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서 사는 기간이 늘어날수록 대한민국이 점점 더 낯설어지고 있다. 여전히 내 조국이고 내 고향임은 변함이 없지만 TV 속에 비친 한국의 모습은 내가 알던 한국의 모습과 많은 차이가 있어 보였다. 내가 한국을 떠난 십몇 년 동안 변화무쌍한 대한민국답게 땅의 지형도 변하고 문화도 변하고 있다. 지난번에 한국에 들렀을 때도 그랬지만 다음에 한국에 가면 나는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어리바리한 교포 아줌마가 될게 뻔하다.
"한국에 가니까 한국사람들 얼굴이 다 똑같아 보이는 거야"
캐나다에서 오랫동안 살던 교포가 한국에 다녀오고 나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아직까지 그 정도는 아니지만 해가 갈수록 그 말을 실감하게 된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이런 경험을 많이 했다. 등장인물 모두가 까만 머리에 까만 눈, 체형도 비슷비슷해서 누가 누구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각 인물의 옷이나 액세서리 등으로 겨우 구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교복이나 군복, 죄수복처럼 단체복을 입고 등장하는 영화라면 각각의 등장인물을 구별하기가 더욱 어렵다. 도대체 어떤 놈이 죽고, 어떤 놈이 죽인 건지, 누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한국의 아이돌 얼굴을 구별하는 것 역시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슈퍼주니어, 2NE1, 소녀시대가 각각의 멤버를 구분할 수 있는 나의 한계다. 내 기준으로 보면 요즘 아이돌들의 얼굴은 거의가 똑같다.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BTS도 ‘RM’을 제외하면 모두 비슷해 보인다. 그래서 머리색과 같은 외형의 특징으로 구분해야 한다. 그런데 아이돌들은 새로운 앨범이 나올 때마다 스타일을 바꾸기 때문에 또다시 헛갈리기 일쑤다. 내가 이 정도인데 서양 사람은 오죽하겠는가. 서양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머리색과 눈색이 동일한 동양인을 구별하는 일은 더욱 쉽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요즘 한국의 젊은 여자들은 점점 더 서로를 닮아간다. 예쁜 눈, 예쁜 코, 예쁜 턱, 예쁜 이마 등 정형화된 얼굴이 서로 많이도 닮았다. 세계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한국의 미용성형술이 <복제미인>을 대량생산하고 있는 중이다. 나에게 더욱 놀라운 일은 미용성형에 대해 지나치게 당당하다는 것과 사회적 허용 또한 지나치게 관대하다는 것이다. 연예인은 물론이고 사회저명인사들까지도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얼굴이 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게다가 매스컴들은 하나같이 성형사실을 밝힌 사람들을 솔직하고 털털하다고 포장해 주며 성형이 용기 있고 당당한 삶을 찾아주었다고 말한다. 나는 이런 사회 환경에서 자란 청소년들은 타고난 자신의 외모를 좋아할 리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기의 정체성은 부정되고 인공으로 만들어진 껍질을 욕망하게 될 것이다.
내가 느끼는 또 다른 낯선 한국 문화는 스마트폰의 보급, 상용화다. 한국에서는 전 국민이 스마트폰을 이용한 정보 통신망과 함께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바일의 일상화다. 물론 노령이나 극빈 등의 이유로 모바일의 삶으로부터 소외된 계층도 분명 존재하겠지만 보통의 대한민국 생활인이라면 누구나 모바일을 이용하고 있다. 이점은 캐나다와 크게 다른 것 같다. 우리 동네에서는 아직도 피자 주문이나 중국음식 주문을 하기 위해서 전화를 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남녀노소 누구나 ‘앱’을 이용해서 간편하게 주문하고 결제까지 한다. 이것은 노바스코샤에서 15년째 사는 한국 아줌마 눈에는 이만저만 신기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이민 올 즈음에는 전화상으로 은행 업무를 처리하는 ‘텔레뱅킹(폰뱅킹)’이 있었다. 텔레뱅킹은 공인 인증서와 보안카드를 발급받아야 했고 ARS 대기 시간이 길어서 불편했는데 요즘은 스마트폰만 있으면 어디에서든 은행업무를 볼 수 있는 모바일뱅킹을 한다고 하니 IT강국 대한민국 답다. 물론 캐나다에서도 모바일뱅킹 시스템이 있다. 다만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한국에 비해 현저히 적다.
15년 전 남편과 나는 캐나다행 비행기를 타기 전날 각자의 휴대폰을 해지하면서 앞으로는 휴대폰 없는 평화로운 삶을 살기로 약속했었다. 그리고 캐나다에 도착한 후 그 약속은 몇 년간 잘 지켜졌다. 그러나 휴대폰 없이 4년을 버티던 남편도 결국 스마트폰을 개설하고 말았다. 나는 휴대폰 없는 삶을 무려 13년이나 이어갔는데
남편이 나보다 더 폰 없는 나를 갑갑해했다. 결국 재작년 크리스마스 선물로 그는 내게 폰을 개설해 주었다. 나는 노트북과 태블릿 PC만으로도 충분히 21세기답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스마트폰이 생기고 보니 비로소 21세기의 삶이 완성된 느낌이 들었다.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세계를 스마트폰 속에서 찾은 기분이다.
한국의 풍경 중에 눈에 띄게 변한 것은 새로운 아파트의 외관이다. 요즘 지어진 아파트 건물은 내가 살던 때와는 많이 달라 보인다. 예전에 지은 아파트들은 직사각형의 납작한 책을 줄지어 세워 놓은 듯 보였는데 요즘의 아파트는 창문이 다닥다닥 박힌 다각형의 큰 기둥처럼 보인다. 이제 한국에서는 책을 도미노처럼 세워 놓은 아파트의 풍경은 점점 사라지고, 보다 입체적이고 기하학적인 초고층 건물이 채워지고 있다.
지난번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인천에 있는 송도국제도시에 갈 기회가 있었다. 송도에 그렇게 규모가 큰 인공 도시가 세워지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는데, 어마어마한 규모의 간척지 위에 세련된 미래형 도시가 세워진 걸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건물의 외관이나 공원, 산책로, 수로 등이 어쩌면 그렇게... 인공적이던지! 인공수로에서 로봇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인공적 아름다움으로 가득 채운 도시가 내 눈에는 어색했지만 한국에서는 최고의 주거환경지로 손꼽힌다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송도국제도시를 보며 한국인들의 개발지향적이고 세련강박적인 도시 개발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잠실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렇기 때문에 잠실의 풍경은 언제나 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그런데 지난번 한국 방문에서 내가 알던 잠실이 아닌 아주 생경하고 낯선 풍경을 마주했다. 그것은 바로 L타워였다. 사실 한국을 방문하기 전에 L타워가 세워진 잠실의 사진을 인터넷뉴스 등을 통해서 보았었다. 처음 사진을 보았을 때는 그곳이 잠실이 아닌 줄 알았다. 너무 높고 뾰족한 초고층 빌딩이 호숫가에 우뚝 서있는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한국에 가서 내 두 눈으로 직접 보니 사진에서 보았던 것보다 더욱 큰 이질감이 들었다. 날카로운 이쑤시개 하나가 호숫가에 꽂혀있는 것처럼 보였다. 건물 하나 새로 지어졌을 뿐인데도 내 추억이 깃든 잠실이 사라진 것만 같아 조금 서글펐다.
변화의 속도가 느린 캐나다에서 살다 보니 한국의 변화 속도에 눈이 핑핑 돌 지경이다. 한국의 고속철도는 캐네디언들이 특히 부러워한다. KTX(한국고속철도)는 내가 이민 오기 5년 전에 개통되었고, 지금까지 꾸준히 발전해서 대한민국 곳곳을 달리고 있다. 서울에서 경남, 호남 지역까지 순식간에 갈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요즘은 강릉까지 KTX를 타고 갈 수 있다고 들었다. 게다가 불과 1시간 40분 걸린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예전에는 서울에서 강릉이나 속초 쪽으로 가려면 대관령이나 한계령을 넘는 고속도로를 이용하곤 했다. 명절이나 휴일이면 고속도로에 차가 막혀서, 서울에서 강릉까지 6시간에서 길게는 10시간까지 걸리기도 했던 고난의 길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고작 1시간 40분 이면 갈 수 있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내 기억에 태백산맥을 넘어 동쪽으로 가는 옛 고갯길은 모두 운치 있고 아름다웠다. KTX를 타면 한계령 휴게소를 지나는 그런 운치는 없겠지만 그래도 1시간 40분 만에 서울에서 강릉까지 갈 수 있다니 생각만으로도 멋지다. 다음에 한국에 가면 내가 좋아하는 감자옹심이 먹으러 KTX 타고 강릉엘 꼭 가봐야겠다. 내 친구는 자동차로 3시간 거리를 기차를 타고 10시간 걸려서 도착한 적이 있다고 했다. 물론 케나다에서의 일이다. 기차 티켓값도 엄청 비쌌다고 했다. 이런 실정이다 보니 캐나다에서 한국의 고속철도를 부러워하지 않을 수없다.
해외에서 살다 보면 한국에서 살 때 보다 더 한국 뉴스에 관심이 간다. 이민 초기에는 한국 뉴스를 딱 끊고 살았지만 역시 내 조국을 영원히 모른 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다시 한국 뉴스를 보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이게 너무 흥미진진하다 보니 이제는 뉴스를 끊을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안타까운 뉴스도 많고 분노하게 만드는 뉴스도 많아서 일일 드라마처럼 다음 방영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그렇게 한국 뉴스를 보다가 이해할 수 없는 사회현상을 하나가 내 눈에 띄었다. 그것은 바로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스트>에 대한 부정적 시각과, 이로 인한 양극화 현상이 사회적으로 넓게 퍼져있다는 것이다.
성별에 의한 차별을 없애고 여성의 사회, 정치, 법률상의 지위와 역할의 신장을 주장하는 페미니즘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이 많고 그로 인해 사회 갈등이 증폭된다니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거시적으로 보면 페미니즘은 ‘인류애’와 같은 맥락이 아닌가. 인종, 민족, 국적, 종교 등의 차이를 초월한 모든 인류에 대한 사랑이라는 ‘인류애’와 ‘페미니즘’의 다른 점은 여성에게 좀 더 포커스를 두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인류역사상 여성은 남성에 비해 소외되고 차별받아 왔던 것이 사실이다. 놀라운 것은 현재에도 여전히 남녀 불평등이 만연하다는 것이다. 여성에게도 정당한 권리를 인정해 주자는 것은 사회공동체를 위한 옳고 바른 도리, 즉 정의正義의 문제이다. 이런 페미니즘이 어째서 사회적 저항을 불러올 수 있는 논쟁거리가 될 수 있단 말인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없다. 더구나 조선시대도 아닌 21세기에 말이다. 일부 속좁고 찌질한 남성들 사이에서나 나올법한 비논리적 좁쌀 공론이 어째서 사회적 이슈로까지 확장되어야 했는지 나로서는 실망스럽기만 하다. 페미니즘을 혐오하는 젊은 남성들을 볼 때면 한국의 미래가 걱정스럽기까지 하다. 누군가를 차별하는 목소리가 큰 사회, 차별과 혐오의 소리를 방조하고 묵인해 주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해외에 나와 살다 보면 애국가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고 눈물이 난다. 여전히 내 조국이고 내 고향인 한국이 그립지 않을 수없다. 그렇지만 한국을 떠나 사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대한민국이 점점 낯설게 느껴질 때가 많다. 이럴때면 나 스스로도 <교포>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교포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같은 민족의 사람>. 그런데 이 교포라는 말이 한때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외국물 좀 먹어 본 한국인>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담아 사용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래전 교포가 흔치 않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요즘은 재외교포 칠백만 명 시대이다. (2021년 해외동포 총계 7,325,143 명) 그러니 대한민국 내에서도 교포를 친인척으로 둔 사람은 흔하고 흔해졌다. 게다가 유학으로 해외 생활을 한 사람도 많을 테고 해외여행 또한 흔해져서 외국물을 안 먹어 본 사람을 찾는 게 빠를지도 모른다. 그러니 요즘은 교포라고 해서 특별히 색안경을 쓰고 보지는 않는 것 같다. 나 같은 교포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한국이 점점 더 낯설어지지만 그래도 내 조국이라서 애착이 간다. 내가 한국을 떠나 사는 동안 많이도 변했지만, 그럼에도 한국이 내 조국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드라마틱하게 변한 한국을 즐기려면 다음 한국 방문 일정을 넉넉하게 잡아야 할 것 같다. 지난번에 한국에 갔을 때는 홍대 앞에서도, 광화문에서 길을 잃었었다. 다음에 한국을 가도 역시 어디선가 길을 잃을 게 뻔하지만 한국은 빠르게 변하고 발전해야 제맛이다. Exciting Korea! 신나는 한국이다. 이것이 바로 세계인을 사로잡은 한국의 매력인 것 같다. 대한민국의 변화와 발전이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방향이길 바란다.
글-민재미첼 그림-조현아
37. 그리운 한국의 명절
영어로 설날은 <Lunar New Year's Day (음력설날)>라고 한다. 내가 처음 이민 왔을 때만 해도 캐네디언들은 Lunar New Year's Day보다 <중국설날 Chinese New Year's Day>라고 말하곤 했었다. 지금과는 다르게 그때만 해도 ‘중국’이 ‘동양’을 대표하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양 사람들은 동양에 관한 것을 말할 때에는 단어 앞에 접두사처럼 <중국 China> 혹은 <중국인 Chinese>을 붙여 말하곤 했다. 그만큼 중국인들의 이민 역사가 오래되었고 이주자의 인구도 많았기 때문에 서양에서 중국=동양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어느 정도 이해는 한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을 제외한 다른 아시아 국가 사람들에게는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다행히 요즘에는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음력설을 쇠는 아시아 국가에서 유입되는 이민자와 유학생들이 급증하고,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서양문화 속 동양에 대해 말할 때 접두사처럼 붙던 ‘중국’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분위기다. 요즘은 캐나다는 물론이고 미국, 호주, 유럽 등의 나라에서도 설 명절을 기념하는 축하행사가 다양하게 열린다고 들었다. 아시아인의 한 사람으로서 다문화를 수용하는 이런 변화가 고맙고 감사하다. 물론 캐나다에서 보내는 설 명절이 한국과 같을 수는 없다. 당연히 캐나다에서 설날은 공휴일이 아니다. 학교나 공공기관에서는 설맞이 파티를 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여느 날과 다름없는 평범하게 보낸다. 나의 경우만 해도 이따금 떡국을 끓여 먹거나 전을 부쳐 먹기도 하지만 한국과 같은 명절 감흥을 느끼기엔 역부족이다.
내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은 차례를 지내기 위해 큰집으로 갔었다. 큰집은 마당 한편에 우리를 짓고 돼지 한 쌍을 키우고 있었다. 유난히 추웠던 어느 해 겨울, 설빔을 곱게 차려입고 큰집에 갔는데 귀여운 아기돼지들이 안방 아랫목을 차지하고 있었다. 추운 날씨에 태어난 아기돼지가 감기에라도 걸릴세라 사과상자에 볏짚을 깔고 돼지들을 담아 따뜻한 방 안으로 들였다. 어미 돼지는 부엌 아궁이 앞에서 산후조리 중이었다.
사촌들과 우리 삼 남매는 꼬물거리는 아기돼지들을 들여다보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작고 보드라운 분홍색 아기돼지들은 정말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손탄다고 걱정하는 큰아버지의 눈을 피해 안아보기도 하고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아기돼지들은 시간에 맞추어 어미돼지가 있는 부엌 아궁이 앞에서 젖을 먹었다. 어미의 품을 파고들어 허겁지겁 젖을 빠는 아기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예전에는 동네 이발소에 복을 부른다는 <어미돼지 모유수유> 그림이 걸려 있곤 했었다. 그런 그림은 소위 <이발소 그림>이라 불리며 3류 문화로 취급받았다. 나는 큰집에서 돼지 모유수유 장면을 직접 목격한 이후로 왜 이발소마다 그 그림이 걸려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가위와 칼과 바리깡이 오가는 삭막한 이발소에 정겹고 따스하고 사랑스러운 기운을 주는 인테리어로 ‘돼지 모유수유’ 그림만 한 것은 없을 것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행운이 굴러 들어올 것같이 느껴졌다. 큰집에서 경험한 아기돼지들은 이발소 그림처럼 내 기억 어딘가에 걸려있었다. 그런 이유로 나의 설날 상징은 아기돼지가 되었다. 12 간지 모든 동물들을 제치고 나에게는 매해가 아기돼지의 해인 것만 같다.
큰집에서는 큰집의 냄새가 났다. 그 냄새는 그냥 시골 냄새라기보다 큰집에만 있는 큰집 냄새였다. 큰집 마당에 들어서면 아궁이에서 장작을 때는 냄새와 돼지죽 끓이는 냄새가 서울내기 우리 삼 남매를 반겼다.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 친지들은 따뜻한 방으로 모였고, 불을 때지 않는 추운 건넛방에는 큰엄마가 해 놓은 명절 음식이 있었다. 이따금 큰엄마의 심부름으로 음식을 가지러 건넛방 문을 열면 꾸덕꾸덕하게 말라가는 가래떡과 공들여 썰어 놓은 떡국떡이 소쿠리에 가득 담겨있었다. 추운 날씨 탓에 문 손잡이에 손이 쩍쩍 달라붙기도 했었다.
큰집에서는 명절에 토란국을 끓였다. 개성이 고향인 친가는 차례상에 꼭 토란국을 올렸다. 어렸을 때는 미끌미끌한 토란의 식감이 싫어서 안 먹고 싶었지만 엄한 큰아버지 때문에 억지로 토란국을 먹어야 했다. 그런데 나이 들고 보니 이제는 싫어하던 토란국도 그립기만 하다.
우리 가족은 설날에 떡만둣국을 끓여 먹었다. 개성식 만두는 꿩고기가 들어가야 하지만 꿩고기는 귀하기 때문에 큰집은 돼지고기만두를 했고, 돼지고기를 싫어하는 우리 엄마는 김치만두를 했다. 엄마의 김치만두를 더 많이 먹고 자라서 그런지 나는 고기만두보다 김치만두가 좋아한다. 까치설날인 그믐밤에 일찍 잠들면 눈썹이 하얗게 된다고 해서 온 가족이 밤늦게까지 만두를 빚었던 기억이 눈에 선하다.
이민 생활을 하다 보면 그리운 고향 음식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제일 그리운 음식은 뭐니 뭐니 해도 명절음식이다. 이곳에서도 한인마트에 가면 떡국떡, 만두, 가래떡, 송편, 시루떡 등을 살 수 있다. 그런데 모두 꽁꽁 얼어있다. 어린 시절 엄마를 따라 방앗간에 가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끈한 가래떡 한 조각을 얻어먹었던 기억이 난다. 안타깝게도 노바스코샤에는 방앗간이 없는 관계로 따끈한 가래떡은 먹을 수가 없다. 가래떡뿐이 아니다. 웬만한 떡은 다 벽돌처럼 딱딱한 얼음덩어리 상태로 판매된다.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는 냉동떡이 한국의 떡집에서 먹는 따뜻하고 말랑한 떡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지만 고향을 떠나 사는 이민자에게는 냉동떡도 감지덕지다.
이민자들 대부분은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야하듯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직접 만들어 먹는다. 그런데 아무리 조리법 대로, 정량을 맞추어해도 이상하게 한국에서 먹던 맛과는 조금 다른 맛이 난다. 맛은 있는데 뭔지 모르게 완벽한 한식이라 하기에 살짝 부족한 맛이다. 한국산을 모방한 ‘짝퉁’ 음식 같다. 노바스코샤의 경험 많고 솜씨 좋은 한식당 주방장님들이 아무리 맛있게 요리를 해도 내게는 ‘짝퉁 한식’ 같기만 하다. 음식솜씨가 없어서가 아니다.
본고장에 가야 진짜 오리지널을 만날 수 있다. 본고장을 떠나서 생산되는 것은 진정한 오리지널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한국 아닌 곳에서 만들어지는 한식은 궁극적으로 모두 짝퉁이라고 할 수 있다. 할머니의 된장찌개는 할머니 집에 가야만 오리지널을 맛볼 수 있듯이, 한국에 가야 100% 오리지널 한식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나와 같은 이민자들은 한평생 ‘짭’ 한식에 만족해야 한다. 내 손으로 만두도 만들어 보고 떡도 쪄보고, 잡채나 전도 해 먹어 봤지만 역시 엄마가 해준 그 맛은 도저히 만들 수가 없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음식은 모조리 엄마 요리의 ‘짭’이며 절대 오리지널이 될 수없다.
나의 친가와 외가는 명절음식에서 서로 많이 달랐다. 안동에는 <헛제삿밥>이 있을 정도로 제사를 많이 지내기로 유명하다. 어느 지역에나 명절 음식에는 각종 다양한 진귀한 식재료가 사용되지만 안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특이한 식재료가 많았다. 상어고기나 매운 식혜는 개성식 제사상에는 없는 것이었다. 이제는 엄마도 나이 들어서 명절음식 하기도 힘드실 테니 다음에 한국에 가면 엄마를 모시고 ‘안동 헛제삿밥’을 먹으러 가야겠다. 안동 출신 엄마도 이따금 아버지의 개성식 명절음식이 아닌 엄마의 고향명절 음식이 그리울 테고 나 역시 어렸을 때 외가에서 먹어본 안동식 제사음식이 그립다.
서양의 아이들은 선물을 받을 수 있는 크리스마스를 손꼽아 기다리고, 한국의 아이들은 세뱃돈을 받을 수 있는 설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맛있는 음식 실컷 먹고 세뱃돈으로 주머니가 두둑해지는 설날은 아이들에게는 마냥 행복한 날이 아닐 수 없다. 캐나다에서 살다 보니 세배를 해본지도 까마득하게 오랜 일이 되었다. 이러다가 큰절하는 법도 까먹는 건 아닌지 걱정될 지경이다.
큰집에서는 설날에 윷놀이를 하기도 했다. 특별한 내기를 한 것도 아닌데 윷놀이는 언제나 재미있었다. 여느 가족들은 명절마다 고스톱을 친다는데 우리 부모님들은 화투를 집안에 들이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 덕에 나는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친구들에게 화투를 배웠고 이 나이 되도록 화투도 칠 줄 모른다고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기도 했었다.
캐나다 우리 집에도 화투와 윷이 있다. 남편이 나보다 고스톱도 더 잘 치고 윷놀이도 잘해서 우리 부부의 고스톱과 윷놀이는 싱겁게 끝나기 일쑤다. 고스톱은 광을 팔 사람이 있어야 제맛이고, 윷놀이는 땡깡 부리는 사촌이 한 명쯤 있어야 제맛인데 남편과 나, 단둘이 치는 ‘맞고’와 땡깡 없는 윷놀이는 영 재미가 없었다. 왁자지껄하게 참견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더욱 재미가 있는 것, 그게 바로 명절놀이다.
타향살이가 길어질수록 한국이 낯설어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립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고향에 대한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아름다운 쪽으로 각색되어서 점점 더 아름답고 좋은 한국만 기억하게 된다. 한국에서는 명절 스트레스가 심하다고들 하는데 이민자들은 때때로 그것마저 그리울 때가 있다.
분홍색 아기돼지들이 꿀꿀 거리는 따뜻한 아랫목에서 엄마의 김치만둣국을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