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 man is an island
많은 은퇴 전문가들이 퇴직하면 집 사이즈를 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퇴직 후에는 집에 머무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길어진다. 나의 히키코모리 기질상, 외출은 거의 없을 테니까.
그래서 집은 나의 취향과 생활이 자유롭게 실험되는 곳이면 좋겠다.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컨펌도 필요 없다.
대범해도 좋고, 촌스러워도 좋다.
커다란 도화지 위에 에너지를 풀어내듯, 집이라는 도화지에 나의 마음을 그리며 살아보고 싶다.
테마별 공간
나가봐야 단지 내 피트니스나 집 근처 공원이 전부일 것이다. 그러니 집에만 있어도 답답하지 않고, 심심하지 않게 취미와 운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 침실은 오직 잠만을 위한 공간
• 큰 책상과 컴퓨터가 있는 업무공간 겸 아틀리에
• 요가할 수 있는 운동 공간
• 허브 화분이 가득한 미니 실내 정원
• 반신욕을 즐길 수 있는 욕조
• 집 밥을 자주 할 수 있는 넓은 부엌
• 손님이 오면 풍성하게 대접할 수 있는 큰 식탁
• 분더샵 같은 편집매장 분위기의 드레스룸
• 고양이가 뛰어놀고 햇살을 쬐는 거실
손님은 없어도 길고양이들의 방문은 이어질 것이다.
고양이들이 우다다 뛰고, 햇살이 드는 창가를 상상해 본다.
이곳에서 나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공간 스타일링을 즐길 것이다. 여행이나 쇼핑은 줄일 수 있어도, 집이라는 나만의 섬에는 아낌없이 투자하고 싶다.
내가 만족하고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분야이기 때문이다.
집의 의미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집이 아니라, 내 생활과 취향, 성격까지 고려한 집은 핏이 편한 옷처럼 내 삶을 지켜줄 것이다.
공간은 인간의 심리에 강한 영향을 준다.
좁고 답답한 곳은 마음을 웅크리게 하고, 너무 넓어서 관리가 안 되는 집은 정신을 황량하게 만든다.
숨통이 트이는 크기, 목적별로 잘 정리된 물건, 심미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가구.
그런 공간은 안정감을 준다.
호텔에서 휴식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일상의 영역이 지워진 여백 덕분이다.
내가 머무는 공간은 나를 닮아가고, 나도 그 분위기를 닮아간다. 나이가 들수록 겉으로 드러나는 영역만큼, 남이 보지 못하는 곳까지 정성스럽게 관리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상상하는 하루
아침에 일어나 요가를 하고 고양이들을 챙긴다.
허브를 살펴보다 보면 오전이 훌쩍 지나갈 것이다.
작업공간에서 존 콜트레인과 마일스 데이비스의 재즈를 듣는다. 1960년 파리 올림피아 극장의 공연이면 더할 나위 없겠다.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드리며 오후를 보낸다.
저녁 산책을 하고 돌아와, 미니 정원에서 딴 허브와 해산물로 만든 샐러드.
그리고 나의 맥주, 스텔라 아르투아 한 모금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의식 같은 시간을 갖는다.
나의 아일랜드
내 집은 성(城)이 아니라 섬(아일랜드)이면 좋겠다.
멀리 떨어져 고립된 듯 보여도, 햇살과 고양이, 식물,
그리고 때때로 이어지는 인연들이 바다 밑에서 나를 다른 섬들과 연결시켜 줄 것이다.
영화 About a Boy에서 휴 그랜트가 내레이션 한 것처럼.
“Every man is an island. I stand by that.
But clearly some men are part of island chains.
Below the surface of the ocean, they’re actually connected.”
— About a Bo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