가 먼저 노래를 시작하면 그에 맞추어 악기를 연주했다. 기타, 만돌린, 아코디언, 바이올린, 젬베, 하모니카 소리가 어우러지고 사람들은 송구영신을 노래했다.
그 집의 거실에는 악기 바구니가 있는데 그 속에는 온갖가지 모양을 한 마라카스 (셰이커 Shaker)와 트라이앵글, 캐스터네츠, 피리 등이 담겨있었다. 누구나 어울려서 음악을 즐길 수 있게 집주인 M과 P부부가 세심하게 준비해 둔 것이었다. 나는 한국의 타악기인 <장구>를 가져가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도 했었다. 제이슨 므라즈 Jason Mraz의 노래에 삼채 장단이 썩 잘 어울렸다.
그 집에서 저마다의 방법으로 연말 파티를 즐기던 사람들은 자정이 되기 전에 모두 정원으로 모였다. 그리고 자정을 10초 앞두고 다 함께 큰소리로 숫자를 거꾸로 세어 나갔다. 드디어 3, 2, 1! 모두가 목청 높여 외쳤다. Happy New Year! 이 소리와 동시에 하늘 위로 불꽃이 튀어 올랐다. 피웅~! 깜깜한 밤하늘로 빛줄기가 솟아오르다가 펑! 하며 반짝이를 쏟아냈다. 불꽃이 꽃처럼 활짝 피었다 사그라들기를 반복하는 사이 사람들은 서로 포옹하며 덕담을 주고받았다. 집주인 M 씨는 정확한 시간에 맞추어 폭죽을 터뜨리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어느 해는 비가 와서 폭죽이 잘 안 터지기도 했었고, 어느 해는 카운트다운이 채 끝나기도 전에 폭죽이 터져 버리기도 했었다. 폭죽 타이밍 맞추기는 어느새 M 씨의 자존심이 되었다.
울프빌을 떠나 도시 근처로 이사 오고부터 우리 부부는 핼리팩스 다운타운에서 열리는 불꽃축제를 보며 새해를 맞이하곤 했다. 핼리팩스의 불꽃축제는 멋진 밴드 공연도 있고 폭죽의 규모도 크다. 그렇지만 유명 엠시와 유명 가수가 나오는 축제를 구경하는 동안에도 나는 여전히 그 집의 소박한 연말연시 파티가 그리웠다. 정겨운 이웃들과 함께하는 송구영신은 포근하고 따뜻했다.
<새해>라는 말에는 강력한 각성효과가 있는 게 분명하다. 어떤 잘못이나 사실 등을 깨달아 알게 한다는 ‘각성’의 사전적 의미대로, 새해에 모든 사람들은 지난해를 반성하고 새로운 각오를 다진다. 1월 1일이 되면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각성 바람이 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작심삼일이 될지언정 많은 사람들이 다이어트나 금연 계획을 세우는 걸 보면 <새해 각성>은 다른 생물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오직 호모사피엔스에게만 발현되는 특이 증상이라고 생각된다. 모든 호모사피엔스의 새해 각성이 아름다운 결말을 짓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반성하고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마음자세만으로도 각성효과는 충분하다고 하겠다.
매해 연말만 되면 <다사다난多事多難>한 해였다는 말을 수없이 듣는다. 올해는 참으로 다사다난했다 싶다가도 돌이켜보면 매해가 정말 다사다난했던 것 같다. 개인사도 물론 그렇지만 국제적으로도 그렇고 대한민국을 놓고 보면 정말 다사다난의 끝장판을 보여주었다고 본다. 재작년에도 그랬고 작년에도 그랬으니 새해에도 어김없이 다사다난할 것 같다. 이쯤 되면 겁도 안 난다. 한 두해 다사다난한 것도 아닌데 올해라고 특별히 겁날 이유가 있겠는가? 누구에게나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까짓 다사다난쯤이야 일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다사다난한 일을 담고 지구는 쉬지 않고 돌아갈 것이고, 우리는 우리에게 닥칠 다사다난을 어떻게든 견뎌내고 버텨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한다. 복을 많이 받아야 다사다난을 견디고 버텨낼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을 받으려면 먼저 복을 지어야 한다는데, 올 한 해도 복을 많이 짓고 많이 받으려면 흥미진진한 해가 될게 분명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동물들과 나무와 풀과 꽃과 생명 있는 모든 것과 생명 없는 것들까지 모두 모두 복 많이 짓고 복 많이 받고 흥미진진한 삶을 살길 기도해 본다.
글-민재미첼 그림-조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