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고로상과 미스 크롤

번아웃 휴직자의 생존기

by Mira

다시 젊어지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유일하게, 그때로 돌아가 다시 한번 살아보고 싶은 '딱 한 해"가 있다.

다시 살아보면 어떨까?

2012년 봄에서 2013년 봄.


회사에서 벌어지는 정치질과 임원들의 밥그릇 싸움에 끼어서 새우처럼 등이 터진다. 이런 날들이 끝도 없이 반복되니 몸도 마음도 완전히 고갈되었다.


스트레스로 악화된 디스크의 통증

마치 누군가 내 손에 뾰족한 못을 가득 두고 힘주어 손을 접는 느낌. 깊고 날카로운 통증으로 말이 나오지 않는 날이 많았다.

먹는 것을 소화하지 못하고

불면증을 밤을 새우고

어지러워서 길에서 쓰러지는 날도 있었다.


그때는 휴가도 내 일정대로 낼 수가 없는 강압적인 조직문화였다.

아프다고 쉰다?

그냥 니 책상을 빼세요,

하는 분위기.


사라지고 싶었다.

나의 무능을 매일 깨우치는 압박감

길거리에 버려진 과자 봉지처럼 내가 하찮고 쓸모없는 존재라고 말하는 상사의 눈빛.

승진가도를 달리는 후배의 나를 뚫고 지나가는 표정.

임원들끼리 직접 말하지 않고 이 사람이 불러서 난리치고 저 사람이 불러서 고함치고.


나는 삭아버린 종이처럼 건드리면 부서질 것만 같았다. 마우스만 붙잡고 있는 게 하루의 전부인 날이 점점 늘었다.


내 안에서 울리는 비명소리를 못 들은 척하며 출근을 이어 나갔던 것은 최소한으로 남은 '생존본능'이 아니었나 싶다.

이 것마저 놓아버리면 나는 끝장이라는 생각.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하면 그다음은 다 그냥 저절로 되는 건 줄 알았다.

6개월 단위로 평가받으면 1년이 거짓말처럼 지나간다.

그러다 보면 고등학교 때 보다 더 현실적이고 어려운 질문과 마주한다.

내가 이 일을 끝까지 할 수 있을까?


잘할 수 있고 좋아서 선택한 전공이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에서 일하고 있지만,

숨 쉬기가 힘들게 짓눌리는 압박감.


내가 이 일에 재능이 없는 건가?

다른 일을 찾아야 하는가?

나는 조직생활에 맞지 않는 인간인가?


길고 긴 고민 끝에 <1년 휴직>을 결정했다.

마음 같아서는 멋지게 <퇴사합니다!> 하고 싶었지만.


도망치듯이 휴직계를 내고 집으로 와서 거의 1년을 집에만 있었다.


그 결정을 하기 전에 했던 일은,


-보험을 모두 해제해서 고정비를 최소화하고

-적금과 보험을 해제한 목돈을 한 통장으로 모았다.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거 같았다.

절망이 땅 끝을 파고 들 때면,

이 돈을 다 쓸 때까지만 살자는 극단적인 생각도 했다.


밤도 없고 낮도 없이,

나는 침대에 누워 오른쪽으로 자다가 왼쪽으로 돌아 누울 기운조차 없었다.

고양이들은 품을 파고들고

고양이 밥을 주기 위해서만 일어났다.

화장실 가는 것도 귀찮았다.


음악만 들었다.

그 해 가장 많은 들은 음악이 Diana Krall.

허스키한 그녀의 목소리에만이 내 마음은 붙잡았다.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

The look of love


히키코모리 기질대로 그냥 집에만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누워서 지냈는지, 머리카락이 엉킬 대로 엉켜서 수세미로 쓸 수 있을 거 같았다.


몸무게는 거의 10kg 이 빠졌다.

식욕이 전혀 없어진 그때, <고독한 미식가>를 즐겨 보았다.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이 신기했다.

고로상이 음미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우동을 먹는 장면을 반복해서 봤다. 식욕은 없었지만 '먹는다는 것'의 기억이 날아가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그때 나는 쉰 게 아니라,

스스로를 괴롭힐 수 있는 온갖 방법을 총동원해서

나를 갉아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자신에게 실망한 사람은 자기를 극단적으로 몰아가는 선택을 주사위 던지듯이 던져서, 운명에 질문하고 싶어진다.


임원들의 전쟁에 끼어서도 멋진 언변과 처세술로 능숙하게 대처했어야 했나?

억울한 마음보다 성공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나의 못남이 싫었다. 나를 탓하고 괴롭히며 지냈다.


2013년 봄에 다시 복직했고

차츰 업무의 감을 다시 찾았다.


승진은 이미 물 건너갔으니, 내 일만 열심히 하기로 했다. 더 이상 임원들이 불러대지도 않았다.

사내 네트워크에 관심을 끄니 저녁 회식이나 술자리에서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지 않게 되었다.


그때 휴직이 아니라 퇴직을 선택했더라면, 지금 어땠을까? 만약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을까?


그때 하지 못했던 일들이 아직 마음 어딘가에서 서성인다.


마음을 다듬듯이 그림을 그리고

내 마음을 휘갈기고 지나가는 감정을 글로 써 보고 싶었다.

요가를 해서 나를 다시 단단하게 만들고,

고레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깊게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일어를 공부하고

레이먼드 카버의 문장을 원문으로 읽고 싶었다.

엄마와 함께 다정하게 냉면을 먹고 싶었다.


지금이라도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나씩 할 수 있을까?

그 지옥 같은 시간이 나에게 남긴 게 있다면

'포기하지 않는 경험'


그 힘으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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