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 많던 사다리를 치웠나?
참여연대는 말한다.
“지난 12년간 커진 자산 불평등, 문제의 근원은 부동산이다.”
이것들아,
진짜 문제는 부동산이 아니라 대출이다.
현금은 없지만 상환 능력이 되는 사람들이
레버리지를 통해 자산을 키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정부는 대출 규제로
그 통로를 완전히 막아버렸다.
자산가치를 무시하고 대출 얼마라는 식으로 일률적으로.
정부지원금은 소득 따라 주면서
대출은 왜 소득이 기준이 아닌가?
대출은 위험이 아니라 기회의 사다리였다.
그 사다리를 걷어차면,
오를 수 있는 사람조차 밑바닥에 머물게 된다.
결국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정책이
불평등을 고착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자산가는 더 자산이 성장하고
계층 이동 사다리는 없어진다.
대출을 다루는 능력
대출은 단순히 돈을 빌리는 게 아니라 시간을 다루는 기술이다.
현재의 나로는 도달할 수 없는 기회를
미래의 소득을 담보로 앞당겨 사는 행위.
그게 레버리지의 본질이다.
부자는 빚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빚을 ‘관리 가능한 속도’로 다루는 법을 알기 때문이다.
대출은 자본주의에서
가진 자와 시작하는 자의 속도 차이를 메우는 유일한 장치다.
그런데 우리는 ‘빚은 나쁘다’는 프레임에 갇혀 있다.
빚 없이 사는 게 미덕이고,
대출이 없으면 안정적이라는 착각.
하지만 그건 가난을 안전하게 유지하는 방식일 뿐이다.
대출을 피하는 사람보다
대출을 설계할 줄 아는 사람이 부자가 된다.
소시민의 세계관과 투자자의 세계관
소시민에게 대출은 남의 돈을 쓰는 위험한 일이고
매달 나가는 이자는 아깝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이해도 감각도 없이 원금 상환에 집중한다.
투자자에게 대출은 완전히 다르다.
이자 < 수익이라는 확신이 서면 과감히 움직인다.
그리고 예측이 빗나가더라도
전체 경제활동이 흔들리지 않도록 포트폴리오를 설계한다.
물론 베테랑 투자자도 실패한다.
수익이 나면 세금이 붙고,
망하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이익은 나눠 가지되 손실은 개인의 몫 —
이것이 자본주의다.
이것은 공평한가, 불공평한가
그렇다면 이것은 공평한가? 불공평한가?
많은 사람들은 “불공평하다”라고 말하지만,
나는 오히려 이것이 자본주의의 유일하게 공평한 질서라고 생각한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책임도 누구에게나 지워진다.
누구는 두려움 때문에 기회를 놓치고,
누구는 계산된 위험 속에서 한 발 앞선다.
이 차이가 바로 세상을 움직이는 불균형이자,
어쩌면 가장 공평한 불균형이다.
그런데 대출 금지는 과연 누구를 위한 정책인가?
세금과 책임의 비대칭
개인의 수익에는 칼처럼 세금을 걷어간다.
하지만 개인의 실패에는 아무런 안전장치가 없다.
투자로 실패하면 모든 손실은 개인의 몫이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개인이 투자로 실패했을 때,
그가 수익이 날 때 냈던 세금의 일부라도 돌려받을 수 있을까?
한편, 소득이 전혀 없는 사람은
기초생활보장제도로 생계를 보장받는다.
그렇다면 세금을 내며 일하고 투자하는 사람들은
어떤 보호를 받는가?
이건 공평한 사회일까,
아니면 노력하는 사람에게 불리한 사회일까.
실패의 책임만 개인에게 남긴다.
공평이란 이름 아래,
가장 불공평한 구조가 만들어진다.
침묵의 방관자들
불평등은 부동산에서 시작된 게 아니다.
오를 수 있는 사다리를 걷어찼을 때 시작됐다.
대출을 막으면 기회가 멈추고,
기회가 멈추면 사회도 멈춘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 불합리를 아는 사람들이 침묵하고 있다는 점이다.
참여연대 같은 시민단체는
‘불평등’이라는 단어만 되풀이하며
그 원인인 대출 접근성의 불평등에 대한 언급은 없다.
경제 전문가들 또한
정책의 구조적 모순을 비판하기보다
“가계부채 안정”이라는 원론으로 숨는다.
그들의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침묵은 곧 방관이고,
방관은 결국 현 상태의 편에 서는 일이다.
불평등을 말하면서
불평등의 원인을 외면하는 것은 위선이다.
기회의 사다리를 없애놓고
기회가 없다고 한탄하는 건 자기모순이다.
진짜 공평은 결과의 평등이 아니라
기회의 평등과 책임의 균형에 있다.
이 단순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 —
그것이 지금 우리 사회가
가장 결핍한 자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