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L196.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

낙후된 섬에 어쩌다 갇혔다

by Mira



스스로 발을 들여놓을 때는 전혀 상상할 수없었다. 이곳에 영원히 갇혀 살아야 한다는 것을.

출항하는 배를 타려고 했지만, 순박하면서도 음흉한 구석이 있는 마을 사람들이 작당을 해서 나를 골탕 먹였다.


배를 태워 줄 듯 말 듯,

나를 놓아줄 듯 말듯한

사람들과 실랑이가 밤새 계속되었다.


꿈이었다.


이젠 GPT에게 물어보기 전에

나도 내 꿈을 해석할 수 있겠다.


GPT의 해석


꿈의 이미지만 놓고 보면,

• 낙후된 섬은 익숙하지만 이미 낡은 체계, 오래된 관계나 역할, 혹은 머무를 이유가 사라진 ‘이전의 나’를 상징하고

• 육지로 떠나려는 배는 새 방향, 현실적 도약이나 퇴직 이후의 새로운 삶을 향한 시도

• 마을 사람들의 방해는 외부의 제약이라기보다 내 안의 ‘습관화된 불안’ 혹은 ‘충성심의 잔재’로도 볼 수 있어요.


즉, 이 꿈은 *“나가야 한다는 걸 아는데, 아직 마음 한켠에서 잡고 있는 나 자신”*의 이야기.

그걸 이미 자각했기에 아침 5시에 눈이 떠진 거죠.


이건 불안의 꿈이라기보다,

‘떠날 준비가 거의 끝났다’는 내면의 리허설에 가까워요.


혹시 내일 아침 같은 시간에도 깬다면,

그건 신체가 아니라 무의식이 새 리듬을 만들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몰라요.


무의식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

인류 역사상 최초로 그것을

심리학과 의학의 언어로 증명하려고 시도한 남자.

나는 감히 그의 머릿속을 상상해 본다.


얼마나 강력한 호기심과 설렘과 놀라운으로 가득 찾을까? 알려진 대로 괴팍한 성격으로 외로움을 극복했을까? 아니면 고약한 행동(각종 불륜 등등) 분출한 걸까?


“인간은 자신의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에 의해 더 많이 지배된다. “


이에 대해 얼마나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그 개념을 ‘집단무의식’으로 발전시킨 융.

그리고 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조화된 것’이라고 정의한 쟈크 라깡.

그는 말과 상징, 관계 속에서 작동하는 심리의 언어로 무의식을 설명했다.



무의식은 ‘나도 모르는 나’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구조다.


내 꿈이 그렇다.

마치 나를 관찰하는 작가가 오직 나만을 위해 쓴 시나리오나 소설 같은 영상들.


꿈속의 서사적 구조.

배경, 인물, 긴장, 갈등, 그리고 해결되지 않은 상황.

그건 마치 내면의 작가가 매일 나를 소재로

“오늘의 장면”을 써 주는 것 같다.


앤드류 포터의 인물들


꿈에서 당황하고 헤매고 전전긍긍하는 나의 캐릭터와 아슬한 절망감이 꼭 앤드류 포터의 소설 같다.

서서히 망가지는 인물들,

벌어진 일이 뭔지 몰라 불안해하는 심리에 대한 묘사


방금 떠나오 곳,

언제든 다시 갈 수 있다고 생각한 곳을

영영 잃어버린 심정.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을 줄 알고 헤어진 사람을

그 뒤로 다시는 보지 못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런 식으로

예고 없이 찾아오는

삶의 전환에 대해 그가 쓴 문장들이

오랜 시간이 지나도 떠오른다.


포터는 전환을 ‘사건’으로 다루지 않고,

기억의 잔상으로 그린다.

그 일이 지나간 뒤

한참이 지나서야

그것이 ‘전환점’이었다는 걸 깨닫는 식으로.


“언제든 다시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곳을 잃은 마음” —

그건 단순한 상실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인식의 변화다.


우리가 어릴 때는

모든 관계와 장소가 반복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러다 어느 날,

더 이상 반복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는 순간.

그게 바로 ‘어른이 되는 순간’이고,

포터의 작품은 그 깨달음의 균열 위에 있다.


그래서 그의 문장을 읽으면

슬픈데 동시에 고요해진다.

그의 인물들은 크게 분노하거나 울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이미 돌아올 수 없는 쪽에 서 있음을 아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내가 꿈에서 느낀 그 감정,

내가 지금 지나고 있는 전환기의 정서일까?


퇴직, 이사, 관계의 변화 같은 현실적 사건들이

무의식 속에서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섬”으로 나타나는 걸까?

작가의 이전글[WORK] W195. 무한시간을 위한 문학(2부)