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작가들
무라카미 하루키
나는 그의 ‘살아보는 여행기’에 완전히 사로잡혔었다.
그리스에서 달리기를 하던 어느 날,
검은 옷을 입은 동네 할머니들이 다가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큰일이라도 있니?”
아무리 운동이라고 설명해도 할머니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 장면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세상을 낯설게 바라보는 시선이 이렇게 따뜻할 수 있다니.
나는 위스키를 마시지 못하지만,
그를 따라 영국의 캐슬로 위스키 여행을 떠난다.
위스키의 이름, 향, 증류 방식, 그리고 그 뒤에 숨어 있는 이야기까지—
하루키의 문장은 감각의 언어였다.
읽다 보면 코끝에서 알싸한 향이 스미는 듯하다.
유럽의 공원에서 옆자리 연인이
세상 끝처럼 키스를 나누는 장면에서는 이렇게 쓴다.
“서로의 뇌수를 빨아들이는 건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그의 유머는 언제나 조용히, 그러나 정확히 웃음을 터뜨린다.
이탈리아에서 살아보기 위해
은행 계좌를 만들고 운전 연습을 하는 하루키.
하필 첫 운전면허 도전이 이탈리아라니.
운전대보다 손짓에 더 열심인 운전자들,
카오스 같은 도로에서 사고가 잘 안 나는 이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서로를 믿지 않기 때문에 더 조심한다.”
그 역설이 얼마나 웃기고 또 진실한지.
빌 브라이슨.
영국 출신의 미국인, 미국인 아내와 결혼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 작가.
그는 늘 두 세계의 경계에 서 있었다.
미국식 자본주의에 지쳐버린 미국 지식인들의 전형처럼,
그에게 북유럽의 사회주의 정신과 복지제도는
또 다른 대안, 혹은 꿈같은 이상향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가 북유럽을 여행하며 체험한 현실은 달랐다.
“간단한 맥주와 스낵을 먹으려면 은행 대출부터 받아야 한다.”
그 한 문장에 브라이슨의 유머가 다 들어 있다.
불친절하고 비싼 호텔에서 보낸 밤,
엘리베이터마다 등장하는 술 취한 일본인 ‘닌자’들과의 반복된 조우.
그는 그 장면을 시트콤처럼 써 내려간다.
어이없고, 어쩐지 귀엽고, 또 묘하게 인생스럽다.
그의 대표작 『발칙한 유럽 산책(Neither Here Nor There)』은
젊은 시절의 배낭여행을 다시 따라가며 쓴 유럽 여행기다.
노르웨이, 프랑스, 스위스, 독일, 이탈리아까지—
길을 잃고, 사람을 만나고, 또다시 길을 잃는다.
그의 문장은 늘 여행 중에 길을 헤매면서도
세상을 비웃지 않는다.
인간의 어리석음 속에서 웃음을 발견한다.
『나를 부르는 숲(A Walk in the Woods)』에서는
모기와 굶주림, 산길의 고통 속에서도 농담이 멈추지 않는다.
그의 글에는 살아 있다는 것을 유머로 받아들이는 능력이 있다.
누군가는 불평할 일을 그는 우스꽝스럽게 기록한다.
이것이 그를 ‘여행 작가’가 아니라 ‘인생 관찰자’로 만든다.
하루키의 여행이 내면으로 걷는 시간이라면,
브라이슨의 여행은 세상을 웃으며 바라보는 시간이다.
나는 그 둘의 중간쯤에서,
하루키의 고요함과 브라이슨의 재치를 오가며
나만의 여행기를 쓰고 싶다.
그리스의 언덕과 이탈리아의 골목,
바다가 보이는 작은 카페와 오래된 위스키 바 사이에서.
아니면 프로스트처럼, 동네의 작은 풍경을 여행하는 것도 좋겠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현실과 픽션 사이를 오가며
진실에 더 가까운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